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산 찍고 건설 재벌-229화 (229/230)

229화 태양 천하(3)

태수가 날린 전보 한 장의 위력은 대단했다.

“뭐? 태수가 결혼을 해?”

아침밥상머리는 초토화되었다.

태수 부모님이 잔뜩 흥분해서 난리였다.

“예쁘대?”

“어리대?”

“여기서 이럴 때가 아니지. 귀국하자. 당장 짐 싸!”

평생 독신으로 살 것처럼 굴던 아들이 결혼이라니!

결혼하고 사우디에 가라고 그리 설득해도 눈 하나 깜짝 않던 태수가 아닌가.

한수는 얼굴에 잔뜩 튄 밥알을 손수건으로 대충 닦아 냈다.

“그럴 것 없어요. 형이 이쪽으로 오겠다고 전보 왔으니까요.”

“태수가? 언제 온데?”

“오늘이요.”

“오늘?”

갑자기 숟가락 딱 내려놓으신 태수 어머니.

벌떡 일어나서 우왕좌왕 허둥대기 시작했다.

“미용실부터? 옷부터? 아니면 청소부터?”

그때였다.

딩동.

심장이 떨어지는, 맑고 고운 소리였다.

한수가 현관문에 달린 외시경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태수 형이에요. 그런데 형 옆에 웬 예쁘장한 외국인 여자가…….”

“외국인?”

아니, 외국 출장 나가는 놈도 아닌데 한국에서 외국인 여자를 데려와?

게다가 바로 결혼?

하여간에 태수 이놈은 뭐든지 속전속결이야.

벌컥.

현관문 앞에 선 엘리스를 처음 본 순간.

태수가 결혼까지 결심한 이유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극히 일부 톱스타들만이 가지고 있다는 후광이라는 것이 엘리스에게서 뿜어져 나왔다.

귀한 집 따님은 귀티와 부티가 좔좔 흘러넘쳤다.

가족 모두 동시에 엄지를 척 들어 올렸다.

[웰컴! 환영합니다. 먼 길 오느라 고생했어요.]

[아침은 먹었어요? 스테이크? 스파게티? 아니면 간단하게 햄버거나 시리얼?]

미국 생활 2년 만에 어설프게나마 영어를 쓰는 부모님이 두 팔 발려 환영했다.

* * *

록펠러 가주 집무실.

집무실 왼쪽 방에는 록펠러 가주가 누워 있었다.

여전히 생명 유지 장치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록펠러 가주.

몇 달 만에 다시 만난 록펠러 가주는 그새 훨씬 더 초췌한 안색을 하고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다…….]

오랫동안 지금 이 순간을 기다려 왔다.

록펠러 가주가 손을 젓자 총괄 집사가 서류를 들고 왔다.

[가져가라…….]

록펠러 가주는 결혼을 허락한다는 서류를 미리 준비해 놓고 있었다.

삐뚤삐뚤한 글씨지만 친필로 직접 서명을 하고, 록펠러 가주 인장까지 제대로 찍었다.

록펠러 가문 변호인단의 공증을 받아 둔 데다, 한국용과 미국용 혼인 신고서까지 준비했다.

태수와 엘리스가 서명하면 공식적인 절차는 모두 끝난다.

[약속해다오……. 그래도 가족이다…….]

엘리스는 대답할 수 없었다.

어머니와 동생을 죽이고, 그녀를 짓밟은 사람을 용서할 수 없다.

태수는 엘리스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아버님 말씀을 따릅시다.]

[태수 씨.]

[때로는 죽음보다 밑바닥 삶이 더 끔찍한 법입니다.]

태수가 엘리스의 손에 깍지를 꼈다.

청혼할 때 끼워 준 다이아 반지가 깍지에 걸린다.

[내가 그렇게 만들어 주겠습니다. 못 믿겠습니까?]

[…믿어요. 당신이라면 마무리까지 확실하게 처리하겠죠.]

엘리스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좋아요. 약속할게요.]

[자네…….]

약속받고 사람은 엘리스가 아니라 태수다.

태수의 독심을 알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안심할 수 없다.

록펠러 가주는 태수에게 손을 뻗었다.

허공에서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태수가 꽉 잡아 주었다.

[적당히……. 살살 정리해다오…….]

[알겠습니다. 아버님 말씀대로 가족은 적당히 살살 처리하겠습니다.]

태수가 안심하라는 듯 록펠러 가주의 손을 침대 위에 올려 주었다.

그제야 눈에 띄게 안색이 편안해지는 가주다.

록펠러 가주가 엘리스의 손을 끌어와 태수의 손 위에 얹었다.

[결혼식 대신이다…….]

이 몸으로는 막내딸의 결혼식엔 가지 못할 것이다.

딸의 손을 잡고 걸어가 사위 손에 고이 넘겨주고 싶었다.

[잘 살아라…….]

딸의 손가락에서 반짝이는 물방울 다이아몬드 반지를 확인했다.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누가 끼워 주었는지.

[이왕이면 행복하게…….]

딸의 손등을 툭툭 두들겨 준다.

[이놈이 힘이 되어 줄 거다…….]

덤덤한 말투에 사랑이 묻어나왔다.

좀처럼 감정을 보이지 않는 록펠러 가주로서는 드문 일이었다.

[이만 나가 봐라…….]

엘리스는 굽혔던 무릎을 폈다.

엘리스의 손을 잡고 태수도 함께 나가려고 했다.

[자네는 남아 봐…….]

총괄 집사가 태수 대신 엘리스를 병실 밖으로 내보냈다.

이곳엔 장인과 사위, 둘만이 남았다.

* * *

한참이나 정적이 흘렀다.

장인과 사위만 둘이 남았으니 공기는 무겁고 칙칙하기 그지없다.

이보다 더 무거운 침묵이 또 있을까.

[크리스는 가주 재목이 아니야…….]

아들의 그릇은 아비가 안다.

크리스의 외가가 바로 영국 금융업을 기반으로 한 세계 은행이다.

크리스의 매형이 바로 주식 투자의 귀재 워렌 버프다.

[이 가문을 지키려면 돈만으로는 안 된다……. 그런데 그놈은 그걸 몰라…….]

크리스는 유전 대신 돈을 택했다.

그 결과 젊은 나이에 매우 많은 돈을 갖고 있다.

크리스의 투자 회사가 보유한 주식만 해도 엄청난 물량이다.

크리스가 돈 냄새를 유독 진하게 풍기는 이유였다.

[석유를 기반으로 힘을 갖춘 가문이거늘……. 숫자놀음에 정신이 팔려서…….]

재물을 지키려면 권력이 있어야 하거늘.

힘은 남을 휘두를 수 있는 무기에서 나온다.

록펠러 가문의 근원은 석유였다.

[그놈은 유전을 빼앗기고… 인맥을 내어 주고… 가문은 체면만 유지하겠지…….]

정확히 보았다.

전생에서 태수가 알고 있는 미래 그대로였다.

[하지만 자네는 권력을 움직일 줄 알지…….]

태수가 청일을 어떻게 집어삼키는지 지켜봤다.

절대 권력을 자랑하던 군부 독재 대통령을 어떻게 제거하는지도 안다.

군과 정보부를 틀어쥐고, 검찰과 언론까지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그렇게 태수는 일국의 대통령까지 제 입맛에 맞는 자를 골랐다.

[내 딸 반지 값이다…….]

바싹 말라 앙상한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내도록 했다.

세련된 금반지였다.

가주의 인장을 대신하는 물건이다.

[껴 봐…….]

반지는 꼭 맞았다.

당연히 미리 태수의 손가락 사이즈에 맞게 가공했기 때문이다.

[아무에게나 내어 주는 물건이 아닌 것 같습니다만.]

[어차피 줘야 할 거라면 기분 좋게 주는 게 낫다. 안 그런가……?]

단순히 속내를 떠보는 말이 아니었다.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록펠러 가문의 차기 가주는 엘리스가 될 것이라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남자가 지금 눈앞에 있다.

[비공식적인 자리에서나 통용되는 물건이야……. 함부로 도장 찍고 다니진 마라…….]

태수에게 힘을 실어 주겠다는 뜻이다.

가주 전쟁의 판을 유리하게 바꿔 보란 소리다.

‘마침 좋은 물건을 얻었군. 유용하게 써 주지.’

박정환의 라이터만 들이대도 일이 수월하게 풀리지 않았던가.

록펠러 가주의 인장이라면 깽판 한 번 거하게 칠 수 있는 물건이 아닌가.

그래서 물었다.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제가 록펠러 가문을 어찌 처리할지 짐작하고 계시잖습니까.]

그러니 가족들 목숨 건들지 말란 부탁을 했겠지.

[록펠러의 힘을 네놈 맘대로 갖다 쓰려면… 가문은 말아먹지 않을 테지…….]

똑똑

엘리스를 밖으로 모신 총괄 집사가 돌아왔다.

총괄 집사는 제일 먼저 태수의 손가락에서 가주의 반지를 확인했다.

씁쓸해하면서도 안심하는, 묘한 표정이 잠깐 드러났다 사라졌다.

[받으십시오. 가주님께서 드리라 하셨습니다.]

총괄 집사가 미리 준비해 두었던 서류를 건넨다.

록펠러 가주가 병석에 드러눕자마자 돌변한 놈들 명단이 제일 위에 올려졌다.

‘살생부로군.’

심지어 명단 아래에 그들의 치부를 빼곡하게 기록한 장부도 있다.

‘치부책까지. 시간과 노력을 확실하게 줄여 주는군. 마음에 들어.’

태수는 씩 웃었다.

[귀한 선물을 받았으니 제가 장인어른 대신 싹 박멸해 놓겠습니다.]

[가신들이다…….]

[아무렴요. 서열 정리부터 확실히 하겠습니다. 그간 몰래 처먹은 것들도 전부 토하게 만들죠.]

미국은 감방 시설도 남다르다던데.

세계적으로 악명 높은 교도소가 어디 어디 있더라.

칼잡이는 누가 좋을까.

‘미국이니까 국세청을 쥐고 흔들어 볼까?’

미국 연방 국세청(IRS).

미합중국 재무부 산하 관청으로, 미국 내 세금 징수에 관한 모든 권한을 갖고 있다.

약 9만 8천여 명의 직원을 보유하고 있으며 한 해 약 82억 예산을 쓰는 재무부 산하 최대 기관.

산하의 세무 범죄 조사국은 경찰 조직으로서 법무부, 국토 안보부, FBI, DEA, 연방 보안관들과 긴밀히 협조하여 연방 차원에서 탈세범의 검거와 체포를 담당한다.

‘미국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정부 기관으로 도둑놈들 곳간을 제대로 털어 준다.’

주정부의 방해를 거의 받지 않고 집행이 가능하다는 점도.

또한 권력자의 뒤통수를 후려갈길 화력이 충분하다는 점도.

전부 마음에 든다.

[그럼 마음 놓고 록펠러의 힘 좀 빌려 쓰겠습니다. 제 계획이 앞당겨지게 생겼군요.]

두툼한 서류 뭉치를 꺼내는 태수다.

총괄 집사가 대신 건네받고 대충 서류를 살펴본다.

그가 입을 떡 벌렸다.

[아니, 이, 이 사람이 또……!]

파라락. 휘리리릭.

록히드 게이트를 터뜨려 달라면서 서류를 받았을 때와 똑같은 반응이었다.

[대체 어쩌자고 또 이 분탕을 치겠다는 겁니까? 중국 고위 관료들을 싹 물갈이하려고요?]

그뿐만이 아니다.

[영국이랑 프랑스, 캐나다는 또 왜 건드립니까? 록히드 게이트 때 독일이랑 이탈리아 뒤집어 놓은 거로도 모자라서…….]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캐나다, 일본.

이렇게 선진국 일곱 개를 ‘주요 7개국 모임’이라는 이름으로 G7이라고 불린다.

[헉! 어쩌자고 간도 크게 소련을……!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을 해체할 계획이라고요? 이게 말이 됩니까? 세상에서 미국과 유일하게 견줄 수 있는 국가를……?]

파라라락.

서류를 넘길수록 총괄 집사는 편두통이 심해졌다.

[허어… 기존 중동 국가 중심으로 구성된 OPEC을 종속시키고, 아프리카 국가를 개발하여… 아이구, 머리야.]

탁.

뒤를 더 읽는 것조차 두렵다.

총괄 집사는 그냥 체념하고 말았다.

[록히드 게이트 때 각 나라 고위직 공무원과 정치인들을 한꺼번에 처리하셨죠. 이번에도 그러실 작정입니까?]

[그게 빠르고 간단하지 않습니까?]

[누가 효율적인 방법이라는 거 몰라서 묻겠습니까? 록히드 게이트 때야 가주님께서 발 벗고 뒤처리를 해 주셨지만…….]

뒷말은 더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나날이 쇠약해지시는 가주님껜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엘리스 아가씨가 차기 가주가 되면 이 남자가 직접 뒤처리를 도맡아 할 테니까 상관없으려나.’

태수는 록펠러 가주를 보았다.

[장인어른께서도 제가 이런 식으로 일을 처리하는 것이 못마땅하십니까?]

[천만에…….]

록펠러 가주는 크게 웃었다.

[화끈한 게 마음에 들어……. 남자라면 그 정도 수완은 부려야지…….]

엘리스의 짝으로 과할 정도다.

엘리스가 차기 록펠러 가주가 되더라도 마찬가지다.

[자네가 록히드 게이트를 터뜨린 이유는 석유 때문이었을 텐데…….]

[겸사겸사였습니다.]

[자네는 물밑에서 차기 일본 정부를 맡을 내각을 직접 구성하고 있지 않나…….]

[…알고 계셨습니까?]

의외였다.

병색이 완연하여 죽을 날만 기다리는 남자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병상 위에서 세계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내가 직접 깔아 준 깽판이 아닌가……. 그래서 한국 정부처럼 일본 정부를 뒤에서 조종할 생각인가…….]

[뒤통수 맞기 싫어서 말입니다. 또한 난 내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차라리 치워 버리지…….]

태수가 추진하는 대륙붕 석유 개발에 거슬렸기 때문이다.

박정환이 만들어 놨던 일본 루트까지 전부다 제거했던 이유기도 하다.

이제 일본 정부와의 커넥션은 오로지 태수만이 쥐고 있다.

태수의 영향력을 확실히 과시하기 위해서다.

[록히드 게이트 때 뒤흔든 나라 말이야……. 자네와 동맹 관계를 맺은 사우디 빼고는 전부 자네가 뒤에서 작업하고 있지…….]

[어렵게 만든 기회입니다. 남의 손에 그냥 쥐여 주긴 아깝지 않습니까.]

한수와 홀쭉이가 한국으로 귀국하지 못하는 이유였다.

[이번엔 중국, 소련, 영국과 프랑스, 캐나다……. 그리고 우리 록펠러가 꽉 쥐고 있는 미국까지…….]

록펠러 가주만이 유일하게 태수의 원대한 꿈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자네는 세계를 움직이는 권력자가 되려고 하는군…….]

록펠러 가주 역시 말하지 않았나.

재물을 지키려면 반드시 권력이 필요한 법이다.

태수는 태양 천하를 이룩하기 위해 한 걸음씩 전진하고 있었다.

[당연히 자네와 엘리스의 아이에겐 록펠러 성을 물려주겠지……?]

[싫습니다.]

[록펠러 가문을 이어받을 수 있는 자격이다……. 그래도 싫은가?]

태수는 씩 웃었다.

[아마도 우리 아이가 가주 자리 이어받을 즈음엔 태양 그룹 후계자가 되는 게 록펠러 가주 자리 앉는 것보단 낫지 않을까 싶은데요.]

자신만만한 선언이었다.

록펠러 가주는 크게 웃으며 기꺼워했다.

[그거야 한 번 두고 보면 알 일이지…….]

장인과 사위는 서로 마주 보며 씩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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