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박정환의 비밀 금고를 털다(1)
장말동은 입술을 씰룩댔다.
“네놈의 세 가지 용건 중에 최소한 한 가지는 알겠다. 이거 맞지?”
장말동은 추리고 있던 서류 뭉치 더미를 부채로 가리켰다.
“맞습니다.”
태수는 씩 웃었다.
장말동은 의기양양해서 웃었다.
“알짜 기업들을 제대로 추려 놨다.”
장말동이 부채를 하나씩 가리키며 말한다.
“요쪽은 금융과 보험, 요쪽은 건설, 요쪽은 부품 공장, 요쪽은 완구, 요쪽은······ 아, 헷갈리니 네놈이 직접 확인하거라. 내가 이것까지 해야겠느냐? 에잉!”
태수는 반대편 구석에 덥수룩하게 쌓인 서류 뭉치를 보며 물었다.
“그럼 저쪽에 쌓인 서류는 뭡니까?”
“그건 쭉정이야. 여태 힘들게 부실한 놈들 골라 놨으니까 그쪽은 눈길도 줄 것 없다.”
한수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르신이랑 몇 분이 더 도와주셔서 몇 시간 동안 이 작업만 계속하고 있어. 힘들어 죽겠다.”
“고생했다.”
태수가 웃으며 가져온 걸 내밀었다.
“열심히 일하느라 당 떨어지셨을 텐데 요걸로 입가심이나 하십시오.”
장말동이 부채를 살살 부치면서 곁눈질한다.
“그건 무엇이냐?”
“오다 양과자 파는 곳이 있어서 어르신 간식으로 사 왔습니다.”
“그런 거라면 진즉에 내놨어야지. 어디 보자.”
쿠키가 곱게 포장되어 있었다.
장말동은 눈을 빛내며 웃었다.
“예쁜 놈이 하는 짓까지 예쁘구나. 그러니 내가 우리 아가씨를······.”
“됐습니다. 자꾸 그런 말 하시면 여기 발길 끊겠습니다.”
“에잉, 사내가 적당히 튕겨야지 네놈은 단호해도 너무 단호해!”
암만 옆구리 찔러 봤자 꿈쩍도 하지 않는 단호한 놈이다.
장말동은 아쉬워서 입맛을 쩝쩝 다셨다.
“아까 말했듯이 제가 이곳에 온 용건은 모두 세 가지입니다.”
태수는 말했다.
“첫째, 이번에 태양에서 인수할 알짜 기업에 대해 정보를 얻고자 왔습니다.”
그건 장말동이 이미 맞추었다.
장말동이 어깨를 으쓱하며 웃는다.
“둘째, 청일 중장비와 청일 정유 사무실에서 압수해 온 서류를 제대로 정리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귀찮은 일을 왜 내게 떠넘기느냐? 싫다!”
말은 저렇게 하면서도 끙끙대며 서류 분류 작업하는 거 이미 다 봤다.
“한청호의 약점입니다. 한청호가 눈이 벌게져서 찾으러 왔어요. 그 서류의 중요성은 더 말 안 해도 아실 테고.”
태수는 빙그레 웃었다.
“믿을 수 없는 사람에겐 애초에 이런 말도 안 꺼냅니다. 제가 며칠 밤을 새워서라도 혼자 찾고 말지.”
그만큼 장말동을 믿는다는 뜻이다.
장말동의 입가가 자꾸만 위로 씰룩댄다.
애써 미소를 참기 위해서 몰래 허벅지까지 꼬집는다.
“게다가 명색이 정보 상인이잖습니까. 그걸 이용하면 한몫 단단히 벌 수 있는 정보가 우수수 쏟아질 겁니다.”
이걸 뒤지고 정리하다 보면 청일 그룹 자금 내역과 비자금에 대한 실마리가 보일 것이다.
그 와중에 얽히고설킨 정보들을 취합하면 제법 그럴듯한 그림이 그려진다.
“이건 돈 주고도 못 구할 귀한 정보 더미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건 그렇다.
그렇기에 장말동이 제일 먼저 좋다고 달려들지 않았던가.
“대가로 뭘 원하느냐?”
“우린 동맹이 아닙니까. 서로 너무 야박하게 살지 맙시다.”
“이걸 그냥 공짜로 주겠다고?”
“정 부담스러우면 알아서 챙겨 주시던가요.”
“크흠!”
말문이 턱 막힌 장말동이다.
그래서 슬쩍 말을 꺼낸다.
“그럼 고마운 마음을 듬뿍 담아 보답하는 의미로, 우리 아가씨를······.”
아가씨란 말만 나오면 단호하게 자르는 태수가 아닌가.
“마지막 용건입니다. 한청호의 동향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은행장들을 만났다던데요.”
“만났지.”
장말동은 장수 은행의 은행장이 아닌가.
아까 한청호는 태수에게 말했다.
-내가 여기 왜 늦었겠나? 은행장들을 만나고 오는 길이다.
-어떤 은행도 네겐 단 10원조차 대출해 주지 않을 거야.
-기한을 정해 두지 않은 대출 막기. 넌 어떻게 뚫을 셈이냐?
장말동은 말했다.
“은행장들을 모아서 대출을 요구했다. 덧붙여 대출 기한 연장 및 금리 인하까지 요구하더구나.”
“어떻게 됐습니까?”
“대부분 한청호 뜻대로 되었다.”
“태양에 은행 대출을 막는다는 것도 사실입니까?”
“그래, 위에서 압박이 들어왔다.”
장말동이 손가락을 들어 위를 가리켰다.
“박정환이 손을 썼어. 그러니 은행장들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망할 놈, 은행을 제 손안에 두고 좌지우지 흔들어 대. 아주 제멋대로야. 에잉!”
태수는 눈살을 찌푸렸다.
“한청호가 요구한 건 얼마나 받아들여졌습니까?”
“추가 대출 350억에 금리 3% 추가 인하. 기존 대출 5년 거치 기간 연장.”
말도 안 되는 조건이다.
“담보는?”
“을지로 호텔 설계도.”
태수는 뒤통수에 망치를 맞은 기분이 들었다.
“을지로 호텔이요?”
전생에서 청일엔 을지로 호텔 따윈 없었다.
장말동은 말했다.
“정부 소유의 반도호텔과 국립중앙도서관이 있던 자리에 들어설 호텔이야. 네놈이 사우디에 있는 동안 반도 호텔은 철거를 준비했고, 국립 중앙 도서관이 남산으로 옮겨졌어.”
어느 호텔인지 알겠다.
전생에 그 호텔은 샤를롯 호텔 서울이었다.
‘샤를롯 호텔 서울을 가지게 되면서 샤를롯이 호텔과 면세, 쇼핑으로 눈 돌리게 된 계기가 되었지. 샤를롯의 브랜드 이미지를 구축한 최고급 호텔이고.’
서울 중심지에 위치한 5성급 호텔이다.
한국 샤를롯 그룹의 본사가 위치할 곳이며 훗날 샤를롯 백화점이라 불리는 샤를롯 쇼핑 센터 본점이 들어선다.
또한 훗날 명품관인 에비뉴와 쇼핑몰 영플라워 등 건물로 이어져 샤를롯 타운을 이루게 되는 곳이 아닌가.
“규모는 어느 정도랍니까?”
“규모가 대단해. 설계도를 봤는데 지하 3층부터 지상 34층인가 38층이야. 객실이 무려 1,000개가 넘더라고.”
확실하다.
그곳이 맞다.
태수는 눈을 감았다.
“거긴 원래 청일이 지을 호텔이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맞아. 샤를롯이라고 일본에서 껌이랑 사탕, 과자 같은 거 팔던 기업이 짓기로 했었지. 설계도까지 다 나온 마당이야. 그런데 박정환이 돌연 마음을 바꾸었어, 에잉!”
박정환이 돌연 마음을 왜 바꿨을까.
한청호는 무슨 수작을 부렸을까.
이건 단순히 뇌물 정도로 마음이 바뀔 만한 일이 아닌데.
‘3년 전 샤를롯 제품에서 쇳가루가 나오면서 제과 관련 제조 정지 3개월을 때렸다. 이것을 풀어 주는 조건으로 박정환이 먼저 제시한 게 최고급 호텔 건설이었어.’
박정환은 쉽게 말을 바꾸는 사람이 아니다.
국가 원수의 말은 무게가 있어야 하는 법이라며 말 바꾸는 것을 질색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 어려운 일을 한청호가 해냈다.
“이번에 박정환이 샤를롯에 전보를 보냈다더군. 호텔 공사에서 손을 떼라는 통보였을 거야.”
아마도 그럴 것이다.
한청호가 샤를롯 호텔 설계도를 손에 얻었다.
샤를롯이 순순히 내놓지는 않았을 테니 박정환이 빼앗아 한청호에게 준 게 분명하다.
“그도 그럴 것이 샤를롯의 신군호가 일본에 틀어박힌 채 3년이나 흐지부지 시간을 끌지 않았나.”
전생에선 3년만 시간을 끈 게 아니다.
샤를롯 제과에 제조 정지 명령을 내린 게 70년 11월 13일이다.
같은 날 박정환은 직접 일본에 머물던 신군호 회장을 청와대로 불러 독대했다.
그때 결정된 것이 바로 이 샤를롯 호텔 서울의 건축이었다.
“차일피일 시간을 끌면서 국립 중앙 도서관 인수에 한 세월, 반도 호텔 운영에만 눈이 멀어서 또 한 세월, 철거도 지지부진하게 끌다가······.”
장말동은 혀를 찼다.
“누가 봐도 신군호가 일본 사업만 중시하며 박정환을 무시했다고 여길 수 있는 상황이 아닌가. 한청호 말로는 박정환이 도저히 두고 볼 수 없다고 했다더군.”
한청호가 박정환을 꼬드겨 샤를롯 호텔 서울을 가로챈 것이다.
‘한청호는 청일 정유를 내놓은 대신 박정환에게 호텔을 요구했구나.’
어쩐지 금성 호텔 룸을 나올 때 의기양양하게 독기가 가득하더라니.
그때 이걸 얻어 낸 게 분명하다.
“그뿐만이 아니야. 한청호가 요즘에 축구장을 만들겠다고 대출을 끌어오고 있어.”
“축구장이요?”
청일 그룹에 축구라니.
청일은 야구단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 역시 전생과 달라진 점이다.
“박정환이 흔쾌히 허락했다더군. 국제 축구 대회에만 나갔다면 1승조차 못해서 쪽팔리지 않나. 이해는 해.”
한청호가 박정환을 축구로 들쑤셔 놓았구나.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대략 알겠군.’
태수는 잠시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똑딱똑딱.
방에는 시계 소리만 난다.
한참이나 잠자코 있던 장말동이 입을 열었다.
“한청호가 가만히 앉아서 당하진 않을 텐데. 네놈은 후환이 두렵지도 않으냐?”
“한청호는 저와 제 가족의 안전을 위협하지 못합니다.”
“왜?”
“제가 협박했거든요. 건들기만 하면 청일을 통째로 박살 낼 핵폭탄을 들고 있다고.”
장말동이 참지 못하고 엉덩이를 들썩였다.
“그게 뭐냐? 나도 좀 알자.”
“저 서류를 찾다 보면 윤곽이 잡힐 수도 있습니다. 아주 꽁꽁 숨겨 놨을 테지만 그래도 실마리가 나올 겁니다.”
그렇지 않다면 한청호가 헐레벌떡 달려오진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중요한 비밀이 서류들 사이에 숨겨져 있다는 뜻이다.
“그게 무슨 소리야? 네놈이 벌써 한청호를 협박했다면서? 뭐로 협박했냐니까?”
“알면 다칩니다. 나중에 알려 드리겠습니다.”
“에잉! 비싸게 굴기는!”
장말동이 들고 있던 부채로 좌탁을 탁탁 친다.
“그냥 빵 터트려 버려. 아끼다 똥 된다! 그놈이 얼마나 무서운 놈인데, 약점 잡힌 것을 가만히 두고 보겠느냐?”
“압니다.”
“그걸 아는 놈이 이리 천하태평이야? 한청호는 벌써 흔적부터 지우고, 몸을 뺄 준비를 해 놓을 게야.”
약점이 잡혔다는 것을 알면 누구나 그걸 무용지물로 만들고 싶어 한다.
흔적을 지우고, 알리바이를 만들고, 증거를 없애고, 사람을 매수할 것이다.
하지만 태수는 고개를 젓는다.
“그러지 못할 겁니다.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 없을 만큼 사안이 큽니다.”
“그러니까 그게 뭐냐니까!”
“명색이 정보 상인이 아닙니까? 저한테 묻기 전에 제게 먼저 알려 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에잉! 차라리 나 궁금해서 뒈져 보라고 약 올리는 중이라고 해라!”
장말동은 토라져서 고개를 홱 돌린다.
그 덕분에 태수의 쓴웃음은 보지 못했다.
‘저도 그러고 싶습니다. 하지만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으니 어쩝니까?’
태수는 남몰래 한숨을 삼켰다.
누구보다 청일을 무너뜨리고 싶은 사람이 태수다.
‘송 비서가 듬성듬성 가져온 자료만으로는 결정적인 증거가 안 돼. 빠져나가려면 얼마든지 빠져나갈 수 있어.’
바로 그게 문제였다.
송 비서가 열심히 모아 놓은 자료가 구멍이 숭숭 뚫린 빈껍데기라는 것.
한청호의 눈을 피해 안간힘을 쓰며 준비했지만 그런 극비 사안의 증거를 얻는 게 쉬울 리가 있나.
‘만일 확실한 증거였으면 송 비서님이 먼저 터뜨렸지. 나 역시 각오하고 터뜨렸을 테고.’
태수는 아쉬움을 삼켰다.
‘하지만 윤곽만은 어렴풋이 잡을 수 있었다. 한청호는 박정환의 분노를 이끌어 낼 만한 위험한 짓을 벌이고 있어.’
전생에서 청일 그룹 총괄 비서실장이자 총수 일을 하고 있던 태수다.
하지만 이번 사안만은 전혀 몰랐다.
‘이건 청일 그룹 정보 열람실에서도 찾을 수 없었던 일이야. 그만큼 철저히 비밀리에 다루었단 뜻이기도 하고.’
한청호 성격에 오죽 주의를 기울였을까.
‘어쩌면 한청호가 그 비밀을 치부책에는 남겨 놨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치부책은 한일권이 가지고 있었고, 난 한 번도 본 적이 없지.’
그랬기에 송 비서가 처음 그 공책을 가져왔을 때 태수는 깜짝 놀랐다.
처음 보는 비사(秘事)가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으로서는 고작 한청호를 위협해 겁주는 수밖에. 똥패 들고 큰소리치는 포커 게임이 따로 없군.’
그마저도 한청호가 눈치채면 모두 허사가 된다.
태수가 눈에 불을 켜고 서류를 뒤지는 이유다.
실마리.
하나만 제대로 건지면 어떻게 그걸 타고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르신께서 이 서류 중에서 실마리를 찾아내면 그때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좋다! 내 궁금해서라도 반드시 그놈의 실마리, 찾아내고야 만다!”
장말동이 의욕을 활활 불태웠다.
* * *
서울 성북동의 고급 요정인 대운각(大雲閣).
70년대의 대표적인 요정으로 박정환과 차기범, 태수가 은밀히 만났던 곳이다.
인수 합병이 끝나자마자 이곳을 찾았던 한청호는 저녁에도 이곳에 있었다.
“각하. 한 잔 받으시지요.”
한청호는 무릎을 꿇고 청자 빛 술 주전자를 공손히 들었다.
박정환이 잔을 내밀었다.
“금산의 장 회장에게 계약서를 받았다.”
박정환은 계약서를 보고 눈을 의심했다.
청일 정유만 넘기기로 했었는데, 청일 중장비까지 고스란히 빼앗겼기 때문이다.
“10원에 넘겨? 거기다가 부채는 전부 자네가 떠안고?”
박정환의 눈빛이 가라앉는다.
“말해 봐. 그놈한테 무슨 약점 잡혔어?”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겠나.
이 바닥 생리를 누구보다 잘 아는 박정환이다.
더구나 눈앞에 있는 자는 한청호가 아닌가.
‘올 것이 왔구나.’
박정환에게 솔직하게 대답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한청호는 재빨리 잔머리를 굴렸다.
“제 약점이 아닙니다. 각하의 약점입니다. 그러니 제가 별수 있었겠습니까?”
박정환의 눈썹이 꿈틀댄다.
“무슨 약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