# 16
16. 쓸데없다 (4)
“대체 이건 무슨 음식입니까?”
충격으로 멍해진 헤나지그가 물었다.
“비빔밥.”
“비빔밥?”
되물은 헤나지그는 어안이 벙벙했다.
아삭아삭한 식감에 짭조름한 맛이 느껴진다 싶더니 고소한 향과 진한 맛이 어우러져 음미하고 나면 이미 삼킨 후였다.
허탈한 마음에 다시 한 입 먹고 씹으면 다시 느껴지는 향과 식감에 취해 더 집중하지만, 목구멍이 빨리 내놓으라며 꿀떡 삼켜 버린다.
그렇게 한 그릇을 비우고 남은 건 갈증과 허탈감.
입안 가득 남은 여운만 그 마음을 달래려고 하지만, 오히려 갈증만 쌓였다.
그러고 보니 식탁 중앙에 놓인 두 음식은 온전한 상태였다.
헤나지그는 서툰 숟가락질로 김치부침개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와사삭!
바삭한 식감이 사라지기도 전에 짠맛과 진득한 질감이 매운맛과 함께 몰려왔다.
화끈거리는 느낌에 벌어지려는 입이 순간 어우러진 맛에 압도되어 본능적으로 씹었다.
‘마, 맛있다… 아니, 이런 게 맛있을 수 있다니!’
고기가 들어가지 않음에도 맛을 낼 수 있다는 걸 처음 깨달았다.
‘게다가 속이 더부룩하지 않다.’
속이 편안했다. 몸도 개운한 느낌이다. 음식을 종용하는 입안은 특유의 텁텁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육류에 치중된 식사가 당연한 제브라드 음식만 먹던 그에게는 엄청난 충격으로 와 닿았다.
좋다. 즐겁다.
‘식사란 게 이렇게 즐거운 거였나?’
“……!”
순간 헤나지그의 주변으로 강력한 마나가 밀려들어 가기 시작했다.
6서클의 길이었다.
꾹 닫힌 눈을 다시 떴을 땐, 양푼째 밥을 비우고 있는 그라드와 라스가 보였다.
“이, 이놈들! 너희들만 먹느냐!”
***
한국대학교의 한 강의실.
문이 벌컥 열리며 4명의 사내가 들어왔다.
“으아, 아직 봄인데 뭐 이렇게 더워?”
“그러니까, 각성해도 더운 건 어째 똑같냐?”
김승재와 이민준이 상의를 펄럭이며 투덜댔다.
“그야 우리가 허접하니 그렇지. 7등급인데 뭘 바라냐?”
“아우, 저 바가지를!”
이민준이 주먹을 쥐자 시민형은 잽싸게 고창하 뒤로 숨었다.
“어차피 학과 애들 태반이 7등급인데 뭘 그렇게 열 올려.”
강의실에 들어오자마자 에어컨을 켠 고창하가 심드렁하게 말하며 지정석에 앉았다.
시민형은 날렵하게 옆자리를 차지하고 태블릿을 꺼냈다.
“열 올리는 놈이나 재수 없게 현실감 돋는 소리 하는 놈이나.”
한숨을 푹푹 내쉬던 김승재와 그런 김승재의 등을 툭 친 이민준이 앉으려다 딱딱하게 굳었다.
아무도 없어야 할 강의실에 한 사람이 앉아 턱을 괴고 앉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 시바 놀래라!”
“저거 수석 아냐?”
이민준이 검지로 가리키자 시민형과 고창하가 몸을 틀어 확인했다.
맨 끝 구석진 자리. 도현의 지정석이었다.
늘 같은 자세로 강의가 끝날 때까지 단 한 번도 안 깨고 잔다 해서 수석(睡石). 그가 실습으로 일주일 만에 다시 나왔다.
“근데 안자네? 웬일이래?”
시민형이 순수하게 의아했다.
“졸라 무섭네. 귀신이냐? 언제부터 저러고 있다냐? 에어컨이라도 켜고 있지, 덥지도 않나.”
김승재가 구시렁거리는 사이, 고창하는 몸을 바로 하며 콧등을 내려온 안경을 검지로 밀어 올렸다.
“뭐, 우리가 하는 밥줄 걱정 같진 않고 고르는 중이겠지.”
“뭘 골라?”
시민형이 고개를 갸웃하자 김승재가 대답했다.
“학교냐 헌터냐 아니겠냐. 뭐 가업이 블랙홀이니 더 고민되겠지?”
“와 씨… 겁나 부럽네.”
이민준이 부러움을 잔뜩 담아 툴툴댔다.
고창하는 친구들이 뭐라 하든 노트북을 켜 이번 주의 시간표를 확인했다.
오늘부터 이어지는 리포트위크.
최소 2주, 최대 3주로 이어지는 1학기 기말고사였다.
오늘 첫 강의는 워프학개론. 워프 내부를 탐사하고 서식하는 모든 생물을 관찰, 기록 실습이다.
‘그게 리포트지.’
1학기 동안 배운 탐사, 관찰, 기록을 평가하는 시간.
평가가 B 미만이 되면 다음 달에 있을 적성 테스트는 고사하고 학과에서 퇴출이다.
그나마 턱걸이라도 하면 비싼 계절 수업을 들어 학점을 보충하고 2학기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만큼 워프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갖고 있어야 하고, 매일매일 갱신되는 새로운 지식도 찾아 머릿속에 집어넣어야 하는 학과.
그런데도 엄청난 인기를 누리는 이유는 공무원이라는 안정적인 직업이면서 고소득의 호봉제 때문이었다.
거기다 파격적인 복지제도도 한몫했다.
‘문제는 대부분이 2년도 못 채우고 그만둔다는 거지.’
헌터가 만성피로에 시달린다면 말 다 한 게 아니겠는가.
“하… 재벌 2세에 실습까지 하고도 저런 여유라니.”
공무원이냐 헌터냐 가업이냐.
시민형의 상상 속 도현은 그런 고뇌에 빠진 모습처럼 보였다.
‘그러니 실습을 늘리지도 않고 딱 일주일만 다녀왔겠지!’
오늘부터 리포트위크 아닌가.
어쩌면 수석이란 별명도 반대가 극심한 부모님과의 마찰로 빚어진 피로 때문일 거다.
이미 시민형이 어떤 망상을 하는지 눈치챈 김승재와 이민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오히려 열불이 난 건 김승재였다.
“아, 세상은 정말 부조리하다! 불공평하다고오오!”
이민준과 고창하는 깊은 한숨을 쉬며 낮게 혀를 찼다.
10시 정각. 칼 같이 들어온 담당 교수가 2절지 크기의 종이 2장을 화이트보드에 붙이고 말했다.
“5인 1조로 7등급 워프 탐사가 1학기 리포트입니다. 조 편성은 이미 배정해두었으니 확인하시고, 입장 가능한 워프 리스트도 함께 붙여 뒀으니 확인하세요.”
이미 조를 짜둔 학생들 사이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깔끔히 무시한 교수가 다시 말을 이었다.
“리포트 양식은 홈페이지 게시판에 업로드 해둘 테니 다운 받으면 됩니다. 조 편성, 워프 리스트도 함께 업로드 했습니다. 리포트 기한은 넉넉잡아 1주일. 시간 엄수 합니다.”
일주일? 탐사만으로 최소 4일을 잡아먹는데?
결국 학생들의 불만이 폭발했다.
“교수님 너무합니다!”
“차라리 조 편성을 자유롭게 해 주십시오!”
교수는 야유에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다시 입을 열었다.
“나머지 시간은 조원들끼리 회의하시고, 강의는 마칩니다.
교수가 강의실을 떠나자 강의실은 더 시끄러워졌다.
부족한 시간에 불만을 부르짖을 시간도 없었다.
그렇게 팀별로 모인 학생들은 워프를 선택하고 계획을 짜야 했지만, 사람들이 모이니 분노로 교수를 씹어 대기 바빴다.
오히려 조용한 건 고창하와 그의 친구들이었다.
김승재가 갑작스럽게 벌떡 일어나 양팔을 숭배하듯 뻗었다.
“기뻐해라! 우린 또다시 4명이다!”
“오오오! 이 찰거머리 같은 인연! 도움은커녕 개똥도 안 되는 인연!”
“4인조 헌터사무공무원과 특고오옹대!”
이번엔 이민준과 시민형이 가세해 한마디씩 거들었다.
“근데 5인 1조라며? 나머지 한 사람이 누구야?”
기억력이 좋은 이민준이 김승재에게 물었지만, 대답은 고창하가 했다.
“우도현.”
“엑?”
“아?”
멍청한 소리를 내며 놀래는 이민준과 시민형 사이로 김승재가 상기된 얼굴로 외쳤다.
“대, 대박!”
***
도현은 강의실에서 턱을 괸 채 멍하니 허공을 보고 있었다.
반투명의 홀로그램 창.
이젠 익숙할 만도 했지만 여태 봤던 창들과 다른 창이었다.
커넥트(Connect)창.
―아도노스제국력 450년 1월―
[그라드가 5서클 마스터가 되었습니다! (후원하기 / 댓글 달기)]
[헤나지그 디 오르센이 가로등을 발명했습니다. 깨달음을 얻고 7서클에 진입합니다! (후원하기 / 댓글 달기)]
[대단한 업적! 실용마법 학파의 위상이 제브라드를 떠들썩하게 만듭니다.]
[블러드 크레이지 엑마(어둠의 정령 라스(상급))가 최상급암살자 30명을 처치합니다! 능력이 소폭 상승하였습니다.]
……
“이거 뭔가 말린 느낌인데.”
귀찮음이 잔뜩 묻은 나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방문자가 기습적으로 들어온 그 날. 시간이 남아 밥을 먹자 한 게 잘못인 걸까, 지구의 물건들을 관찰하게 둔 게 잘못인 걸까.
두 마법사는 전자 기기에 엄청난 관심을 보였고, 도현에게 질문을 쏟아냈다.
10, 20분밖에 안 돼 짧게 끝나긴 했지만 그게 아니었다면 몇 날 며칠을 달달 볶였을 거다.
도현이 거머리를 땠다고 생각했을 때,
[피를 매개체로 유대감이 형성됩니다.]
[시스템 – 커넥트가 오픈됩니다.]
[대가 없이 방문자를 등록할 수 있습니다.]
거래라 했지만, 첩자를 심어 보자는 생각에 했던 행동이 이런 결과를 만들어 낼 줄은 자신도 예상하지 못했다.
‘내 피가 평범하지 않다는 건 알았지만.’
긴 세월 동안 너무 많은 생명을 앗아버린 탓일까, 도현의 피는 더는 피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모든 병을 치료한다는 엘릭서가 될 수도 있었고, 모든 생명을 꺼버리는 극독이 될 수도 있었다.
모든 것이 그의 의지에 따라 가능한 이 능력은 우도현교가 창시하게 된 원이기도 했다.
‘그렇다 해도 이건 좀.’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빠르게 올라가는 메시지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새로운 시스템을 발견해서다.
메시지의 단어마다 규칙이 있었다.
이름에는 밑줄만, 아이템은 글자색이 파란색이다. 명칭은 녹색으로, 적일 경우 붉은색 글자로 표시됐다.
그걸 손으로 터치하면 익숙한 창이 떴다.
그라드
19세 / 남
5서클 마스터(경험치 87%)
능력치 [상세 보기+]
스킬 [상세보기+]
특이사항
1. 커넥트(우도현) 관계로 경험치
1000% 상태입니다.
2. 모든 능력치의 한계 사라집니다.
3. 커넥터(우도현)에게 메시지를 받을 수 있습니다. [메시지 보내기]
……
‘무슨 고전 영지물도 아니고.’
아니, 신도 육성 시뮬레이션이려나.
신도 육성으로 제브라드 정복… 같은 거 말이다.
“아, 귀찮은 건 딱 질색인데.”
급 피로해졌다.
“그러고 보니 뭔가 바뀌었는데.”
기억을 더듬어 세 놈의 첫 상태 창을 떠올렸다.
그라드(19세/남)
비운의 혼혈(사망) → 마왕 서열 1위 그라드(각성)
능력치 상세보기(+)
특이사항
1. 곧 죽을 운명의 혼혈이었지만 우도현의 피로 오버-각성이 이루어집니다.
2. 우도현교 절실한 신도로 명예신도가 됩니다. (비공개)
3. 우도현과 커넥트 상태를 유지합니다.
헤나지그 카 오르센(52세/남)
실용마법 학파 최후의 수장 → 실용마법 학파의 전설, 제 6마탑 창시자(마스터), 8서클 마스터
능력치 상세 보기(+)
특이사항
1. 죽음의 끝에서 우도현의 피로 새 삶을 얻었습니다.
2. 모든 능력치가 비정상적으로 뛰어오릅니다.
3. 우도현교 절실한 신도로 장로직에 오릅니다.
4. 헤미오르 쥬 노르세아스의 든든한 지원군이 됩니다.
5. 우도현과 커넥트 상태를 유지합니다.
‘그놈의 우도현교…’
정리하고 돌아오는 거였는데, 방문자마다 얽히니 황당하달까, 소 뒷걸음질에 쥐 잡은 격이랄까.
‘뭐, 될 대로 되라지.’
우도현교도, 방문자들의 바뀐 운명도 이젠 자신의 손을 떠났다.
아무튼, 여기까진 괜찮았다.
문제는 이다음에 뜬 내용이었다.
알림
헤미오르 쥬 노르세아스가 커넥트 시스템을 원합니다.
‘넌 왜 거기서 나와?’
도현의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주기적으로 울려대는 항의성 짙은 알림에 없는 피로까지 몰려와 결국 커넥트 창의 모든 알림을 꺼버렸다.
그리고 새롭게 갱신된 스코어.
현재 방문 가능자 수 : 0
일주일 스코어 : A
조언 : 나쁘지 않습니다. 하지만 종족에 따른 음식의 다양성을 추구해보는 건 어떨까요?
4번째 방문자부터 ‘이 종족’이 추가됩니다.
돌발 퀘스트
워프에서 구한 재료로 요리를 만들어 방문자의 만족도를 이끌어 보세요!
[이 종족 방문자의 만족도 A 달성하기]
보상 : 농장
농장이라니.
“이젠 하다못해 생산부터 시작하라고?”
이렇게 퀘스트까지 나타나서 사람을 괴롭힌다.
“이러다 요리사란 직업까지 강제로 생길 지경이네.”
너른 마음으로 방문자 대접까진 이해한다지만 이건 좀 너무 하다.
“하아. 그냥 다 때려칠까?”
“뭐? 때려쳐?”
“안 돼애애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