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
15. 쓸데없다 (3)
그라드는 거두어지는 순간부터 자신은 결국 짐 덩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스승님… 아버지, 그렇게도 저를 살리려 하셨습니까….’
바들바들 떨릴 정도로 꽉 쥐어진 주먹에서 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
“…어떻게 하면 됩니까?”
그라드는 꽉 다문 이 사이로 한 자 한 자 뱉어냈다.
도현은 고민했다. 혼혈은 아무리 선택을 한다 해도 태생인 반마족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게다가 마족은 등급에 따라서 힘의 격차는 상상을 불허했다.
하지만.
빽이나 선의가 아니라서 가능하다.
우도현, 자신이라서.
‘게다가 정보처로 쓰기도 딱이고.’
제브라드에서 추방당한 몸. 수단으로서 이렇게 적절할 수 없었다.
시스템이 무슨 의도로 이런 인연을 이어준 건지 모르겠지만, 자신은 적당히 이용 해주면 될 일이었다.
그럴 거면 추방 낙인은 왜 찍은 건지.
‘설마 제브라드조차 예상하지 못한 건가?’
그럼 누가?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졌다.
‘보험도 필요하겠어.’
정보를 물어다 줄 놈들만이 아닌, 필요하다면 써 먹을 수 있는 놈들이.
어차피 써 먹을 수 있을만큼 수준을 높일 생각이었으니 계획에 더 적합해졌다.
마침 시스템이 알아서 방문자들을 보내주니 잘 걸러 쓰면 될 일이고.
도현은 검은 조약돌을 건네며 말했다.
“우선은 그 정령석을 먹어. 그럼 어둠의 정령과 계약할 수 있을 거다.”
그라드는 받은 정령석을 망설임 없이 입에 털어 넣었다. 단단한 돌덩이가 혀에 닿자마자 액체가 되어 사라졌다.
놀람과 동시에 온몸이 뜨거워지며 세상이 뒤집어졌다.
그가 정신을 차린 건 그로부터 한 시간 뒤였다.
불안정하고 위축되었던 모습은 사라지고 당당하고 깊어진 눈빛의 그라드로 바뀌었다.
“다녀왔습니다.”
그라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예의를 갖춰 도현에게 인사했다.
그사이 식사를 마치고 설거지까지 끝낸 도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상처럼 굳어 있던 엑마를 턱짓했다.
“알아서 처리해.”
기절한 듯 움직임도 없던 엑마가 눈을 번쩍 뜨며 몸을 일으켰다.
도현의 눈치를 보던 놈은, 자신을 무표정하게 보는 그라드와 시선이 마주치자 극도의 분노를 느꼈다.
달라진 그라드의 분위기도 눈치 채지 못한 엑마는 분노에 몸을 맡긴 채 그라드를 향해 달려들었다.
‘갈갈이 찢어 버리겠다!’
엑마에게 있어서 2써클의 마법사는 5살짜리 꼬미와 다를 바 없었다.
엑마의 주먹에 거친 오러가 맺혔다. 그는 이대로 그라드의 심장에 꽂아 몸을 폭발 시킬 심산이었다.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졌다. 무방비의 몸뚱이를 향해 주먹을 내지른다.
“죽어라!”
가슴에 주먹이 닿자 갈비벼까 여린 나뭇가지처럼 부서진다. 주먹 크기만큼 움푹 패인 가슴 안으로 쏘아진 오러가 몸 내부의 심장을 터트렸다.
“낄낄낄!”
죽음을 확신한 엑마의 입가에 드디어 비웃음이 걸렸다.
“우웩!”
그라드 입에서 시커먼 핏덩이가 쏟아졌다. 턱을 타고 흐른 피는 아직 가슴에 꽂힌 엑마의 주먹 위로 떨어졌다.
“이제 끝이다!”
엑마는 한 층 더 오러를 끌어 올렸다. 그리고 주먹을 꾹 밀기 시작했다. 생 살이 찢기는 고통에 그라드의 몸이 들썩였다.
“……?”
주먹이 들어가지 않는다?
구멍을 뚫을 심산이었던 엑마는 더 이상 주먹이 들어가지 않자 의아해 고개를 들어 그라드를 확인했다.
“우웩!”
다시 토한 핏덩이가 엑마 얼굴을 적셨다.
“이 쥐 새끼… 어억!”
엑마는 자신의 가슴을 부여잡았다. 뜨끈한 덩어리가 터지는 느낌.
분명 자신의 심장이었다.
“이게 도대체….”
몸이 기울며 바닥으로 고꾸라지는 시야를 끝으로 어둠이 찾아왔다.
떨치던 악명에 비해 실로 허망한 죽음이었다.
방관하던 도현이 감상을 남겼다.
“상급이라. 꽤 소질 있네.”
“감사합니다.”
그라드. 아니, 어둠의 정령 라스는 흠뻑 젖은 로브를 들어보며 킬킬댔다.
발끝에 쓰러져 죽은 엑마를 붉은 눈으로 훑더니 입맛을 다셨다.
라스의 입이 쩍 벌어졌다. 아니, 몸 전체가 입 밖에 없는 듯 세로로 쪼개지며 엑마를 집어 삼켰다.
그 사이 그라드는 스승 옆에 주저앉아 몸을 바르게 뉘이고 손을 잡았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손에 다시금 이를 악물었다.
모든 힘을 끌어내 라스를 소환한 그라드는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도 없었다. 금방이라도 몸이 쓰러질 것만 같았다.
어둠의 정령.
4대 속성이라 일컫는 땅, 불, 바람, 물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속성이었다.
친화력을 중시하는 정령사와 달리 마이너스감정과 영혼의 강함에 따라 계약할 수 있으며 그 감정의.크기에 따라 급이 달랐다.
‘상급.’
그라드는 스승의 손을 쥔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덜덜 떨리는 게 눈으로 봐도 심각할 정도다.
‘내가 해치웠다.’
스승이 온전한 몸이라도 어려웠을B급 살수를 자신의 능력으로 해치웠다.
첫 살인의 충격이 없을 순 없지만, 해냈다는 성취감이 더 컸다.
그리고,
“이 손으로 지킬 겁니다…!”
스승이자 아버지를. 더 나아가 학파까지도!
그라드는 도현의 말대로 죽지 않은 게 천운인 몸이었다.
그럼 그가 상급 정령을 소환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도현의 한마디 때문이었다.
‘나와 거래하자.’
‘네 스승도 살려줄게.’
말이 어둠의 정령석이지 애초 어둠의 정령에는 정령석이 존재하지 않는다.
‘마족의 영혼이 갈가리 찢겨 버리면 남게 되는 돌입니다. 악의만 응축되어 남게 되는 것이지요. 그것도 꽤 강한― 당신에겐 너무 과분합니다. 그러니 그대의 몸은 내가 잘 쓰겠습니다.’
친절한 설명 뒤로 라스의 공격이 이어졌다. 살이 찢기고 팔, 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몸뚱이만 남았을 때.
마주친 라스의 눈이 즐거움으로 가득 찬 걸 느꼈다.
익숙한 눈빛.
5살부터 시작된 괴롭힘, 무능력했던 날들이 머릿속을 해집었다.
그와 함께 자신 때문에 죽어가는 스승이자 아버지, 헤나지그가 오버랩 되었다.
‘죽여 버릴겠다아아악!’
내 영혼을 태워 모든 걸 잊는다 해도.
복수. 그것만이 내가 바라 마지않는 것.
꽈아악―
그라드는 ‘주먹을 내지른다’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주먹은 라스의 머리통을 부쉈다.
의지의 발현. 강한 정신력만이 어둠의 정령을 부릴 수 있었다.
그라드가 떨리는 주먹을 꽉 쥐며 복수를 다시 다짐했을 때, 엑마의 탈을 쓴 라스가 도현을 향해 머리를 숙였다.
“입에 담을 수 없는 존재이시여, 라스. 인사드립니다.”
정중하면서도 존경을 담아 인사.
‘입에 담을 수 없는 존재’의 의미를 알게 된 그라드만이 몸을 떨었다.
그러든 말든 고개를 끄덕인 도현은 인벤토리에서 갈색 병 2개를 꺼냈다.
“다음으로 넘어가지.”
상표 라벨만 붙였다면 드링크제로 보일 그런 외형이었다.
뚜껑을 열자 진득한 마나가 방을 가득 채웠다. 그 기운에 그라드와 라스가 눈을 부릅떴다.
도현은 검지를 씹어 피 한 방울씩 병에 넣고 뚜껑을 닫아 그라드에게 건넸다.
“하나는 네 스승에게, 하나는 네 거다.”
공손히 받아드는 그라드의 손이 떨렸다.
별 것 아니라 생각했던 정령석만 해도 과분한 은혜였다.
거기에 스승님을 살릴 수 있는 포션까지.
왜 두 개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스승을 살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그라드는 틀어 막힌 목구멍을 겨우 짜내어 감사의 인사했다.
19년 동안 살아오면서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준 건 스승인 헤나지그 밖에 없었다.
몇 시간 전 처음 만난 사내가 이런 호의를 보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거래라고 했지만….’
누가 이런 호의를 보이겠는가. 아무것도 이룬 게 없는 자신에게 말이다.
신뢰.
그 값이라기에는 너무나도 컸다.
“이 은혜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그라드는 엎드려 절할 기세로 다시 한번 허리를 깊숙이 굽혀 인사를 하고, 조심스럽게 스승의 상체를 자신의 다리에 기울여 눕혔다.
얼음장같이 식은 스승의 몸에 울컥 분노가 치밀었다.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다!’
목숨을 잃는다 하더라도 혼자 죽을 생각은 없었다.
그게 마탑의 수장이든, 나라의 왕이든, 철저하게 부수어버리겠다고.
심호흡하며 감정을 가라앉힌 그라드는 스승의 입안으로 조금씩 천천히 액체를 흘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한 번의 과정을 끝낼 때마다 얼음장 같던 몸에 온기가 돌고 혈색이 돌았다. 병이 비워지자 스승은 편안히 숨을 내쉬며 천천히 눈을 떴다.
“스승님!”
“그라드? 살아… 있는 거냐?”
“…예! 살아있습니다.”
짧은 정황 설명 끝에 둘의 시선이 도현에게 향했다.
헤나지그는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그라드가 놀라 부축하려 했지만, 오히려 가뿐한 몸에 헤나지그가 더 놀라며 도현에게 머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다 갚아야 할지, 은인님 성함이라도 알려주시지 않겠습니까? 꼭, 꼭…. ”
“우도현.”
“……!”
헤나지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도현은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두 마법사는 고장 난 인형처럼 잠깐 굳었다 몸을 폈다.
적막감이 감돌았다. 먼저 입을 연 건 헤나지그였다.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뜬 그는 허탈한 듯 낮게 웃었다.
“허허… 소문으로만 듣던 귀한 분을 뵈어 정말 영광입니다.”
도현은 덤덤한 시선에 두 마법사는 횡송한 듯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잠깐 고민하던 헤나지그가 말을 이었다.
“외람된 말입니다만, 이런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이유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복잡한 헤나지그의 얼굴을 빤히 보던 도현은 픽 웃었다.
“그저 변덕이라 해두지.”
“예?”
멍청하게 되묻는 두 마법사를 보며 도현은 말을 툭 던졌다.
“그런데 너희들.”
“……?”
“밥 먹을래?”
톡톡, 촤아아악!
달궈진 프라이팬에 계란이 퍼지며 하얗게 익어갔다.
그라인더에 갈린 천일염을 계란 위에서 두 바퀴 돌린다.
7년 동안 간수를 뺀 천일염을 볶아 갈은, 엄마표 소금. 맛소금이 캐시 아이템이라면, 이건 치트키다.
중불로 낮추고 숫자를 센다.
하나, 둘, 셋… 열.
계란 끝이 바싹하게 구워지면 숟가락을 살짝 넣어 붙은 바닥을 정리하고 뒤집어 준다.
불을 끄고, 대접을 꺼내 고슬고슬하게 지어진 밥을 적당히 퍼 넣고, 엄마표 나물을 가짓수대로 올리기 시작했다.
무나물, 시금치, 콩나물, 부추 나물, 깻잎무침.
그렇다. 이번 메뉴는 비빔밥이다.
혼자 사는 살림에 칼은 물론이고 포크도 없으니, 그냥 숟가락으로 먹을 수 있는 메뉴를 정한 거다.
‘나물이 있으면 비빔밥이 진리지.’
오이소박이나 오징어 젓갈을 더 넣고 싶지만, 제브라드는 매운 음식이 보편화 되지 않아 제외했다.
‘그것들 보단 고추장을 올려야 완성인데.’
아쉽지만 이것도 매우니 패스.
마지막으로 잘 익은 계란 프라이를 깔끔하게 올렸다.
완성이다.
세 그릇을 식탁에 올리고 중앙에는 된장찌개와 먹기 좋게 자른 김치전을 놓았다.
“먹어.”
한참 TV에 넋을 잃고 있던 3명이 쪼르르 달려와 앉았다.
“뭐해? 안 먹어?”
셋은 어색하게 숟가락을 들어 밥과 숟가락만 살폈다.
‘아. 사용법을 알 턱이 없지.’
도현은 새 숟가락을 들고 라스의 비빔밥을 비비며 설명했다.
“이렇게 비벼서 먹으면 돼.”
어설프게나마 따라 하고 한 숟갈 퍼먹자 충격으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셋은 경쟁이라도 하듯 그릇을 빠르게 비워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