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사막의 뜨거운 밤(2)
송창준은 작게 감탄했다.
‘이 모두를 전부 미리 예상하고······. 정말 대단하다. 괜히 거물들이 나서서 밀어주라는 청탁한 게 아니었어. 치밀하게 준비할 뿐만 아니라 몸이 달아 서두르지도 않는구나. 노련하다.’
젊은 친구가 참 쉽게도 문제를 해결했다.
‘몇 달 동안 외무부와 사우디 왕실이 달라붙어도 못 푼 문제를 이렇게 쉽게 풀다니. 시소 받침대부터 날려버렸어. 물 문제를 해결해서 싸움을 끝낼 줄이야.’
경이롭다.
몇 달이나 사우디 왕실의 독촉에 힘들던 외무부였다.
그랬기에 송창준은 태수의 수완이 더욱 대단해 보였다.
‘대체 유조선에 물을 싣고 오겠다는 발상은 누구 머리에서 나온 걸까? 이자의 머리에서 나온 거겠지?’
지금 물은 황금보다 귀하다.
물이라면 다들 껌뻑 죽는다.
‘이자 덕분에 대사께서 사우디 왕족을 앞에 두고 헛기침 꽤 하시겠어. 어깨를 한껏 세우고.’
마음이 급하다.
‘이 기쁜 소식을 당장 외무부에 전해 주고 싶다. 우리의 스트레스가 한 방에 끝났어.’
* * *
연회 장소로는 하코넨 마을로 결정됐다.
우물 공사를 할 현장을 보고 싶다는 태수의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하코넨 마을은 잔치로 떠들썩했다.
여자와 노인들이 기쁜 마음으로 음식을 나른다.
[대체 얼마 만에 열리는 대규모 연회인지 모르겠어요.]
[이게 다 저 손님 덕분이래요. 먹을 것도 전부 손님이 들고 오셨고요.]
[그뿐만이 아니에요. 엄청나게 큰 배를 가지고 우리가 몇 달이나 마실 물을 잔뜩 가져오셨다지 뭐예요?]
오랜만에 배불리 먹은 아이들은 즐거운 분위기에 잔뜩 신이 나서 뛰어다닌다.
손에는 저마다 먹을 것이 들려 있었다.
[매일이 오늘 같았으면 좋겠어.]
[잼을 듬뿍 바른 쿠키가 제일 맛있었어.]
[너 사탕은 못 먹었지? 난 우리 엄마가 줬지롱.]
즐거운 연회였다.
모닥불을 둘러싸고 사람들은 먹고 즐겼다.
[고기 부족하신 분?]
[여기요. 빵도 없어요. 계란이랑 잼 좀 주세요.]
[수프 더 주세요. 과일이랑 생선도요.]
특히 부족의 시인들이 우드(류트의 조상이 되는 현악기)와 라바바(바이올린과 비슷한 현악기)를 연주하며 시를 읊고 노래를 부른다.
부족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주제, 전쟁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였다.
둥둥둥.
아름다운 무희들의 춤도 빠질 수 없었다.
특히 칼춤을 추던 무희는 유독 아름다워서 지켜보던 남자들이 모두 감탄했다.
육감적인 몸매와 섹시한 표정에 시선이 가지 않을 수 없다.
어째서인지 태수는 자꾸만 그녀와 눈이 마주치는 것 같았다.
‘착각이겠지.’
무희가 특유의 복장을 하고 요염한 동작을 선보이며 태수에게 다가온다.
구애의 춤이었다.
[받아요.]
순간 좋은 향기가 은은하게 풍겼다.
태수는 얼떨결에 그녀가 내민 끈을 받았다.
그러자 사방에서 휘파람을 불어 댄다.
태수는 어리둥절했다.
[왜 이렇게 휘파람을 불어 대는 겁니까?]
족장이 껄껄 웃었다.
[무희가 당신이 마음에 들었나 봅니다. 당신이 그녀의 마음을 받아 준 겁니다.]
태수는 난감해하며 끈을 어쩌지 못했다.
[이런, 그런 줄도 모르고.]
[지금 그걸 내버리면 무희가 많이 창피할 겁니다. 적당히 넣어 두세요. 무희에겐 제가 잘 말해 보겠습니다.]
[그게 좋겠군요. 감사합니다.]
태수는 두 부족의 수뇌부들과 연회를 즐기고 있었다.
족장이 태수에게 슬쩍 물었다.
[사막 부족의 전통춤입니다. 어떠십니까?]
[아름답습니다.]
[그렇지요? 무척 아름답지요. 그런 여자에게 끈도 받고 말이죠, 하하하.]
[자꾸 놀리실 겁니까?]
배두인족 수뇌부들이 크게 웃으며 좋아했다.
오랜만에 풍족한 음식으로 배를 든든히 채운 건 수뇌부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몸과 마음이 느슨하게 풀렸다.
오고 가는 대화도 훈훈하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태수가 슬쩍 얘기를 꺼냈다.
[앞으로 할 일이 꽤 많습니다. 그것에 대해 의논해 봅시다.]
당연히 수뇌부들은 두 손 들고 환영했다.
마을 우물 공사가 아닌가.
[귀인, 당장 내일부터 우물 공사를 한다고 하셨죠?]
[그렇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공사를 시작해야 합니다. 중장비를 총동원할 겁니다.]
[그럼 감사하죠. 귀인 덕분에 앞으로 가뭄 걱정은 안 해도 되겠습니다, 하하하.]
행복해한다.
그들은 앞으로 닥칠 일을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껄껄 웃었다.
공사가 뭐 별건가 싶었다.
[유조선에 실린 물을 가져오려면 따로 수로를 깔아야 할 겁니다. 물론 제가 도울 겁니다.]
우물에 수로까지 도와준다고?
당연히 수뇌들이 전부 좋아했다.
[그렇군요. 물이 워낙 많으니까 덤프트럭을 동원해도 전부 가져올 수 없겠군요.]
[이 가뭄에 물이 많아서 문제네요. 하하하, 정말 감사합니다.]
[그 많은 물을 다 가져오면 우기까지 문제없이 버틸 수 있을 겁니다. 껄껄껄.]
분위기가 참 좋다.
[다만 중장비는 있는데, 작업을 거들 인부가 부족합니다.]
당연한 소리였다.
수뇌부들은 역시나 껄껄 웃었다.
[그런 문제라면 우리가 돕겠습니다. 우리가 먹을 물인데 당연히 도와야죠.]
[귀인 덕분에 싸움을 멈췄습니다. 사막 전사들을 인부로 동원하겠습니다.]
[우물도 그렇고, 수로도 그렇습니다. 우리 마을까지 물을 대려고 공사를 한다는데요.]
태수도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좋습니다. 여러분이 그리 나서 준다면 정말 고맙지요. 그럼 저도 중장비와 기름값 일체를 떠맡겠습니다.]
중장비는 전부 한청호한테 뜯어왔다.
게다가 여기는 중동 제일의 산유국.
석유 가격은 거저나 다름없다.
다행이다.
[귀인의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우리도 귀인의 일에 일손을 보태겠습니다.]
[우리 마을 우물 공사고, 수로 공사에 사용하는 것들인데 우리가 고맙지요.]
[원래 우리가 중장비를 빌리고 기름값까지 대야 하는 걸 누가 모르겠습니까. 우리도 귀인의 도로 공사를 돕겠습니다. 완공할 때까지 책임지고.]
아주 고마운 말이었다.
‘베두인족 전사들, 힘도 잘 쓰고, 체력도 좋지.’
무려 사막의 전투 종족이라 일컬어지는 사막의 전사들이니 힘은 오죽 좋을까.
하루 종일 일하더라도 지치지도 않을 터다.
익숙지 않은 인부일도 곧잘 해내리라 생각한다.
‘아직 중동까지 일하러 오겠다는 한국 인부들이 부족할 때다. 급한 대로 현지에서 수급할 수 있는 것은 전부 수급해야 한다.’
아직 중동 건설 붐이 일지 않아서 한국 인부들을 모집하는 데 난항을 겪고 있었다.
하지만 대신 현지에서 훨씬 튼튼한 사람들로 구할 수 있어 다행이다.
'현지인이니까 풍토병에도 안 걸릴 테고, 물갈이도 안 할 테고. 딱 좋다.'
풍토병이 다 뭔가? 그런 건 허약한 애들이나 걸리는 거라며 웃는 사막 전사들이다.
물갈이가 다 뭔가? 물이 없어서 이 모양이지, 썩은 물도 받아 마실 사막 전사들이다.
태수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 수로를 노출하면 다른 부족들이 중간에서 물을 가로채지 않을까요? 극심한 가뭄이니 다들 눈이 벌게져 있을 겁니다.]
태수의 말에 모두 정신이 확 든다.
‘그렇구나. 다들 물이 부족하지.’
물 때문에 싸움을 벌이는 베두인족은 그들만이 아니었다.
[어떤 놈들이 감히 우리 물을 훔치려 한답니까?]
[우리 부족을 살릴 생명수입니다. 목숨 걸고 지켜야 합니다.]
[사막 전사가 불침번을 서서라도 반드시 지켜 낼 겁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수로를 지키기 위해 귀한 인재들을 길바닥에 세우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기가 올 때까지 몇 달이나 그 일에 매달려야 할 겁니다.]
다들 탄식했다.
[그럼 어떡합니까?]
[눈 뜨고 물을 빼앗길 수는 없습니다.]
[가뭄입니다. 다들 목숨 걸고 물을 탈취하려고 할 겁니다. 그들을 막아낼 수 있는 건 우리 사막 전사들밖에 없습니다.]
일단 문제를 들이밀어 정신을 쏙 빼놨으면, 슬그머니 대안도 제시해야 하는 법이다.
[수로를 지킬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어떤 방법입니까?]
[수로 위를 덮는 거죠. 쉽게 파서 물을 훔쳐 갈 수 없을 만큼 단단한 것으로요.]
거의 다 왔다.
[이를테면 도로 같은 거요. 수로 위에 시멘트 도로를 깔면 누구도 훔쳐 가지 못할 겁니다. 사막 전사가 교대로 수로를 지킬 필요도 없죠.]
다들 무릎을 탁 쳤다.
[그거 좋은 생각입니다.]
[우기가 올 때까지 몇 달이나 하루 종일 수로를 지킬 필요가 없어지겠네요. 그거라면 도로 까는 정도의 번거로움은 감수하겠습니다.]
[마침 항구의 시장에서 물건을 쉽게 사 오려면 도로는 필요했습니다. 겸사겸사 아주 좋습니다.]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이번에도 물었다.
[여러분 뜻이 그렇다면 도로 공사도 제가 돕겠습니다.]
다들 깜짝 놀란다.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우리는 당신을 부족의 영원한 은인으로 모시겠습니다.]
[저희는 은혜를 모르는 자가 아닙니다. 은인께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 내어드릴 수 있습니다. 말씀만 하세요.]
도로 까는데 들어가는 거? 생각보다 많지 않다.
멀지 않은 바닷가에 굴러다는 게 품질 좋은 모래와 자갈이다.
게다가 물 문제도 해결했다.
그러니 문제는 딱 하나뿐이다.
바로 시멘트.
[사실 제가 여러분을 위해 도로 공사를 돕는 것은 큰 문제 없습니다. 중장비가 있으니까요. 다만 시멘트 도로를 깔기 위해서 시멘트가 필요합니다.]
그런 문제가······.
베두인족 수뇌부들은 머리를 싸맸다.
[당장 어디서 시멘트를 그처럼 많이 사 올 수 있겠습니까?]
[도로를 깔려면 사 와야 하는 시멘트가 한두 푼도 아닐 텐데······.]
태수는 손을 들어 모아딥 석산을 가리켰다.
[마침 저기 석회암 석산이 있어서 말입니다.]
코리노 부족이 둥지를 튼 바로 그곳이었다.
[저는 석회 광산을 개발하고, 시멘트 공장을 지으려고 합니다.]
베두인족들은 깜짝 놀랐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제안이었기 때문이었다.
[모아딥 석산을 석회 광산으로 개발한다고요?]
[시멘트 공장을 지어요?]
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한국에서 석회 광산과 시멘트 공장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문가들을 잔뜩 데리고 왔습니다.]
태수는 한쪽에서 음식을 먹으며 무희의 춤을 바라보고 있는 일행을 가리켰다.
[저를 따라온 사람들입니다. 광맥 탐사 전문가도 있고, 석회 광산에서 설비를 정비하던 자도 있습니다. 시멘트를 전문적으로 만드는 사람도 물론 있습니다.]
태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전 석회 광산과 시멘트 공장을 지어 도로를 완성하고자 합니다. 그러니 여러분들께서 양해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태수가 뭘 걱정하는지 이제 이해가 간다.
족장이 자애롭게 미소지었다.
[우리 부족의 터전을 빼앗았다고 원망할까 그러시는군요. 하지만 저희도 압니다. 도로 공사를 하려면 시멘트가 필요하죠. 바로 근처에서 필요한 재료를 수급할 수 있다면 내어드려야죠.]
모두 고개를 끄덕인다.
[귀인께서 모든 돈과 장비, 전문가까지 제공하니 그건 당연한 귀인의 권리입니다.]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인정할 수 있습니다.]
족장은 말했다.
[제가 관공서에 가서 정식으로 공문서를 만들겠습니다. 귀인의 이름으로 드릴 것입다.]
[베두인족의 이름으로 해도 좋습니다. 다만 제가 도로 공사할 때까지만 석산과 시멘트 공장을 충분히 이용하고 싶습니다.]
[아닙니다. 귀인께서는 사양하지 마십시오. 이건 귀인의 권리이자, 우리 부족의 뜻입니다.]
족장은 비장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사우디 왕실의 허가를 꼭 받아낼 것입니다. 만일 왕실이 반대한다면 최소 10년, 20년이라도 권리를 보장할 수 있도록.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일을 성사시킬 겁니다.]
태수는 허리 숙여 인사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럴수록 미안해진다.
태수는 난처한 듯 말했다.
[그런데 여러분께 한 가지 더 알려 드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태수는 이번엔 항구를 가리켰다.
[물을 잔뜩 실은 유조선은 항구에 보름밖에 정박하지 못합니다. 이웃 나라 바레인에 석유를 공급받기 위해서죠. 떠나야 할 날짜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베두인족들의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위기감이 급습했다.
[그 말은······.]
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공사를 무척 서둘러야 한다는 말입니다.]
태수는 안타까워하며 말했다.
[빨리 서두르지 않으면 물을 가득 실은 유조선은 바레인으로 떠납니다. 제가 공사를 서두르는 이유입니다.]
큰일 났다.
베두인족 수뇌부들은 입이 바짝 마르고,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결국 보름 동안 수로를 깔고, 도로를 깔고, 우물을 파고, 시멘트를 만들어야 한다는 소리잖아?’
‘우리가 할 수 있을까? 자칫하다간 그 귀한 물이 옆 나라로 가 버리고 만다.’
‘안 돼. 그 물을 어떻게 보내.’
벌떡.
베두인족들이 일어나서 부족원들에게 달려가며 소리쳤다.
[비상! 비상사태다. 모두 연회를 중지하고 우리의 얘기를 들어라!]
[내일 새벽부터 공사 시작해야 한단 말이다!]
뜻밖의 비상사태가 발생하고 말았다.
태수는 품에 든 황금 명함을 만지작거렸다.
'이걸 쓸 때가 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