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원하는 대로(1)
전화기를 앞에 둔 라흐만은 고민이 깊어졌다.
태수가 한 말 때문이다.
-잠시 전할 얘기가 있습니다. 이것은 라흐만님이 아니라 아버님, 칼리드 빈 압둘 아지즈 알사우드님이 아셔야 할 정보입니다.
중요한 정보였다.
전쟁을 관할하는 국방부 장관에겐 더욱 더 중요한 정보일 터.
‘이것은 호의일까, 악의일까? 은혜일까, 함정일까?’
태수의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라흐만님의 앞길은 제가 밝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동맹이 되지 못할 이유가 있습니까? 힘을 합칩시다.
그래서 고민이 된다.
믿었던 한청호와 삼원 건설에 이미 배신당한 값을 치르느라 고생했기에.
‘이 정보는 내 지위와 발언권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귀한 정보다.’
권력 싸움에 희생되어 서쪽으로 쫓겨 갔던 라흐만이다.
어쩌면 이 일로 단숨에 중앙에, 중요 인물로 급부상할 수도 있는 값비싼 정보다.
라흐만이 고민할 때, 가슴 속 깊이 박힌 태수의 또 다른 말이 떠올랐다.
-아까도 말했지만 사람 말 대신 돈을 봐야죠. 신뢰의 근간은 역시 계약서가 아니겠습니까?
어찌나 철두철미한지, 미리 계약서까지 준비했던 인물이다.
이 정보가 돈이 될 거라는 걸 확신하고 있다는 뜻이다.
‘사람 말은 못 믿어도, 계약서는 믿어야지.’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다.
사람 말의 진의를 헤아릴 필요 없다.
돈의 행방을 헤아리면 그만이다.
‘Winner takes all. 원래 승자가 다 먹는 것 아니겠나? 나도 이번 판에 크게 걸어보겠다.’
라흐만은 전화기를 들었다.
한편, 사우디아라비아 수도 리야드.
사우디 왕궁과 조금 떨어진 대저택의 주인은 칼리드 빈 압둘 아지즈 알사우드였다.
그는 아들 라흐만의 전화를 받고 안색이 바뀌었다.
[아들아, 너는 지금 조만간 전쟁이 날 수도 있다고 말하는 것이냐?]
-네, 그렇습니다.
문득 의심스럽다.
사우디 서쪽 도시에 처박혀 있는 녀석이 그런 극비 정보를 어디서 얻은 걸까?
[설마 형님 쪽에서 나온 정보냐?]
-아닙니다. 한청호는 이미 제 손을 끊어냈습니다. 아버님도 아실 것입니다.
[으음.]
형님, 그리고 한청호.
그들은 아들 라흐만의 뒤통수를 치고, 함정에 몰아넣었다.
생각할수록 이가 갈린다.
하지만 칼리드는 마음을 다잡았다.
‘이 정도에 흔들릴 내가 아니다. 그랬다면 죄 없는 라흐만을 잠시 서쪽으로 보낸다는 결단도 내리지 않았을 것이다.’
칼리드는 주먹을 꽉 쥐었다.
‘형님, 벌써 아들 셋을 잃었습니다. 저도 더 이상은 못 참습니다.’
자신의 가장 뛰어난 아들이라면 단연 라흐만을 손꼽는다.
라흐만은 어려서부터 영특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칼리드는 그런 라흐만을 차기 후계자로 염두에 두고 있었다.
‘모든 면에서 제 형을 능가한다. 이렇게 뛰어난 놈이 고작 이런 일로 꺾여선 안 되는데.’
원망스럽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형님이 이것으로 야욕을 끝낸다면 감당할 수 있다. 하지만 끝내 내 아들을 이 나라 밖으로 내쫓으려 한다면, 그땐 나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때 수화기 너머에서 라흐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는 당장 전쟁을 대비하여야 합니다.
다른 이들이 말했다면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말라고 일축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말을 한 자는 다른 누구도 아닌 라흐만이다.
[라흐만, 너는 허풍쟁이 사다트의 말을 믿는 것이냐?]
-아뇨, 전 이제 사람의 간사한 말은 안 믿을 겁니다. 저는 이 모든 게 이집트 대통령 사다트의 기만 술책이라 보고 있습니다.
[그럼 무엇을 보고 그리 판단한 것이냐, 아들아.]
-돈의 흐름입니다. 사람은 돈을 허투루 쓰지 않기 때문입니다.
태수가 가르쳐 준 말이었다.
하지만 이젠 라흐만의 가슴에 깊이 박힌 말이다.
칼리드에겐 뜻밖이었다.
‘세상의 시작과 끝은 결국 욕망이다. 욕망은 돈과 떼려야 뗄 수 없지. 라흐만이 그걸 깨달은 건가?’
그걸 깨달았으면 세상의 이치를 헤아리는 기본은 갖췄다 할 것이다.
칼리드의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누가 네게 그런 가르침을 베풀어 주었느냐?]
라흐만에게 가슴속 깊이 가르침을 박아 놓은 자가 있는 게 분명하다.
그자는 아들을 이끌어 주고 있었다.
아들은 잘 모르겠지만, 그가 생각하기에 이건 아무리 봐도 호의였다.
-대한민국에서 온 강태수라는 자입니다.
처음 들어 보는 인물이다.
[어떤 사람이더냐?]
-돈과 말의 무게를 아는 자였습니다. 그자의 말 중에 가벼운 건 없었습니다. 와인을 보면서도 인간을 꿰뚫어 보는 자였습니다.
처음이었다.
라흐만이 사람을 이토록 높이 사는 건.
‘라흐만이 인정하는 자라면······.’
라흐만은 크게 될 인재다.
라흐만을 후계자로 제대로 성장시킬 수 있는 친구라면 그 무엇도 아깝지 않다.
-아버님께 긴히 드릴 청이 있습니다.
[청? 그게 무엇이냐?]
-석유가 필요합니다.
라흐만은 태수와 있었던 만남에 대해서 말했다.
태수와 한 계약에 이르자, 칼리드는 무릎을 탁 치며 크게 웃었다.
[대단한 놈이구나! 정말 수완이 보통이 아니야. 이건 네가 무조건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나라도 뿌리치기 힘든 제안이구나.]
하지만 마음에 안 드는 점도 있다.
[라흐만, 너는 왜 판돈을 올리는 것에 동의하였느냐?]
그 정도 석유라면 못 줄 것도 없지만, 무리해서 내어줄 필요도 없었다.
[내기의 흥에 취한 것이더냐, 그자의 수작에 놀아난 것이더냐?]
-아닙니다, 아버님. 전 제대로 이기기 위해서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택했을 뿐입니다.
칼리드는 아들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
[라흐만, 너는 이번 공사에 모든 걸 걸었구나.]
-그렇습니다. 이번 공사를 망치면 사우디 왕실에 제 자리는 없을 겁니다.
[잘했다. 넌 오히려 그자의 욕심을 이용했어. 사람의 욕망을 이용해 이득을 얻는 방법을 깨우쳤구나.]
이번 공사로 인해 라흐만이 쫓겨나면?
칼리드는 태수를 모른 척할 생각이었다.
'한청호, 이 망할 놈.'
아들의 일을 망친 자를 어찌 그냥 놔둘 수 있으랴.
그 보복으로 그놈의 일 역시 망쳐 놓을 작정이었다.
-그깟 석유입니다. 욕심에 눈이 뒤집혀 도로 공사를 악착같이 끝내주길 바랐습니다. 우리는 한 배를 탔으니, 실패의 쓴맛도 같이 맛보게 될 겁니다.
[훌륭하다. 너는 최선을 다해 네가 이겨야 하는 자리를 골랐다.]
칼리드가 칭찬하는 일은 드물다.
[또한 장기말을 움직이는 법을 알게 되었다. 이번에 그자를 만나 귀중한 가르침을 배웠구나.]
-감사합니다, 아버님.
칼리드는 마음이 동했다.
[그자가 대한민국에서 왔다고?]
-네, 삼원 건설에 맡겼던 공사를 그가 이어받아 끝마칠 것입니다.
[도로 건설이 무사히 끝나면 그를 한 번 데리고 오너라. 만나보고 싶구나.]
-알겠습니다, 아버님. 그럼 그때 뵙겠습니다.
칼리드는 전화를 끊고, 집사를 돌아보았다.
[은밀히 알아봐야 할 일이 생겼다.]
* * *
숙소로 돌아온 태수는 날짜를 확인했다.
1973년 4월 25일.
‘이제 슬슬 특수요원이 중동에 올 때가 됐는데.’
마침 2등 서기관 송창준이 태수를 찾아왔다.
“특수요원들이 일주일 후에 도착한다고 합니다.”
태수가 중동에 왔을 때, 3일 후에 따라온다던 특수요원들은 아직도 안 온다.
일정이 벌써 여러 번 연기되었다.
송창준은 머리를 긁적였다.
“이번엔 제대로 왔으면 좋겠어요. 이게 대체 몇 번째 연기인지 모르겠네요.”
특수 요원들이 딱히 필요하지는 않았지만 이쯤 되자 태수도 이유가 궁금했다.
특수요원들이 자꾸 일정을 늦추는 이유가.
‘또 한청호의 수작질인가?’
아마도 그럴 것이다.
태수가 베두인족과 만날 때 특수요원을 데려갈 것이라 짐작하고 수작을 부리는 게 틀림없다.
‘날 곤란하게 만들려고 돈 꽤 썼겠는데? 그런데 이걸 어쩌지? 전부 헛돈인데.’
태수는 특수요원 없이도 베두인족을 잘 만났고, 일도 전부 해결했다.
이제 남은 건 도로 공사를 끝내는 것과 삼원 건설 수뇌부를 한국으로 돌려보내는 것뿐이다.
“일단 진정하세요. 그래도 무슨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휴, 사실 짚이는 게 몇 개 있긴 합니다. 듣자 하니 바로 며칠 전 남산 야외음악당에서 열린 부활절 기념 예배에서 불미스러운 사건이 발생했다고 합니다.
태수는 바로 알아차렸다.
‘남산 부활절 연합 예배 사건이로군.’
1973년 박정환 유신 정권 당시 빈민구제와 민주화 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하던 개혁적 개신교인들이 내란 음모를 꾸몄다는 이유로 탄압당한 사건이다.
당시 도시 빈민 문제가 아주 심각했기에 판자촌을 중심으로 도시 빈민 선교활동을 벌이던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데 그들이 남산 야외 음악당에서 열린 부활절 기념 예배에서 일을 벌였다.
민주주의를 부르짖는 플래카드를 걸고, 전단을 돌려 교인들에게 배포한 것이다.
이로 인해 박정환은 크게 노하여 그들을 ‘내란 음모 예비’로 규정하고, 훗날 서울지검 공안부에서 잡아들이도록 하였다.
“그로 인해 좀 시끄러웠던 모양입니다. 차기범은 대통령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몸을 바짝 웅크렸고요. 그 탓에 일이 조금 미뤄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참 속도 좋으십니다. 어찌 그리 너그러우십니까? 저였다면 당장 항의했을 텐데요.”
송창준은 안타까워했지만, 태수로서는 하나도 안타깝지 않은 일이었다.
‘상관없다. 애초에 그냥 와서 삼원 건설 사람들을 데리고 가라고 부른 사람들이었으니까.’
말 그대로 ‘박정환을 위한 체면 살려 주기용 이미지 쇼’가 아닌가.
하지만 그 내막을 알 길이 없는 송창준은 난감해했다.
“게다가 며칠 후면 제6차 남북적십자회담 본회담이 서울에서 개최될 예정이라, 중동에서 특수요원들이 며칠 머물지 못한다고 하더군요.”
그것도 마음에 들었다.
하는 일도 없으면서 괜히 중동에 눌러 앉아서 이것저것 간섭하는 건 사양이니까.
“사정이 그렇다면야 어쩔 수 없지요.”
“그래도 이건 경우가 아니지 않습니까? 아, 차기범 대통령 경호실장님께서 전해달라는 말이 있습니다.”
송창준은 태수에게 전보를 내밀었다.
<당신의 사정을 헤아리지 못하게 되어 유감이오. 하지만 이 일로 당신은 장차 나를 고마워하게 될 것이오.>
송창준은 전보를 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다시 봐도 너무하는군요. 베두인족과 담판을 벌일 때 강태수 씨를 보호하라고 대통령께서 직접 보내신 특수요원일 텐데요.”
누가 봐도 특수 요원의 쓰임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뭐, 괜찮습니다. 이미 베두인족과 대화는 안전하게 잘 끝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오지 않아도 필요한 몫은 다 해 줬고요.”
“네? 아직 도착도 하지 않은 특수 요원이요?”
“하하, 그런 게 있습니다. 아무튼 전 괜찮으니 너무 열 내지 마세요. 안 그래도 더운 나라인데 쓰러질까 겁납니다.”
태수가 특수 요원을 요청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앞서 말했듯 삼원 건설을 이용한 미끼.
‘또 하나. 한청호가 날 과소평가하길 바랐지.’
사실 태수는 믿는 구석이 많다.
하지만 그걸 한청호가 몰랐으면 했다.
‘아직은 때가 이르다.’
한청호를 방심하게 만들고 싶다.
그래야 중요한 기회가 왔을 때 제대로 뒤통수를 갈길 수 있을 거고.
그러면 그럴수록 한청호는 더욱 속이 쓰릴 것이다.
‘그나저나 차기범의 진짜 속내는 뭘까? 뭘 노리고 있는 것이지?’
태수는 예전, 포항에서 차기범을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미리 짜둔 대로 박태종이 특수 요원을 차출하겠다고 지원할 차례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차기범이 먼저 선수 쳤다.
-각하, 그 특수요원은 제가 뽑아도 되겠습니까?
박태종은 난감해했지만, 명분이 없었다.
어쨌건 박태종은 이미 군복을 벗었고, 차기범은 현역인 대통령 경호실장이다.
‘그때 예상했었지. 차기범이 누구 편에 서느냐에 따라 재밌는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태수는 전보를 보면서 피식 웃었다.
‘보통이라면 송창준처럼 화낼 일이고, 차기범이 미안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차기범은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이고 있어.’
이유는 두 가지로 짐작한다.
‘차기범이 상식이 통하지 않는 또라이거나, 아니면 특수요원 출국 일정 연기가 내게 정말로 유리한 일이라거나.’
궁금하다.
차기범이 왜 저렇게 나오는지.
‘특수요원들이 오면 곧 알게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