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결혼식 이틀 전(3)
한일권은 대답했다.
“진즉에 중앙 정보부에서 풀려났죠.”
한청호가 차기범에게 청탁한 일이다.
“국빈관 깡패 새끼들이 우리 일에 협조하겠다더냐?”
“협조해야죠. 아니면 지들이 어쩔 겁니까?”
한청호가 차기범에게 청탁하지 않았으면 그놈들은 취조실에서 시체로 발견돼도 할 말이 없는 놈들이 아닌가.
“목숨값을 빚졌으면 목숨으로 갚아야죠. 안 그래요?”
한청호는 코웃음 쳤다.
“깡패 새끼들 특징이 뭔지 아느냐?”
“뭔데요?”
“원한은 알아도 은혜는 모른다는 거다.”
그 바닥에 의리가 어디 있냐.
성깔만 있을 뿐이다.
“제 목숨값 갚는 놈들? 웃기지 마라. 푼돈에 한솥밥 먹던 의리를 내던지니까.”
“그래서 돈으로도 흔들었어요. 가진 것 하나 없이 맨몸으로 시작할 수는 없잖아요?”
태양 그룹 경호원들에게 모든 것을 내주게 된 후다.
중앙 정보부에 끌려갔다 나왔으니 앞날이 막막할 터다.
“배운 건 도둑질이고, 쌓은 건 원한인데 뿔뿔이 흩어지느냐, 아니면 내가 시킨 일을 하고 콩고물이라도 받아먹느냐. 놈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어요.”
국빈관을 운영하면서 원한을 오죽 샀겠나.
아마 밑바닥에서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소식이 들리자마자 원한 가진 놈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짓밟아 놓을 것이다.
“돈 없는 조직이 어디 조직인가요? 클클클.”
국빈관은 이미 중앙 정보부에 끌려갔을 때부터 끝났다.
한일권이 구제해 주지 않는 한 변하지 않을 미래다.
“국빈관 두목은 그 정도 머리는 돌아가는 놈이에요. 걱정하지 마세요.”
“하기야 그놈들은 의리는 못 믿어도 돈은 믿지. 은혜는 못 믿어도 원한은 믿어.”
한청호도 아들과 똑같이 웃었다.
“종로의 노른자라는 국빈관이야. 돌려받고 싶으면 협조해야지.”
“물론이죠. 본전치기 장사라도 감지덕지해야죠. 클클클.”
차기범이나 전두호, 둘 중 하나만 정권을 잡으면 끝이다.
태양 그룹 강태수는 모든 것을 토해 놓아야 할 것이다.
“그깟 국빈관을 원한다면 줘 버려. 그거 얻겠다고 목숨을 건다면 이쪽은 환영이다.”
“깡패 새끼들이 아주 독을 품었더라고요. 든든한 전력이 될 거예요.”
“좋아. 물량엔 장사 없지.”
마음에 든다.
다른 건 몰라도 아들이 이런 건 아주 잘한다.
흡족하다.
“입 단속하는 거 잊지 말고.”
“물론이죠. 안 그래도 단단히 일러뒀어요.”
한일권이 키득키득 웃으며 말했다.
“연장까지 제대로 챙겨서 투입하기로 했죠.”
“연장? 그건 따로 챙겨라.”
“왜요?”
“경계가 삼엄할 거야.”
전국에서 군 장성들이 몰려올 결혼식이 아닌가.
더구나 대통령까지 참석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니 사전에 경호실에서 철저하게 통제할 것이다.
‘물론 차기범이 어느 정도는 눈감아 주겠지만 괜한 소란이 일어나는 건 곤란해.’
청일 호텔에서 칼 든 깡패가 맞아 죽었다는 소란이 일면 이쪽이 곤란하다.
“우리 호텔 종업원으로 들어올 거예요. 아버지 결혼식은 청일 호텔에서 열려요.”
“주방 종업원으로 해. 부엌은 칼이 좀 많아도 괜찮을 거야.”
“뭐, 그러죠.”
그때였다.
밖이 또 소란스러워졌다.
청일 사모님의 웃음소리가 연신 들려온다.
한청호는 눈살을 찌푸렸다.
“화를 냈다, 쳐 웃다, 아주 정신줄을 놨군.”
“신경 끄세요. 어머니 저러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런데 청일 사모님의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예비 사돈, 남편은 이곳에 있으니까 얘기들 천천히 나누고 있어요. 곧 저녁을 준비할 테니까요. 호호호.”
예비 사돈이라고?
한청호와 한일권이 동시에 서재 문을 보았다.
서재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들어온다.
그를 보자마자 한청호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 이게 누구십니까?”
전두호 보안 사령관이었다.
“왜? 내가 찾아오면 곤란한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여기에 앉으시지요.”
한청호가 안내하는 자리에 앉는 전두호.
그가 모자를 벗고, 손으로 쓸어 헤어스타일을 한 번 정리한다.
그래 봐야 크게 달라지지 않지만 말이다.
“보안 사령관께서 제 집에 어쩐 일이십니까? 결혼식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요.”
“결혼식이 얼마 안 남았으니까 왔지.”
전두호는 눈살을 찌푸렸다.
차가운 눈이었다.
“사람을 물리지.”
독대하자는 말이다.
말 끝나기 무섭게 한일권이 서재를 나갔다.
* * *
서재에는 한청호와 전두호, 둘만 남았다.
전두호는 냉수를 벌컥벌컥 마셨다.
이제야 살 것 같았다.
“돈은?”
군자금이 부족하다.
“오성회 회원을 쓰려면 돈이라도 넉넉히 쥐여 줘야지.”
“안 그래도 오늘 일본으로 떠났습니다. 군자금을 듬뿍 가지고 돌아올 겁니다.”
“지금 그 말을 지켜야 할 거야.”
전두호의 눈이 사납다.
“오성회 없이는 청일의 미래도 없어. 알겠나?”
“물론이지요. 우리는 생사를 걸고 미래를 함께하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한청호가 전두호를 달랜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군자금은 틀림없이 마련해 올 겁니다.”
“그렇게 호언장담할 일이 아니야. 일본 은행이 돈을 그리 쉽게 빌려주겠나?”
“은행에서 빌리는 거 아닙니다.”
“뭐? 그럼 어디서?”
“박정환의 금고에서 빌리는 겁니다.”
“……!”
전두호의 안색이 변한다.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할까 싶은 의심이 어렸다.
“죽고 싶어 환장했군.”
“어차피 거사에 실패하면 죽는 건 매한가지 아닙니까?”
그도 그렇다.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곱다고 했습니다. 박정환의 금고를 턴 돈으로 누구를 먹일 것 같습니까?”
그제야 전두호가 의미심장하게 웃는다.
“오성회.”
“바로 그렇습니다.”
“잘 생각했다. 전쟁에 나가기 전에 군인들을 배불리 먹어야 승률이 오르는 법이지.”
“물론이지요.”
전두호의 표정이 풀어진다.
무척 흐뭇한 표정이다.
“기필코 승리할 것이야.”
“당연히 승리해야죠.”
승리의 전리품이 너무나 달콤하다.
바로 이 나라 최고 통수권자의 자리!
전두호는 턱을 쓸었다.
“내일 군대에서 총기를 반출해 올 거야.”
내일이라면 결혼식 전날이다.
“물론 불법이지.”
총기 반출이 합법일 리가 있나.
“훗날 밝혀진다면 큰일이 날 일입니다.”
“어차피 실패한다면 내일은 없다.”
무려 박정환을 노린 일이 아니던가.
이 나라 최고 통치권자 목숨을 노린 대가가 가벼울 리가 없다.
“우리에게 결과는 두 가지밖에 없다.”
모 아니면 도.
대박 아니면 쪽박.
승리 아니면 패배.
“내 모든 것을 걸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저 역시 그렇습니다.”
전두호와 한청호는 사정이 조금 다르다.
배수진을 친 전두호에 비해 한청호는 여유가 있다.
‘차기범이란 보험은 들어 뒀지.’
하지만 속이 타는 건 매한가지다.
한청호도 냉수를 벌컥벌컥 마셨다.
“청일 호텔은 피바다가 될 겁니다.”
“그래.”
흘리는 피 없이 쟁취할 수 없는 권력은 없다.
그게 아군의 피든, 적군의 피든.
그건 각오하는 바다.
“결혼식 전에 대통령 경호실과 중앙 정보부에서 청일 호텔을 대대적으로 수색하겠지.”
군 장성들과 대통령이 모이는 자리에 수색은 당연하다.
삼엄한 경계는 물론이고, 무기 소지를 확인함은 필수적인 일이다.
“반출한 총기를 숨길 곳은?”
“이미 청일 호텔을 지을 때 마땅한 곳을 마련해 놨습니다.”
한청호가 청일 호텔 설계 도면을 내놓는다.
몇 군데 붉은색으로 표시가 되어 있다.
“그래서 결혼식을 청일 호텔에서 열기로 한 겁니다.”
“준비가 치밀하군.”
“이 정도는 해야지 거사의 승률을 높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한청호가 표시된 곳을 짚으며 설명했다.
“호텔 룸 벽을 위장해서 무기고를 만들어 놨지요. 그곳에 숨겨 놓으면 됩니다.”
“좋아.”
“이곳은 바닥입니다. 카펫을 들러 보면 가운데 바닥이 조금 다른 걸 알 수 있지요.”
“마음에 든다.”
전두호가 고개를 끄덕인다.
“청일 호텔에서는 오성회 회원 70명이 동원될 예정이다.”
“고작 70명…….”
“더는 무리야. 나머지는 군에 남아 사령관들이 없는 군대를 우선 장악해야지. 그래야 후일을 도모할 것 아닌가.”
전두호는 박정환과 차기범, 그리고 군 장성들을 죽인 이후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군 장성들의 빈자리를 다른 놈들이 채우면 곤란해. 군을 오성회가 차지해야지.”
군 세력이 들고 일어나면 쿠데타를 성공해도 골치 아프다.
“나는 확실한 승리를 원한다.”
오성회를 군에 대거 남겨 둔 이유이자 전두호의 심복 중의 심복만 골라 거사에 참여하는 이유였다.
‘박정환과 군 장성들을 잡는데 총력전을 기울여도 될까 말까 한데. 전두호가 너무 그릇이 큰 것인가, 너무 안일하게 생각하는 것인가.’
하지만 별수 있나.
전두호의 멱살을 잡아다 협박해 전력을 보강하라 윽박지를 수도 없는 일인 것을.
마지못해 한청호가 고개를 끄덕였지만 걱정을 숨길 수는 없었다.
“왜 그리 똥 씹은 표정이냐?”
“아닙니다.”
“불만이 있으면 허심탄회하게 말해. 짜증 나니까.”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장군의 말씀처럼 확실한 승리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수백 명의 하객을 고작 70명으로 제압하기엔…….”
전두호가 자신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군 장성들이고 하객들이고 전부 무기 소지를 못해. 군 총기를 반입한 우리 오성회 회원 70명 전력이 가벼워 보이나?”
무기 소지라는 장비의 절대적 우위 때문이다.
“총 든 군인들을 민간인들이 어찌 이기겠나?”
그뿐만이 아니다.
“은퇴를 앞둔 퇴물들을 한창때인 오성회 장정들이 제압하지 못할 것 같나?”
전두호의 머릿속에선 이미 계산이 끝났다.
“70명이 몇 그룹으로 나뉘어 군 장성들을 잡고, 박정환과 차기범을 끌어낼 것이다. 그런 줄 알고 있으면 돼. 괜한 걱정하지 말고.”
전두호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저녁 안 드시고 가십니까?”
“그 전에 청일 호텔을 둘러보고 싶다.”
전투가 벌어질 전장을 확인하는 건 장군들의 기본 소양이 아니던가.
“무기고를 확보하고, 동선을 짜야지. 현장 점검은 필수다.”
“앞장서겠습니다.”
그런 이유라면 저녁이고 나발이고, 무조건 앞장서야지.
* * *
종로의 국빈관.
내내 쇠사슬로 막아 뒀던 문이 오랜만에 열렸다.
국빈관 지하실은 사람 잡기 딱 좋게 만들어져 있다.
태수가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우리 초면인가?”
팔짱을 한 채 삐딱하게 서 있던 남자가 고개를 모로 들었다.
국빈관 두목이었다.
“아마도. 저쪽은 구면인 것…….”
태수 뒤에 서 있던 김광록이 잇몸을 드러내며 웃었다.
“거 말이 상당히 짧네.”
김광록이 한 발 앞으로 내딛기 무섭게 국빈관 두목이 크게 복창했다.
“초면입니다. 제 기억이 틀렸다면 시정하겠습니다!”
조건 반사적으로 벌써 땀이 줄줄 흘렀다.
김광록에 어떻게 당했는지 생각이 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다.
“듣자 하니 깡다구가 좋다면서?”
“어, 내가 보증한다. 저 새끼 깡다구 좀 있다.”
김광록이 보증하자 국빈관 두목이 치를 떨었다.
그 깡다구 때문에 복날에 개 맞듯이 처맞았다.
아직도 밤마다 삭신이 쑤신다.
그때 깔끔하게 부서진 뼈는 멀쩡하게 잘 붙었는데도.
“깡다구 좋게 개길 생각이라면…….”
“저 깡다구 버린 지 오랩니다. 위아래 모르고 겁 없이 발휘되는 깡다구는 목숨과 정신 건강에 매우 좋지 않다는 교훈을 잘 배웠습니다.”
김광록이 잇몸을 드러내며 웃었다.
“중앙 정보부가 좋긴 좋아. 정신 교육이 제대로 됐는데?”
중앙 정보부가 아니라 댁이…….
김광록이 머리통만한 주먹을 들어 올렸다.
“교육 필요하면 제대로 해 주려고 기대했는데.”
“히익!”
국빈관 두목이 질겁했다.
태수가 말했다.
“앉아서 얘기하지. 언제까지 내가 위를 쳐다봐야 하나?”
김광록이 눈을 부라렸다.
“눈높이 교육 좀 해 주랴?”
“눈높이 조절, 제가 아주 잘할 자신 있습니다!”
국빈관 두목은 얌전히 앉았다.
두 손과 두 발을 모은 매우 공손한 자세였다.
대화를 나눌 준비가 되자 태수가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