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산 찍고 건설 재벌-52화 (52/230)

52. 사우디 왕족의 초대(4)

라흐만이 피식 웃는다.

[그럼 한 배를 탄 의미로, 좋은 걸 함께 하며 결의를 다져야겠구나. 여봐라.]

딱.

라흐만이 손가락을 튕기자 경호원이 그에게 다가왔다.

[아까 내왔던 레드 와인을 다시 내와라. 내 이번엔 동맹자와 즐거운 마음으로 한잔 더 해야겠다.]

이 양반이 억지로 무리하는 거 다 안다.

두바이에서라면 몰라도 사우디에서 레드 와인을 대놓고 마실 생각을 하다니.

[사우디에선 주류를 금하는 거 아니었습니까?]

[하지만 자네는 외국인이지 않나. 손님 맞이용이지.]

[아까 한 모금 마신 것을 다 봤는데요? 절 핑계로 또 한 잔 하시려고요?]

[그럼 뱉어낸 것도 봤겠지? 잔에 든 와인을 버린 것도, 와인 병째 버린 것도 당연히 봤겠지.]

라흐만은 짓궂게 웃으며 작게 말했다.

[다들 몰래 숨어 한두 잔씩은 해. 이참에 나도 4만 달러짜리 와인 맛은 봐야 할 것 아닌가. 남 좋을 일도 한두 번이지.]

이제 보니 아까 와인 병 깬 것도 다른 계산이 있어서였군.

초면에 상대를 위협하려는 허세에, 내가 못 먹는 건 남도 못 준다는 심보가 하나 더 붙어었던 거였어.

[뭐 하나? 빨리 내오지 않고.]

경호원은 재빨리 선실에 들어가서 한 병에 4만 달러짜리 와인을 다시 가져왔다.

못말리겠다.

태수는 와인 디켄터를 들었다.

그리고 태수가 직접 디켄터에 와인을 따랐다.

[최고급 와인을 제대로 음미하려면 침전물을 솎아 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라흐만 님도 분명 이번 일로 침전물이 무엇인지 제대로 확인하셨겠죠?]

라흐만이 흠칫했다.

떠오르는 게 있었기 때문이다.

[설마······.]

[침전물은 버리세요.]

침전물이라.

그래, 찌꺼기는 버려야지.

[그리고 그 위에 있는 맑고 정제된 와인을 마셔야죠. 그게 최고급 와인을 마시는 법입니다.]

라흐만은 눈을 크게 떴다.

‘그래, 이자의 말대로 이건 전화위복의 기회일지도 모르겠군.’

이번 일로 버려야 하는 자들의 명단을 작성할 수 있게 되었다.

한참이나 속으로 살생부를 만들던 라흐만.

잠시 뒤 태수를 보는 눈엔 호감이 가득했다.

[내기를 떠나 빚을 하나 더 지게 됐군.]

라흐만은 느긋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건 무엇으로 갚으면 될까? 또 석유로 갚아야 하려나?]

아주 바람직한 태도였다.

석유로 갚겠다니 더할 나위 없다.

[뭐, 석유가 편하시다면 석유로 주십시오.]

[이번엔 얼마나 필요한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요. 아, 또 하나 더.]

오일 쇼크를 대비해 여유 자금 좀 투자합시다.

[현재 시세대로 석유를 사고 싶습니다. 석유를 받는 건 12월로 하고요.]

라흐만이 태수를 떠보기 위해 은근하게 말했다.

[지금이 아니라 꼭 12월, 도로 공사 후, 이런 조건을 다는 이유가 따로 있나?]

하지만 고작 이런 수작에 놀아날 태수가 아니었다.

[아직 도로 공사를 완공하지 못하여 라흐만 님의 신임을 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도로 공사를 서둘러 끝내고 후련한 마음으로 석유를 받고 싶습니다.]

라흐만이 무척 기뻐하며 의자 팔걸이를 내려쳤다.

[좋아, 아주 좋아! 그런 각오로 공사를 제대로 끝내 놓기만 해! 그럼 내가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자네에게 석유를 챙겨 줄 테니까! 내게도 그 정도 능력은 있어.]

아무렴.

아버지가 무려 국방부 장관인데.

초대 국왕의 손자가 힘이 없다면 말이 안 된다.

더구나 고작 서른 초반의 나이로 사우디아라비아 서쪽 도시 전역을 개발한다는 남자가 아닌가.

이미 제 능력을 선보이며 눈도장을 찍는 중일 것이다.

‘라흐만은 전생과 달리 장차 사우디 서부 도시 건설자로 이름을 떨치게 될 것인가? 아니면 전생과 같이 두바이에서 도시 건설자로 이름을 떨치게 될 것인가?’

태수는 눈앞의 남자를 가늠해 보았다.

제법 야망이 있고, 계산도 잘하는 남자였다.

실제로 사람 보는 안목으로는 정평이 난 한청호가 눈독 들여 로비를 벌였던 인물이었다.

‘삼원 건설이 72년에 도로 건설 공사를 수주했다는 사실도 역사 속에선 지워졌다. 라흐만과 관련이 있는 일인 것 같은데.’

태수는 라흐만을 보며 눈을 빛냈다.

‘전생에선 삼원 건설은 72년 도로 공사에 실패했다. 그 책임자였던 라흐만도 이 일로 제대로 문제가 생긴 것 같은데. 그게 뭘까? 뒤에 누가 있기에 한청호가 손을 잘라 냈을까?’

라흐만은 늘 고독하고 외로운 눈을 하고 있었다.

두바이 최고급 호텔 유리창에서 레드 와인 잔을 손에 들고 고층 빌딩을 내려다보는 걸 좋아했다.

‘돌아갈 수 없는 곳이 있고, 보고 싶은데 볼 수 없는 사람이 있어서 늘 마음이 아프다며 바라본 곳이··· 사우디 방향이었구나.’

태수는 이제야 그가 예전에 흘리듯 했던 말을 깨달았다.

‘이번에 내가 도로 공사를 무사히 기한 내에 끝낸다면 많은 것이 바뀌게 된다. 제일 먼저 라흐만이 사우디를 떠나 두바이로 향하게 될 일은 없을지도 모른다.’

태수는 잠시 고민했다.

‘도박을 하나 더 하자. 어쨌든 그와 한 배를 탔으니, 그가 사우디 왕실에서 내쳐지는 건 막아야지. 이참에 뿌리를 단단히 내릴 수 있도록. ’

결심은 끝났다.

마침 라흐만의 아버지는 국방부 장관이다.

태수는 라흐만에게 작게 속삭였다.

[잠시 전할 얘기가 있습니다. 이것은 라흐만 님이 아니라 아버님, 칼리드 빈 압둘 아지즈 알사우드 님이 아셔야 할 정보입니다.]

라흐만이 미리 방어한다.

[날 통해 내 아버님께 청탁을 넣을 생각은 말지. 12번째 아들이고, 위에서 찍혀 서부로 쫓겨 온 몸이라 그 정도 힘은 없으니까.]

[그런 종류가 아닙니다. 일단 들어 보시지요.]

청탁이 아니다.

분명히 정보라고 말했다.

하지만 국방부 장관이라면 혹할 수밖에 없는 정보가 될 것이다.

[말해 보게.]

[몇 년 전 이집트 대통령이었던 가말 압델 나세르가 심장마비로 급사하자 뒤를 이어 차기 대통령이 된 자, 안와르 사다트의 행보를 아십니까?]

[사다트?]

라흐만이 손을 휘둘러 경호원들을 도로 물렸다.

이어 태수에게 바싹 상체를 붙이며 귀를 기울이는 라흐만.

태수는 작게 말했다.

[그가 서방 국가에 우호적인 제스처를 보내면서도 아랍국의 단결을 도모하고 있습니다. 또한 구태의연한 국내 조직을 개혁하고 있죠. 그는 전 대통령인 나세르와 달리 시나이 반도를 되찾겠다는 의지가 강합니다.]

[그건 나도 알고 있다. 소련 고문단을 초빙하여 군대의 체질을 개선하고, 훈련 강도를 높이고 있다고 아버님께 들었지.]

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겁니다. 사다트가 이스라엘을 상대로 걸핏하면 협박하고 있는 건 아시죠? 몇 개월에 한 번씩 전쟁을 일으키겠다면서 말입니다.]

[군대 동원령을 발령하는 시늉까지 하면서 허풍을 남발하고 있지.]

유명한 이야기다.

이집트 대통령 사다트는 공격 의사를 숨기어 이스라엘을 잔뜩 긴장시켰던 나세르와는 정반대로 대놓고 공갈 협박을 일삼고 있었다.

그 일로 이스라엘은 잔뜩 쫄아서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으나, 실제로 이집트 측은 별다른 군사적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사우디 국방부 장관의 아들인 라흐만이 모를 리 없는 이야기였다.

[그건 일종의 정치적 제스처가 아닌가? 국제 사회에서 이집트 대통령 안와르 사다트는 위협만 일삼는 허풍쟁이로 여겨지고 있으니까.]

그것이 이집트 대통령 사다트가 노린 기만 술책이었다.

‘실제로 사다트가 제4차 중동 전쟁을 일으키기 직전에 날린 진짜 선전 포고에도 전 세계가 또 거짓말한다고 손가락질했으니까.’

하지만 정말로 이집트 대통령 사다트는 선전 포고 며칠 후에 제4차 중동 전쟁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아연실색해서 그제야 허둥지둥 방어하기 급급했다.

‘사다트의 기만 술책이 멋지게 통했지. 시리아와 이집트 연합군은 이스라엘 군인들이 휴가를 떠나 경계가 느슨해진 틈을 타서 전면적인 기습을 시작하니까.’

태수는 라흐만에게 슬쩍 귀띔했다.

[이집트와 시리아가 무기 상인들에게서 엄청난 양의 무기를 몰래 사들이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요즘 한복 입은 남자가 외국으로 바쁘게 나다니는 이유이기도 하다.

태수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이 정보는 석유 얼마짜리일까?’

라흐만이 잘 이용한다면 수백 억짜리 고급 정보일 터다.

하지만 이용하지 못한다면 지나가는 개소리겠지.

[아버님께 몰래 무기 상인과의 밀매에 대해 조사해 보는 게 어떠냐고 한마디 꺼내 보심이 어떨까요?]

라흐만의 안색이 확 변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냥 이집트의 허풍일 뿐이야. 당신네 나라 역시 마찬가지가 아닌가? 남과 북으로 나뉜 나라가 휴전 상태이긴 하지만 시시때때로 도발하고, 공갈 협박하고.]

[다르지요. 공갈 협박을 일삼는 것과 보여 주기식 군대 동원령은 가볍습니다. 하지만 무기 밀수는 차원이 다른 무게를 가집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돈의 무게를 생각하셔야죠. 군자금을 있는 대로 쏟아붓는 일입니다.]

간단한 이치다.

[말이 아니라 돈을 봐야 합니다.]

사람은 거짓말을 하지만 돈은 거짓말하지 않는다.

돈이 움직이는 것을 살펴보면 그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다.

[사람은 허투루 돈을 쓰지 않습니다.]

그 말이 라흐만의 가슴에 화살처럼 틀어박혔다.

‘말이 아니라 돈을 봐야 한다? 사람은 허투루 돈을 쓰지 않으니까?’

태수는 그저 빙그레 웃었다.

그럴수록 라흐만의 표정은 복잡해진다.

‘하지만 정말로, 만에 하나 그런 일이 생긴다면? 시나이 반도가 전쟁터가 된다면?’

벌떡.

라흐만이 참지 못하고 일어났다.

[이만 가 봐야 할 것 같군. 즉석에서 결정한 유람선 초대에 응해 줘서 기뻤다. 오늘은 여기서 이만 마치고, 다음을 기약하지.]

그가 몸을 홱 돌렸다.

그러다가 아차, 하면서 다시 태수를 돌아본다.

[내 이 빚은 반드시 무겁게 갚겠다. 이건 나라의 존망과 성패가 달린 일이니까.]

태수보다 라흐만이 빨랐다.

[물론 석유로 갚겠다. 자네 정보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만큼 아주 제대로 갚을 테니까 그건 염려 말고. 내가 아니라도 아버님께서 힘을 쓰실 거다.]

태수는 슬쩍 계약서를 흔들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사람 말 대신 돈을 봐야죠. 신뢰의 근간은 역시 계약서가 아니겠습니까?]

[못 말리겠군.]

라흐만은 서둘러 계약서에 휘갈겨 사인하고, 허둥지둥 선실로 들어간다.

태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라흐만의 어린 시절은 꽤 어수룩하군. 두바이에선 지금처럼 호락호락하지 않았는데.’

능력 자체는 더할 나위 없이 뛰어나다.

게다가 그의 아버지 칼리드 빈 압둘 아지즈 알사우드.

형을 제치고 무려 국방부 장관까지 꿰찬 인물이 아닌가.

‘사우디아라비아의 무기 구입액은 세계에서도 손꼽히니 자연히 국방부의 입김이 강할 수밖에 없지. 대단한 아버지를 두셨군.’

칼리드는 말 그대로 권력자 중의 권력자다.

‘칼리드가 이 말을 듣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 참으로 궁금하구나.’

그래서였다.

그의 아들인 라흐만에게 이런 정보를 전달하게 했다.

‘내가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끝났다.’

남은 건 열심히 공사하는 것뿐이다.

무조건 기한 내로 공사를 끝마친다!

'조만간 귀국해야겠다.'

한국으로 가기 전에 처리할 일이 하나 남았다.

'삼원 건설 수뇌부들.'

그들을 특수요원에게 넘겨주기만 하면 된다.

‘차기범. 내게 어떤 녀석들을 보내줄까?’

어떤 놈을 보내던 상관없다.

그에 대한 계획은 이미 세워뒀다.

‘그것만 해결하고 한국으로 돌아가자.’

아마 다들 왜 이렇게 빨리 왔냐며 놀랄 터다.

그리운 얼굴들을 떠올리자, 괜히 웃음이 난다.

‘돌아갈 곳이 있다는 기분. 이건 참 좋구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