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청일 중장비가 아닙니다(1)
태수는 명동으로 향했다.
장말동의 집 대문 앞에 차를 세운다.
“형, 여긴 왜 온 거야? 아깐 청일 중장비로 간다며?”
“장말동 어르신을 만나야지. 난 청일 중장비에 들렸다가 바로 합류할 테니까.”
한수 혼자 장말동을 만나란 소리였다.
한수는 헛웃음을 지었다.
“내가 무슨 용건으로 장말동 어르신을 만나? 딱히 할 말도 없는데.”
“할 말이야 많지. 투자금 자금 세탁 현황에 대해서 보고해야 할 것도 있고.”
“아······.”
중동에서 무기를 판 돈이 한수의 미국 투자 회사를 거쳐 장수 은행으로 들어가고 있다.
합의 하에 간혹 주식 투자를 대신 하거나, 다른 시설 투자에 돈을 돌리기도 하는 상황이다.
“어르신께 나 대신 리스트 미리 뽑아 달라고 부탁해 줘.”
“리스트? 무슨 리스트?”
“알짜 기업 리스트.”
“알짜 기업? 갑자기 그건 왜?”
“청일 정유 인수하려던 돈이 남았잖아. 대신 다른 회사들을 인수하려고.”
한청호가 얄팍한 수작을 부린 탓에 정당한 값을 치르려고 준비해 두었던 돈이 굳었다.
“이참에 우리도 덩치 좀 불리자.”
안 그래도 요즘 알짜 기업들까지 줄도산을 두려워하는 처지다.
중동 산유국에서 쏘아 올린 오일 쇼크 때문이다.
유가가 갑자기 마구 치솟는 바람에 갑작스러운 경영 악화로 흑자 도산까지 할 지경이다.
“알짜만 골라서 인수하려고.”
1억 배럴의 석유를 팔아 자금이 넉넉한 태수는 두려울 게 없었다.
알짜 기업을 헐값에 인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칠 생각은 없다.
“어르신에게 말하면 알아서 기업 리스트를 줄줄이 뽑아 줄 거야.”
명색이 정보 상인이 아닌가.
게다가 명동 큰손이라 사채업에 은행까지 굴리고 있으니 말해 무엇 하랴.
아마도 여러 기업의 재정 상태를 손바닥 보듯 보고 있을 터다.
“좋아. 그렇게 할게.”
“일단 리스트만 뽑아 놔. 그거 보면서 같이 인수할 기업을 추리자.”
“오케이.”
말만 꺼냈는데도 벌써 돈 냄새가 나는 것 같다.
오일 쇼크란 세계적인 이벤트는 주머니에 돈이 넉넉한 자들만 누릴 수 있는 기회다.
호화롭고 치열한 기업 인수 파티의 장이 열린 것이다.
‘내가 청일 중장비에 다녀오는 동안 한수가 대략적인 윤곽을 잡아 놓겠지. 제법 안목이 쓸 만한 녀석이니 한번 맡겨 보자.’
굳이 한수를 통해 미리 부탁하는 이유였다.
“또 하나 더.”
태수는 차에서 내리려는 한수를 붙잡았다.
“어르신에게 한청호의 동태를 확인해 달라고 부탁해 줘.”
아무래도 금산 호텔 연회장에서의 눈빛이 걸린다.
박정환을 만나고 나오면서 눈빛이 달라진 한청호였다.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있는지 장말동의 정보력이라면 곧 알게 되겠지.’
태수는 자동차에 시동을 걸었다.
청일 중장비 사장실에 갈 시간이다.
‘한청호가 들이닥치기 전에 서둘러야 해. 놈이 증거를 전부 인멸하기 전에.’
한청호가 청일 정유를 비우느라 미처 챙기지 못한 것들이 꽤 남았다.
그걸 청일 정유와 가장 가까운 청일 중장비 사무실로 일단 옮겼다.
중장비 역시 대비해 두지 않았을 테니 한청호가 남긴 흔적들이 꽤 있을 터.
태수가 굳이 청일 중장비를 콕 짚어 인수한 이유였다.
* * *
호텔에서 나온 한청호와 박 비서.
금산의 장준용과 김 비서가 붙들어도 매몰차게 가 버렸다.
차에 오른 한청호가 운전기사에게 말했다.
“여기서 가장 가까운 은행이 어디지?”
“대성 은행입니다.”
“가자.”
한청호가 박 비서를 돌아보며 말했다.
“내가 대성 은행에서 은행장을 만나고 있는 동안 자네는 다른 은행장들에게 전화 싹 돌려. 청일의 한청호가 보잔다고 전해. 장소는 성북동 대운각(大雲閣).”
“약속 시간은 언제로 잡을까요?”
“30분 후.”
너무 빠듯하다.
당장 출발해도 시간에 맞출 수 있을까 의문이다.
하지만 한청호는 그쪽 사정 따윈 아랑곳 않을 것이다.
“늦는 놈은 알아서 하라고 해. 그런 놈은 각하께 보고해 올릴 거라고 전해.”
“회장님, 각하께서는 진즉 은행을 통해 청일에 대출을 금지하셨습니다만······.”
“청일 정유 인수 합병 아까 끝났다! 이번은 각하께서 추진하는 축구장 건설 때문이라고 해! 이유가 뭐가 됐든 은행장들을 불러오기만 하면 되는 것을.”
안 그래도 태수 때문에 화가 난 한청호가 아닌가.
박 비서가 합세해서 필름만 빼앗았어도 이 지경까지 몰리진 않았으리라.
한청호는 박 비서 얼굴만 봐도 화가 부글부글 끓었다.
“이런 머저리 같은 놈이 총괄 비서 실장이라니. 쯧쯧.”
송 비서라면 일일이 지시하지 않아도 적당히 알아서 수완을 발휘했다.
하지만 박 비서는 기세도 약하고, 머리도 송 비서만큼 굴러가지 않는다.
일 처리 수완 역시 비교되지 않는다.
이럴 때면 송 비서만 한 놈도 없었구나 싶다.
“그렇게 자꾸 실망스럽게 굴다간 자네 자리 보전하기 힘들 거야. 명심해.”
“···네.”
박 비서는 고개를 숙였다.
“끝나고 나면 바로 청일 중장비로 간다.”
거기서 회수해야 할 것이 있다.
* * *
청일 중장비 사장실.
청일 중장비 사장과 청일 정유 사장이 함께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청일 정유 일은 안 됐어.”
“웬일로 내 걱정을 다 해 주나?”
“동기잖나. 내가 아니면 누가 자네 걱정을 해 주겠어.”
둘은 40대 후반의 동갑내기이자 입사 동기로, 한청호의 눈에 들어 서로 경쟁하듯 고속 승진을 거듭해 왔다.
“청일 정유 전 직원이 책상 놓을 자리도 안 정해져서 청일 중장비에 의탁한 상태야. 그러니 내가 걱정이 안 되나. 남의 회사 로비에 바글바글하게 모였는데.”
“내 이럴 줄 알았지.”
하지만 둘은 서로 만나기만 하면 물어뜯는 앙숙이기도 했다.
“어허, 이거 왜 이래? 난 같은 그룹에 중화학 공업 계열에 가장 가까운 공장과 사무실이라고, 청일 정유 사람들을 좋은 마음으로 받아들였어.”
회장님 지시 사항이라 거역할 수 없었을 뿐이다.
그 결과 청일 중장비 건물에 청일 정유 직원들이 임시 사무실을 마련했다.
“회장님께서는 자리를 어디로 옮기라고 하셨나?”
“조만간 대대적인 인사이동이 있을 것이라고만 하셨네.”
정확히 어디라고 콕 짚어 말하진 않았다.
청일 정유를 빈껍데기로 만들어야 할 시간이 너무 촉박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청일 정유 직원들은 소속이 정해지지 않아 붕 뜬 상태였다.
“자네라도 이만 난민 생활 청산하고 청일 중장비로 와. 내가 자리 하나 비워 놓을 테니까.”
인심 쓰는 말로 보이나, 속셈은 뻔했다.
사장 자리를 내놓지는 않을 테니 제 밑에 집어넣어 부하로 부리겠단 뜻이 아닌가.
“회장님께서 어련히 알아서 하실까. 인사이동이 시작되면 이 생활도 끝이야.”
“청일 정유가 통째로 날아간 마당인데, 마땅한 자리는 있고? 당장 책상 둘 곳도 없으면서.”
청일 정유 사장의 눈이 날카로워진다.
안 그래도 지금 청일 정유 사장 속은 말이 아니다.
‘지금쯤 금산 호텔 회의실에선 청일 정유 인수 합병 협상이 한창이겠지.’
얼마 후면 그가 맡고 있던 청일 정유가 딴사람 손에 넘어갈 터였다.
하지만 청일 중장비 사장에겐 남의 일이었다.
“아까운 청일 정유를 날렸으니 이참에 잘리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잘려도 회장님께 잘려. 남의 일에 신경 꺼.”
“왜 이렇게 까칠해? 내가 손 내밀 때 내 손 잡아. 비싸게 굴지 말고.”
청일 중장비 사장은 피식 웃는다.
“임원 자리 하나 챙겨 줄게. 상무는 쪽팔릴 테니까 전무. 어때?”
임원? 전무?
청일 정유 사장까지 지낸 나한테 부사장도 아니고 고작 전무 자리를 내밀며 유세를 떨어?
“놀고 있네.”
“거, 말이 심하네.”
“다른 데서 구르면 굴렀지 네 밑에서는 안 굴러.”
“갈 데는 있고? 난 회장님께 널 내 밑으로 보내 달라고 청할 셈인데?”
“차라리 내가 사표를 내고 말지 그렇겐 못하겠다.”
“그럼 그러던가. 재수 없는 놈 들였다가 청일 정유에 이어 청일 중장비까지 날릴지 누가 알겠어?”
이게 진짜 보자 보자 하니까!
그때 노크 소리도 없이 누가 문을 발칵 열었다.
청일 중장비 부사장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들이닥쳤다.
“사, 사장님!”
“왜?”
“사장님께서 오셨답니다!”
“어디 사장님? 청일 화학 사장님?”
“중장비 사장님이시랍니다!”
이건 또 무슨 헛소린가?
“중장비 회사 사장이 한두 명이야? 어느 회사의 누구 사장?”
“청일 중장비가 넘어갔답니다! 그걸 인수한 사장님이 지금 이곳에······!”
“뭐라고?”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따로 없다.
“청일 중장비가 왜? 우리 이참에 묵은 적자도 완전히 털어 냈잖아!”
“인, 인수 합병에서······!”
“그건 청일 정유고! 사장이 모르는 인수 합병이 어디 있나? 좀 똑바로 알고 다녀. 식겁했잖아.”
중장비 사장을 가슴을 쓸어내렸다.
사장실 문 밖에 서 있던 태수는 피식 웃었다.
‘뜻밖이군. 청일 정유 사장과 청일 중장비 사장이 한 사무실에 있다니.’
태수는 이 둘을 잘 알고 있었다.
태수가 청일에 입사할 때 이들은 여전히 정유와 중장비를 맡아 청일 중공업을 든든히 받치고 있었으니까.
‘청일 그룹 최고의 앙숙 둘이 붙어 있으니 시끄러울 만도 하지.’
이 두 사장은 청일 그룹을 이끌어 갈 유능한 인재들이다.
머지않아 둘은 청일의 중화학 공업을 쌍으로 끌어간다고 하여 ‘청일 중공업의 쌍두마차’로 불린다.
하지만 걸핏하면 폭주하는 쌍두마차 고삐를 잡고 가기는 무척 어려운 일이다.
둘 사이를 조율하느라 한청호 역시 진땀 깨나 쏟았다고 들었다.
‘오늘 여기 오길 잘했군. 한청호의 비밀 장부를 찾는 것과 동시에 청일을 떠받칠 인재도 함께 빼 오면 되겠어. 자발적인 협조를 받으면 더 좋고.’
태수가 처음 세웠던 계획은 서류를 보관한 캐비넷을 터는 것이었다.
따라서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사장실을 차지한 놈을 쫓아내는 일.
하지만 현재 사장실에 있는 이들은 장차 청일의 대들보가 될 사람들이다.
이런 굵직한 인재들을 만난 이상, 미끼는 던져 봐야 할 것이 아닌가.
‘한청호가 이들을 잃으면 어떻게 될까?’
청일 그룹의 몰락에 가속도가 붙을 것이다.
더구나 지금 태수에겐 인재가 절실히 필요하다.
일석이조가 될 것이다.
‘하지만 기선 제압이 먼저다. 처음부터 만만하게 보였다가는 두고두고 골치 아플 거야.’
태수는 마음을 정했다.
‘인재라는 이유로 내가 먼저 숙이고 들어갈 필요 없다. 먼저 고분고분하게 만들어야겠군.’
청일이란 대기업 계열사 사장으로 가뜩이나 목이 뻣뻣할 터였다.
하지만 태수는 그들의 허리를 90도로 꺾을 자신이 있었다.
실제로 한청호가 죽은 후, 한일권 대신 태수가 휘어잡아 부리던 사람들이기도 하다.
“청일 정유 인수 합병은 어떻게 되고 있는지 그거나 가서 알아 와. 이번엔 헛소리하지 말고 똑바로 상황 파악해. 알았나?”
태수는 거침없이 사장실 안으로 들어가며 큰소리쳤다.
“상황 똑바로 알아야 하는 건 당신입니다.”
난데없는 태수의 등장으로 사장실에 있던 사람들이 동시에 태수를 본다.
“사장이랍시고 사장실이나 지키고 앉아서 바깥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줄도 모르니. 회사 참 잘 돌아가는군요.”
태수가 쯧쯧, 혀를 찬다.
“자식들은 보자마자 아버지 명함부터 들이밀며 시비를 걸지 않나. 아버지란 작자들은 회사에서 쌈박질을 하질 않나. 여긴 아주 쌍으로 엉망진창입니다.”
중장비 사장이 눈을 부라렸다.
“새파랗게 어린놈의 새끼가 건방지게! 누가 이 새끼 여기 들여보냈어?”
“내가 내 사무실에 들어온다는데, 누가 감히 날 막습니까?”
“감히? 야, 너 누구야?”
“당신의 새로운 상사.”
“개소리 작작······!”
태수가 말을 딱 자른다.
“지금 발언으로 1계급 강등.”
“뭐?”
태수는 씩 웃었다.
“난 청일 중장비의 새로운 주인입니다. 아까 제대로 보고 받았잖습니까. 아직 상황 파악이 잘 안 되시나?”
“······!”
청일 중장비와 청일 정유 사장이 동시에 표정이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