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산 찍고 건설 재벌-228화 (228/230)

228화 태양 천하(2)

크리스 록펠러가 입꼬리를 올렸다.

[지키지 못할 약속은 하는 것이 아니다.]

[왜 내가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것이라고 단언하죠?]

[내 뜻이 곧 록펠러의 뜻이 될 테니까. 내가 그걸 허락지 않아.]

[아직 차기 가주는 결정되지 않았어요. 그리고 저 역시 록펠러예요.]

엘리스의 눈이 당차다.

한 번도 속에 품은 야망과 기세를 겉으로 드러낸 적 없던 엘리스다.

좋은 머리, 뛰어난 안목, 굳은 의지, 날카로운 통찰력 등.

그녀는 형제들 중 가장 뛰어났음에도 머리를 숙이고 살았다.

[엘리스, 그동안 건방진 눈을 하게 되었구나. 내 어머니께서 널 그리 가르치지 않으셨는데 말이다.]

크리스가 모친을 언급하자, 엘리스가 몸을 작게 떨었다.

크리스의 모친은 영국 금융을 기반으로, 세계를 손에 쥐고 흔드는 막강한 집안 출신이다.

과거 후계 경쟁 구도에서 밀리던 현(現) 록펠러 가주는 그녀의 서포트를 받아, 형제들을 제치고 마침내 가주가 될 수 있었다.

이후 록펠러 가주가 얼마나 많은 여자들을 거느리던, 그녀는 여태껏 정부인 자리를 지키며 록펠러 가문 사람들을 좌지우지 해왔다.

다들 그녀의 위세 앞에서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꿇어라, 이 건방진 것!

크리스의 모친이 택한 방법은 크리스의 경쟁상대가 될 자들을 일찍부터 꺾어놓는 것이었다.

고작 5살이던 엘리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넌 지금 이 순간부터 3일 동안 지하실을 나올 수 없다. 음식은 물론 물 한 모금 허락하지 않겠다.

-큰어머니, 잘못했어요. 한 번만 용서해주세요. 다신 크리스 오빠에게 말대답하지 않을게요.

-닥쳐라.

짜악.

-누가 네 어미란 말이냐? 난 너 같은 천것을 낳지 않았다. 한 번만 더 어미 소리를 입에 담았다간 채찍으로 맞을 것이다.

-큰 사모님, 부디 한 번만 자비를…….

-다들 뭐하는가? 당장 이 계집년을 끌어내지 않고!

엘리스는 걸핏하면 교육을 빙자한 학대를 받곤 했다.

그렇게 15년이란 모진 시간을 견뎌내야 했다.

차기 가주를 향한 집념과 복수의 독기를 가슴에 품고 산 세월이 너무도 길다.

[엘리스, 책임지지 못할 야망을 함부로 내비치지 마라. 난 내게 대든 자를 용서하지 않는다.]

[난 반드시 록펠러의 가주가 되고 말겠어요. 무슨 수를 쓰더라도.]

[네게 달리 무슨 수가 있어서?]

크리스는 가소로웠다.

[넌 가진 게 아무 것도 없다. 후계자 싸움에 같이 참전할 외가나 형제, 친구와 동맹은 고사하고 충성을 맹세한 가신조차 없으니.]

23명의 형제자매 중에서 쟁쟁한 외가를 가진 형제자매만 7명이다.

크리스가 신경 쓰는 건 그 7명으로 족하다.

[싸움도 어느 정도 체급이 맞아야 긴장이란 것을 하지.]

[말했잖아요. 난 오빠가 절대로 강태수 씨에게 내어줄 수 없는 것을 줄 수 있어요.]

[헛소리는 이쯤하자.]

크리스가 단번에 상황을 정리해버린다.

여태 잠자코 있던 태수가 입을 열었다.

[그럼 시작합시다. 저를 포섭할 조건을 제시해주시길 바랍니다.]

[여기서? 이 사람들 앞에서? 지금 장난하나?]

청와대 만찬에 모인 정재계 유명 인사들은 물론 각국의 대사들까지 모두 아연실색하여 태수를 바라보았다.

태수는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으쓱했다.

[엘리스 영애께서 무엇을 약속하던 열 배를 치르시겠다면서요? 그거 다 뻥이셨습니까?]

[지금 경매하는 것도 아니고. 황당하군.]

[쫄리면 뒈지시던가요. 없는 시간 쪼개고 쪼개서 한국까지 전용기 타고 오신 이유가 뭡니까?]

[그야 한국의 해상 유전 개발을…….]

[바로 그겁니다. 그리고 난 그 해상 유전 개발권을 갖고 있습니다. 더 이상 다른 말이 필요합니까?]

[…필요 없지. 좋다.]

엘리스는 주먹을 꽉 쥐었다.

[조건을 제시하기 전에 먼저 물어볼 말이 있어요.]

[좋습니다.]

[크리스 오빠가 바쁜 일정을 제쳐두고 한국까지 서둘러 날아온 이유가 뭘 것 같아요?]

[당연히 차기 록펠러 가주가 되기 위해서겠죠.]

그걸 아는 사람이…….

[크리스 오빠는 태어나자마자 쿠웨이트 유전 및 유럽계 정유 회사를 외가 선물로 받았어요. 한국의 해상 유전이 없어도 돼요. 이미 차기 가주의 조건을 전부 충족했으니까요.]

록펠러 가주의 23명 자식들 중에 세 가지 조건을 전부 달성한 사람은 크리스가 유일하다.

크리스가 돈 냄새를 풍기는 이유는 셀 수 없이 많다.

[지금 내가 중요한 카드를 들고 있다는 사실은 변치 않습니다. 무려 한국까지 날아와야 할 만큼.]

[내가 차기 가주가 될 조건을 달성하지 못하도록. 오빠의 목적은 그거뿐이에요.]

[압니다.]

엘리스의 눈이 분노로 화르륵 불타올랐다.

-배신.

태수를 믿었던 만큼 그녀를 아프게 하는 단어였다.

하지만 태수를 이해한다.

그녀라도 그랬을 테니까.

[크리스 씨, 당신은 내게 뭘 약속해줄 수 있습니까?]

[한국 해상 유전을 호시탐탐 노릴 게 분명한 일본과 중국 정부를 틀어막아주지.]

[생각보다 조건이 별로군요.]

그건 이미 손 써뒀다.

일본을 발칵 뒤집어 놓은 록히드 게이트는 전초전에 불과하다.

또한 중국에선 곧 천안문사태가 일어나리란 걸 아는데, 태수가 이를 놓칠 리가 없다.

[미국에 한해 수출 관세율을 낮춰주지.]

[얼마나?]

[통상 관세율에서 5% 정도.]

[한국에서 수출하는 물품 전부. 가능합니까?]

[…그건 내가 록펠러의 가주가 되어야 가능하겠군. 지금으로서는 태양 그룹에 한해서밖에 약속할 수 없다.]

이건 구미가 당긴다.

록펠러 가주가 나서야 하는 선이 여기까지인 것을 확인했다.

‘미국 의원들이 나서서 법을 바꿔야 하는 일은 아무리 크리스라도 힘이 제한되나 보군.’

태양 그룹만 특례로 관세를 낮춰줄 경우 관계 기관을 움직일 정도는 가능하단 소리다.

이것 역시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세계의 금융을 틀어쥐고 있는 크리스의 외가에서 같이 힘을 써야지 가능한 수준이다.

‘확실히 엘리스가 제시하기 불가능한 조건들을 내걸고 있군.’

흥미롭다.

하지만 태수는 쉽게 흔들리지 않았다.

[다른 건 없습니까?]

[욕심이 많은 자군. 이건 어떤가? 자네 은행 하나 필요하지 않나?]

전 세계적으로 금산분리는 기본 원칙이다.

기업을 운영하면서 은행돈 안 빌려 쓰는 곳이 있던가.

그래서 큰 기업들은 변칙적인 방법을 사용하곤 했다.

바로 태수나 록펠러 가주처럼 말이다.

[은행이라. 몇 개나 내어주실 수 있습니까?]

[개수가 중요한가?]

[미국 은행으로 10개 본점. 가능하십니까?]

[본점을 10개나? 2개로 하지. 더는 안 돼.]

은행이라면 이미 태수도 많이 가지고 있다.

크리스의 외가와는 비교조차 힘들긴 하지만 한국에서는 절대적인 영향력은 발휘하고 있다.

무려 시중 11개 은행을 통제하고 있고, 전국 은행 연합회 회장이 장말동이니까.

[사업하는 자가 은행에도 넘어오지 않다니. 배짱이 좋은 건가, 계산이 안 되는 건가?]

[다른 건 없습니까? 이를 테면 부동산 같은 거 말입니다.]

[미국 철광석, 중국의 주석, 러시아의 희토류. 이렇게 세 종류 광산이면 되겠지.]

[광산 세 개 말입니까?]

[아니, 한 20개 쯤?]

스케일이 남다르다.

짙어지는 돈 냄새에 질식하기 딱 좋다.

‘생각보다 가진 패가 대단하시군.’

태수는 물었다.

[주식은 어떻습니까?]

[주식? 어떤 주식을 원하나?]

[록펠러 재단의 주식.]

[하하하, 그건 안 돼. 내가 미쳤다고 록펠러의 주식을 넘기겠나. 차라리 정유 회사를 몇 개 달라고 해. 그거라면 생각해보지.]

이 정도면 볼 장 다 봤다.

태수는 만족스러운 표정인데 반해, 엘리스는 얼음처럼 냉기를 풀풀 날렸다.

[크리스 오빠의 조건을 들은 소감이 어떤가요?]

[굳이 소감을 묻는다면, ‘생각보다 붙어볼 만 한데?’ 정도.]

잘못 들었나 싶었다.

엘리스는 죽었다 깨어나도 절대로 제시할 수 없는 조건이다.

태수가 한 발 먼저 손을 들었다.

[난 이미 결정을 내렸습니다.]

[내 조건도 들어보고 결정하세요. 나중에 좋은 기회 놓쳤다고 후회하지 말고.]

[크리스 씨, 제시해주신 조건은 성에 차지 않아 거절하겠습니다.]

예상과 다른 상황이었다.

엘리스는 머리가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반면 크리스의 눈썹은 꿈틀댔다.

[이렇게 나온다면 내 기분이 몹시 상하지 않겠나. 나는 이리 성심성의껏 대했는데 말이야.]

[그것참 유감스럽군요. 그럼 이만 갈까요?]

전혀 유감스럽지 않은 태수가 엘리스에게 손 내밀었다.

태수는 크리스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말했다.

[앞으로 본격적으로 경쟁해야 할 텐데, 상대의 패를 까볼 좋은 기회였잖습니까.]

[설마…….]

[몇 번이나 약속했는데, 전부 잊으셨습니까?]

당신이 차기 록펠러 가주가 되는 것을 도와주겠다고.

[당신이 내게 의리를 다하는 이상, 내가 먼저 당신을 배신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아무리 돈 냄새를 풍기는 좋은 기회가 날 유혹한다 할지라도.]

크리스가 조건을 제안할 열 때마다 짙어지는 돈 냄새를 맡았다.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의 유혹이었지만, 의리를 저버릴 생각 따윈 애초에 없었다.

[사업한다고 사람 마음까지 값 매겨 팔아서야 쓰나.]

[고마워요.]

엘리스는 태수의 손을 잡았다.

놓을 생각이 들지 않는 단단한 손이었다.

[오늘 내 손 잡는 거, 후회하지 않도록 해줄게요,]

[좋습니다. 기대해보죠.]

둘은 손을 잡은 채로 청와대 만찬장을 떠나갔다.

모든 이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채, 태수와 엘리스는 만찬장을 떠났다.

크리스가 매서운 눈으로 둘을 노려보았지만, 둘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 * *

태양 호텔 레스토랑.

과거 청일 호텔이었던 곳은 태수의 명에 따라 리모델링 공사를 완료했다.

개장을 며칠 앞둔 태양 호텔은 지금 손님 맞을 직원 교육으로 분주했다.

[아까 일이 그렇게 마음에 걸립니까?]

태수가 엘리스의 스테이크 접시를 끌어와 작은 크기로 대신 썰어준다.

그녀를 위해 와인까지 따라 그녀에게 내밀었다.

[크리스 오빠는 자비로운 사람이 아니에요.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고요.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오빠를 저버렸으니, 절대 당신을 가만히 두지 않을 거예요.]

앞으로 공격은 더 거세질 것이다.

그의 모친까지 나서서 대대적으로 보복을 감행할 테니까.

[태양 그룹은 아직 크리스 오빠를 감당할 수 없어요. 록펠러 가문은 무서운 곳이에요. 온갖 피비린내 나는 암투가 벌어지는 곳이죠.]

그녀가 음식을 통 먹지 못하는 이유였다.

[미안해요. 나 때문에 당신이 곤란해진다는 거 알아요. 그래서 나는…….]

[됐습니다. 그만하고 먹읍시다.]

태수가 엘리스의 손에 스테이크 조각을 꽂은 포크를 들려준다.

하지만 엘리스는 도로 접시에 내려놨다.

[난 어떻게 해서라도 가주가 되어야만 해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반드시.]

[그게 당신 인생을 희생할 만큼 가치 있습니까?]

[복수하고 싶어요. 허망하게 죽은 엄마와 동생의 복수를 돌려줘야만 해요.]

복수를 해봐서 안다.

복수의 끝이 아무리 허망하다고 해도, 달릴 때는 달려야 한다.

당한 것을 갚아주지 않고서는 내내 불같은 증오만 불태우게 되니까.

스스로를 살라먹는 것보다 당사자에게 지옥 불을 돌려주는 게 더 싸다.

태수는 기어이 복수를 이뤄내고서야 마음의 평안을 얻었다.

이제야 행복해질 준비를 마친 기분이 든다.

[그렇다면 해야지. 복수합시다. 내가 도와주겠습니다.]

태수가 품에서 상자를 하나 꺼내어 내밀었다.

[우리 결혼합시다.]

뚜껑을 열었더니 영롱한 빛을 내뿜는 물방울 다이아몬드 반지가 자태를 드러냈다.

청와대 만찬장에서 그녀가 꺼내려 했던 제안을 태수가 지금 대신하고 있었다.

[당신, 내 생각을 전부 꿰뚫어보고 있었군요.]

태수가 어찌 모르겠나.

궁지에 몰린 그녀에게서 무시무시한 돈 냄새가 짙어졌는데.

크리스 록펠러 이상으로 돈 냄새 풍길 일이라면 짐작하고도 남았다.

[록펠러 가문이 어떤지는 몰라도, 당신을 차기 가주로 만들 능력은 됩니다, 내가.]

엘리스는 한참이나 제 앞에 놓인 다이아몬드 반지를 보았다.

[당신의 이 결정은 전략적 선택인가요, 감정적 결정인가요?]

[내 대답에 따라 당신의 결정이 달라집니까?]

[아뇨, 그 어떤 경우에도 내 대답이 달라질 일은 없어요.]

엘리스는 벌떡 일어났다.

넵킨으로 서둘러 입가를 닦아내고 손을 내밀었다.

태수는 그녀의 손바닥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올려주었다.

[그래서 내 청혼에 대한 당신의 대답은?]

[예스.]

그녀는 다이아몬드 반지를 제 손가락에 꼈다.

맞춤 제작이라도 한 것처럼 꼭 맞았다.

[우리 나머지 이야기는 방에서 마저 하죠.]

태양 호텔 스위트룸이 첫 손님을 맞이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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