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산 찍고 건설 재벌-109화 (109/230)

109. 미래가 변했다(1)

태수는 장준용을 만류했다.

“왜 갑자기 이러십니까? 라흐만 님께서도 그냥 넘어가시는 마당에.”

“아닐세. 일이 이렇게 된 건 결국 내 탓이야.”

장준용은 회한에 젖어 한숨을 내쉬었다.

“저런 놈을 인재라고, 일 잘한다고 아꼈으니 내 눈이 썩었던 게지.”

씁쓸한 웃음이었다.

“이미 일은 망칠 대로 망쳤어. 저놈이 원하던 대로.”

“그자가 독단적으로 벌인 일입니다. 라흐만 님은 바보가 아닙니다. 그러니 정상을 참작해서 한 번 눈감아 주실 때…….”

“한 번 깨어진 신뢰야. 깨진 물그릇을 붙여 놓는다고 물이 안 샐 것 같나?”

“회장님.”

장준용은 눈을 감았다.

“자네도 알잖나. 신뢰를 쌓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그 신뢰를 깨는 데는 고작 5분도 걸리지 않아. 상황이 이런데도 금산을 믿어 달라고 염치없이 말할 수 있겠나? 난 못하네.”

장준용은 라흐만에게 허리를 굽혔다.

[신의로 맺은 동맹입니다. 어찌 되었든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 그 믿음을 깨뜨렸다면 마땅히 자숙하고 그에 따른 값을 치러야겠지요.]

장준용은 태수의 어깨를 툭툭 쳤다.

“주베일 산업항 공사, 자네는 성공하길 빌겠네.”

“회장님, 굳이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억지로 신의를 구걸하진 않겠어. 그런 건 강요하는 게 아니야. 오랜 시간에 걸쳐 스스로 증명하는 거지. 행동으로.”

비통한 목소리였다.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이겠네.”

이런 건 운명이 아니다.

전생에서 장준용은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성공적으로 따냈다.

변수가 있다면 태수, 그리고 이문복.

‘미래가 바뀌게 생겼군. 이문복이 분탕질을 하는 바람에.’

태수는 장준용의 팔을 잡았다.

“회장님, 10억 달러짜리 공사를 고작 이런 일로 포기하실 생각입니까?”

“나도 아까워. 하지만 망친 일에 미련을 두진 않아. 다른 일을 찾아보면 그만이야. 세상에 널린 게 일이잖나.”

자신의 잘못이 아님에도, 깨끗하게 포기하는 장준용이었다.

“후회하지 않겠습니까? 들인 시간과 노력이 아깝지 않습니까?”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습관처럼 스스로를 망치는 습관은 없다네.”

장준용은 후련하게 웃었다.

“살다 보면 실패할 수도 있지. 그냥 깨끗하게 인정하고, 털어 버리는 게 오히려 이득이야. 하하하, 미련은 야멸차게 끊어 내야 새로운 기회를 놓치지 않는 법이지.”

장준용이 딱 잘라 말한다.

“이제야 속이 편하군. 어울리지도 않게 애걸복걸했으니 내가 봐도 꼴불견이었어.”

장준용은 술잔을 꺾는 시늉을 하며 웃었다.

“마음이 쓰리니 오늘은 나와 같이 위로주 한 잔 같이해 주지 그러나?”

차마 거절하기 힘든 부탁이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오랜만에 양주 스트레이트로 달리겠군. 독한 남자에겐 독한 술이 어울리지.”

아마도 김 비서까지 합세하면 오늘도 제정신으로 집에 못 들어갈 각오를 해야겠다.

그때 잠자코 장준용을 보고 있던 라흐만이 조용히 말했다.

[착각하는 게 하나 있는 것 같군. 당신과 나 사이, 애초에 신의는 없었다. 우린 동맹이 아니었지.]

장준용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동맹은 저와 강태수 사이에 맺은 것이니 라흐만 님께서 저를 동맹 대하듯 눈감아 줄 필요도 전혀 없지요.]

[우리는 오늘 처음 본 사이가 아닌가.]

[그것도 맞습니다.]

딱 잘라 말하는 라흐만이다.

[신의를 쌓을 수 없던 사이이니 잃을 신의도 없다. 기회를 주지 않았으니 잃을 기회도 없다. 그러니 내가 신의를 쌓을 기회는 줘야 하지 않겠나.]

장준용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다.

[전 이미 주베일 산업항 입찰을 포기했습니다만…….]

[한 나라를 다스리는 국왕의 발언이 무겁듯, 큰 기업을 일구는 당신의 발언도 무거울 것임을 안다. 그러니 발언을 철회하라고 하지는 않겠다.]

라흐만이 빙그레 웃었다.

[사우디 주베일 산업항 공사는 태양 그룹의 단독 입찰로 간다. 하지만 금산은 하청 그룹의 입장으로 사우디에서 공사를 함께해 보지 않겠나?]

라흐만이 태수를 슬쩍 보았다.

[내가 너무 오지랖을 부렸나?]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라흐만 님. 안 그래도 제가 먼저 금산에 하청 제안을 할 생각이었습니다.]

태수는 진심이었다.

태양 건설이 혼자 단독으로 추진하기엔 사우디 주베일 공사 규모가 커도 너무 컸다.

하려면 못할 건 없지만 예정된 준공 일정에 맞추려면 어려움이 따른다.

애초에 금산과 함께할 생각으로 추진한 계획으로, 추가한 도시 개발 제안도 있었다.

[금산이 단독으로 사우디에 진출하려면 외국 건설 기업이란 타이틀 때문에 꽤 어려움을 겪을 겁니다. 태양 건설 역시 단독으로 주베일 산업항 입찰에 뛰어들기엔 부족한 면이 있습니다.]

사우디는 외국 기업이 진출하기에 진입 장벽이 꽤 높다.

금산 역시 그런 이유로 사우디 건설 공사에 아직 진출하지 못했다.

[결국 태양 건설의 인맥, 금산 건설의 기술과 규모란 무기로 우리는 공동 입찰을 준비했습니다. 한 축이라도 빠지면 입찰 경쟁에서 밀릴 가능성도 꽤 큽니다. 그러니…….]

태양 건설은 현지 파트너를 맺고 있는 사우디 왕족의 인맥이 있다.

하지만 산업항을 건설한 실적이 없기에 기술을 증명하지 못한다.

반면 금산은 금산 조선소 및 대한민국의 여러 항구를 건설한 실적이 있다.

그러나 사우디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스폰서 기업이 없다.

둘은 상부상조할 수 있다.

[저 역시 금산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장 회장님.]

태수가 장준용에게 정중히 부탁한다.

장준용은 태수의 수완이라면 금산 없이도 공사를 훌륭히 끝내리라는 걸 안다.

저 말이 누구를 위한 말인지 그가 어찌 모르겠나.

라흐만도 거들었다.

[마침 내가 주베일 도시 개발 담당자라서.]

아까 브리핑할 때 태양 건설에서 제시한 도시 개발 계획안 중 하나다.

[산업항 공사에 많은 동원과 중장비가 동원될 예정이라지. 인부들이 머무를 숙소와 산업항을 이용할 사람들을 위한 상업 시설을 함께 지을 생각이야.]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접근해야 나중에 재정비하는 수고를 던다.

그건 도시 개발 계획 담당자인 라흐만이 누구보다 잘 안다.

[태양 그룹 건설 계획 입안자의 의견이야. 나 역시 이에 대해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어. 주베일 산업항 공사와 연계할 공사로 규모를 추가, 확대하는 게 낫지 않을까 고민하던 차였지.]

라흐만이 장준용에게 손을 내민다.

[태양 그룹은 금산과 공동 입찰을 생각하고 이런 계획을 입안했다. 그러니 태양 그룹이 입찰을 따내면 주베일 도시 개발과 관련해 일부를 금산에 하청하는 방식으로 맡길까 하는데.]

하청이란 방식의 차이만 있지 실제로 공동 입찰과 크게 다르지는 않다.

다만 단독 입찰로 인해 태수의 결정권 및 권한이 공동 입찰에 비해 훨씬 커질 따름이다.

[어떤가?]

장준용은 라흐만이 내민 손을 물끄러미 보았다.

태수가 웃으며 재촉했다.

“흔치 않은 기회인데, 이대로 눈 뜨고 놓치실 작정이십니까?”

“아, 아니! 믿기지 않아서 그렇지.”

장준용이 퍼뜩 제정신을 차리고, 라흐만의 손을 부여잡았다.

격하게 위아래로 흔들리는 남자들의 악수.

“이문복이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 준다더니 제대로 보여 주긴 보여 줬군요.”

“무엇을?”

“금산 건설을 어필하라고 보냈더니 결국 회장님을 제대로 어필했지 않습니까?”

예부터 가장 확실한 방법은 ‘보여 주기’라고 했다.

태수를 제물로 삼아 자신의 유능함과 뛰어남을 어필하려 했던 이문복.

그는 오히려 장 회장의 그릇만 보여 주어 라흐만의 환심을 사는 데 일조하고 말았다.

“회장님 말씀이 맞았습니다. 미련을 깨끗이 끊어 냈더니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군요.”

“하하하, 내가 뭐라고 그랬나.”

라흐만이 한 손으로 턱을 괴며 불만스레 말했다.

[자꾸 나만 따돌리고. 둘이서 친목을 도모하는 건 그만두지그래?]

영어 쓸 줄 아는 사람들이 한국말로 떠들어서 그렇다.

[동맹이라더니, 실은 친구였나?]

[술친구라고 혹시 아십니까?]

태수가 라흐만을 돌아보며 웃었다.

[라흐만 님, 양주는 좀 하십니까? 그것도 얼음 하나 없는 스트레이트로요. 우린 여기 호텔 바에서 만나면 그렇게 마십니다.]

[음?]

태수는 씩 웃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위로주 대신 축하주를 마셔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동맹의 신의를 다시 확인한 기념으로. 어떻습니까?]

이문복은 그들을 이간질해 갈라놓지 못했다.

더구나 주베일 산업항 입찰 계획을 망치지도 못했고, 라흐만에게 금산의 이미지를 최악으로 낙인찍는 것마저 실패했다.

라흐만도 씩 웃었다.

[양주라… 어쩔 수 없지. 이 호텔 바는 레드 와인보다 양주를 잘 들여놓나 보지?]

장준용이 참을 수 없어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우리 호텔 바의 바텐더는 폭탄주 마는 솜씨가 아주 기가 막힙니다. 레드 와인을 베이스로 한번 말아 보라고 할까요?]

[기대하지.]

그들은 사이좋게 금산 호텔 바로 올라갔다.

아까 태양 계열사 사장 3인방에 먼저 올라갔던 바로 그 호텔 바였다.

* * *

금산 호텔 지하 주차장.

검은색 지프차에는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금산 건설 사장과 부사장이었다.

금산 건설 사장이 담배를 피우며 물었다.

“왜 그랬어?”

“뭐 말입니까?”

이문복은 깨끗하게 시치미를 뗐다.

“단독 입찰 말입니까? 다시 말하지만 그게 금산 건설을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이었습니다. 듣도 보도 못한 태양 건설이 우리 금산 건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

“그것 보세요. 그래서 제가 충심으로 금산을 위해 총대를 멘 겁니다. 분명 회장님도 제 충심을 아실 거예요. 그러니 사장님이 회장님 앞에서 오해 없이…….”

“아니, 그것 말고.”

금산 건설 사장이 담배를 뻑뻑 피우며 인상을 찌푸렸다.

“내 마누라 말이야. 왜 그랬냐고.”

이문복의 눈이 잘게 떨렸다.

하지만 입으로는 여전히 모르쇠로 일관했다.

“저, 그게 무슨 말씀인지 잘 이해가 안 가는데요.”

“이걸 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금산 건설 사장이 운전대 위로 종이 몇 장과 사진 몇 장을 꺼냈다.

종이에는 언제, 어디서, 누구와 만나 얼마나 오고 갔는지가 적혀 있었다.

사진은 이문복과 연예인, 연예인과 사장 부인이 어디서 만났는지 찍혀 있었고.

빼도 박도 못하는 증거에 이문복이 눈을 크게 떴다.

“이, 이걸 어, 어, 어떻게……!”

“오다 주웠다.”

장말동이 아까 화장실에서 그에게 건네준 것이다.

진짜 흘리듯이 그의 발밑에 툭.

마누라 사진을 보자마자 눈이 뒤집힌 나머지 그 고마운 사람이 누군지도 확인 못하고 말았다.

“맞을 이유, 충분하지?”

군인 출신의 돌주먹 사장이다.

“회장님께선 해고라고 했지만 네놈이 무슨 짓을 했는지 똑똑히 안 이상 이대로 풀어 줄 수는 없지. 해고도 없고, 사직서도 안 받아. 난 사장, 넌 비서. 우리 내일도 또 보자고.”

조 사장은 아직 이문복을 자유롭게 풀어 줄 생각이 없었다.

“매일 진실의 소리를 듣는 시간이 올 거야. 아주 즐거운 시간이 되겠지?”

이문복을 보는 조 사장의 눈빛은 악랄하게 빛났다.

그가 주먹을 야무지게 말아 쥐고 이문복 눈앞에 들이밀었다.

“일단 맞고 다시 얘기하자.”

금산 건설 사장에게는 한 가지 흔들리지 않는 신념이 있다.

-진실을 알고 싶다면 주먹이 진리.

패다 보면 안다.

이게 진짠지 거짓인지.

* * *

금산 호텔 바.

사이좋게 올라온 세 사람은 당혹스러운 광경을 맞이했다.

“술 마시려면 곱게 마시지 그러나.”

“왜 엄한 우리한테 시비야?”

“이 사람이 미쳤나?”

태양 계열사 사장 3인방이 취객과 시비에 휘말려서 난처한 상황이었다.

30대 후반의 취객은 휘청대면서 소리쳤다.

“야, 너희 회장? 그 애송이가 그렇게 잘났냐? 나보다 새파랗게 어린놈이 벌써 그룹 총수라니! 세상이 이렇게 불공평하다!”

오늘 발족한 태양 그룹 출범식 기사를 석간신문으로 봤다.

라디오에서도, 텔레비전 뉴스로도 나왔다.

취객이 여기까지 와서 술에 잔뜩 취한 이유였다.

“나는 석유 파동으로 쫄딱 망했는데, 너희는 왜 이렇게 떵떵거리며 잘 사냐? 대통령에 사우디 왕족까지 와서 축하해 주고. 나도 그 얼굴이나 한번 보자! 여기 묵는다며?”

취객을 알아본 태수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 남자는 대운 건설의 사장 김우진이 아닌가.’

그런데 의아했다.

장차 공격적인 중동 건설 진출로 외화를 잔뜩 벌어 와 기업 덩치를 재벌 그룹으로까지 불릴 남자다.

그런데 왜 망했다는 말을 하는 걸까?

“그놈이랑 내가 뭐가 그렇게 다르냐? 들어 보니까 걔도 은행이 전부 대출 금지하고, 대출금 일시 상환 독촉을 받았다며? 그런데 걘 멀쩡한데, 왜 나는 쫄딱 망했냐고! 대체 뭐가 달라서!”

태수의 안색이 변했다.

“모든 은행이 대운 건설에 일제히 대출을 금지하고, 대출금 일시 상환을 독촉했다는 겁니까?”

“그래! 덕분에 난 3개월을 못 버티고 파산했다! 반년을 버티다가 한 방에 문제를 해결한 너희랑은 달리!”

전생에선 그런 일이 없었다.

대운 건설은 젊은 사장의 공격적인 투자 은행권의 일제히 대출금 몰아주기로 그룹을 무지막지한 속도로 확장했었다.

‘미래가 변했다.’

조금씩 바뀌던 미래가 점점 더 그 폭을 크게 키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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