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청일 중장비가 아닙니다(4)
“됐어! 볼일만 마치면 바로 갈 테니까!”
한청호는 눈을 돌려 사장실 책상을 빼앗긴 얼간이를 찾았다.
사장실 구석에 커다란 회의실용 테이블을 두고, 자료를 쌓아 둔 채 끙끙대는 두 놈이 보인다.
눈만 마주치면 싸우기로 유명한 앙숙인 사장 둘이 머리를 맞대고 사이좋게 일하고 있었다.
한청호에게는 너무나 낯선 광경이었다.
“지금 둘이서 뭐하는 건가?”
“사장님이 알아서 처리해 주십시오. 전 바쁘니까 말 시키지 마시고요. 용건은 나중에.”
청일 중장비의 이창원이 고개도 들지 않고 손을 휘젓는다.
서류에 코를 박고 일하느라 정신없다.
게다가 청일 정유의 노일국 역시 한청호는 깨끗이 무시하는 게 아닌가.
“이놈들아! 나야, 한청호!”
노일국이 그제야 고개를 들어 한청호를 발견했다.
그런데 어째 표정이 똥 씹은 표정이다.
노일국이 팔꿈치로 이창원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고개를 든 이창원도 한청호를 발견했다.
“다들 뭐 하냐고 물었다.”
대답은 태수가 대신 했다.
“보면 모릅니까? 일 하잖습니까.”
“그러니까 무슨 일?”
“내가 그것까지 말해야 합니까?”
한청호는 태수를 무시하고 크게 외쳤다.
“야, 이창원이! 노일국이! 당장 일어서! 청일로 돌아간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둘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슥슥, 사각사각.
펜 움직이는 소리만 바쁘게 들린다.
자료 넘기는 소리도 간간이 들린다.
바쁜 부하 직원들을 대신해 이번에도 태수가 대답한다.
“여기서 청일로 돌아갈 사람은 회장님과 그쪽 비서밖에 없습니다만.”
이젠 태양 중장비 전무고, 태양 정유 전무다.
중장비 및 정유 식구들도 전부 고용 계약서에 사인하고 소속을 옮긴 후다.
태수가 딱 잘라 말한다.
“이 건물에 있는 사람들, 전부 청일 직원이 아니라 태양 직원들입니다. 그러니 헛물켜지 마시고 그만 돌아가시죠.”
“강태수······!”
“참, 온 김에 이것들 가져가시죠.”
태수가 사장실 책상 한쪽에 쌓아 뒀던 서류 뭉치를 가리켰다.
한청호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건 뭐냐?”
“청일 정유 직원들 사직서입니다.”
태수가 직접 서류 뭉치를 들어 박 비서의 품에 떠안겼다.
박 비서는 얼결에 받아 듣고 억 소리를 절로 냈다.
휘리릭 넘겨보니 정말로 청일 정유 직원들이 낸 사직서다.
“허······.”
심지어 사직 이유도 짧다.
<스카웃>
대충 휘갈긴 한 단어짜리 사직서가 왜 이리도 많은가.
급하게 작성한 태가 곳곳에서 보인다.
박 비서는 태수를 노려보며 말했다.
“청일 중장비 직원들 사직서는 없군요.”
“청일 중장비는 인수 합병됐잖습니까? 당연히 직원들까지 딸려 오는 거 아니겠습니까?”
한청호가 이창원과 노일국을 매섭게 노려본다.
“그래서 지금 너희가 청일을 버리고 회사를 갈아탔다는 거야?”
역시 바쁘게 일하는 직원들 대신 대답은 태수가 한다.
“지금 이런 상황이 싫으셨으면 애초에 회장님이 인수 합병 계약서에 사인하지 마셨어야죠.”
“나도 그 계약서에 사인하기 싫었어! 강태수, 네놈이······!”
태수는 딱 잘랐다.
“보시다시피 지금 다들 바쁩니다. 그런 이유로 회장님 배웅은 못해 드리니까 오셨던 대로 알아서 가시죠.”
예전에 태양 광산 사무실에 한청호에게 했던 말이었다.
한청호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석유 공급처를 뚫지 못했던 노일국은 그렇다 쳐도, 중장비를 맡아 일 잘하던 이창원은 많이 아쉬웠다.
“이창원이, 네 입으로 대답해 봐. 나랑 같이 청일 본사로 안 갈 테냐?”
“안 갑니다.”
이창원은 서류에 코를 박고 일하며 건성으로 대답한다.
중장비 기술 개발 연구소 건립에 필요한 계획을 짜고 있다.
3일 내로 대략적인 계획 보고서를 올리려면 몸이 두 개라도 모자를 지경이다.
“여기서 무슨 제안을 어떻게 받았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그 이상을 약속하지. 계열사 사장 자리 내줄 테니까 이리 나와.”
“됐습니다.”
이번에도 이창원은 심드렁하게 대답한다.
태수가 웃었다.
“입에 발린 소리 그만하죠. 계열사 어디 사장 자리를 내줄 겁니까? 강원도 광산 사장? 아니면 방직 공장 사장? 목재소 사장?”
어째 태양 광산에서 태수가 했던 말이 다시 나온다.
정말 그럴 작정이었던 한청호는 태수를 노려봤다.
“그 짧은 시간에 잘도 구워삶았구나, 강태수.”
이번만큼은 태수 대신 이창원이 대답했다.
“내가 사냥갭니까? 구워삶긴 누굴 구워삶습니까?”
말은 바로 해야 한다.
사냥개가 아니라 청일의 개였다.
“야, 이창원이!”
“그동안 함께해서 더러웠습니다. 살펴 가십시오.”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고개를 숙인 이창원이 도로 앉는다.
그 말을 끝으로 이창원은 한청호 쪽으로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는다.
‘이창원은 완전히 돌아섰군. 이 짧은 시간에 용케도······!’
한청호는 노일국을 노려봤다.
“난데없이 중장비가 넘어가서 저놈은 섭섭하다 치고, 너는 왜 거기 껴 있어? 넌 청일 소속이야!”
“박 비서가 들고 있는 정유 직원 사직서들 가운데 제 사직서가 제일 위에 있을 겁니다.”
“야, 노일국이! 네놈까지 넘어갔어?”
“보면 모르십니까? 사표 냈으면 끝이지.”
노일국이 일어서서 한청호에게 가볍게 고개 숙였다.
“저도 그간 더러웠습니다. 배웅은 안 할 테니 알아서 가시죠.”
도로 자리에 앉은 노일국도 서류에 코를 박고 일한다.
전국 주요 도시 주유소 확충에 대한 청사진을 짜고 있다.
거기에 정유 시설, 유조선 및 정유 탱크 및 운반에 관련된 계획 등 신경 쓸 게 많다.
“이 자식들이!”
화가 나서 두 전무에게 다가가려는 한청호.
그 앞을 태수가 가로막았다.
“우리 회사 직원들입니다. 그리고 여긴 남의 사무실이고요. 적당히 하시죠.”
행패를 부리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눈이었다.
“청일 회장님 돌아가신다! 뭐 하십니까? 밑으로 모셔다드리세요!”
옆에서 같이 서류를 검토하던 전(前) 청일 중장비 부사장, 현(現) 태양 중장비 상무가 일어나 한숨을 내쉬었다.
“이만 가시죠, 회장님. 가뜩이나 시간 없는데 방해하지 마시고요. 이대로라면 저희 일 못 끝냅니다. 며칠 야근해도 기한 맞출까 말까 한 상황이에요.”
취객 쫓듯 한청호를 사무실에서 쫓아내려 한다.
한청호는 이를 바드득 갈았다.
“좋다, 대신 내 서류들은 가져가야겠다. 내놔!”
“서류? 그런 게 있었습니까? 전 모르는 일입니다.”
태수가 의미심장하게 웃는다.
그러고 보니 사무실이 이상하게 휑하다.
“여기 있던 케비넷들은 다 어쨌어?”
“전부 버렸습니다.”
“청일 중장비 서류를 전부? 청일 정유 서류들까지?”
“전부. 모두. 일제히. 싹. 다.”
태수는 씩 웃었다.
“회장님이 말씀하셨잖습니까. 전부 쓰레기라고.”
금산 호텔에서 한청호는 말했다.
-넌 쓰레기만 갖게 될 거다, 강태수.
“그래서 쓰레기는 쓰레기 처리장으로 보냈습니다. 정 필요하면 쓰레기 처리장을 뒤져 보시면 되겠군요.”
한청호라면 비밀 장부를 찾기 위해 쓰레기 처리장을 뒤질 것이다.
하지만 정작 서류가 든 케비넷과 서랍은 통째로 명동 장말동의 집으로 보내진 후다.
‘내가 한발 늦었구나!’
한청호는 태수를 매섭게 노려봤다.
“강태수, 우쭐대지 마라. 네놈이 웃기엔 아직 이르다.”
아직 승자는 정해지지 않았다.
“네깟 놈이 아무리 수작을 부려 봤자 청일은 무너지지 않아.”
“적자가 상당하던데.”
비수로 찔러 오는 태수의 말.
“내가 수작 안 부려도 청일은 위태롭던데요. 자칫하면 줄도산할 처지에 남 걱정은.”
하지만 한청호는 코웃음 쳤다.
“내가 여기 왜 늦었겠나? 은행장들을 만나고 오는 길이다.”
은행장들을 움직여 부채에 관해 손을 썼다.
“내겐 그깟 쓰레기 따윈 없어도 그만이다. 하지만 넌 다를 거야, 강태수.”
한청호는 이죽댔다.
“어떤 은행도 네겐 단 10원조차 대출해 주지 않을 거야.”
한청호가 큰소리치는 이유였다.
“각하께서도 이미 허락하신 일이야.”
한청호는 금산 호텔을 나오자마자 청와대로 달려가는 대신 은행장들을 만났다.
그런데 언제 박정환의 허락을 받은 것일까.
“수백억짜리 청일 정유와 청일 중장비를 가져갔으니 이 정도 수작은 각하께서도 눈감아 주시기로 했지. 어떤가?”
한청호는 의기양양했다.
사실 금산 호텔 VIP룸에서 이미 말을 끝냈다.
-각하, 이번 인수 합병이 끝나면 청일에 대출을 막은 것처럼 태양도 대출을 막아 주십시오.
-이유는?
-이번 석유 파동으로 청일 정유엔 부채가 쌓였습니다. 청일 정유를 먹고 싶다면 그 부채 정도는 스스로 책임져야죠. 과실만 먹고 부채는 은행에 떠넘긴다고요? 안 될 말이죠.
박정환은 턱을 쓸며 웃었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대신 제가 이번 인수 합병만 끝나면 바로 일본으로 가겠습니다. 사우디 국방부 장관이 으스대지 못하도록 일본 일은 완전히 마무리 짓겠습니다. 어떻습니까?
-좋아.
다른 뒷거래를 대가로 얻어 낸 허락이었다.
“대출 하나 없이 굴러가는 기업이 몇이나 될까? 하물며 기한을 정해 두지 않은 대출 막기. 넌 어떻게 뚫을 셈이냐?”
사각대던 펜 소리가 동시에 뚝 끊겼다.
이창원과 노일국은 고개를 들었다.
그만큼 심각한 위협이었다.
한청호는 두 팔을 펴며 웃었다.
“마지막에 웃는 자는 결국 내가 될 것이다. 안 그런가, 강태수?”
“착각하는 것 같군.”
태수는 동요하지 않았다.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나도 할 수 있다고 했을 텐데. 그것도 잊었나?”
박정환을 움직일 수 있는 건 한청호만이 아니다.
“강태수, 넌 마지막 남은 카드를 안전을 지키는 데 쓸 셈이냐, 회사를 지키는 데 쓸 셈이냐? 그것부터 결정하고 각하를 만나야 할 거야. 안 그런가? 하하하.”
한청호는 태수가 은행 대출을 뚫기 위해 마지막 남은 카드를 쓸 수밖에 없다고 믿었다.
그러나 태수는 코웃음 친다.
“고작 은행 대출에? 귀한 카드를 그런 데 쓸 수야 없는 일이죠.”
“허세 부리지 마라.”
“그거야 두고 보면 알겠죠. 중요한 건 나한테는 귀한 카드가 있다는 것. 당신에겐 없다는 것. 아닙니까?”
태수는 한청호의 약점을 잡고 있지만 한청호는 태수를 흔들 무기가 없다.
“내가 그걸 터뜨리면 당신은 물론이고 청일 그룹까지 박살 날 거란 거, 알잖습니까.”
태수와 한청호 사이엔 보이지 않는 스파크가 튀었다.
“그깟 필요하지도 않은 쓰레기? 그걸 얻으려고 여기까지 달려온 사람 말을 내가 믿을 것 같습니까?”
태수는 캐비넷을 뜯어 간 자리를 가리키며 웃었다.
“당신도 이만하면 알 텐데. 쓰레기 속에서 보물을 얻는 건 내 특기라는 걸.”
한청호는 적자만 쌓여 가는 청일 정유를 두고서도 쓰레기 운운했던 자가 아닌가.
하지만 태수가 칼리드에게서 석유 공급권을 받으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오일 쇼크로 유가가 치솟았을 때 태수는 석유를 팔아 떼돈을 벌 것이다.
“흥! 마음대로 해 봐라! 하지만 강태수, 조만간 넌 무릎 꿇고 빌게 될 거야. 돈 빌려 달라고.”
“그건 아까 인수 합병 때 당신이 하던 거 아닙니까? 이유를 알려 달라고.”
한청호는 두 전무를 보며 이를 갈았다.
“네놈들도 조만간 내게 무릎 꿇고 빌게 될 거야. 잘못했다고! 한 번만 용서해 달라고!”
“그럴 일 없습니다.”
“회사가 청일만 있나?”
두 전무는 심드렁하게 대답한다.
예전에는 벌벌 떨 정도로 무서웠던 한청호의 엄중한 경고였지만 지금은 하나도 두렵지 않았다.
두려운 건 따로 있었다.
태수가 한청호를 무시한 채 두 전무에게 말했다.
“아직 밑에서 예산안 안 올라왔습니까?”
“20명이 달라붙어 작업하고 있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곧 올라올 겁니다.”
“부지 선정은 검토 끝났습니까?”
“그것도 달라붙어 찾고 있습니다. 현장 시찰도 필요한 일이 아닙니까.”
“지도로 대략적인 윤곽을 잡고, 직원들 파견하죠. 사진 첨부하고, 관련 보고서 올리십시오.”
“안 그래도 파견할 담당자들 추리고 있습니다.”
새로운 사장은 보통이 아니다.
부임한 지 3시간 만에 눈앞이 어지러울 정도로 구르고 있다.
태수가 맡긴 어마어마한 업무량에 과로로 죽을까 두렵기만 하다.
* * *
명동 장말동의 집.
장말동과 한수가 머리를 맞대고 바쁘게 일하고 있었다.
태수가 미리 부탁한 알짜 기업 리스트를 추리랴, 태수가 보내온 청일의 서류를 정리하랴.
눈이 팽팽 돌아갈 지경이다.
“어르신, 오랜만입니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오랜만에 나타나서 늙은이에게 일거리 폭탄을 던지다니. 그러니 내가 안녕할 수 있겠느냐? 에잉!”
장말동이 고개를 홱 돌린다.
트럭으로 실려 오는 서류 산을 받았으니 저런 반응은 당연했다.
“멀뚱히 서 있지 말고 얼른 와서 앉··· 아 있구나.”
평소처럼 성큼성큼 걸어와서 이미 방바닥에 앉아 있는 태수였다.
“제가 이곳에 온 용건은 모두 세 가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