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 차원의 벽(2)
파아앗!
빛의 폭발.
마법으로 만든 흙의자에 앉아 대화를 나누던 한율과 레스트가 저 멀리서 발생한 마나의 유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가까운 거리에서 빛의 폭발이 일어나 눈을 감아야 했던 레스트의 소환과는 다르게 거리가 매우 떨어져 있었고, 대화에 집중한 나머지 마나를 감지하는 것이 조금 늦었다.
“오!”
“흐음. 서적을 통해 추측하고 있었지만 정말 아름답군요.”
“하지만 민초 여왕.”
“……예?”
“아닙니다.”
어색한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흔든 한율이 거래 대상자 중 유일한 여성, 에리얼을 바라봤다.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복장이…….”
어느 날이었다. 에리얼이 갑작스레 패션에 관심을 가져 한율은 그녀의 요청에 따라 인터넷 쇼핑몰을 이용해 여성 의류를 구입해 영약과 거래했다.
“예쁜 옷도 보내 줬는데.”
곰돌이가 그려진 티셔츠, 늘어난 고무줄 바지, 그리고 슬리퍼를 신고 있는 여성.
아름다운 외모와는 다른 그녀의 패션에 미묘한 표정을 지었던 한율이 레스트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안녕하…….”
“이쪽이 레스트 씨?”
바람의 정령왕, 에리얼이 금발의 사내, 레스트에게 물었다.
“예. 레스트입니다. 에리얼 님 만나서 반갑습니다.”
고개를 살짝 숙이면서 인사를 건넨 레스트가 천천히 손을 내밀자 바람의 정령왕, 에리얼도 웃으면서 손을 내밀어 그와 악수를 했다.
짧은 대화를 끝낸 에리얼이 한율을 바라보며 다시 손을 내밀었다.
“한율 씨 맞죠?”
“네. 에리얼 님.”
“가져오셨고?”
가져와?
뭘?
고개를 갸웃했던 한율은 레스트와 인사를 할 때와는 다르게 손바닥이 하늘로 향해 있는 그녀의 손을 확인하고 입을 열었다.
“거래창.”
자연스럽게 차원 거래 능력을 사용.
거래창 하단에 위치한 커다란 아이스크림 컵을 터치.
공중에 갑작스레 나타난 아이스크림 컵을 자연스럽게 받은 한율이 에리얼에게 내밀었다.
“여기요. 부탁하신 아이스크림.”
“헤헤헤. 죄송해요. 대화를 나누는 딱 그때 아이스크림이 떨어져서.”
한율이 민트 초코 아이스크림을 받고 아이처럼 웃는 에리얼의 모습에 다시 한 번 웃음을 터트렸다.
레스트가 도착했고, 에리얼이 도착했다.
언소월은 미리 늦게 도착한다고 양해를 구한 상태.
“도착한 거 같은데.”
한율이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말하자 레스트, 에리얼이 자연스럽게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그가 바라보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의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거대한 게이트.
[차원의 벽: 언소월이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미리 양해를 구했잖아.”
[차원의 벽: 같은 말을 반복해야 합니다.]
“대화방을 열어 둔 상태에서 대화를 나누면 되지.”
짧은 침묵.
[차원의 벽: 인정합니다. 그럼 회의를 시작하십시오. 질문이 있다면 제 명칭을 먼저 언급한 후에 물어보시면 됩니다.]
지성을 갖춘 생명체보다 고도로 발달한 인공지능이 더 어울린다.
한율은 레스트, 에리얼을 바라봤다.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은 채 눈앞에 떠오른, 정확하게는 세 사람이 동시에 볼 수 있도록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나타난 커다란 메시지창을 바라보고 있던 두 사람이었다.
“우와.”
정령왕은 아이스크림을 퍼 먹으며 탄성을 흘렸고, 레스트는 메시지창과 유일한 게이트를 번갈아 바라보며 턱을 쓰다듬고 있었다.
“지성을 갖추었다기보다는 어떠한 현상, 또는 기적의 발현으로 지성이 생겼다, 인가.”
고민하듯이 게이트와 메시지창을 번갈아 바라보던 레스트가 쓰윽 고개를 돌려 한율을 바라봤다.
“…….”
“왜 그러세요?”
“지구의 시스템.”
“지구의 시스템?”
“분명 언어가 다름에도 우리들은 평범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건 말도 안 되는 현상,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죠. 그렇다면 이런 상식에서 벗어난 현상을 이해하려면.”
“……이능.”
이능 쪽을 의심해야 한다.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한율이 레스트와 함께 다시 게이트를 바라봤다.
[차원의 벽: 한율, 레스트, 에리얼이 도착하기 1시간 전입니다. 한율의 차원, 지구 시스템에게 요청해 한율의 차원이 말하는 각성을 했습니다.]
각성.
“……어, 게이트가요?”
[차원의 벽: 그렇습니다.]
“그게 가능해요?”
[차원의 벽: 그렇습니다.]
“……어떻게?”
[차원의 벽: 요청했습니다.]
“아니, 그러니까. 게이트가 요청을 했다고 시스템이 각성을 시켜 줬다?”
[차원의 벽: 그렇습니다.]
“……어떻게?”
[차원의 벽: 요청했습니다.]
“…….”
***
어두운 숲속.
“후우.”
작게 숨을 고른 흑발의 미남자가 주변을 확인했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거칠게 호흡을 고르고 있는 이가 있었고, 동료의 도움을 받아 상처를 치료하는 이가 있었다.
미남자의 시선이 바닥으로 향했다.
수십을 넘어 일백에 가까운 요괴들.
종족은 다르다. 하지만 요기라는 기운을 품은 요괴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기운을 통해 적아를 구분하는 것처럼 같은 요괴를 상대로 이를 드러내지 않아 종족이 다음에도 함께 인간들을 공격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피해는?”
미남자의 물음에 그의 뒤를 따르던 한 무인이 바로 대답했다.
“사망 스물둘, 중상 마흔일곱입니다.”
“바로 전투에 투입할 수 있는 인원을 제외한 경상자는.”
“예?”
“장기 치료가 필요한 경상자 말입니다. 예를 들어 팔을 잃은 것은 아니지만 심각한 부상을 입어 당분간 팔을 쓰지 못하는.”
“어, 그게 경상입니까?”
“사망자가 발생하는 전쟁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부상에 의해 당분간 팔을 사용하지 못하는 정도는 경상으로 봐야지요.”
“어, 확인을 해야할 거 같습니다.”
“확인해 주십시오. 그리고 빠른 구분을 위해 1급 경상자, 2급 경상자로 나눕니다. 1급 경상자는 장기 치료가 필요한 이들로 구분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확인하고 바로 보고를 올리겠습니다.”
“예. 부탁드리겠습니다.”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말을 받은 흑발의 미남자, 언소월이 걸음을 옮겼다.
우선적으로 가문에 속한 무인에게 다가가 치유 술법(치료 마법)을 사용한 언소월은 그대로 복귀하는 대신 가문에 소속되지 않은 중소문파 무인들에게도 다가가 치유 술법을 펼쳤다.
“가,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치유 술법이 필요하면 바로 말씀해 주십시오.”
“……예!”
큰 목소리로 대답한 무인.
언소월은 그런 무인을 향해 고개를 살짝 숙였고, 또 한 번 감격한 무인이 허리를 반으로 접어 인사를 받자 머쓱한 표정을 지은 채 몸을 돌렸다.
그렇게 치유 술법을 펼치며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피해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잠시 자리를 벗어났던 무인이 돌아와 피해를 보고했다.
“가문은 물론 가문에 소속되지 않은 의원들에게도 도움을 요청하십시오. 적절한 보상을 해 줄 터이니 목숨을 걸고 요괴들을 막아 준 무인들을 치료해 달라고 말하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피해를 보고한 무인이 짧은 대답을 끝으로 다시 자리를 뜨자 언소월도 움직였다.
자연스럽게 중소문파, 그리고 진주언가의 무력 부대 대장을 찾아간 그는 복귀를 요청했고, 요청이 받아들여지자 바로 몸을 돌려 가문으로 복귀했다.
조금 귀찮았다. 하지만 언소월은 진주언가의 장남이라는 자신의 위치를 상기해 정식적으로 절차를 밟아 보고를 마치고 자신의 방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이동하는 데 걸린 시간과 정식적으로 절차를 밟아 보고를 하는 데 걸린 시간은 대략 반 시간.
“후우. 그럼.”
아직 일이 끝난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인상을 찌푸려야 했지만 언소월은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옷을 갈아입고 방을 나왔다.
“도련님.”
“개인 수련장에 있겠습니다. 깨달음이 있으니 정말 중요한 문제가 아니면 그 누구도 수련장을 방문해서는 안 됩니다.”
요괴와의 전투를 마친 무인의 요청이다.
언소월은 진주언가의 무인들이 바로 알겠다는 대답을 하자 바로 지하 수련장으로 이동, 탐지 마법을 사용해 주변을 확인했다
아무도 없다.
그렇다면 남은 일을 처리해야 할 시간.
“……차원의 벽.”
언소월이 갑작스레 생긴 이능, 차원의 벽을 사용했다.
우우웅.
파앗!
마나의 유동, 빛의 폭발.
그 이후에 나타나는 지하 수련장의 철문.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린 언소월이 지하 수련장의 문을 확인한 후에 눈앞에 나타난 ‘차원의 문’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갑작스레 찾아온 빛 때문에 잠시 눈을 감았던 언소월이 거대한 마나를 품은 두 존재와 자연 그 자체를 감지하고 눈을 떴다.
특이한 복장을 한 흑발의 사내, 이상한 통을 들고 있는 아름다운 여인, 그리고 이상한 쇳덩어리를 입에 가져가는 금발의 사내.
세 사람, 아니 두 사람과 자연을 품은 여성체가 고개를 돌렸다.
만남을 가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하지만 누가 누구인지는 너무나 쉽게 알 수 있었다.
한율?
캠코더를 거래하고 사용법을 배우면서 얼굴을 확인했다.
에리얼?
한율의 거래 대상 중 유일한 여성이다. 그러니 남은 사람은 당연히 레스트일 게 뻔했다.
“……큭.”
분명 처음 만나는 자리였다. 하지만 오랜 친구를 만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웃음이 나오고만 언소월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두 사람, 그리고 자연을 품은 여성체에게 인사를 건넸다.
“마치 오랜만에 만나는 것 같은 느낌이 드니 매우 어색하네요. 인사드리겠습니다. 진주언가의 장남, 언소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