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 세 가지 용건(2)
“제 뒤를 부탁드립니다.”
태수가 비장하게 말했다.
그러자 장말동과 안정우의 웃음이 거짓말처럼 뚝 멈추었다.
“그게 무슨 소리지?”
“가족들이 휘말리지 않도록 외국으로 빼돌릴 생각입니다. 흔적을 지워 주시길 바랍니다.”
안정우에겐 태수의 가족을 보호해 줄 힘이 있고, 밀항시켜 줄 루트가 있다.
또한 흔적을 없애 줄 수완도 있고, 음지에서 나오지 않았기에 관심에서 벗어나 있다.
‘결혼식의 깽판 스케일이 보통이 아니라서 뒤를 걱정할 수밖에 없군.’
안정우가 물었다.
“자네가 직접 하면 될 텐데?”
“그럴 수 없을 것 같기에 드리는 부탁입니다.”
재수 없이 휘말리면 몸을 빼기 어려울지 모른다.
태수의 뒤를 파긴 쉬워도, 안정우의 뒤를 파긴 어려울 것이다.
“대체 무슨 일을 꾸미려는 건가?”
안정우가 태수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날 동맹이라고, 동지라고 생각한다면 가족을 맡길 만큼 믿는다면 자네가 위험을 무릅쓰는 이유 정도는 들을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데.”
태수는 잠시 망설였다.
이윽고 입을 열었다.
“전두호와 한청호 집안의 결혼식에서 일을 벌일 생각입니다.”
“뭐?”
“전두호와 박정환, 그리고 한청호까지. 전부 휘말린 개판, 깽판, 난장판을 한판 그려 볼 생각입니다.”
태수의 말에 안정우의 안색이 변한다.
“자네, 지금 제정신인가?”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아닌가.
“대체 어찌할 생각인가? 한청호의 딸이라도 데리고 도망갈 텐가?”
“설마요.”
한청호의 딸은 트럭으로 줘도 싫습니다!
태수는 쓴웃음을 지었다.
“저와 한청호는 불구대천의 원수입니다. 한청호와 사돈으로 엮인 전두호가 정권을 틀어쥐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전두호는 자기 사람을 편파적으로 밀어주는 자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오성회가 이렇게까지 커질 수 있겠나.
다른 사람은 몰라도 태수는 안다.
전생에서 전두호가 어떤 짓을 했고, 어떻게 지인들을 싸고돌았는지.
‘장인어른의 땅을 비싼 값에 사들이라는 제안을 거절했다는 이유만으로도 재벌 그룹을 조진 놈이 전두호입니다. 한청호가 전두호의 사돈이 되면…….’
한청호의 특기가 정치 권력을 잘 쓰는 거다.
안 그래도 한청호는 사업이 아닌, 뇌물과 로비로 재벌이 되었다고 평가받는 자다.
전두호와 한청호가 손을 잡으면 청일이 얼마나 혜택을 받을지 안 봐도 뻔하다.
‘그에 반해 전두호가 본보기를 보여 주겠다고 낙인찍은 태양 그룹의 앞날은 깜깜하지.’
태수가 위험을 불사하는 이유다.
“결혼을 파투 내는 데엔 다른 방법도 있지 않나. 이를테면 바람이라든가, 새로운 여자라든가.”
“이해관계로 맺어진 정략결혼을 파투 내는 건 쉽지 않습니다. 전두호의 권력과 한청호의 돈. 둘은 동맹을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거기에 박정환의 총애를 받는 두 집안이 묶이다니.
태수로서는 막강한 적이 뭉치기 전에 흩어 놔야 할 필요가 생겼다.
“저는 전두호 동생에게 내어 줄 여자가 없고, 전두호 역시 저보다 한청호처럼 거물을 원할 겁니다.”
한청호의 청일 그룹은 지금 재계 서열 13위이다.
그에 반해 태수의 태양 그룹은 재계 서열이 고작 200위 근처다.
“그럼 어떤 방법으로 결혼을 파투 낼 생각인가?”
“권력 싸움의 난장판으로 만들 생각입니다.”
“음?”
“이해관계로 합의한 사이를 갈라놓는 가장 좋은 방법이 뭐겠습니까?”
태수는 씩 웃었다.
“이해관계 자체의 판을 바꾸는 겁니다.”
“어떻게?”
“박정환, 전두호, 육군 참모 총장 이세후, 그리고 차기범까지. 그들 사이의 권력 관계를 이용해야죠. 거기에 한청호도 빠질 수 없죠.”
“박정환과 전두호, 이세후와 차기범은 미묘한 권력 관계를 가지고 있지. 치정극이 따로 없을 정도로 이해관계가 복잡해.”
“압니다. 그래서 미리 조금 손을 써 두었습니다.”
태수가 보낸 장성들을 차기범은 아주 흔쾌히 팔 벌려 환영했을 것이다.
안정우는 태수의 계획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알 것 같았다.
“자네, 무모한 일을 벌이려고 하는군. 너무 위험해.”
정치, 군대, 재벌에서 다들 한가락 하는 사람들이다.
아니, 정점에 선 자들까지 끼어든 판이다.
게다가 그들 사이의 권력 관계를 흔들 생각이라니.
“계획된 위험은 무모함과 다릅니다. 이 정도 위험은 감수해야 합니다.”
“그만두게. 굳이 자네가 일부러 위험을 감수할 이유가 없어.”
안정우는 고개를 저었다.
“정치 권력 싸움은 그놈들에게 맡겨. 우리는 우리의 싸움을 하면 된다. 자네는 사업가지 정치가나 군인이 아니잖나.”
왜 아니겠나.
태수를 괴롭히는 일이 바로 그런 점이다.
“저도 그러고 싶습니다.”
이게 문제다.
“그런데 상대는 권력을 끌어와서 저를 억누르려고 합니다.”
한청호의 특기가 정치 권력을 등에 업고, 상대의 사업을 박살 내는 거다.
“대통령 말 한마디를 거스르면 기업은 하루아침에 무너집니다. 제가 아무리 사업을 잘한다고 해도, 정치권과 얽히지 않으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습니다.”
“으음.”
“대운 건설의 김우진이 한청호의 수작질에 도산하고 해외로 도피했습니다. 태양 그룹 역시 같은 방법에 당할 뻔했죠.”
박정환을 들쑤셔 은행을 틀어막은 일이다.
또한 대뜸 10억이나 상납금을 요구해서 부도 직전까지 몰렸다.
그때 안정우의 10억과 태양 그룹의 주식을 바꿔서 겨우 벗어났다.
“한청호가 권력으로 절 찍어 죽이겠다고 하는데, 한청호의 무기를 알면서도 방비하지 못하면 결국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잖습니까.”
태수가 주먹을 꽉 쥐었다.
“한청호가 짜 놓은 판에 휘말려 위기를 넘겨 봐야 본전입니다. 애초에 저를 상대로 칼을 들이밀지 못하게 만들려면 보다 근원적인 해결책이 필요합니다.”
“으음.”
“한청호의 제일 큰 무기를 빼앗아야죠. 바로 절대 권력자와의 끈.”
태수가 안정우를 똑바로 보았다.
“제 것을 지키고, 상대의 공격을 막아 내고. 거기에 재벌끼리의 사업으로 제대로 붙기 위해서 전 새로운 판을 깔려고 합니다.”
안정우 역시 태수를 똑바로 보고 있었다.
“자네의 이번 싸움이 마지막 정치 싸움이길 바라지.”
“저 역시 그리되길 바랍니다.”
안정우가 태수의 등을 토닥인다.
그가 담담히 말한다.
“나와 술 한 잔 같이하지.”
태수가 안정우를 바라본다.
안정우는 인자하게 웃고 있었다.
“날 찾아온 용건은 다 끝났으니 숨 좀 돌리자고.”
아직 대답을 듣지 못했다.
“잠시 동맹이고, 동지고, 이해득실까지 전부 버리고, 인간 대 인간으로 술 한 잔 같이하지.”
장말동이 재빨리 몸을 일으킨다.
“술상 들여오라 이르겠습니다.”
안정우가 태수를 돌아보며 말한다.
“은행에서 술을 마실 순 없지. 우리 집으로 가는 게 어떤가.”
“좋습니다.”
명동 장수 은행과 명동 장말동의 집은 고작 걸어서 10분 거리도 안 된다.
안정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자네와 술 한잔하는 건 처음이군. 금산의 장 회장과는 가끔 한잔한다지?”
“두 번 마셨습니다.”
처음 동맹이 결성되었을 때, 라흐만이 와서 주베일 산업항 공동 입찰을 포기했을 때.
“장 회장님이 술을 너무 잘 마셔서요.”
곤욕이 따로 없다.
상대하던 태수가 폭음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나도 술이라면 조금 해.”
두려운 소리였다.
* * *
명동 장말동의 집.
장말동을 주로 만났던 접객실이며 넓은 방에 주안상이 차려졌다.
한복을 입은 여자가 장지문 너머에서 가야금과 거문고를 탄다.
‘조선 시대 기생집 같군.’
태수는 덤덤하게 말했다.
“술 한잔하신다면서 진수성찬을 차려 놓으셨습니다.”
“귀한 손님과 함께하는 자리니까.”
상다리가 부러질 것 같다.
전주 한정식집도 이처럼 풍성하게 차려진다.
“자네가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이걸 고작 30분 만에 해냈다는 게 더 놀랍습니다.”
태수와 안정우가 장수 은행에서 이 집으로 이동하는 사이.
잠시 정원을 산책하는 사이.
송진구에게 사우디의 상황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사이.
그 짧은 사이에 이리 풍성한 상을 차려 놓은 것이다.
장말동이 슬쩍 끼어들었다.
“우리 댁 아가씨께선 제법 요리를 하네. 얼굴 예쁜 여자는 3개월, 착한 여자는 3년, 요리 잘하는 여자는 30년, 현명한 여자는 3대를 행복하게 한다지? 우리 아가씨…….”
“잘 먹겠습니다.”
태수가 단박에 말을 자른다.
장말동은 어째 틈만 나면 은근슬쩍 결혼을 권한다.
안정우가 호리병에 담긴 술병을 들었다.
“한 잔 받지.”
“감사합니다.”
생각보다 꽤 독한 술이었다.
대충 잡아도 도수 40도 이상이다.
“군포의 옥로주네. 술이 향기롭고 숙취가 없어.”
문경의 호산춘, 영주의 소백산 오정주, 봉화의 봉화선주, 경주의 경주 교동 법주, 함양의 지리산 국화주, 해남의 진양주, 전주의 이강주와 금산의 인삼주까지.
한참이나 주거니 받거니 술을 마셨다.
“자네도 제법 마시는군.”
“…….”
머리가 핑 돌았다.
술자리에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일 수 없어 애써 몸을 바르게 했다.
겉은 멀쩡해 보이나, 눈앞은 이미 어지러웠다.
안정우가 은근하게 물었다.
“솔직히 말해 보게. 자네는 어째서 전두호가 정권을 틀어쥘 것임을 확신하지?”
일부러 태수를 취하게 한 이유였다.
취중진담이라 했다.
더구나 태수는 이미 찾아온 용건을 모두 끝내고, 마음이 풀어져 있었다.
태수가 평소와 다르게 조금 늘어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할 뿐, 확신하진 못하고 있습니다.”
미래가 바뀌었다.
그래서 섣불리 전두호가 12.12사태를 일으킬 것이라고 확언할 수는 없다.
“박정환, 이세후, 전두호는 미묘한 견제 관계를 가집니다.”
“전두호가 사조직을 운영할 수 있는 건 육군 참모 총장을 견제한다는 목적이 있기 때문이야.”
“이세후가 전두호를 쳐내면 박정환이 이세후의 반역을 의심할 테죠.”
“그게 아니라면 진즉에 오성회는 해산됐지.”
안정우가 태수에게 다시 술을 먹이며 물었다.
“박정환이 전두호를 제거하는 건 어떤가?”
“박정환이 무너지지 않는다면 그렇게 될 겁니다. 사냥을 끝낸 사냥개는 솥에서 삶아지기 마련이니까요.”
태수는 다시 한입에 털어 넣은 술잔을 내려놓았다.
“육군 참모 총장이 되기 전에 박정환이 자신을 제거할 것임을 뻔히 아는데, 전두호가 가만히 있겠습니까? 반드시 그 전에 손을 쓸 겁니다.”
전두호의 쓰임은 육군 총장을 견제하는 용도다.
전두호가 육군 총장이 되면 언제 반란이 일어날까 두려워해야 하는 건 박정환이 될 것이다.
안정우의 생각이 깊어진다.
“만일 전두호가 정권을 잡게 되면 이 나라는 어찌 되겠나?”
“정통성이 없으니 힘으로 눌러야죠. 전두호는 학살을 벌일 겁니다.”
광주 5.18 학살은 그렇게 벌어졌다.
정확한 통계는 나오지 않았지만 최소 5천 명 이상이 죽거나 다쳤다.
그보다 훨씬 많은 수의 유가족들이 고통을 겪고 있다.
“반발하는 국민들의 입을 틀어막고, 박정환의 세력을 쓸어버리기 위해 발칵 뒤집을 겁니다.”
안정우의 눈이 깊게 가라앉는다.
“전두호의 반란이 제압된다면 어떻게 될까?”
“박정환의 탄압이 지금보다 극심해질 겁니다. 그 누구도 자신에게 반기를 들지 못하도록 모든 세력을 말살하려 하겠죠.”
“국민들의 피해만 커지겠군.”
안정우의 표정이 더욱 심각해진다.
“최근에 전두호가 오성회 신입 회원을 받아들이느라 혈안이 되어 있어.”
김광록은 오성회 가입을 거부하다가 눈 밖에 나서 군복을 벗었다.
“게다가 최근 박정환 몰래 재벌들을 들쑤시며 엄청난 군자금을 모으고 있지.”
“제게도 10억을 요구하더군요.”
“이제 이해가 가. 자네가 왜 결혼식을 전쟁터로 삼았는지.”
안정우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는다.
“전국에서 군 장성들이 모여들고, 대통령까지 한자리에 모이는 자리. 반란을 꾀하기엔 최적의 기회구나.”
안정우는 독한 술을 벌컥벌컥 마셨다.
탁 소리가 나도록 상 위에 올려놓는다.
“자네가 그리고 있는 거사 말이야. 가장 좋은 결과는 어떤 건가?”
“이번 기회에 친일 군부 독재를 완전히 끊어 내는 거죠.”
“어떻게?”
“상잔(相殘). 함께 괴멸해 버리는 게 베스트죠.”
안정우가 씩 웃었다.
“그거 아주 마음에 드는 구도로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