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산 찍고 건설 재벌-98화 (98/230)

98. 태양 그룹 출범하다(1)

한청호는 초조했다.

오영순의 입을 막기 위해서 별수를 다 썼다.

마침내 둘 사이에 합의점을 찾았다.

1. 각하 앞에서는 ‘금고엔 문제가 없었다.’고 보고한다.

2. 새로운 비밀 금고는 한청호가 채워 넣는다.

3. 사진과 필름을 오영순에게 돌려준다.

4. 이 모든 것을 무덤까지 가져가며 절대로 발설하지 않는다.

오영순은 매우 만족했다.

남편 앞에서 ‘금고엔 문제가 없었다.’란 한마디만 하면 됐으니까.

그럼 그녀를 오랫동안 괴롭혔던 협박이 끝난다.

반면 한청호는 매우 화가 났다.

“강태수! 이 개새끼가 또!”

박정환의 비밀 금고를 채워 넣기 위해 사재를 출연해야 했다.

친일파 명단과 재산 목록이야 문제없다.

제 손으로 바친 것이니 다시 베껴 넣으면 그만이다.

문제는 돈.

“이번 일로 오영순에게 뜯어냈던 걸 전부 토해 놓게 생겼어!”

한청호가 화가 난 이유였다.

순진하고 가진 거 많은 제물을 잡아 두고 꿀을 빨아 왔었는데.

이번 기회에 제물은 도망가고, 잘 빨던 꿀은 토해 놓게 생겼으니 오죽 화가 날까.

“오냐, 강태수. 네놈이 망하는 꼴을 보지 못한다면 나 한청호가 아니다!”

다행히 금고 일은 잘 마무리될 것이다.

박정환과 틀어졌던 사이도 이 일로 좋아질 것이고, 박정환의 근심도 이참에 털어 낼 것이다.

“너도 한번 엿 먹어 봐라.”

한청호의 눈이 음산하게 빛났다.

“사업하는 놈이 돈줄이 마르면 어떻게 되는지 내 똑똑히 보여 줄 것이다!”

은행들이 일제히 대출을 막고, 그 기한을 연장하도록 해야겠다.

“각하께 다녀와야겠군.”

사과 박스는 이럴 때 쓰는 거다.

* * *

송 비서가 나른 물건이고, 사우디 국방부 장관 칼리드가 언급한 일이다.

<제7광구에 관한 한일 양국 협정 계획서:1970>

제7광구는 제주 해분(海盆) 일대에 설정된 자원 탐사 구역을 일컫는다.

이 광구에는 채산성 있는 석유전 및 천연가스전이 다량으로 매장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올해 74년 1월 30일. 대한민국과 일본이 이 지역을 공동 개발하기 위한 <한일 대륙붕 협정>을 체결했지.’

협정은 78년에 발효되고, 50년의 유효 기간을 설정했다.

하지만 2020년까지도 양국의 공동 탐사가 중단되어 개발이 이뤄지지 않고 있었다.

일본 측의 일방적인 협력 거부로 해당 수역이 방기된다.

‘여기에 매장된 자원 추정량이 어마어마하다고 들었는데.’

사우디의 석유 가채 매장량이 약 2,700억 배럴이라면 7광구 최대 매장량은 1,000억 배럴에 달한다.

러시아가 800억 배럴, 미국이 300억 배럴이라고 하면 비교가 될까?

실제로 중국은 제7 광구 옆에 수십 개의 원유 시추 시설을 박아 놓고 채굴한다.

‘박정환, 뒤에서 이런 딴짓을 하고 있었단 말이지.’

장말동의 눈은 여전히 친일파 재산 목록을 쫓는다.

“이놈들, 이번엔 어디 한번 네놈들도 억울하게 빼앗겨 봐라! 네놈들 눈에서도 피눈물 한번 나 봐!”

일제 강점기, 죄 없는 백성들 재산을 그렇게 착취했을 때의 기분을 느껴 봐!

장말동이 이를 가는 이유였다.

“다른 건 몰라도 이건 두 팔 걷고 도와준다!”

“어르신만 믿겠습니다.”

참 든든하다.

‘이참에 제법 목돈을 만질 수 있겠어.’

머지않아 주머니가 두둑해질 것 같다.

‘안 그래도 박정환이 은행 대출을 금지해서 기업 인수 자금이 부족했는데, 마침 잘됐군.’

한수의 미국 투자 회사엔 석유 1억 배럴을 비싸게 팔아 치운 자금이 있다.

거기에 사우디 도로 공사로 받은 돈도 제법 두둑하다.

몰리브덴 광산과 시멘트 공장, 석회 광산에서 나오는 돈도 꽤 있다.

‘박정환의 금고를 털어 기업 인수 자금에 보태게 될 줄이야.’

태수는 자신만만하게 선언했다.

“이제 기업 사냥을 시작해 태양 그룹으로 출범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오일 쇼크로 넘어가는 알짜 기업들을 이참에 잔뜩 긁어 올 것이다.

“좋아, 내 그것도 도와주지. 알짜 기업들이라면 고르고 골랐어.”

“어르신만 믿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사우디엔 언제 돌아가느냐?”

“당분간은 한국에 남아 버텨야 합니다.”

버티다니?

이게 무슨 소린가?

“아니, 왜?”

“제가 한국에 남아야 할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태수는 말했다.

“첫째, 알짜 기업을 인수해서 재벌 그룹으로 거듭날 생각입니다.”

이제는 기반을 잡을 때다.

“둘째, 제가 한국을 떠나면 한청호가 제 사업체를 박살 내기 위해 사냥을 시작할 겁니다. 제가 막고 버틸 차례입니다.”

은행을 들쑤시고 다닐 게 뻔하다.

박정환이 이미 은행장들에게 태양에 대출 금지를 명했으니까.

“셋째, 관심을 잡아 두려고 합니다. 말 그대로 미끼가 되어야죠.”

“미끼?”

“제가 한국에 버티고 있어야 뒤에서 딴짓하는 걸 모를 테니까요.”

한국에서 버티고 있는 태수가 해외에서 딴짓을 준비하는 것을 어찌 알까.

“제가 미끼가 되어 관심을 끄는 동안, 다른 이가 반격을 준비해야 할 때입니다.”

박정환의 비밀 금고에서 가져온 돈으로 할 일이 있다.

마침 적당한 적임자도 있다.

“반년, 그 안에 승부가 날 겁니다.”

한 방에 전세 역전을 해야겠다.

멀리 뛰기 위해서는 잠시 몸을 웅크려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 * *

기다리는 시간은 왜 이리 더디게 흐르나.

태수는 아침마다 신문을 본다.

1974년 4월 25일.

포르투갈에선 좌익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 40년에 가까운 독재를 종식시켰다.

쿠데타 군부는 쿠데타 성공 후 바로 민간에 정권을 이양하며 카네이션 혁명이라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우리나라 누구랑은 정반대로군. 이쪽은 쿠데타를 성공한 군부가 헌법까지 바꾸면서 10년 넘도록 독재하고 있는데 말이야.”

태수는 신문을 접었다.

오일 쇼크의 여파로 경제에서부터 시작된 불안이 점점 사회로 번지고 있었다.

1974년 5월 18일.

인도가 핵 실험에 성공하여 세계에서 6번째 핵 보유국이 되었다.

실제로 인도가 핵을 전력화하는 데는 상당한 시일이 걸린다.

하지만 ‘핵 보유국으로 인정받았다.’는 데 의미가 있었다.

“지금 박정환도 기를 쓰고 비밀 핵 실험을 하고 있지. 하지만 우리나라는 21세기가 되어서도 핵 보유국이 되지 못해.”

21세기엔 북한이 핵 보유국으로 인정받기 위해 난리를 떤다.

그로 인한 국제 사회의 비난과 불안 여론 및 고립까지 감수하고 걸었던 행보였다.

1974년 6월 13일.

서독에서 서독 월드컵이 개막되었다.

“보나 마나 1승도 못 올릴 텐데. 박정환은 축구 국가 대표팀에 분노하려나, 큰소리쳤던 한청호에게 화살이 돌아가려나.”

1974년 8월 5일.

미국에서 워터게이트 사건의 결정적이 증거물인 녹음 테이프가 공개되었다.

며칠 후인 8월 9일.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은 커져 가는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결국 탄핵 위기에 직면하자 결국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미국에서 현직 대통령 사임은 지금까지도 이 사례가 유일하다.

“사우디는 남은 사람들이 알아서 잘해 주고 있으니 안심이야.”

요즘 태수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인수 합병한 기업들을 정리하려니 바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우디에 몇 번 다녀왔을 뿐 한국에서의 일이 바빠 주로 서울에 머문 지 벌써 몇 달째다.

“덥다.”

8월 무더위는 찜통인데, 선풍기 바람은 약하다.

태수가 피곤한 얼굴로 침대 위에 털썩 앉았다.

“에어컨이 필요해. 한수야, 우리 에어컨 사자.”

“미쳤어? 그게 얼마나 비싼데. 전기료도 엄청 먹는다며?”

“돈 벌어서 뭐하겠냐? 이런 데다 쓰자.”

“형이 기업 인수한다고 다 썼잖아. 돈 없어.”

“우리 이번에 인수한 전기, 전자 회사에서 에어컨이나 만들어 팔까?”

책상 위에서 서류를 넘기던 한수가 형을 돌아봤다.

“형, 피곤해 보인다. 오늘은 이만 쉬어. 에어컨 같은 헛꿈 꿀 생각이면 차라리 잠이나 자.”

“그럴 수야 있나. 지금은 달려야 할 때야.”

초기에 인수 합병한 기업들의 현황을 파악하고, 분위기를 바꾸고, 인재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해야 한다.

그걸 태수가 다 하려니 몸이 남아나질 않는 것이다.

“아냐, 이제는 그만 쉬어 가야 할 때야. 이러다 형이 먼저 과로로 죽겠어.”

“이 정도는 끄떡없어.”

지금은 20대의 젊고 창창한 몸뚱이를 갖고 있다.

그리고 청일 그룹에서 일할 땐 더 바쁘게 살았다.

그러나 그걸 알 리 없는 한수는 형이 걱정됐다.

“형은 지금 무리하고 있어.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그리고 일적으로도. 형 얼굴을 봐. 다크 서클이 턱까지 내려왔어.”

한수가 태수에게 다가왔다.

동생의 걱정스런 눈에 태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실제로 요즘 몸이 두 개라도 부족해서 휴식은 물론 잠까지 줄이고 있으니까.

“형, 이번 인수 합병 전부터 태양이 가지고 있는 기업은 자그마치 여섯 개야.”

태수가 설립했던 기업이 태양 광산, 태양 건설, 태양 상사로 세 개.

광산 인수로 인수했던 기업이 태양 중석, 태양 시멘트 두 개.

그리고 박정환이 선물로 준 삼원 건설.

“청일 그룹에서 뜯어낸 기업이 두 개고.”

청일 정유와 청일 중장비가 그것이다.

“이번에 형이 새로이 인수한 기업이 일곱 개.”

오리온 전자, 서양 전기, 성보 목재, 국동 화학, 상우 창호, 조웅 증권, 유성 보험.

장말동과 한수가 추리고, 태수가 돈 냄새를 맡아 가며 고른 알짜 기업들이다.

“거기에 내가 만든 미국 투자 회사까지. 지금 형이 가지고 있는 기업이 대체 몇 개나 되는 줄 알아?”

“16개. 아무렴 내가 덧셈도 못하겠냐?”

“무려 16개나 된다고. 형은 사업 시작한 지 고작 2년밖에 안 됐어. 알아?”

그 얘기를 들으니 절로 기운이 난다.

쉬지 않고 달려와 보니 벌써 딸린 기업이 16개가 됐구나 싶다.

이제 슬슬 기획 조정실을 두고 재벌 기업으로서 나아갈 때가 되었다.

“오일 쇼크 덕을 크게 봤지. 생각보다 수월하게 덩치를 불렸어. 우리도 이제 재벌 반열에 한 발 걸치게 됐다.”

태수의 얼굴에는 미소가 어렸다.

“태양 그룹으로 출범해야지.”

드디어 시작이다.

태수가 드디어 오랫동안 웅크렸던 몸을 일으켰다.

“한수야, 정재계 유명 인사, 그리고 신문과 방송사에 알려야겠다.”

크게 기획하는 행사는 아니다.

하지만 재벌 그룹이 출범하는 것을 알리긴 해야 할 것이 아닌가.

“태양 중장비 앞 운동장에서, 8월 13일 오전 10시에 출범식을 갖는다.”

“알았어.”

“인쇄소 가서 초대장 찍는 건 됐어. 그 정도 일은 아니니까. 그냥 전화나 돌려.”

“그래도 돼?”

“상관없어. 올 사람만 오고 아니면 말지.”

태수는 늘어지게 기지개를 켰다.

그러고는 한수에게 돌아봤다.

“출범식 준비를 위해 장말동 어르신께 다녀와야겠다.”

출범식 준비를 하는데 왜 장말동 어르신께 가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같이 가자. 무슨 일인지 궁금하니까.”

형은 쓸데없이 놀러 가는 사람이 아니다.

분명 꼭 필요한 용건이 있어서 가는 것이다.

“전세 역전을 위해 준비할 게 있어서 그래.”

그게 뭔지 모르지만 기대가 된다.

“어르신이 들으시면 아주 좋아할 제안을 건넬 생각이거든.”

오랜만이다.

돈을 두고 장말동 어르신과 담판 지을 일이 생겼다.

새로운 제안을 제시해 활로를 모색할 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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