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끊을 수 없는 것(5)
라흐만이 머물고 있는 금산 호텔 스위트룸을 나서는 장말동과 안정우.
안정우의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아까 장 회장을 따라 들어간 사람들, 금산 건설 사장과 부사장 맞지?”
“확실합니다.”
“부사장 놈이 뒤에서 장난질을 친다고 하지 않았나?”
“그랬지요.”
태수가 미리 부탁한 뒷조사였다.
금산과 함께 주베일 산업항 공사의 공동 입찰에 나서기로 한순간부터, 태수는 금산 건설을 주목해 왔다.
“느낌이 영 안 좋다.”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면서 호텔 방으로 들어가던 부사장의 얼굴이 떠올라 께름칙하다.
“모아 놨던 자료들, 가져오라고 해.”
장말동은 로비로 내려가 카운터에 지폐를 한 장 내밀었다.
“전화 좀 씁시다.”
설마 애송이는 지금 이 상황을 전부 예측하고 미리부터 준비했던 것은 아니겠지?
장말동의 시선이 슬쩍 위로 향했다.
태수가 있던 스위트룸을 향해서.
* * *
이문복은 지금 상황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
금산의 불도저 장준용이 꼼짝 못하고 쩔쩔매는 바로 이 상황 말이다.
짜릿함에 온몸을 휘감았다.
‘슬슬 시작해 볼까?’
청일 호텔 착공식에 참석했던 이문복.
돌아가려는데 한청호가 그의 팔을 잡고 말을 붙였다.
-아주 좋은 제안이 하나 있는데. 어떤가? 들어 볼 텐가?
그렇게 둘 사이에 대화가 오가기 시작했다.
한청호에게 사주받은 일은 총 세 가지다.
1. 금산과 태양의 사이를 이간질하여 갈라서게 만들 것.
2. 사우디 왕자에게 금산의 이미지를 최악으로 낙인찍을 것.
3. 주베일 산업항 공사 입찰을 망칠 것.
이것만 완수하면 많은 것이 달라질 것이다.
한청호는 이문복에게 깜짝 놀랄 대가를 약속했다.
1. 청일 건설 사장 자리.
2. 정치 후원 및 사조직 결성.
3. 현금 3억 원.
4. 여자.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정치권부터 말단 공무원까지 발 넓기로 유명한 청일의 한청호다.
안목 좋기로 유명한 한청호가 밀어주는 인재란 타이틀이 탐난다.
그가 적극적으로 이문복을 밀어주어 정치 새내기로 키워 주겠다는 뜻을 비췄다.
‘요즘 세상에 재벌이 어디 재벌인가? 대통령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납작 엎드려 머리 조아려야 하는 세상이지. 난 자존심 팔아 물건 파는 생활은 이만 청산할란다.’
꿈이 큰 야심가는 30대부터 정치에 꿈을 두었다.
이문복은 자신 있었다.
‘한청호 회장이 요청한 세 가지 일을 한꺼번에 끝낼 수 있지. 거기다 심지어 내 개인적인 이득도 챙길 수 있어. 바로 사우디 왕자 앞에서 나를 어필하는 것으로.’
하늘이 도왔던가.
사우디 왕자를 만날 일이 없을 것이라 여기고 반쯤 포기했는데, 금산의 장준용이 제 손으로 저를 사우디 왕자 앞에 내보이는 게 아닌가.
‘성공할 가능성이 낮아서 입맛만 다시고 있었던 참이다. 기회를 놓치면 남자가 아니지.’
이문복이 작심한 이유였다.
이문복은 라흐만 앞에서 당당히 주장했다.
[금산 혼자서도 얼마든지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진행할 수 있습니다. 금산은 조선소를 세웠고, 서해안과 남해안의 수많은 항구를 정비했습니다. 그뿐입니까?]
이문복은 주먹을 꽉 쥐며 열정적으로 어필했다.
[다리를 세우고, 도로를 깔고, 해군 기지를 정비하고, 유조선이 드나드는 금산항을 세웠습니다. 그 전부를 우리 금산 건설이 해냈단 말입니다.]
유능함을 어필하는 두 번째, 실적 나열하기!
[금산 건설은 오래전부터 사우디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따내기 위해 다방면으로 자료를 수집했지요. 어떡하면 사우디 최고의 동쪽 항구로 자리매김할까? 어떡하면 아름다운 항구를 만들까?]
유능함을 어필하는 첫 번째, 구구절절이 설득하기!
[우리 금산 건설은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중시합니다. 해양 생태계를 파괴하지 않고, 인간의 편리함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요? 예, 기술이 필요합니다.]
금산 건설의 역사는 30년이지만 큰 공사를 맡으며 축적된 기술은 수준급이다.
[오는 길에 서울 시내를 둘러보셨나요? 우리는 대한민국 산업 발전과 그 역사를 같이 합니다. 전쟁의 포화로 잿더미가 된 서울을 다시 세운 것이 바로 우리 금산 건설입니다.]
금산 건설이 서울 도심 건설에 기여한 바는 분명히 크다.
[한강 다리는 건너셨겠죠? 비행기가 이착륙한 서울 공항은 이용하셨겠죠? 금산 호텔까지 이어진 도로? 이 호화로운 호텔? 전부 금산 건설이 지었습니다.]
청산유수가 따로 없다.
장준용이 마음 졸이며 작게 으르렁댔다.
“여기까진 봐주지. 더는 안 돼. 그러니 한마디만 해. 공동 입찰을 원한다고!”
이문복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풀지 않는다.
태수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이문복이 오늘 작정하고 나섰군.’
미치지 않고서야 이런 짓을 벌일 리가 없다.
하지만 미쳤을 리 없으니 문제가 아닌가.
‘나머지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 사전에 계획된 것도 아닌데. 예정과 다르게 지금 이 시점에서 배신한 이유가 뭘까?’
이문복은 셈이 빠르고 영악한 남자다.
그런 남자가 계산 없이 이런 상황을 만들지는 않았을 거란 걸 태수는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일로 이문복은 무슨 이득을 얻을까?’
현재 상황으로만 보면 이득은 없고 손해뿐이다.
‘귀빈 앞에서 제멋대로 나서서 일을 벌였다. 금산의 장준용이 이를 가만히 두고 볼까? 아니다. 해고, 좌천, 전근, 징계, 감봉 등 불이익 조치는 정해진 수순이야.’
그걸 모를 리 없는 데도 이문복은 장준용의 말을 몇 번이나 가로막으며 일부러 영어로 대화하고 있다.
라흐만더러 들으라는 소리다.
그 심보, 그 악의는 아무리 곱게 봐주려야 곱게 봐줄 수 없다.
‘금산을 버렸다는 뜻인데. 지금껏 준비했던 사장 전복 계획까지 전부 포기하고 배신을 택할 정도라면…….’
이문복의 목적은 뚜렷하다.
금산의 체면을 망치는 것, 난장, 이간질 등.
태수는 이문복을 꾀어냈을 배후를 떠올렸다.
‘한청호.’
짧은 시간에 잘도 손을 썼구나.
‘청일 호텔 착공식이구나.’
일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감이 온다.
‘금산 회장의 체면이 말이 아니군.’
지금 이 상황은 반은 이문복이, 반은 라흐만이 만들어 냈다.
라흐만은 처음부터 금산을 배제해 주베일 산업항 입찰을 태수에게 주고 싶어 했으니까.
‘원래 의도는 금산 건설의 젊은 인재인 부사장을 어필하기 위해서, 아까 라흐만의 태도를 보고 조바심이 나서 이들을 데려온 것이겠지. 하지만 그게 패착이었군.’
속 터져서 죽기 직전인 장준용이 안쓰럽기까지 하다.
이문복의 입가에 걸려 있는 의미심장한 미소.
이런 결정적인 상황에서 배신이라니.
‘최악의 타이밍이야.’
안타까운 일이다.
한청호의 낚시에 이문복이 걸려들 줄이야.
이문복이 태수를 보며 이죽거렸다.
[저 애송이로서는 감히 넘볼 수 없는 대한민국 최고의 건설회사, 바로 금산 건설입니다. 사우디에선 어떤지 모르지만 이곳에서 태양 건설은 듣도 보도 못한…….]
본격적으로 태수를 제물로 삼아 이문복이 자신을 어필하려고 한다.
태수가 중간에 말을 뚝 잘랐다.
[금산 건설은 당신이 세운 게 아닙니다. 당신이 키운 건 더더욱 아니고. 금산 건설의 주인이 옆에 버젓이 있는데, 왜 당신이 주인 행세를 합니까?]
태수는 이문복이 제대로 말할 여유조차 주지 않는다.
태수가 금산 건설 사장에게 웃으며 말했다.
“금산 건설 사장님, 대화를 매끄럽게 이어 갈 수 있도록 부하 직원 좀 치워 주시겠습니까?”
“아무렴! 부하 직원 단속이야 윗사람의 일이지! 새끼야, 넌 죽었어!”
군인 출신의 다부진 몸매.
금산 건설 사장이 이문복의 멱살을 잡고 질질 끌고 간다.
이문복은 크게 당황했다.
아직 한청호가 사주한 걸 하나도 제대로 끝내지 못했다.
[어? 어어? 아직 전할 말이…….]
이런 식으로 내쳐질 줄은 상상조차 못했으니까.
장준용이 크게 외쳤다.
“조 사장, 그 새끼 입부터 틀어막고 가!”
“예, 회장님!”
참, 깜빡한 말이 있다.
“넌 내일부터 해고야. 그러니까 오늘은 조 사장한테 대들 생각하지 마. 대신 내일부터는 회사 나올 필요 없어!”
라흐만이 수수방관하니 이문복은 찍소리도 못하고 내쳐졌다.
태수가 장준용을 돌아본다.
[금산의 장 회장님, 단독 입찰 주장에 동의하십니까?]
[동의할 수 없어. 금산 그룹의 총수, 나 장준용의 의견은 공동 입찰이다.]
태수는 라흐만을 돌아봤다.
[금산 그룹의 총수인 장 회장님과 건설사 부사장의 의견이 갈렸군요. 라흐만 님, 이 경우 누구의 의견을 금산의 뜻으로 받아들여야 할까요?]
라흐만이 턱을 괴었다.
이문복이 분탕질을 쳐주는 바람에 아주 마음에 드는 상황이 왔는데.
[강태수, 넌 가만히만 있어도 어부지리를 얻는 상황이었다.]
라흐만이 바라는 결론으로 일이 매듭지어질 예정이었다.
-이문복이 단독 입찰을 주장하는 경우, 이를 승인한다. 결국 태양 그룹 혼자 주베일 산업항 공사 입찰에 성공한다.
-이문복과 장준용이 마찰을 일으키는 경우, 이를 문제 삼는다. 위계질서가 엉망인 곳은 믿을 수 없다는 이유로, 태양 그룹에 주베일 산업항을 단독으로 준다.
그런데 다른 누구도 아닌 태수가 나서서 이를 막고 있다.
[네 쪽으로 유리하게 잘 흘러가고 있는 물줄기 방향을 왜 틀려고 하지?]
[라흐만 님의 뜻은 잘 알고 있습니다. 일부러 제게 유리하도록 상황을 유도하고 있다는 것도 압니다. 하지만 그게 남이 부린 농간에 놀아나는 것이어서는 곤란합니다.]
태수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라흐만 님도 아시겠죠. 저자가 왜 저리 망나니처럼 나오는지.]
그걸 왜 모를까.
오히려 그 상황을 이용하고 있던 라흐만이 아닌가.
[강태수.]
[최고급 레드 와인의 침전물.]
태수가 단호하게 못 박는다.
[지금 침전물 거르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겁니다.]
태수의 말에 라흐만이 크게 웃었다.
[하하하, 나한테 가르쳐 준 수를 금산에도 써먹고 있다는 건가?]
태수는 사우디 얀부 항 위에 떠 있던 호화 크루저에 초대받았을 때 레드 와인에 대해 설파한 적이 있다.
-최고급 와인을 제대로 음미하려면 침전물을 솎아 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번 일로 침전물이 무엇인지 제대로 확인하셨겠죠?
-침전물을 버리고 그 위에 있는 맑고 정제된 와인을 마셔야죠. 그게 최고급 와인을 마시는 법입니다.
그때 일로 라흐만은 버려야 하는 사람들 명단을 작성할 수 있게 되었다.
[좋은 기회잖습니까. 더구나 저와 공동 입찰을 추진하고 있는 동맹이 아닙니까? 저런 자와 같이 공사를 해야 하는데, 일이 제대로 되겠습니까?]
라흐만이 피식 웃었다.
[봤는가? 이게 강태수라는 남자라네. 내 앞에 강태수와 견줄 인재를 들이밀 생각이었다면 좀 더 괜찮은 놈으로 골라 오지 그랬나.]
장준용은 허리를 깊이 숙였다.
[못난 꼴을 보여드려서 정말 죄송합니다. 뭐라 드릴 말이 없습니다. 그저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내가 왜 그랬는지는 누구보다 잘 알 텐데?]
[압니다. 라흐만 님뿐만 아니라, 강 회장이 어째서 절 도와줬는지도 잘 압니다. 제가 그 뜻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장준용은 태수에게도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고맙네. 동맹의 의리를 지키며 내게 여러 가지 선물을 주는군.”
“별말씀을요.”
태수는 싱긋 웃으며 마주 고개 숙여 인사했다.
“이제라도 찌꺼기는 확실히 버릴 테니 염려 말게.”
“다행입니다.”
장준용은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금산은 이번 사우디 주베일 산업항 공사 입찰에서 빠지겠습니다.]
[회장님?]
태수가 황급히 말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