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산 찍고 건설 재벌-162화 (162/230)

162화 결혼식 이틀 전(2)

“각하 대신 욕을 뒤집어쓸 제물은 언제나 필요할 테니까요.”

“음?”

김재국이 고개를 갸웃댄다.

앞뒤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각하 대신 차기범이 욕을 왜 뒤집어쓰나? 그놈이 지금 벌이고 있는 짓 때문에 각하께서 욕을 먹고 있는데.”

“차기범이 날뛰면 날뛸수록, 만행이 두드러지면 두드러질수록 민심은 차기범에 주목합니다. 천하의 나쁜 놈이 될수록 좋습니다.”

태수는 손으로 목을 그었다.

“각하께선 이것 한 가지만 하시면 됩니다.”

“아……!”

김재국이 작게 감탄했다.

“탐관오리 차기범을 국민들에게 내어 주고, 각하께선 나라의 어지러움을 바로잡은 영웅이 되길 바라신다는 건가.”

“국민들에게 원성을 산 과거의 잘못까지 전부 차기범이 떠안고 처형될지도 모르죠.”

앞으로 나올 신문과 방송 제목까지 눈에 선하다.

<차기범, 여태 이런 만행을 저질렀다!>

<대통령, 읍참마속의 결단을 내리다!>

아마 그렇게 발표될 것이다.

“이번 일로 차기범을 지지하면서 착복했던 배신자들을 숙청하고, 각하의 힘을 다시 한번 각인시키실 생각이었을 겁니다.”

박정환을 잘 아는 김재국이 아닌가.

과연 그렇구나, 하고 수긍했다.

“이제 보니 각하께서 일부러 차기범이 날뛰는 것을 모른 체하고 계셨군.”

그렇지 않고서야 박정환이 저리 잠잠할 수 있겠나.

‘이미 오래전부터 지라시로 이를 넌지시 알려 줬다. 눈치채지 못할 박정환이 아니지.’

지라시 애독자로 알려진 박정환이다.

모든 코너를 꼼꼼히 읽는다고 들었다.

더구나 그가 가장 유심하게 살펴 읽는 코너는 소설 음모론.

한청호와 영부인을 주제로 쓴 이야기가 아닌가.

‘차기범은 박정환의 눈과 귀를 가렸다고 생각하지만 박정환은 그렇게까지 바보가 아니야.’

박정환은 알아야 될 사실을 이미 대부분 알고 있을 터다.

안소정이 청와대에 몰래 숨어 놓은 정보원을 통해 이미 파악한 사실이다.

‘박정환은 차기범이 날뛰는 것을 보다가 한꺼번에 제압할 생각이야. 차기범에 동조해 박정환에게 의구심을 품었던 자들까지 한 번에.’

사냥할 기회를 노리고 있는 줄도 모르고 차기범은 의기양양해하고 있다.

그러니 점점 권력 과시 수위가 높아지는 것이고.

“지금 각하 걱정할 때가 아닐 텐데요.”

“중앙 정보부 역시 차기범 때문에 난리가 아니긴 하지.”

통탄할 일이다.

“이러다간 중앙 정보부가 차기범 사조직으로 탈바꿈할지도 모른다.”

김재국의 우려는 타당했다.

실제로 중앙 정보부와 수도 경비 사령부는 오성회 대신 차기범 사람들로 채워지고 있었다.

“받으십시오.”

태수가 품에서 종이를 하나 꺼낸다.

“이건 뭔가?”

“차기범이 꽂아 놓은 사람들 명단입니다.”

한청호가 했던 짓을 태수라고 못할까.

김재국은 혀를 내 둘렀다.

“다른 곳도 아니고 중앙 정보부 요원들의 명단이라고? 우리 중에 숨어 들어간 간자들을 잡았다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명실상부 나라의 최고 정보 기관인 중앙 정보부가 아닌가.

그런데 태수는 지금 중앙 정보부 내의 첩자 색출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믿을 수 없는 정보력이 아닌가.

“제가 한 게 아닙니다.”

안소정이 한 일이다.

하지만 태수는 시치미를 떼었다.

“중앙 정보부 일은 중앙 정보부 요원들이 제일 잘 아는 법이죠.”

“그렇군.”

중앙 정보부에 들어오는 첩자를 색출한 요원이 태수를 통해 윗선에 알렸다는 뜻이다.

이제야 순순히 납득하는 김재국이다.

그가 품에 종이를 넣으며 말했다.

“이 빚은 잊지 않지.”

“말 나온 김에 그 빚, 지금 갚으셨으면 좋겠습니다.”

“…….”

이렇게 빨리?

“영애에 관해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자네가 영애에게 부탁할 일이 뭐가 있나? 혹시…….”

김재국의 눈이 가늘어지기 전에 태수가 선수 쳤다.

“아무래도 영부인의 유품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사랑의 밀어를 전해 달라는 부탁일 줄 알았는데.”

“어림도 없습니다.”

어디 엮을 여자가 없어서 박경혜와 엮나.

“영부인의 유품이라……. 자네도 그걸 노리고 있었나?”

“오해하지 마십시오. 저는 영애께서 그것을 되찾아 오길 바라는 겁니다. 제게 그것을 내놓길 바라는 게 아니라.”

“영애의 물건을 노리지 않는다는 말이군. 그런데 굳이 찾아오길 바라는 이유가 뭔가?”

“그건 아마도 대통령 각하와 깊이 연관된 물건일 겁니다.”

“뭐?”

김재국이 눈을 크게 떴다.

“한청호가 최태문까지 붙여 가며 끈질기게 노렸던 물건입니다. 한청호는 왜 그것을 노렸을까요?”

“으음.”

김재국이 생각에 잠긴다.

마침내 김재국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설마. 각하와 연관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각하를 제대로 쥐고 흔들 수 있는 물건이 틀림없습니다.”

김재국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면 한청호가 저리 기를 쓰면서 달려들진 않을 터다.

“그래서 그 물건이 필요합니다.”

김재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영부인의 부친께서 남기신 유품이라 들었네. 영부인께서 일본 비밀 금고에 넣어 애지중지 보관한 것을 보면…….”

“분명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을 겁니다.”

“그걸 보면 각하께서 결단을 내리실 거란 소리지?”

마지막 쐐기다.

“차기범의 만행을 봐주는 것도 이쯤 하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국민들의 고통이 너무 큽니다.”

차기범에 국민을 들먹이니 김재국으로서는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아주 좋은 생각일세. 각하께서 칼을 뽑으시면 차기범 따위는 꼼짝도 못할 거야.”

김재국이 벌떡 일어섰다.

어찌나 서둘렀는지 손에 들고 있던 뜨거운 커피가 넘쳐 옷을 적실 정도였다.

그럼에도 김재국의 관심은 온통 태수에게 향했다.

“영애를 설득해 함께 일본으로 가겠네.”

태수도 일어나 김재국과 마주했다.

“또 하나.”

태수의 말에 김재국이 집중한다.

“중앙 정보부 요원 몇 명을 쓰고 싶습니다.”

“중앙 정보부 요원을? 태양 그룹 경호원들을 부리지 않고서.”

태양 그룹 경호원의 실력은 정평이 나 있다.

김광록이 아주 제대로 뽑아 와 훈련을 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력이 필요한 작전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첩보, 혹은 정보 수집의 스페셜리스트가 필요합니다.”

“그거라면 우리 요원들을 따를 자는 없지.”

중앙 정보부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김재국이 아닌가.

“한청호의 행적을 놓치지 않고 추적, 그가 하는 일을 낱낱이 캐내어 확실한 증거를 가져올 수 있는 실력자로.”

그 정도라면 안소정의 정보 상인들이 더 잘할 수 있다.

하지만 태수가 굳이 중앙 정보부 요원을 요청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정보의 출처와 수집인의 신원이 확실해야지. 중앙 정보부라면 박정환이 납득할 것이다.’

바로 박정환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좋아. 그거라면 별로 어려운 부탁도 아니군. 적임자가 있어.”

“보나 마나 오늘 중으로 한청호가 보낸 사람이 일본에 다녀올 겁니다.”

바로 이틀 후면 결혼식이 열린다.

자금이 부족한 한청호는 박정환의 비밀 금고를 털어야 오성회를 동원할 군자금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젠 박정환의 눈치를 보지 않고 일을 추진할 거야. 안 그런가, 한청호?’

그동안 박정환의 눈치를 보느라 악착같이 버티던 한청호다.

영부인의 재산을 써 버리면 발뺌할 길이 없으니까.

하지만 지금 돈을 지불하지 못하면 군사를 움직일 수 없다.

‘그걸 꺼내 쓰는 순간 당신은 외통수에 걸릴 거야.’

김재국이 물었다.

“중앙 정보부 요원을 어디로 보낼까?”

“공항에.”

아마도 박 비서일 것이다.

* * *

중앙 정보부 주차장에서 차에 오르는 태수.

김광록이 운전석에 앉으며 물었다.

“어디로 갈까?”

“종로.”

김광록이 차를 출발시켰다.

그 뒤로 태양 그룹 경호원 팀이 탄 차가 뒤따랐다.

* * *

한청호의 집.

결혼식 준비가 한창인 그곳은 정신없이 바빴다.

청일의 사모님이 가정부들을 모아 놓고 신경질을 낸다.

“먼지 좀 봐. 창틀까지 꼼꼼히 닦아. 집에 귀한 손님이 오시는 거 몰라?”

“죄송합니다, 사모님. 제대로 닦아 놓겠습니다.”

“음식 준비는?”

“아직…….”

“아직도 안 됐어? 당장 저녁에 손님이 들이닥칠 텐데 빨리 서두르지 못해?”

“금방 됩니다.”

“문제라도 생기면 이번 달 월급 없을 거라 각오해.”

“사, 사모님!”

한청호의 딸이 2층 계단에서 소리쳤다.

“엄마! 나 드레스 좀!”

“드레스가 왜?”

“나 그새 살쪘나 봐. 지퍼가 안 잠겨.”

“뭐? 그러니까 엄마가 작작 좀 먹으라고 했지? 이걸 어째?”

“아, 짜증 나!”

한청호 딸이 신경질이 나서 웨딩드레스를 집어 던졌다.

2층 계단에서 떨어진 웨딩드레스를 사모님이 재빨리 주웠다.

“짜증 난다고 이걸 던지면 어떡해? 이게 얼마짜린데!”

“몰라! 나 결혼 안 해!”

“웨딩드레스 작다고 결혼 안 한다는 애가 어디 있어!”

“나 그거 입고 결혼식장 못 들어가! 지퍼가 안 잠긴단 말이야!”

사모님이 서둘러 2층으로 올라간다.

2층에서 옥신각신 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집으로 들어오던 한청호가 이마를 짚었다.

“집안 꼴 참 잘 돌아간다. 철딱서니 없기는. 쯧쯧.”

한청호가 서재 문을 쾅 닫았다.

“지금 이쪽은 목숨을 걸었는데 고작 저딴 일로 수선을 피워 대니.”

바로 이틀 후면 결혼식이다.

한청호 뒤로 한일권이 따라 들어왔다.

한청호가 의자에 앉자마자 입을 열었다.

“청일 호텔 단장은?”

“오늘 내로 내부 공사가 끝나요. 아직 내부 청소가…….”

“당장 이틀 후가 결혼식이야!”

“오늘 내로 쓰레기 전부 치우고 내부 청소를 끝내 놓으라고 엄포 놨어요. 왜 이리 성질이 급하실까.”

마음에 안 든다.

“독촉장은?”

“5월 30일 금요일까지. 결혼식 다음 주로 미뤄놨죠.”

“어떻게?”

“아시면서.”

저 의미심장한 한일권의 미소.

한청호는 한숨을 쉬었다.

“협박했느냐?”

“당연하죠.”

“무엇으로? 차기범이 찍어 누르는데 잘도 기한을 연기했구나.”

은행장 중에 차기범 눈치 안 보는 자가 있었나?

“가족 목숨 걸린 일인데, 지들이 어쩔 겁니까?”

“원한을 샀겠군.”

어찌 이리 생각이 짧을까.

한청호는 한일권이 못마땅했다.

“다른 수 있어요? 아니면 그냥 청일 건설 부도내요?”

방법이 없기는 한청호도 마찬가지다.

지금 돈 나올 구석이 없다.

“일본 가신다면서요? 안 가세요?”

“벌써 박 비서 보냈어. 오늘 중으로 돌아올 거야.”

지난번에 한청호가 옮겨 놓은 박정환의 비밀 금고.

그곳을 채워 넣은 건 영부인의 재산이다.

박 비서더러 챙겨 오라고 보내 놨다.

“그거라도 가져와서 숨통을 틔워야지.”

“아버지도 참. 딴 주머니도 있으면서 미련하게 오래도 버텼습니다.”

“그건 최후의 최후까지도 건드릴 생각이 없었어!”

박정환이 죽기 전까지는.

그건 한청호의 약점이 될 것이다.

“그걸 털어 썼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박정환이 청일을 그냥 두고 볼 것 같으냐?”

“그럼 군자금은 어쩌시게요? 돈도 안 떨어지는 일에 오성회 놈들이 움직인대요?”

“그래서 일본에 박 비서 보냈다지 않느냐! 시끄럽다!”

한청호의 호통에 한일권이 그제야 입을 다문다.

‘괜찮아. 거사만 끝나면 그깟 독촉장쯤이야.’

거사만 끝나면!

모든 게 해결될 것이다.

‘박정환을 끌어내면 차기범이 뒤는 책임진다고 약속했다.’

차기범이 자금 압박을 풀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겠나.

마음 뒤집지 말라고 청일에 경고하는 것이다.

한청호는 한일권을 돌아봤다.

“국빈관은?”

한청호의 또 다른 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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