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금산 호텔 연회장에서(2)
태수가 한 걸음 밖으로 내딛는데, 뒤에서 같은 목소리가 다시 들린다.
다시 들어도 재수 없는 목소리였다.
“어이, 웨이터. 누구를 여기에 데려왔어? 얼굴을 보아하니 알겠네. 너 연예인이냐?”
“저, 저기······.”
직접 질문을 받게 된 종업원은 쩔쩔매면서 어쩔 줄 모른다.
연신 그자와 태수의 눈치를 보면서 걸음을 떼지 않는다.
종업원의 안내를 받아 장준용을 만날 생각이었던 태수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넌 왜 대답을 못해? 연예인 나부랭이를 함부로 이곳에 들였어?”
“아니에요. 이 분은 태양 건설에서 오셨습니다. 초대장도 확인했습니다.”
“태양 건설? 역시. 듣도 보도 못한 곳에서 왔네?”
귀찮은 똥파리를 일일이 상대해 줄 필요는 없다.
태수는 종업원에게 말했다.
“장준용 회장님은 어디 계십니까?”
갑자기 한 명 더 합세한다.
“와, 아무리 뭘 몰라도 그렇지 금산 그룹 총수를 직접 만나겠다는 똥배짱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또 다른 놈도 한 명 더 붙었다.
“태양 건설이란 곳은 들어 본 적도 없는데. 졸부 집 아들이신가?”
총 세 명이 태수에게 다가온다.
제일 먼저 시비를 걸었던 놈이 말했다.
“이런 모임은 처음이지? 그럼 이 세계의 룰부터 배우고 와야지. 내가 가르쳐 줄까?”
그가 태수의 어깨를 잡아 돌려세우려 한다.
태수는 탁 소리가 나게 손을 치웠다.
“좋은 집 자제분이 초면에 손부터 나가다니, 그쪽은 이쪽 세계의 룰 이전에 가정교육부터 다시 배우고 와야겠어.”
태수가 그가 잡아챘던 어깨를 툭툭 털어 낸다.
상대할 가치도 없기에 화도 나지 않는다.
“뭐합니까? 앞장서십시오.”
종업원을 재촉하는데, 태수의 어깨를 잡아챘던 남자가 태수 앞을 몸으로 막아선다.
“이왕 여기까지 왔으면 또래 모임에 적응해야지. 무섭다고 아빠 찾을 나이는 아니잖아? 킥킥킥.”
청일 화학 사장 김봉남의 아들, 김재학이다.
한일권의 오른팔로 비서인 태수를 늘 못 잡아먹어 안달했었다.
‘이놈은 언제 봐도 짜증 나는군.’
전생에서도, 이번에도 만나기만 하면 시비부터 거는데 곱게 봐주려야 봐줄 수가 없다.
“이렇게 만난 김에 통성명이나 하자. 청일 화학의 사장님이 내 아버님이셔.”
“통성명을 아버지 이름으로 하나 보군.”
“이 세계의 룰이 그래. 재계 순위가 나이순보다 먼저고, 아버님이 누구신지가 아들의 사회적 위치를 결정하지. 태양 건설하시는 네 아버지는 재계 순위가 몇 위쯤 되실까?”
김재학이 웃으면서 명함을 꺼내 태수의 앞주머니에 꽂는다.
“명함을 받았으면 명함으로 돌려주는 게 이 세계의 룰이야.”
다른 한 놈도 태수의 앞주머니에 명함을 꽂는다.
그런데 이놈은 일부러 중국어를 쓴다.
[그럼, 그게 기본 중에서도 기본이지. 우리 아버진 청일 정유 사장님이다. 어디서 졸부 집 아들이 건방지게 여기에 얼굴을 들이밀어?]
또 다른 놈은 명함을 꽂아 주면서 독일어를 쓴다.
[우리 아버지는 청일 중장비 사장님이지. 그런데 넌 이렇게 말해도 못 알아듣잖아. 아, 명함 보면 알 수 있으려나? 설마 한글은 뗐겠지?]
이제 보니 청일의 한일권 똘마니들이다.
태수의 눈이 배후를 찾는다.
저쪽에 앉아서 이 모습을 느긋하게 지켜보는 한일권을 보았다.
그는 푹신한 소파에 앉아 샴페인 잔을 든 채 태수를 가만히 보고 있었다.
‘한일권······!’
저 낯짝을 보니 절로 주먹에 힘이 들어간다.
당장 저 면상을 묵사발로 뭉개 주고 싶었다.
한일권이 샴페인 잔을 슬쩍 들어 올리며 프랑스어로 말한다.
매우 부드럽고 정중한 어조였다.
[내 명함도 필요한가? 받고 싶으면 네가 이쪽으로 와.]
한일권은 웃으면서 친절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기에 프랑스어를 모르면 태수에게 호감이 있는 줄 알 정도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홀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태수와 청일의 자제들에 주목했다.
“누구기에 이래?”
“누구 태양 건설이라고 아는 사람 있어?”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전부 재벌가 자제들 혹은 유력 정치인 자제들뿐이다.
‘갑자기 청일의 똘마니가 왜 시비를 거는지 알 것 같군. 탐색전이라 이거지?’
태수는 피식 웃었다.
태수는 한일권을 보면서 프랑스어로 우아하고, 정중하게 말했다.
[네 명함 따윈 나한테 쓸모없다. 너나 가져.]
태수는 한일권과 비교도 할 수 없이 좋은 원어민 발음에 고급스러운 단어를 구사한다.
오랫동안 교육받았고, 세계 정상급 인사들과 친분을 다지며 갈고닦은 외국어가 아닌가.
[참, 깜빡했군.]
태수는 앞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냈다.
[내세울 건 아버지뿐인 주제에 통성명을 하자면서 자기 이름조차 말하지 못하는 한심한 것들.]
태수가 그중에서 청일 중장비 사장 아들의 명함을 찾았다.
한글 운운, 독일어 못 알아듣는다며 비아냥거렸던 놈이다.
그걸 그자의 양복 앞주머니에 도로 꽂아 주었다.
훨씬 수준급 고급 독일어를 사용했음은 당연하다.
[이왕이면 독일어로 만든 명함을 준비하지 그랬나? 아, 글자는 모르나? 그거 유감이군.]
이번엔 청일 정유 아들 명함을 찾았다.
졸부 집 아들 운운하던 놈이다.
당연히 유창한 중국어로 되돌려 준다.
[요즘 아버지가 석유 구하러 다니느라 많이 바쁘다지? 아버지가 월급쟁이 사장이라 고생이 많아. 졸부 아버지를 부러워하기 이전에 스스로 졸부가 될 생각을 하면 될 텐데. 참 안타까운 일이야.]
태수의 손에 마지막 명함 한 장이 남았다.
“친구들이 외국어 배울 때 혼자 놀았나 보군. 안 그래도 부실한 가정교육인데, 외국어 교육까진 무리였겠지. 이해해.”
태수는 청일 화학 사장 아들, 김재학의 어깨를 일부러 탁 치며 웃었다.
“같이 어울려 놀아 주기엔 수준이 떨어져서 안 되겠군. 그런 이유로 또래 모임은 내 쪽에서 정중히 사양하지.”
홀에 정적이 맴돈다.
모두 눈이 동그래져서 태수를 보았다.
그때 태수를 찾아 5층에서 3층까지 내려온 사람이 있었다.
“강태수, 자네 여기서 뭐 하나?”
대통령 경호실장 차기범이었다.
“아, 차 실장님도 여기 계셨습니까? 그럼 각하께서도 오셨겠군요.”
“위에서 자넬 기다리고 계시네.”
차기범이 눈만 돌려 주변을 스윽 돌아본다.
“여기서 놀고 있었나? 지금 또래 친구들이랑 놀 때가 아니야.”
차기범의 타박 같지 않은 타박이었다.
“금산, 삼청, 럭키세븐, 대한 정유까지. 그룹 총수들께서 전부 자네가 올라오길 기다리고 계시네.”
그들 그룹은 모두 정유를 소유한 그룹이다.
그중에 청일 그룹이 빠졌다.
태수는 박정환이 왜 그들과 함께 자신을 기다리는지 알 것 같다.
“자네가 와야 석유 공급 문제를 마무리할 것이 아닌가. 오죽하면 내가 직접 내려왔겠나.”
“알겠습니다. 올라가죠.”
홀에 모인 사람들은 숨을 들이마셨다.
‘각하와 재벌 회장님들이 이 남자를 기다리고 있다고?’
‘이 남자가 석유 공급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새삼스러운 눈으로 태수를 보는 유명 인사의 자제들.
태수는 유명 인사 자제분들을 향해 활짝 웃으며 정중하게 인사했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모두 즐거운 시간 되시길.”
태수가 차기범과 나란히 3층 홀을 떠난다.
사람들은 작게 중얼대기 시작했다.
“누구 태양 건설이라고 아는 사람 있어?”
“누구기에 이래?”
태수가 청일 똘마니들과 시비가 붙었을 때 나왔던 것과 똑같은 물음이었다.
하지만 뉘앙스는 그때와 완전히 뒤바뀌었다.
“대체 몇 개 국어를 하는 거야?”
“전부 수준급이야. 발음부터 다르잖아.”
“진짜 졸부집 아들이 맞아?”
여자들이 저마다 수군대기 시작했다.
그녀들 중에 유독 흥미로운 눈으로 태수가 떠난 입구를 바라보는 여자가 있었다.
박정환의 딸, 박경혜였다.
김재학과 친구들이 정신을 차린 건 태수가 유유히 3층에서 사라진 이후였다.
“저 새끼, 뭐야! 그걸 다 알아듣고 있었던 거야?”
“그래서 어느 집안 자식인데? 태양 건설은 듣기도 처음이란 말이야!”
그들은 바락바락 화를 내며 양주를 완전히 동낼 기세로 퍼부어 댔다.
“와, 진짜 어이가 없어서.”
“술! 더 독한 건 없어?”
그들이 열 받아서 어쩔 줄 몰라 한다.
그렇다고 금산의 행사에서 행패 부릴 수도 없다.
타는 속을 달래려 연신 독한 술을 들이붓는다.
“적당히 마셔.”
“일권아! 넌 그 꼴을 보고도······.”
“그대로 꼬리 말 생각이면 쳐마시든가.”
김재학과 친구들은 멈칫했다.
“분한 것 이상으로 되갚아 주면 그만인데, 뭘 그렇게 열 받아 해?”
한일권의 눈이 불길하게 번뜩였다.
“그 새끼, 밤길 조심해야 할 거야.”
* * *
금산 호텔 5층 홀.
그곳에선 정재계 유명 인사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는 얼굴이 많군.’
차기범이 나타나자 홍해 갈라지듯 길을 터 준다.
저벅저벅.
차기범이 태수를 데리고 5층 홀 끝에 있는 룸으로 향한다.
박정환 대통령과 몇몇 그룹 총수만이 들어간 곳이다.
“들어갑시다.”
“네.”
태수와 차기범이 룸 안으로 사라지자 사람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저 젊은이는 누구지?”
“차 실장이 직접 데려왔어. 그것도 총수 회담이 열린 곳까지 안내를 자처할 줄이야.”
“무슨 일인지 모르겠군. 저런 새파란 애송이가 각하가 계신 룸에 입성하다니······.”
대통령 각하께서 부르지 않으면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룸이다.
나이 지긋한 정치인들이나, 재계 10위 내의 그룹 총수도 지금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그때 호탕한 웃음소리가 저쪽 구석에서 나왔다.
박태종이었다.
“하하하, 보고도 모르나? 각하께서 긴히 부르셨으니 이곳에 온 거지.”
박태종이 위스키를 한 모금 마시면서 흐뭇하게 웃었다.
“다들 미리 잘 봐둬. 곧 무섭게 치고 올라와 우리와 어깨를 나란히 할 녀석이니까.”
반면 코웃음 치는 소리도 있었다.
청일 화학 사장 김봉남이다.
“각하께서 하문하실 일이 있으신 모양이지. 제깟 것이 뭐라고.”
박태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각하께서 하문하실 만큼 그만큼 중요한 인물이란 뜻이지.”
“우리 말장난은 하지 말지요, 포항 철강 박 사장님.”
“말장난이 아니야. 사실만 보자고. 각하께서 청일의 한 회장은 안 부르셔도 태양 건설 강태수는 불렀다 이 말이야. 이것으로 끝난 거 아닌가.”
“사실? 흥, 말은 바로 합시다. 우리 한 회장님은 일이 바빠 이 자리에 참석하지 못한 것이지 각하께서 안 부르신 게 아니란 말입니다.”
청일 그룹의 총수 한청호는 이번 금산 조선 중공업 출범 행사에 참석하지 않았다.
하지만 누구도 김봉남의 말을 믿지 않았다.
대신 방금 눈으로 본 것을 믿는다.
-태양 건설 강태수.
사람들의 머릿속에 태수의 이름이 각인되는 순간이었다.
* * *
한청호의 서재 밖.
박 비서는 의아했다.
‘왜 이렇게 조용하지?’
한청호가 악귀처럼 무서운 얼굴로 서재에 들어간 지 벌써 6시간 째다.
하지만 폭풍 전야처럼 고요하기만 하다.
물건 부서지는 소리, 욕설, 고성 따위는 전혀 없다.
‘입사하고 처음이다.’
이처럼 한청호의 서재가 쥐 죽은 듯이 고요한 게 오히려 더 무서웠다.
“들어와.”
마침내 한청호의 부름이 떨어졌다.
박 비서는 조심스럽게 서재 문을 열었다.
‘이럴 수가.’
어둡다. 그런데 멀쩡하다.
서재 안은 한 점 흐트러짐조차 없이 정갈하다.
한청호는 불 꺼진 어두운 서재에 홀로 앉아 있었다.
‘대체 지금까지 회장님께선 이 어둠 속에서 혼자 뭘 하신 걸까?’
박 비서는 궁금했다.
창문으로 새어 나오는 달빛만이 서재를 밝히고 있다.
한청호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다.
어둠 속에서 반쯤 드러난 한청호의 얼굴은 귀기가 서릴 만큼 음산했다.
“금산 호텔로 향할 것이다.”
목소리 역시 잔뜩 쉬어 있었다.
한청호가 어둠 속에서 몸을 일으켰다.
“가자.”
결단을 내린 듯, 발걸음은 무겁기 그지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