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산 찍고 건설 재벌-99화 (99/230)

99. 태양 그룹 출범하다(2)

박 비서의 보고가 이어지자 한청호는 주먹으로 책상을 내려쳤다.

“강태수, 그 자식이 재벌 그룹으로 출범한다고?”

“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은행 대출을 모조리 틀어 잠갔는데, 어떻게 덩치를 불렸는지 이해할 수 없다.

“미꾸라지 같은 놈! 대출 없이 용케도 빠져나갔구나!”

하지만 빠져나간 미꾸라지는 또 잡으면 그만이다.

사방에 넓게 그물을 치면 다시는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다.

“우리도 전화 돌려!”

“무슨 전화를…….”

“청일 호텔 착공식 한다고 전화 돌려!”

한청호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같은 날, 같은 시각에 우리도 착공식 연다. 그럼 사람들은 강태수와 나, 둘 중 누구를 택할 것 같나?”

한청호는 재벌 그룹으로 우뚝 선 지 오래된 강자이다.

그에 반해 신생 재벌 그룹으로 도약하는 강태수는 상대가 안 된다.

기업 덩치로도, 영향력으로도, 자본금으로도, 이름값으로도.

그 무엇도 한청호와 견줄 수 없을 것이다.

“이참에 똑똑히 보여 주지. 누가 더 우위인지!”

강태수의 태양 그룹 출범식엔 파리만 날리게 될 것이다.

* * *

명동 장말동의 집.

8월 찜통더위에 장말동은 부채를 팍팍 부쳤다.

“이 시간에 예까지 무슨 일이냐? 지금이면 한창 서류에 코 박고 일하느라 코빼기도 안 보이던 놈이?”

“돈 좀 빌려주십시오.”

“뭐? 돈?”

옳다구나, 하고 장말동이 달려들었다.

돈 빌려주는 거야 장말동의 특기이자 직업이 아닌가.

장말동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눈을 반짝였다.

“사채냐, 대출이냐?”

“은행까지 세운 분이 아직도 사채놀이를 하십니까?”

사채 동결조치 이후 사채 시장은 많이 움츠러들었다.

그래도 음지에서는 여전히 사채가 성행하고 있다.

예전만큼 큰 규모로는 돌리지 못해도 작은 돈으로 용돈 벌이는 짭짤하게 올리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돈이 왜 필요한 게냐? 네놈 돈 많은 거야 내가 제일 잘 안다만.”

“예비 자금이 부족합니다.”

장말동의 눈이 반달 모양으로 휜다.

아주 마음에 드는 상황이었다.

“박정환의 비밀 금고를 턴 돈이 제법 두둑할 텐데?”

“아시잖습니까? 그건 기업 인수에 들어간 거.”

“계산이 안 맞잖느냐.”

장말동이 부채로 좌탁을 탕탕 내려쳤다.

“비밀 금고 털었잖느냐. 그 많은 돈과 부동산을 가진 자네야. 그동안 인수한 기업이라고는 고작 일곱 개뿐인데, 돈 없다는 게 말이 되느냐?”

“누가 일곱 개뿐이랍니까?”

태수는 씩 웃었다.

“한국에서만 일곱 개죠.”

장말동의 눈이 가늘어진다.

“그게 무슨 소리냐?”

“제가 처한 상황을 모르십니까?”

안다.

그걸 왜 모르겠는가.

“제 기반은 보잘것없습니다. 사우디에서 공사를 따 왔다고 해도 금액을 대부분 뻔히 알 수 있는 정도죠.”

몰리브덴과 석회 광산.

시멘트 공장과 태양 건설, 태양 상사.

그리고 청일에서 뜯어낸 중장비와 정유 회사다.

“태양 정유와 중장비로 석유 파동 덕에 재미를 많이 봤다고 해도, 석유 공급권을 가진 다른 재벌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거기에 은행들은 일제히 대출을 거부했죠. 사채도 규모가 대폭 줄었고요.”

“그거야 전부 다 아는 소리가 아니냐.”

“바로 그래서 문제인 겁니다.”

장말동의 눈이 동그래진다.

태수는 마저 설명했다.

“돈 나올 곳이 뻔히 없는 걸 다 아는데, 무슨 돈이 있어서 더 많은 기업을 현금으로 전부 인수하겠습니까? 당장 중앙 정보국이나 세무 조사가 안 나올까요?”

“남 눈치 보느라 기업을 몇 개밖에 인수 안 했다는 소리더냐?”

이 또라이는 그럴 놈이 아닌데.

기회가 왔다 싶으면 화끈하게 달려들어 대차게 지르는 놈이 아닌가.

“그럼 나머지 비자금은 네놈 주머니에 숨겨 뒀단 소린데, 왜 돈 없단 소리가 나와?”

“아까 말했듯이 기업 인수하는 데 그 돈을 전부 써 버렸으니까요.”

그제야 장말동이 감을 잡았다.

“오호라. 해외 기업을 인수하는 데 썼다는 소리구나.”

“네.”

“대체 무슨 기업을 인수하는데 그 많은 돈을 다 써 버렸더냐?”

“은행이요.”

“뭐라?”

지금 해외 은행을 인수했다는 소린가?

“길이 없으면 길을 찾으면 됩니다. 찾을 길도 없으면 길을 닦아 만들면 그뿐입니다.”

태수는 딱 잘라 말했다.

“은행이 필요한데 은행이 없으니 아예 은행을 인수해 버렸습니다.”

장말동은 입을 떡 벌렸다.

“은행이 필요한데 은행이 없으니 아예 은행을 인수하겠단 발상은 대체 누구 머리에서 나오느냐?”

환경을 탓하는 대신 스스로 길을 만들면 된다.

“한청호와 박정환이 제 손발과 숨통을 묶겠다고 나오는데, 가만히 앉아서 당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박정환의 비밀 금고를 털지 않았다면 뚫을 수 없는 활로였다.

“엄밀히 말하면 제가 인수한 건 아닙니다. 금산 분리에 관한 법은 외국에서도 비슷합니다.”

금산 분리(金産分離).

금융과 산업 자본을 분리하겠다는 취지의 법이다.

부실 기업을 생산하여 경제 전반에 미칠 악영향을 막기 위해서 만든 법이었다.

“박정환과 한청호가 그 법을 악용하여 오히려 저를 괴롭히고 있으니 저도 그걸 피해 살길을 모색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으음, 나 역시도 음지에서 양지로 나오면서 박정환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처지가 되었구나.”

박정환의 횡포를 겪어 본 장말동은 태수의 결심을 이해할 수 있었다.

“믿을 수 있는 자가 해외 은행을 통해 절 지원하는 형식이 될 겁니다. 조만간 한국 지사를 세워 한국에도 진출할 겁니다.”

“그 사람은 대체 누구냐? 한수는 아닌 것 같은데.”

“외국인입니다.”

태수는 씩 웃었다.

“적임자가 마침 해외에 머물고 있었거든요. 어차피 한국에는 들어오지 못하는 김에 이참에 아예 외국인이 되었죠.”

태수는 그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모든 일이 마무리되었다는 연락이 오기를.

“아무리 그래도 은행 인수라니. 허…….”

“어르신도 은행을 설립하지 않으셨습니까? 인수가 설립보다 싸게 먹히잖습니까.”

지금은 전 세계가 발칵 뒤집힌 때다.

위기는 곧 기회의 다른 말이다.

“세계 제1차 오일 쇼크로 전 세계가 발칵 뒤집힌 건 마찬가집니다. 중동 산유국에 빨대 꽂아 제 배를 불리던 석유 회사들이 쫓겨났고, 주식은 연일 폭락했습니다.”

“그랬지.”

“석유를 기반한 산업이 연일 호황이었던지라 경제 규모상 한국보다 그 타격도 훨씬 심하게 받았습니다.”

“그래서?”

“유럽 석유 회사 주식과 기업들이 줄도산이 나면 은행 역시 도산이 났죠. 그걸 사들였습니다.”

장말동이 눈을 빛냈다.

“외국 은행을 싸게 인수하느라 비자금을 다 썼다?”

“아마 다 쓰게 될 겁니다. 현재 미국 은행을 인수하여 절차를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지금 영국과 일본, 홍콩 은행도 알아보는 중입니다.”

“허…….”

태수가 자신만만한 이유였다.

“박정환이 손댈 수 있는 건 결국 국내 은행뿐이잖습니까?”

태수가 굳이 해외 은행에 손을 뻗은 이유다.

“사업을 하는 사람에게 은행 대출 하나 없이 살림을 꾸리라는 건 불가능한 요구가 아닙니까.”

“그렇지.”

“하지만 박정환은 제게 그걸 요구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박정환은 태양과 관련된 모든 것에 일체 대출과 투자를 금하고 있었다.

투자금을 들고 왔던 사람도 서둘러 발을 빼 버린 상황이다.

“제겐 담보로 내놓을 것들이 많습니다.”

굳이 담보를 잡을 필요가 없어서 그렇지.

태수가 갖고 있던 사업들은 부채 하나 없이 튼튼한 알짜 중에서도 알짜 기업이 아닌가.

“사업을 확장해야 할 때, 시설을 확충해야 할 때, 새로운 영역을 개발할 때 전부 목돈이 듭니다. 투자 없이 커 나갈 수 없는 구조입니다.”

그러니 한청호가 제일 먼저 은행부터 찾았던 것이 아닌가.

박정환에게 청을 올린 것도 은행의 대출 금지였다.

“담보가 있는데도 대출을 받을 수 없다. 사업을 확장해야 하는데도 현금이 없어서 손만 빨고 있다. 이걸 두고 보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제 보니 네가 그동안 반년이나 숨을 죽이며 이때를 기다렸구나.”

태수는 빙그레 웃는다.

“그런 이유로 예비 자금이 부족합니다. 급할 때 도움 좀 빌립시다.”

태수는 장말동에게 처음 했던 말을 다시 던졌다.

“돈 좀 빌려주십시오.”

장말동이 피식 웃었다.

“그래, 담보는 무엇이냐?”

장말동은 옛날이고 지금이고 담보부터 찾는다.

여전하다.

직업병이 따로 없다.

“또 옛날처럼 실랑이 시작할까요? 이율부터 정보까지.”

“싫다!”

장말동이 치를 떤다.

그 또라이 짓을 또 당하라고?

“어르신, 제가 사우디에 무기 중개까지 했는데, 수수료는 제대로 주셨습니까?”

“…….”

장말동의 말문이 턱 막혔다.

중개 수수료 따윈 안 줬다.

그냥 먹고 입 닦았다.

“그럼 제가 서구 석유 회사가 곧 망할 거라는 정보 값은 받았습니까? 투자 수익에 기여한 대가는 청구합디까?”

“…….”

안 받았다.

태수는 귀한 정보임에도 최무룡이 잡으라며 그냥 던져 줬다.

덕분에 장수 은행은 제법 큰 수익을 올렸다.

그 수익도 장말동 혼자 꿀꺽했다.

“제가 최무룡 잡으라고 구체적인 계획까지 짜 줬지요. 제가 이 값은 받았습니까?”

“…….”

안 받았다.

하필이면 한청호가 끼어들어 최무룡 은행에서 달러를 빼 가는 바람에 최무룡 은행도 못 먹었다.

차라리 그때 최무룡 은행을 먹었으면 약속대로 수익이라도 나눠 가지는 건데.

“청일 중장비 서류로 돈깨나 만지셨지요? 박정환 금고에서 나온 명단 덕분에 친일파 놈들에게서 뒤로 돈깨나 뜯어내셨지요?”

“…….”

“동맹이라면서요. 그런데 저한테 남처럼 담보 운운하십니까?”

“그렇다고 큰돈 빌려주는데, 담보를 안 받고 빌려주는 경우가 어디 있더냐?”

“투자요. 이참에 저한테 투자 좀 하시죠.”

“…….”

장말동은 번번이 말문이 막혀 입을 다물었다.

그때 장지문이 드르륵 열리면서 한복을 입고 있는 안정우가 들어왔다.

“적당히 좀 잡아라. 아주 쥐 몰이를 하는구나.”

“오셨습니까?”

안정우가 성큼성큼 들어와 장말동의 자리로 간다.

장말동은 재빨리 자리를 내어놓는다.

이젠 태수도 둘의 서열을 알고 있으니 굳이 숨기지 않기로 한 것이다.

“얼마나 필요하냐?”

“생각보다 많이 필요합니다. 얼마나 빌려주실 수 있습니까?”

“자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많이.”

솔직히 놀랐다.

이렇게 흔쾌히 빌려줄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동맹이란 이름으로 조금 유리한 거래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자네 말이 다 맞지 않나.”

안정우는 시원하게 말했다.

“자네 덕분에 무기와 군수물자도 많이 팔았고, 석유 회사 주식으로 수익도 꽤 올렸지. 자네 동생이 투자한 곳에서도 제법 재미를 봤어.”

안정우는 태수가 마음에 들었다.

동지로서 믿고 있기도 하다.

태수의 거침없는 행보도 만족스럽다.

“자네에게 투자하지.”

심지어 빌려주는 것도 아니고, 투자하겠단다.

“무기 밀매한 돈도 세탁해서 장수 은행에 여윳돈이 제법 쌓였어.”

“저한테 은행 대출 금지가 떨어진 거 아실 텐데요?”

“알지.”

“박정환에게 단단히 찍히면 앞으로 곤란할 텐데요.”

“각오하지.”

어려운 문제인데 너무 흔쾌히 나온다.

그래서 의심스럽다.

-대가 없는 호의는 돼지고기까지다.

‘선뜻 쇠고기를 사 주겠다는데, 의도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군.’

태수는 솔직하게 물었다.

“제게 뭘 원하십니까?”

“원하는 거야 많아. 일단 자네가 내 사위가 되길 원하지.”

그건 안 될 말이다.

“돈에 팔려서 장가가는 건 제 스타일이 아닙니다.”

“알아. 그러니 내게 뭘 원하느냐 물으면 안 되지. 뭘 해 주면 되겠냐고 물어야지. 자네는 나한테 뭘 해 줄 수 있나?”

“많은 걸 해 줄 수 있을 겁니다.”

돈과 권력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지만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거기에 수완과 자원이 추가로 붙는다면 사실상 대부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지금 할 수 있는 건 지금 해 드리고, 지금 할 수 없는 건 나중에 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제가 뭘 원하느냐고 물은 겁니다.”

“하하, 뭐든 말해 보라는 태도로구나. 결혼만 빼고 다 해 줄 수 있다는 거냐?”

“제게 불가능한 걸 요구하실 분이 아니란 것을 압니다. 그러니 대부분은 해 드릴 수 있을 겁니다. 다만 걸리는 시간이 문제겠죠.”

태수는 자신만만했다.

“태양은 기획 조정실을 만들고 재벌 그룹으로 출범할 겁니다. 그러니 지금보다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아질 겁니다.”

“알아, 태양 그룹 출범식 초대장 받았으니까. 하긴, 계열사가 벌써 16개나 되는데 이젠 재벌 그룹으로 나아가야 할 때지.”

안정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난 자네의 능력을 인정해.”

사업한 지 고작 2년 만에 재벌 기업으로 발돋움한단다.

자수성가의 대명사라는 금산도 이렇게 빨리 성장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자네에게 투자하는 거야. 자네의 미래를 사고 싶네. 이참에 자네 덕 좀 봐야지.”

“그런 거라면 좋습니다.”

태수도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태양 그룹을 대한민국 최고의 재벌 기업으로 키울 겁니다. 그러니 그때가 되면 지금 어르신의 투자는 크게 빛을 보겠죠. 그건 장담할 수 있습니다.”

“패기만만해. 아주 마음에 들어.”

안정우는 크게 웃었다.

태수는 말했다.

“어르신께서 그리 결심해 주셨으니 저를 도우면서도 박정환의 분노를 사지 않을 방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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