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산 찍고 건설 재벌-89화 (89/230)

89. 협상의 승리자(5)

한청호가 생각하기에 박정환과 틀어질 수 있는 일은 전부 세 가지였다.

첫째, 일본과 얽힌 일.

그건 박정환의 약점이지만 한청호가 겨우 수습할 수 있을 정도니 괜찮다.

둘째, 박정환 마누라가 얽힌 일.

이건 박정환의 남자로서 자존심을 건들게 된다.

제 얼굴에 똥칠한 마누라와 한청호를 단죄하는 것으로 끝날 수도 있는 일이다.

‘청일 그룹까지 걸고 넘어가지 않을 수도 있어.’

게다가 박정환의 성정이라면 마누라는 새로 갈아 치워도 그만이 아닌가.

하지만 마지막은 다르다.

‘이것만은 청일 그룹 공중분해를 피할 수 없게 되겠지.’

그걸 박정환이 알아서는 절대 안 된다.

한청호는 움켜쥔 주먹에서 힘을 풀었다.

“왜 나한테 이렇게까지 하는 거냐?”

“당신도 날 죽이려고 했잖아. 이유가 뭐였어?”

사소한 이유였다.

거슬린다.

화가 난다.

불편하다.

“그럼 대답이 됐나?”

“아니, 너와 나는 경우가 다르지.”

한청호는 웃고 있었다.

독기로 중무장하고, 방심했던 마음을 전부 버렸다.

“그때 나는 강자였고, 너는 약자였다. 강자가 약자를 죽이는 데는 이유가 필요 없지만 약자가 강자에게 대드는 데는 대단한 이유가 필요한 법이지.”

거의 만용에 가까운 무모한 일이기 때문이다.

타협할 길은 많고도 많으니까.

‘고작 몰리브덴 광산 하나밖에 없던 시절부터 넌 그랬다.’

그때도 태수는 한청호와 맞섰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됐는데도, 굳이 어려운 길을 선택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태수는 한결같았다.

‘인정한다. 넌 내 일생일대의 숙적이다.’

지금껏 태수를 깔봤다.

어리다고 애송이 취급했다.

가진 게 없다고 약자 취급했다.

능력이 있어 봐야 별것 없다고 무시했다.

‘덕분에 오늘에 와서 뼈저린 반성을 하게 되는구나.’

한청호는 마침내 태수를 똑바로 보았다.

태수는 진짜배기였다.

“이유를 대답해다오. 나를 적대하는 이유, 나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모르겠다. 짚이는 게 없어.”

그래야 나도 각오를 다질 게 아니냐.

태수는 한청호를 잠시 내려다보았다.

그러곤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강태수, 말을 해!”

끝내 태수는 말하지 않았다.

타악.

회의실 문이 닫혔다.

한청호는 닫힌 문을 보면서 웃었다.

“이 정도까지 했는데도 끝까지 입을 다물다니. 정말로 지독한 놈이군.”

태수의 속마음을 알기 위해, 약점을 알기 위해했던 연기였다.

한청호는 언제 좌절했었느냐는 듯 가뿐하게 일어났다.

벽에 붙어 있던 박 비서가 그걸 보고 화들짝 놀랐다.

“회, 회장님?”

“못난 놈. 대가 이리 약해서야. 쯧쯧.”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열받아서 펄쩍 뛰다가, 바닥에 주저앉아 좌절하다가, 이를 갈며 복수를 다짐하는, 미친놈 그 자체였던 한청호다.

그런데 지금은 평소와 다름없이 너무나 멀쩡하다.

한청호는 대수롭지 않게 양복에 붙은 먼지를 툭툭 털었다.

“헛심 썼군. 내 연기가 안 통했을 리가 없는데. 얻은 게 별로 없어.”

아니지.

“좋은 정보를 얻었다. 이 정도로 흔들어 놨는데도 꿈쩍하지 않는 놈이란 걸 알았으니까. 겉보기엔 기생오라비처럼 생겨선, 속은 영 다르네.”

한청호는 여유롭게 웃었다.

“눈동자가 끝까지 흔들리지 않았다.”

단순히 돈이나 욕심 때문이 아니란 소리다.

고작 이 정도로는 흔들어 놓을 수 없다는 뜻이다.

그만큼 각오가 대단하다는 것이고, 심지가 굳다는 얘기다.

“만만치 않은 놈이야. 애송이라고 생각했는데. 호락호락하지 않아.”

한청호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 * *

달칵.

회의실 문이 열렸다.

아까 문이 잠깐 열린 이후로 궁금증이 극에 달한 장준용과 김 비서가 아닌가.

문에 달라붙어 동정을 살피던 그들은 화들짝 놀라 저만치 떨어져 나간다.

“여기서 뭐하십니까?”

“아, 아무것도 아닐세. 안이 좀 시끄럽다 보니. 계약은 잘 끝났나?”

태수가 품에서 계약서 한 장을 꺼내 흔들었다.

달랑 한 장짜리 계약서였다.

“보시다시피 잘 끝났습니다.”

“한시름 놨군. 청일의 한청호가 그리 호락호락하게 계약서에 도장을··· 응?”

뭔가 이상하다.

자세히 보니 아주 많이 이상하다.

“계약서 두께가 너무 얇은 것 같은데. 겉표지만 떼어 왔나?”

“아닙니다. 계약서가 두꺼워서 뭐 합니까? 간결하게 필요한 말만 들어가면 되죠.”

“그래도 너무 얇은데? 게다가 제목이··· 흡!”

장준용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린다.

믿기지 않는 제목이었기 때문이다.

“청일 정유 및 청일 중장비 인수 합병에 관한 계약서?”

아니, 청일 정유 옆에 청일 중장비는 왜 들어간 거지?

장준용이 눈을 비비고 다시 부릅뜰 때였다.

태수가 계약서를 장준용의 품에 선뜻 안겨 주었다.

“이걸 왜 나한테 주나?”

“그건 대통령 각하께 드릴 겁니다. 저 대신 그걸 각하께 전해 주십시오.”

“그러니까 이걸 왜 나한테······.”

“싫으시면 말고요. 안에서 있었던 일이 궁금할까 싶어 특별히 내어 드리는 겁니다만.”

장준용이 재빨리 계약서를 떠맡는다.

“내가 책임지고 각하께 전해 올리지. 걱정하지 말게.”

“감사합니다.”

아무래도 태수보다는 금산의 장준용이 청와대 드나들기가 쉽다.

그리고 태수가 굳이 박정환에게 가지 않으려는 이유는 또 있다.

“그런데 무슨 수로 청일 중장비까지 받아 냈나?”

바로 이 질문에 대답하기 꺼려지기 때문이다.

“거기 계약서에 쓰여 있지 않습니까. 몇 줄 안 되는 건데요.”

태수가 한 줄을 콕 짚는다.

“허······.”

진짜 있다.

이유가 가관이기까지 하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유로 한청호가 청일 중장비를 내놨다는 걸, 지금 나더러 믿으란 건 아니겠지?”

“어쩝니까? 믿어야죠.”

“각하께서도 믿으실까?”

“어쩝니까? 믿을 수밖에요.”

태수는 씩 웃었다.

“궁금하시면 각하께서 직접 한청호를 불러다 물으시겠죠.”

한청호가 과연 박정환 앞에서 무슨 말로 변명하려나?

죽었다 깨도 진짜 이유를 대진 못할 텐데.

“이걸 나한테 내주면 자네 계약서는?”

“그럴 줄 알고 3부 뽑아 왔죠.”

태수가 제 품에서 계약서 하나를 더 꺼내 흔들었다.

그건 재빨리 품속으로 사라지고 없다.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워낙 피곤한 작자와 입씨름했더니.”

“하하하, 한청호가 피곤하긴 피곤한 인물이지. 그래서 말인데 계약도 성공적으로 끝났겠다, 내가 축하주를 한 잔 사 줄······.”

“안녕히 계십시오.”

태수가 정중하게 90도로 인사하고, 냅다 튀었다.

“어이, 이봐!”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한수까지 덩달아 사라지고 없다.

장준용은 황당한 표정으로 김 비서를 봤다.

“저 친구 지금 튄 거 맞지?”

“보면 모르십니까?”

“왜? 내가 친히 축하주 사 주겠다는데?”

“전 왠지 알 것 같은데요.”

김 비서가 장준용이 들고 있는 계약서를 슬쩍 읽는다.

그러다 눈을 크게 뜨며 절로 헉 소리를 낸다.

“회, 회, 회장님!”

“왜?”

“이, 이이, 이것 좀!”

“뭐?”

심드렁한 얼굴로 계약서를 다시 본 장준용.

그가 다시 눈을 비볐다.

“내가 늙어서 노안이 왔나? 금액이 영 이상하게 보이는데?”

“회장님, 지금 제가 보고 있는 게 계약서가 맞긴 하죠?”

“그러게. 무슨 애들 장난도 아니고. 10원?”

기가 찬다.

“게다가 부채도 전액 청일 그룹에서 떠맡는다는데요?”

“미친 거 아냐?”

그런데 계약서 맨 밑 서명 날인 칸에 진짜 한청호가 이름을 쓰고 사인을 했다.

“이런 데다 사인을 했다고? 천하의 한청호가? 왜? 어쩌다?”

보면서도 믿기지 않는다.

장준용과 김 비서는 노안을 탓하며 가까이서도 보고, 멀리서도 보고, 다시 또 봤다.

바뀌는 게 없다.

마침내 김 비서가 신음을 낸다.

“회장님, 전 다른 건 몰라도 한 가지는 알 것 같습니다.”

“그래, 그게 뭔가?”

“저 안에서 한청호가 왜 미치고 팔딱 뛰면서 온갖 것을 다 부쉈는지. 궁금증이 풀렸습니다.”

그건 장준용도 풀렸다.

그러자 다른 궁금증이 그를 더욱 괴롭혔다.

“그러니까 무슨 수를 썼냐고! 대체 어쩌다 결론이 이렇게 났냐고!”

이미 튀어 버린 강태수를 잡아다가 물어봐야 하나?

* * *

금산 호텔을 빠져나와 차에 올랐다.

차는 경쾌하게 도로를 빠져나간다.

보조석에 앉았던 한수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형, 청일을 적대하는 진짜 이유가 뭐야?”

태수는 절대 그 이유를 알려 주지 않았다.

그래서 한수도 여태 모르고 있다.

“묻지 마. 알면 다쳐.”

“그 회장님 말이 맞잖아. 강자는 괴롭히는 데 이유 없어도, 약자는 강자에게 맞설 땐 반드시 이유가 있다는 거.”

“그럴싸한 개소리에 휘둘리지 마.”

태수는 코웃음 쳤다.

“그거 다 한청호가 연기하는 거야. 날 떠본 거라고.”

한수는 기겁했다.

“연기? 아까 그게 연기라고?”

“너처럼 예민한 놈이 위화감을 못 느꼈어?”

“이상한 포인트에서 묘하게 좀 툭툭 걸리긴 하는데, 그거야 워낙 상황이 그러니까······.”

“바로 그거야. 넌 확실히 직감이 날카로워. 기민하게 반응하는 게, 소질 있다.”

한수의 재능에 감탄하는 태수였다.

솔직히 태수는 한청호를 상대하면서 그 묘하게 툭툭 걸리는 부분을 느끼지 못했다.

어찌나 능숙한지 전혀 위화감이 없었다.

그게 한청호의 무서운 점이었다.

“형은 어떻게 그렇게 확신해? 그게 다 연기라고.”

“눈을 보면 알아.”

태수는 말했다.

“목소리, 어조, 표정, 분위기, 몸짓. 그런 건 전부 꾸며낼 수 있어.”

“그런데 눈은 왜?”

“눈동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아.”

한청호의 눈동자는 깊었다.

화를 낼 때도, 이죽거릴 때도, 체념할 때도 눈동자는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 와중에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이성적인 눈을 하고 있었다.

“상대를 속이려면 눈을 보지 마. 차라리 눈을 감아.”

태수가 한수를 보며 웃었다.

“너도 곧 알게 될 거야. 닳고 닳은 인간들을 만나다 보면.”

태수가 이 바닥에서 저런 인간들을 상대한 게 몇 년인가.

한청호만큼 연기가 능숙하지 못한 인간들이 대부분이고, 한청호 이상으로 잔머리를 굴리는 놈들이 몇 놈인지 셀 수도 없다.

하지만 태수는 청일 병동 VIP룸, 한일권에게 뼈저릴 만큼 제대로 배웠다.

“눈은 마음의 창이야. 괜한 소리가 아니더라.”

태수의 곁에서 무려 45년이나 연기해 온 한일권이었다.

살인자의 눈.

그 눈은 평소 태수가 보던 익숙한 눈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죽음으로 얻은 교훈이야. 제일 비싸게 터득한 마지막 교육이었지.’

그런 면에서 한일권이 한청호보다 훨씬 연기를 잘했다.

나쁜 쪽으로는 누구보다 탁월한 놈이었다.

“한수야, 한청호가 얄팍한 수작을 벌인 덕분에 우리가 큰 이득을 봤다.”

“그랬지. 그 핑계로 무려 청일 정유와 청일 중장비를 고작 20원에 샀으니까. 거기다가 부채도 청일 그룹에 도로 떠안기고.”

“원래는 나도 정당한 값을 치르고 인수해 오려고 했어.”

그럴 생각으로 한수에게 청일 정유 인수할 돈을 남겨 두라고 했던 게 아닌가.

하지만 상황이 바뀌었다.

“만일 한청호가 먼저 치사한 수작을 부리지 않았다면 박정환 대통령은 내가 부린 수작을 모른 척 넘어가 주지 않겠지.”

페어플레이의 룰을 어긴 건 한청호가 먼저다.

박정환은 제 뜻을 우습게 여기고 수작을 부린 걸 못마땅하게 여겼을 것이다.

그 때문에 태수의 수작 역시 눈감아 줄 것이다.

“형, 그런데 지금 우리 어디 가는 거야?”

“청일 중장비 사장실.”

“청일 중장비 사장실에는 왜?”

태수는 씩 웃었다.

“왜긴 왜야. 한청호보다 먼저 손에 넣어야 할 게 있으니까 그렇지.”

지금 청일 정유에는 파리만 날릴 터다.

하지만 청일 중장비는 다르다.

“지금쯤 형이 된통 당하고 있을 거라 생각하며 낄낄대고 있을 텐데 형이 인수 합병 계약서를 들고 나타나면 다들 기겁하겠다.”

딱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진 꼴이 될 거다.

부르릉.

태수의 자동차가 속력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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