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 가짜 숭례문(2)
“안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옆으로 한 걸음 물러서 거리를 터 주는 배희연.
이상필이 다시 한 번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를 건네고 자신의 비서를 돌아봤다.
“저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래요.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이상필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는 비서를 향해 미소를 보이고 대표실 문을 열었다.
대표 책상 앞에 이상민이 앉아 서류를 읽고 있었다.
이상남도 있었다. 열심히 일하고 있는 이상민과는 다르게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지만 이상남도 대표실에 있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잘 지냈고? 아니, 잘 못 지냈겠네. 모두가 군사 기지 사업에 뛰어들 때, 청일 건설은 그 사업에 끼어들지 않았으니까.”
“죄송합니다.”
“죄송하기는. 내가 요청한 일인데.”
어색한 미소를 그리는 이상필.
이상남이 그런 이상필의 모습에 실소를 터트린 후에 여전히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이상민을 바라봤다.
“잠깐 쉬자.”
“…….”
결재 서류에 사인을 하던 이상민이 펜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아버님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래도 절차는 밟아야지.”
“쯧.”
혀를 찬 이상민이 펜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이상필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잘 지내셨습니까?”
사적인 자리가 아닌 공적인 자리다. 이상민은 친구나 다름없는 이상필이었지만 존댓말을 사용했고, 그런 이상민의 모습에 무언가를 깨달은 이상필이 손을 맞잡고 대답했다.
“예. 대표님도 강녕하셨습니까?”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것이 저도, 아버님도, 사장님에게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예. 뭘 하면 되겠습니까?”
“S급 게이트를 소멸시킨 직후, 바로 청일 건설이 움직여야겠습니다.”
“피해 복구와 관련된 일입니까?”
“아닙니다.”
***
청일 그룹의 대표, 이상민을 닮았다. 다른 점은 마른 몸매의 이상민과는 다르게 통통하고 미소가 참 어울리는 사내라는 것이었다.
“청일 건설 사장님이다.”
“건설……?”
“그래. S급 게이트가 사라지면 바로 시작해야지.”
“그건 그렇죠.”
“그래서 알려 주고 싶은데 괜찮겠냐?”
두 사람의 대화를 이해하지 못해 이상필 사장이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봤다. 하지만 질문은 던지지 않았다.
기다리면 설명이 시작되고, 그 설명을 통해 대화를 이해할 수 있다고 판단해 침묵했다.
“입이 무척이나 무거운 분이신가 보네요.”
“그래.”
단호한 표정,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이상민.
한율은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려 소파에 배를 깔고 누워 있는 하양이와 커피를 바라봤고, 두 정령이 확신하듯이 고개를 끄덕이자 다시 이상민 대표를 바라봤다.
“설명을 먼저 할까요?”
“아니, 일단 경험을 하고 설명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뭐, 그게 낫겠네요.”
안 믿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주요 인물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한율의 능력을 마법으로 착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상필 사장님.”
“……아, 네. 한율 헌터님.”
“일단 안내를 해 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목적지에 대해 묻지 않는다. 한율은 그런 이상필을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보다가 두 사람과 함께 연구실 안쪽에 위치한 휴게실로 이동했다.
그렇게 도착한 차원의 벽.
“허, 허어. 허어.”
차원, 차원의 벽에 도착한 이상필이 입을 쩍 벌렸다.
“하, 한율 헌터님.”
“네. 이상필 사장님.”
“여긴 게이트 내부입니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뇨. 다른 차원입니다.”
“……다른 차원.”
한율이 멍한 표정을 지은 채 차원을 살피는 이상필을 확인하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른 차원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는 아주 자세히 설명했다
한 번에 너무나 많은 정보를 얻는다. 한율은 몇 차례나 반복해 설명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이상필은 매우 똑똑한 사람이었다.
“‘게이트 내부는 다른 차원이다’라는 가설이 맞다는 말씀이시군요.”
“예.”
“다른 차원이라.”
이상필이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처음에는 일반인의 시점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면, 이번에는 건설사 사장의 시점으로 둘러봤다.
“차원의 벽을 둘러싼 도시. 게이트가 지구로 넘어오기 전에 소멸시키는 도시. 그러니까 전선기지(前線基地)군요.”
“예. 그렇게 보셔도 됩니다.”
“주의할 점이 있습니까?”
“차원의 벽을 중심으로 네 개의 지구를 만들어 주십시오.”
“방금 전에 말씀하신 레스트 님, 언소월, 에리얼 님, 그리고 한율 님이 관리하는 지구로 말입니까?”
“네. 아, 참고로 관리는 안 합니다. 다른 분들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 아직 듣지 못했지만 저는 대리인을 세울 겁니다.”
“그렇군요. 사업장도 허가하실 생각이십니까?”
“예. 물론 여관 등과 같은 사업도 허가할 생각입니다.”
“알겠습니다. 원하시는 도시가 있습니까?”
“원하는 도시요?”
“예.”
“그냥 한국 도시처럼 해 주세요. 다른 분들은 조금 있다가 도착하실 테니 그분들에게 물어보시고요.”
“어…….”
바로바로 대답하던 이상필이 처음으로 말끝을 흐리자 한율, 그리고 이상민이 고개를 돌려 바라봤다.
“아니, 그 말이 통할까 하는 고민이 생겨서.”
“아. 그건 걱정 마세요. 마법으로 해결이 가능하니까요.”
***
재벌이어서 그런 걸까.
아공간 주머니를 가지고 있던 이상필은 레스트, 에리얼, 언소월이 도착하자 커다란 원형 테이블 위에 새하얀 종이를 펼치고 그 위에 도면을 그리기 시작했다.
모두가 만족하는 도시를 만들 생각인지 이상필은 그들의 요구 사항을 적극 반영했다.
“흐음.”
“……왜 그래?”
옆에서 들려오는 이상민의 질문.
고개만 살짝 돌려 이상민을 확인한 한율이 다시 테이블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요구 사항은 두 사람과 정령이 도착하기 전에 설명했기 때문에 한율은 뒤로 물러나 그들의 회의를 지켜보고 있었다.
“제가 능력을 숨기고 있잖아요.”
“고위급 인사들은 알고 있지만.”
“……어쨌든 혼란이 일어날 것을 방지하기 위해 숨기고 있잖아요.”
“그렇지.”
“그다음에 S급 게이트라는 사건이 터졌고.”
“흐음……. 그러네. 고위급 인사들에게 능력을 숨긴 다음에 S급 게이트 사건이 터졌지.”
각국의 고위급 인사, 상위 헌터들을 대한민국으로 초대해 자연스럽게 능력을 숨겼다는 것을 밝혔다.
무공도 공개했다.
“그런데 그게 왜.”
기억을 더듬어 순서를 재정리했던 이상민이 다시 물었다.
“저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
이상민이 고개를 돌려 레스트를 한 번, 언소월을 한 번, 마지막으로 아이스크림을 퍼 먹으며 열심히 요구 사항을 말하는 에리얼을 바라봤다.
서양인인 레스트나 동양인인 언소월은 정체를 숨기는 것이 어렵지 않다. 하지만 에리얼은 다르다.
그녀뿐만이 아니다. 무인과 술법사로 이루어진 언소월의 차원, 무협과는 달리 레스트의 차원, 판타지에서 넘어오는 이들은 다양하다.
엘프, 드워프, 드래곤.
그들은 인간을 닮았지만 인간이 아니다.
엘프는 인간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귀가 뾰족한 종족.
드워프는 키가 매우 작은 종족.
그나마 드래곤이 가장 인간과 흡사했지만 그 또한 폴리모프 마법으로 외형을 바꾼 것이었다.
“그냥 협력자라고 하면?”
“일반인들의 시점, 그리고 차원 거래 능력에 대해 모르는 사람들의 시점에서는 게이트에서 튀어나온 침략자일 텐데요.”
“…….”
“…….”
“이건.”
좋은 방법이라도 떠올렸는지 이상민이 아주 진지한 목소리로 말하자 한율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네. 이건.”
“정치 쪽하고 이야기를 해 봐야 할 거 같은데.”
“……왜요?”
“능력은 감출 거지?”
“그게 좋다고 생각했어요. 만약 차원의 도시로 각성 범죄자가 숨으면 그때 차원의 문 스킬을 취소화해 출입구를 막고 차원 거래 능력을 이용해 차원의 도시를 방문한 동료들에게 연락을 취해 사로잡을 생각이니까요.”
오래 가지는 못할 것이다. 고위급 인사들이 평생 동안 자신의 비밀을 숨겨 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정치 쪽하고 만나서 연극을 한번 펼쳐야지.”
“……연극?”
“연극.”
***
광화문 광장.
갑작스레 광화문 광장 한복판에 숭례문이 나타났다. 헌터들이 확인한 결과 감정 시스템이 통하지는 않지만 마나를 품은 가짜 숭례문이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헌터 협회?
움직였다.
정계?
움직였다.
언론사도 당연히 움직였다.
헌터 협회가 선두에 서고, 정계가 후방에 대기.
언론사들이 좌우측에 서서 가짜 숭례문을 카메라에 담았다.
“지, 지금 가짜 숭례문에서 마나가 흘러나오고 있다는 헌터의 제보가 들어왔습니다!”
우우웅.
어느 기자의 외침처럼 가짜 숭례문에서 푸른 마나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눈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파란 연기.
휴식을 취하기 위해 카메라를 내려놓았던 기자들이 다시 카메라를 들었다.
하품을 뱉으며 시간을 보내던 헌터들이 바로 자세를 잡고 경계했다.
정계 쪽도 마찬가지였다.
일반적인 게이트가 아니다. 숭례문을 닮은 가짜 게이트, 즉 외형이 외형이다 보니 직접 국가 소속 헌터들을 대동한 채 광화문 광장을 찾은 대통령 또한 긴장한 것처럼 침을 꿀꺽 삼켰다.
누군가가 그랬다.
국회의원은 모두 뛰어난 연기력을 갖춘 배우들이라고.
대통령은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처럼 정말 당황한 표정을 지은 채 가짜 숭례문을 바라봤다.
‘다른 차원의 지원군이 도착하니 놀라지 말라고 했지.’
이미 다른 차원이 존재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충분히 놀란 상황이었다. 그래서 대통령은 주먹을 불끈 쥐었지만 갑작스레 새어 나오던 푸른 연기가 다시 회색 입구로 빨려 들어가 푸른색 입구로 바뀌고, 색이 바뀐 입구에서 지원군이 모습을 드러내자 놀란 표정을 지었다.
크아아앙!
하늘을 나는 거대한 용.
동양의 용이 아닌 서양의 용이라 불리는 드래곤.
“이런…….”
연기?
아니다.
“미친.”
대통령은 진심으로 놀라 욕설을 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