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금산 호텔 연회장에서(3)
룸 안은 담배 연기로 자욱했다.
박정환을 비롯해 재벌 그룹 총수들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매캐한 냄새 때문에 잠시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제일 먼저 금산의 장준용이 태수를 반겼다.
“왜 이렇게 늦었나. 왔으면 당장 이리로 올라올 것이지.”
“죄송합니다.”
태수는 가타부타 변명은 하지 않았다.
강원도에 눈이 내려서 늦었다는 말도, 종업원의 실수로 아래층에 들렸다는 말도 필요 없다.
지금은 그런 사소한 건 중요하지 않으니까.
박정환이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면서 말했다.
“내가 왜 이들과 자네를 같이 불렀는지 굳이 말 안 해도 잘 알고 있지?”
“네.”
석유 공급 권리증의 혜택을 받을 자들이다.
태수는 상석의 박정환을 두고 그 옆에 둘씩 나눠 앉은 재벌 그룹 총수들을 보았다.
‘삼청 그룹의 이병춘.’
삼청 그룹은 73년 현재 대한민국 재계 서열 1위의 대기업이다.
지주의 자식이었던 그는 사업을 하는 것마다 크게 성공했다.
거기다 종류도 가지가지 다방면에 걸쳐 모두 성공해 냈다.
‘럭키세븐의 구자겸.’
럭키세븐 그룹은 재계 서열 2위다.
럭키세븐 그룹 창업주인 구인호 회장의 장남으로, 몇 해 전 아버지가 별세한 후 그룹을 승계받았다.
럭키세븐은 치약과 화장품 등 화학에서 두각을 드러내며 사업을 키웠고, 한국 최초로 플라스틱을 만드는 등 현재 석유 화학 1위를 지켜 내고 있다.
또한 끈질기게 정유 사업을 추진해, 백색가전 및 중화학 공업에 집중하고 있었다.
‘대한 정유의 김동조.’
1962년 한국 정부가 미국 걸프사와 합작해 세운 공사이다.
한국에서 가장 역사가 오랜 정유 업체이기도 하다.
국가의 자본으로 운영하는 공사인 만큼 박정환의 입김이 크게 작용하는 곳이었다.
‘거기다 금산까지.’
금산의 장준용이 유조선을 빌려주어 사우디에 물을 보냈다.
더 말할 필요가 있을까?
‘쟁쟁한 재벌 그룹 총수들이 한자리에 모였군.’
박정환이 손을 들었다.
그러자 차기범이 총수들 앞에 서류를 한 부씩 내려놓는다.
태수가 박정환에게 바쳤던 석유 공급 권리증이었다.
“이건 뭡니까?”
“석유 공급 권리증?”
“사우디 왕실의 인장이 찍혀 있군요.”
다들 흥미로운 눈으로 서류를 넘긴다.
그러던 그들은 마지막 추신에서 피식 웃는다.
“청일 그룹이 사우디 왕실에 단단히 찍혔나 봅니다.”
“뭐 상관있습니까? 청일의 한 회장이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요.”
모두 나 몰라라 신경을 끄지만 미소만은 숨길 수 없었다.
청일 그룹이라는 경쟁자가 이렇게 나가떨어져 주니 고마울 따름이다.
그러다 문득 태수 앞에도 권리증이 놓여 있는 것을 본 총수들.
“그런데 이 젊은 친구는 누굽니까?”
“석유 권리증을 논하는 자리에 왜 함께 앉은 겁니까?”
당연한 의문이 뒤따랐다.
박정환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자네들 앞에 놓인 그 서류를 사우디에서 받아 온 친구일세.”
어조는 대수롭지 않은데, 내용은 흘려 들을 수 없는 무게를 가지고 있었다.
총수들이 일제히 태수를 돌아본다.
“그리고 그 권리증을 나한테 바쳤지.”
뒤에 붙은 말은 더 가관이었다.
이런 시국에 이런 권리증이면 황금 더미와 바꿀 수 있을 터다.
박정환은 담배를 하나 더 꺼내며 입에 물었다.
“그 친구가 이번에 정유 회사를 하나 세울 작정이야.”
“정유 회사를요? 지금 이 시국에 말입니까?”
망하려면 무슨 짓을 못할까.
원래 정유 사업은 초반 시설 비용이 워낙 커서 돈 잡아먹는 귀신이 따로 없다.
그런데 석유 파동 때문에 난리가 난 이 시점에 정유 사업을 새로 시작한다니.
패기가 만만하다고 해야 할까, 대책이 없는 미친 짓이라고 해야 할까.
“청일 정유 간판을 뗀 자리에 간판만 새로 걸라고 했어.”
청일 정유가 이대로 도산하는 것을 내버려 두겠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걸 이 젊은이에게 주겠다는 말이다.
‘맙소사.’
‘청일의 한청호가 버려지다니.’
‘박정환이 한청호 대신에 이 친구 손을 잡았다는 건가.’
총수들이 일제히 박정환을 돌아본다.
박정환이 이런 말을 하는 뜻을 어느 정도 짐작했다.
“청일 정유에 눈독 들이지 말란 소리야.”
박정환이 엄중히 경고한다.
“허튼수작 부리면 그 권리증 받은 값을 단단히 치르게 될 거야.”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박정환이 이토록 비호하는데, 어찌 감히 발을 뻗을까.
이참에 청일 정유가 도산하면 헐값에 인수해 볼까 생각했던 계획은 순식간에 버려졌다.
금산의 장준용이 껄껄 웃었다.
“각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도 염치는 있습니다.”
장준용이 나머지 총수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누구 덕분에 이 권리증을 받게 된 줄 잊고, 발 뻗을 데 안 뻗을 데 못 가릴 정도로 멍청하진 않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어쩔 수 없이 나머지 총수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 시국에 석유를 걱정 없이 공급받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만족합니다.”
“얼결에 공짜 밥 얻어먹게 된 처지에 남의 밥상 뺏을 생각은 없습니다.”
“그것도 각하께서 챙겨 주는 밥상인데, 어딜 감히 넘보겠습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밖이 소란스러워지는 게 느껴진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커진다 싶을 때였다.
쾅.
부서져라 문이 열렸다.
한청호였다.
한청호의 한쪽 팔은 박태종이, 다른 쪽 팔은 김봉남이 붙들고 있었다.
열린 문 사이로 기겁한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각하!”
“어딜 감히!”
차기범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각하, 청일 정유를 내놓겠습니다!”
뜻밖의 말에 모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박정환이 손을 들자 차기범이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그만.”
한청호를 끌어내던 박태종과 김봉남도 손을 뺐다.
한청호는 옷매무새 매만지며 룸 안으로 들어섰다.
“문 닫아.”
박태종이 슬쩍 문을 닫는다.
한청호는 비장한 얼굴을 하고 박정환을 뚫어지게 보았다.
“각하, 주위를 물려주십시오. 독대를 청하고 싶습니다.”
한청호 입에서 청일 정유를 내놓겠다는 말이 나온 마당이다.
그러니 이 자리에 초대받지 못한 한청호가 막무가내로 굴어도 다들 이해한다.
그가 없는 자리에서 이미 청일 정유를 딴 놈에게 먹이겠다는 말까지 나온 상황이 아닌가.
하지만 박정환만은 그걸 이해해 주지 않는다.
“독대? 건방진 새끼.”
“각하, 청일 정유, 그게 몇십억짜리 회사인지는 각하께서도 잘 아실 겁니다. 말 몇 마디를 올리는 대가로 각하께 바치겠습니다.”
대체 얼마짜리 말이기에 저리 나오는 것일까.
하지만 한청호도, 박정환도,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전부 안다.
박정환이 청일 정유를 외면하는 순간, 청일 정유는 도산이 확정되었다.
그리고 그 주인까지 미리 정해졌다.
박정환이 구태여 한청호의 말을 들어 주지 않아도 그만이다.
“각하, 전 그냥 이곳에서 말해 버려도 상관없습니다. 다만 내용이 내용인지라, 각하께서는 조금 불편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한청호가 막다른 길에 몰리긴 몰린 모양이다.
저토록 과감하게 나오는 것을 보면.
“조용.”
박정환이 손을 들었다.
‘그걸 사람들 앞에서 떠들게 둘 수는 없지.’
박정환은 사우디 왕실에서 보내온 물건이 생각났다.
‘둘 사이에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있군.’
‘그렇지 않고서야 박정환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는데.’
평소라면 저런 건방진 소리가 나오자마자 박정환은 재떨이부터 집어 던졌을 터다.
그런데 이상하게 오늘은 박정환이 조용하다.
자리에 앉아 있던 네 명의 그룹 총수들은 각자 다른 표정,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중에 태수만이 태연한 표정으로 한청호를 무심하게 보고 있었다.
박정환은 태우던 담배가 장초임에도 재떨이에 비벼 껐다.
“다들 나가 봐.”
박정환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총수들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이 호텔의 주인인 금산의 장준용도 마찬가지였다.
하나둘씩 한청호를 지나쳐 룸을 나선다.
“강태수.”
태수가 한청호를 지나칠 때 그의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이 빚은 기필코 갚아 주마. 나 한청호, 절대 이대로 죽지 않는다.”
빚?
갚아 줄 빚이라면 당신보다 내가 더 많아.
아직 멀었다.
태수는 피식 웃었다.
“고작 청일 정유 가지고 유난은.”
태수와 한청호 사이에 보이지 않는 스파크가 튀었다.
태수는 태연한 표정으로 한청호를 지나쳐 룸을 나갔다.
안전을 위해 박정환의 곁에는 차기범이 서 있었다.
“자네도 나가 있어.”
“각하, 한청호의 기색이 심상치 않습니다.”
“두 번 말 해?”
“···알겠습니다.”
차기범마저 나갔다.
박정환이 탁 소리가 나도록 담뱃갑을 테이블 위에 올린다.
“용건이 뭐야?”
* * *
태수가 룸에서 나오자 밖에 있던 박태종이 다가왔다.
“오랜만이네.”
“오랜만입니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태수는 정중히 인사했다.
“포항 철강 준공식에 참석하지 못해서 송구합니다.”
“각하께서 당부하신 도로 공사를 지금이야 끝났다지? 막중한 책임에 촉박한 기한마저 발목을 잡았을 테니 이해하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금산의 장준용이 그 얘기를 듣고 피식 웃었다.
어버이날에 부모님 가슴에 카네이션 달아 드린다고 한국에 온 놈이란 걸 알기 때문이었다.
‘없는 시간을 쪼개어 금산까지 찾아와 거하게 술 마시고 돌아갔다. 바로 나랑 말이야.’
그뿐만이 아니다.
사우디에서 새로운 도로 공사를 시작했음에도 금산 조선 중공업 출범식에 참석하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귀국했지 않은가.
왠지 박태종 옆에서 어깨가 으쓱 올라가는 장준용이었다.
“청일 정유는 도산이 확정됐어. 한청호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각하께서는 끄떡하지 않으실 걸세.”
한 번 입 밖으로 내뱉은 말은 지키는 박정환이다.
그것도 내로라하는 재벌 총수들이 있는 자리에서 못 박은 말이다.
태수에게 청일 정유를 내준다는 사실은 변함없을 것이다.
태수도 그걸 알기에 그쪽은 걱정하지 않았다. 다만······.
‘느낌이 좋지 않아. 절망에 빠진 자의 눈빛이 아니었어.’
한청호의 눈에는 독기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분명 뜻하는 바가 있어서 이 시간에 이곳에 와서 독대를 청했을 것이다.
남들 앞에서 망신을 자초하면서까지.
박정환을 만나 반드시 해야 할 말이 있다는 소리다.
‘그게 뭘까. 한청호는 뭘 꾸미고 있는 걸까.’
전생의 기억을 뒤져 보는 태수였다.
특별한 일이 없다.
‘오일 쇼크 때문에 청일 정유와 청일 화학이 잠시 휘청거리긴 했지만 특유의 수완으로 사우디에서 원유 공급을 따냈기 때문에 수월하게 위기를 넘겼었지.’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사우디의 원유 공급뿐만 아니라 다른 산유국 원유 공급까지 틀어막은 게 태수다.
청일 정유는 전생과 달리 무너질 것이다.
태수가 그렇게 만들었다.
‘스스로 청일 정유를 내놓겠다고 했다. 이미 마음을 결정했다는 뜻인데······.’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박태종이 위스키 잔을 건넸다.
위스키 잔 밑에는 쪽지가 숨겨져 있었다.
* * *
한청호는 비장하게 말했다.
“청일 정유는 각하께 바치는 제 충심입니다. 그것만은 알아주십시오.”
한청호는 주먹을 꽉 쥐었다.
“어째서 갑자기 각하께서 마음을 바꾸셨는지는 모릅니다. 분명 큰 뜻이 있으셨을 것이라 짐작할 뿐입니다.”
누군가가 각하의 눈을 흐렸다는 걸 안다.
그 새끼가 내 청일 정유를 노리고 수작을 부렸을 거란 짐작도 한다.
“각하의 중화학 공업 육성 정책의 걸림돌이 된다면 예, 드려야죠. 청일 정유, 각하께 기꺼이 드리겠습니다. 각하께서 물심양면으로 키워 주신 청일 정유가 아닙니까.”
하지만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모르겠다.
그렇다고 이렇게 무너질 수는 없다.
“말 몇 마디 들었다. 이만 나가.”
박정환이 딱 잘라 말한다.
평소의 박정환이라면 지금 이 말로 기색이 크게 누그러졌을 것이다.
하지만 박정환은 아직도 찬바람이 쌩쌩 분다.
한청호는 그것으로 박정환의 마음을 미루어 짐작했다.
짚이는 게 있었다.
“각하, 이것을 보십시오.”
한청호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