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세 가지 용건(1)
TBS 동인 방송국.
방송국 이사 이건후는 무척 바빠졌다.
태수가 투자하는 드라마를 빠른 시일 내에 방영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이사실이 아니라 드라마국까지 내려왔다.
“여자 주인공 세 명의 비중을 조절해야겠는데, 극본 수정에 오래 걸립니까?”
“최대한 빨리 고쳐 보겠습니다.”
“한 달 내로 최소 15화는 고쳐야 합니다. 이미 대략적인 부분은 나왔으니 가능하겠죠?”
“…해 보겠습니다.”
극본가가 달려가고, 이건후는 기획팀을 보았다.
“편성 시간표 나왔습니까?”
“마침 한 자리 있긴 한데, 당장 한 달 후 방송 시작입니다.”
“가능하겠죠?”
당시에는 빨리 찍고 빨리 편집해서 바로 내보내는 시스템이었다.
그래서 일일 연속극을 찍고 있기도 했고, 방영 시간이 현대에 비해 짧기도 했다.
“스튜디오가 문제입니다.”
“스튜디오는 태양 그룹 쪽에서 알아서 해 준다니 맡겨 봅시다.”
저쪽에선 박철완이 코피가 터지도록 설계도를 그렸다고 했다.
그리고 솜씨 좋은 전문가를 붙여 뚝딱 지어 준다고 호언장담했다.
“그전에 극 초반 야외 촬영부터 진행하고 있죠. 배우들 전부 섭외했습니까?”
“스케줄 조정까지 끝냈습니다.”
“소품과 의상, 분장까지 전부 준비합시다.”
“준비하겠습니다.”
다행히 사극이 아닌 현대극인지라 쉽게 조달할 수 있다.
고석만 CP가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CF는 어떻게 할까요?”
“그거야 태양 건설이 얼마나 스튜디오를 빨리 짓느냐에 달렸죠.”
이건후는 씩 웃었다.
“이번 기회에 한 번 지켜봅시다.”
소문이 자자했던 태양 그룹의 강 회장, 어떤 식으로 스튜디오를 완성해 내는지 지켜보고 싶다.
‘견본 주택을 짓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텐데. 한 달 가지고 가능할까?’
어림도 없는 소리다.
* * *
태양 아파트 건설 현장.
박철완은 퀭한 얼굴로 현장을 지휘하고 있었다.
“모델 하우스를 빠르게 짓기 위해 우리는 철골 구조로 지을 겁니다.”
박철완이 현장 소장에게 건축 도면을 내밀었다.
“철골 구조는 철근 콘크리트 건물과 달리 콘크리트 굳힐 필요가 없고, 철골과 철골을 연결하기만 하면 되기에 빠르게 시공할 수 있습니다.”
철근 콘크리트 건물에 비해 공사 기간이 상당히 절약된다.
“하중에 신경 쓸 필요가 없으니까 공간을 널찍하게 뺄 수 있고, 층고도 높일 수 있지요.”
박철완이 철골 구조로 모델 하우스를 짓는 이유다.
“목공 작업이 많을 겁니다. 목수들 전부 총동원하세요. 내부 인테리어 팀도 부릅시다.”
박철완이 이를 악물었다.
“우리는 보름 내에 모든 공사를 끝내야 합니다.”
시간 싸움이다.
* * *
명동 장수 은행 본점 은행장실.
서류를 보던 장말동이 고개를 들었다.
“아니, 이게 누구야? 예까지 네놈이 어인 일인고?”
“부탁할 게 있어서 왔습니다.”
“부탁?”
장말동 옆에 책상을 두고 일하던 안정우가 흥미로운 눈으로 태수를 보았다.
그가 만년필을 내려놓고 물었다.
“직접 찾아올 정도의 일인가?”
“네, 세 가지 정도 있습니다.”
“세 가지나? 말해 보게.”
태수가 손가락을 꼽으며 말했다.
“첫째, 전두호와 관련된 정보를 받고 싶습니다.”
장말동은 정보 상인이다.
정보를 수집하는 루트도 다양하고, 정보의 종류도 많다.
특히 군사 기밀이라 접근하기 힘든 전두호의 정보를 얻을 데가 많지 않다.
‘장말동에게서 군 내부 정보를 얻기 힘들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 한다.’
김광록을 통해서 알아본다든가, 박태종을 통해서 알아본다든가.
장말동은 부채를 살살 부쳤다.
“금산 호텔에서 전두호와 부딪친 것 때문이더냐?”
“그 일이 계기가 된 건 맞습니다.”
태수의 표정이 가라앉는다.
“전두호와 한청호가 사돈을 맺는다고 합니다.”
태수는 전두호와 얽힌 여러 가지 이해관계를 말해 주었다.
장말동 역시 차기범과 전두호 사이에 있었던 알력 다툼에 대해 알고 있었기에 이해가 빨랐다.
“전두호가 쿠데타에 성공하면 태양 그룹의 앞날은 불 보듯 뻔합니다.”
대놓고 선전 포고를 날린 전두호다.
“그래서 전두호와 오성회가 무슨 일을 꾸미는지, 어느 정도로 일이 진척되었는지 알 필요가 있습니다.”
“알았다. 내가 좀 더 깊이 파고들어 보지.”
안정우가 확답했다.
태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용건을 꺼냈다.
“둘째, 은행장들을 규합해 청일에 대한 대출과 투자를 막을 생각입니다.”
장말동이 눈을 동그랗게 뜬다.
“아니, 무슨 수로?”
“돈으로.”
태수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한청호가 제게 했던 그대로 되돌려 주겠습니다.”
태수가 태양 그룹을 키울 때 한청호가 은행장들을 규합해 대출과 투자를 막았다.
그 뒤에는 박정환이 있었다.
정권의 재벌 길들이기와 맞아떨어졌기에 태수는 잠시 속수무책이었다.
장말동은 기가 찼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우리 장수 은행더러 대출을 하지 말아 달란 소리를 한다면 고려해 볼 수는 있다.”
장말동이 장수 은행장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내가 다른 은행까지 힘을 쓸 수는 없지 않으냐. 박정환이라면 모를까.”
“박정환이 한청호의 손을 들어준 이유가 뭐였습니까? 재벌 길들이기 아닙니까? 한청호는 이미 박정환의 입안에 있는 혀처럼 굴죠. 더 길들일 것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박정환은 한청호를 구태여 내치진 않을 거다.
말 잘 듣고, 달콤한 진상을 꼬박꼬박 잘 바치는 놈이지 않은가.
“한청호가 대통령을 끌어들여 은행을 움직였다면 저는 시장 논리에 따라 은행에 영향력을 행사할 겁니다.”
태수가 손가락으로 원을 만들어 보인다.
“바로 돈으로.”
선뜻 이해하지 못하는 장말동에게 설명해 준다.
“미국과 영국, 일본과 홍콩에서 은행을 인수했습니다.”
“알아. 그래서 그게 어쨌다는 게야?”
“외국 은행이 국내 은행에 대규모로 투자하는 거죠. 할 수 있다면 은행 지분을 확보하거나 부실한 은행은 통째로 인수하는 것도 가능할 정도고요.”
“뭐?”
태수는 씩 웃었다.
“제가 돈이 좀 많습니다.”
박정환의 비밀 금고를 털었을 뿐만 아니라 사우디 재정부 장관의 금고까지 싹 털었거든요.
태수는 딱 잘라 말했다.
“회사나 은행이나, 돈 많이 집어넣은 놈이 갑입니다.”
회사도 대주주가 쥐락펴락하는데 은행이라고 다를까.
“사업 자금 조달이라면 투자 회사를 통해 자금 세탁을 하는 것만으로 충분했죠. 제가 굳이 외국 은행을 인수한 이유가 뭐겠습니까?”
금고를 턴 돈을 투자 회사를 거치도록 해서 가져다 쓰면 된다.
그런데 태수는 굳이 외국 은행을 인수하는 번거로움을 자처했다.
“은산분리 때문에 직접적으로 은행을 인수할 순 없죠. 그러니 우회적으로 외국 은행을 통해 국내 은행에 제대로 된 영향력을 행사해 볼까 합니다.”
태수는 기억하고 있다.
은행들이 태수에게 어떻게 나왔는지.
태수의 숨통을 막고, 부도를 내기 위해 어떤 수작을 부렸는지.
“당한 만큼 갚아 줘야지요.”
태수를 곤경에 몰아넣으려 했던 은행들에도.
그 일을 주도한 박정환과 한청호에게도.
“제가 아파트 건설 속도를 높이고 드라마, CF, 신문 기사와 각종 홍보를 때려 부어 한청호를 들쑤실 겁니다.”
태수와 한청호는 아파트 포지션이 같다.
최고급 프리미엄 아파트 말이다.
“고급 아파트는 자제부터 인테리어, 광고까지 돈이 많이 듭니다. 저는 돈이 많아서 감당할 수 있지만 한청호도 그럴까요?”
아니다.
한청호는 청일 중장비를 빼앗기면서 알짜 기업을 잃었다.
더구나 정유를 잃으면서 중공업 분야에 타격을 심하게 받았다.
거기에 오일 쇼크 때 받았던 부채까지 떠안았다.
“한청호는 지금 호텔 공사도 같이하고 있습니다. 둘 다 박정환의 명령으로 하는 일이라 어느 것 하나 무시할 수 없죠. 아파트와 호텔을 동시에 올리려면 허리가 휠 겁니다.”
태수가 한청호를 부추겨 아파트 공사에 속도를 내도록 만들 것이다.
“믿을 거라곤 은행 돈밖에 없을 텐데, 만일 은행에서 일제히 대출과 투자를 막으면 어떻게 될까요?”
“부도를 막기 위해 다른 계열사를 처분하지 않겠나.”
“청일 계열사를 인수하겠다고 나서는 자들이 있을까요?”
태수가 청일 정유를 인수할 때 한청호는 쓰레기 짓을 해 놨다.
“이미 신뢰를 잃은 청일 그룹입니다. 한청호가 적자를 몰아넣어 계열사에 폭탄을 던져 놓는 놈이란 걸 아는데, 누가 계열사를 인수하겠습니까?”
인수하는 순간 이쪽 회사가 부채를 감당하지 못하고 부도가 날 텐데.
한청호가 얄팍한수작을 부리는 걸 알면서도 가만히 두었던 이유다.
“계열사는 안 팔리고, 아파트와 호텔 건설 자금은 계속 들어가고, 은행에선 대출을 안 해 주겠네요. 그렇다면 한청호는 어디다 손을 벌릴까요?”
“혹시 여태 로비를 벌였던 자들…….”
“돈 떨어지면 누가 거들떠나 본답니까?”
사람들은 돈과 권력이 떨어진 자는 가차 없이 버린다.
구걸하는 한청호라면 박정환조차도 내다보지 않을 것이다.
“그럼 한청호가 이대로 도산하게 되는 게냐?”
“한청호는 도산하고 싶지 않겠죠. 아직 자금을 끌어올 데가 한 군데 남았기 때문입니다.”
“설마……!”
“일본에 옮겨 두었던 박정환의 비밀 금고. 한청호는 거기에 손을 댈 겁니다.”
태수는 씩 웃었다.
“한청호가 일본의 금고에 손을 댄 증거를 확실하게 모을 생각입니다. 그럼 한청호는 박정환 앞에서 그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겠죠.”
한청호를 몰락시키기 위해 더할 나위 없는 방 안이 아닌가.
“박정환의 비호를 잃은 한청호는 제 상대가 안 됩니다.”
장말동이 기뻐하며 부채를 탁 쳤다.
“좋다, 내가 한청호의 자금줄을 묶는데 기꺼이 동참하마!”
“좋습니다. 저 역시 미국에 있는 한수를 불러들일 생각입니다.”
한수는 미국에서 투자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송 비서에게 교육을 받으며 무럭무럭 크고 있을 것이다.
“이번 기회에 외국의 거물 은행장도 소환할 계획입니다.”
“네가 은행 인수를 맡겼다는 그 대리인?”
“예.”
꿀꺽.
장말동이 마른침을 삼켰다.
“그래서 내가 은행장들을 모아서 무엇을 해야 하느냐?”
“간단합니다.”
태수는 씩 웃었다.
“은행장들에게 외국의 거물 투자자를 소개시켜 주는 것이죠. 어쩔 수 없이 청일의 발목을 붙들도록 은행에 돈을 잔뜩 넣어 줄 셈입니다.”
은행장들은 거물 투자자를 두 손 들고 환영할 것이다.
“어르신이 소개해 줘서 거액을 유치하게 되는 셈이니 은행장들이 아주 고마워하겠죠?”
“그, 그렇겠지?”
“그럼 이참에 어르신이 자리 하나 맡기도 무척 쉽겠죠?”
“무슨 자리?”
장말동이 고개를 갸웃한다.
“대한 은행 연합회 회장 자리 말입니다.”
“뭐?”
장말동이 입을 떡 벌렸다.
생각지도 못한 제안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대한 은행 연합회 회장을 맡으라고?”
“마침 올해 말에 새로 선출하잖습니까?”
대한 은행 연합회.
은행들의 연합체로 한국 금융 산업의 발전과 건전한 신용 거래 질서 확립을 위해 설립된 단체다.
1928년 11월 1일 경성 은행 집회소를 설립한 것을 모체로 하여 현재 전국 은행 연합회가 되었다.
‘21세기로 가면 덩치가 아주 커지지. 하지만 지금은 70년대이니까, 그 정도까지 몸집이 거대하진 않아.’
한국 전역의 은행을 연합한 연합회니 당연히 덩치와 영향력이 크다.
산하에 시중 은행 협회, 특수 은행 협회, 지방 은행 협회, 은행 사회 공헌 협회, 그 밖에 27개 전문 위원회까지 둔다.
그뿐만이 아니다.
금융 연구원, 종합 신용 정보 기관, 금융 신상품 심의회, 금융 인재 취업 센터까지 갖추는 거대 연합 기관이다.
“이왕 양지로 나왔으니 은행장을 넘어 그 위까지 노립시다. 더 화끈하게 영향력을 휘두를 수 있는 자리가 있잖습니까.”
“…….”
태수의 말에 안정우가 크게 웃었다.
“그래, 이왕 양지로 나왔으니 권력을 틀어쥐는 것도 좋겠어.”
장말동은 어안이 벙벙한지 떡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한다.
장말동 대신 안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좋아. 그럼 은행장을 규합해서 투자자를 소개시키는 것으로 하지.”
태수의 두 번째 용건이 끝났다.
태수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마지막 용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