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산 찍고 건설 재벌-46화 (46/230)

46. 사막의 뜨거운 밤(1)

태수가 품에서 문서를 하나 꺼냈다.

사우디아라비아 왕실에서 박정환에게 보낸 비공식 문서 중 일부를 복사해서 온 것이다.

자세한 사정을 알아야겠다면서 김정림을 들들 볶아 뜯어왔다.

[이번 공사는 사우디아라비아 왕실에서 직접 요청한 일입니다.]

[뭐라고?]

그들에게 있어서 사우디 왕실이란 의미는 남다르다.

부족의 용맹한 전사들이 초대 국왕을 도와 나라를 세웠고, 현재도 왕실 엘리트 경호원으로서 국왕 및 왕족들을 호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소수 부족임에도 불구하고 사우디 왕실에 큰 영향력으 끼치고 있었고, 사우디 왕실의 강력한 지지 세력이 되었다.

[국왕 폐하께서 보낸 것이 확실하냐?]

[직접 확인해 보십시오. 왕실의 인장을 알아보실 수 있는 분이 계십니까?]

[왕실의 인장을 못 알아볼 리가 없잖느냐.]

베두인족 족장이 태수가 내민 문서를 확인하고 눈을 감았다.

[왕실의 인장이 확실하군. 내용을 보아하니 저자의 말이 맞다.]

베두인족들은 깜짝 놀랐다.

[정말 명예 때문에 이 많은 것을 베풀겠다는 겁니까?]

[저자의 말에 따르면 원하는 것이 고작 도로 공사의 끝맺음이라니··· 대단하군요.]

고작 도로 공사 때문에.

사우디 왕실의 부름을 받고 이곳까지 오다니.

‘물은 선물, 우물은 호의, 도로 공사는 조국의 명예라······.’

명예를 위해 헌신하는 것은 쉽게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대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함부로 의심해서 미안하다. 믿기지 않는 일이기에 선뜻 믿을 수가 없었다.]

[이해합니다.]

오해는 모두 풀렸다.

베두인족은 태수를 보며 은은히 감탄과 존경을 내비쳤다.

그를 오해해서 몰아붙였는데, 눈썹 한 번 찡그리지 않았던 것을 기억했다.

그럴수록 태수의 무덤덤한 태도가 대단해 보였다.

사막의 존경받는 대전사가 있다면 바로 이자와 같았으리라 생각했다.

[조국의 명예를 위해 호의를 베풀려는 뜻도 받아들이겠다. 여러 가지로 정말 부끄럽고 미안하다. 전부 그릇이 작은 내 탓이다.]

[아닙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태수는 그들이 조금 안쓰러웠다.

베두인족이 왜 이렇게 나오는지 이해 못 할 것도 없었다.

가뭄 때문에 우물 하나를 두고 생사를 다투던 자들이다.

‘원래 구조된 야생동물은 사람을 경계하지. 이들이라고 다를까.’

유조선 가득 물을 싣고 온다는 건 꿈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기도 했다.

더구나 우물과 수로 공사를 해주겠다는 제안을 꿈에서조차 받아봤을까?

선뜻 믿기지 않았으리라.

‘나라에서조차 그들을 위해 도로와 수로를 깔지 않았다. 가뭄을 버텨내기 무척 어려웠을 테지.’

외로운 생존 투쟁이었을 것이다.

‘받을 건 받고, 줄 건 준다. 물 대신 인부를. 우물과 수로 대신 석회 광산과 시멘트 공장을 받으면 된다.’

이건 태수에게도, 베두인족에게도 모두 좋은 제안이었다.

‘난 석회 광산과 시멘트 공장을 독점해 떼돈 벌어서 좋고. 베두인족은 물과 일자리를 얻어서 좋고. 함께 잘 살면 되는 일인 것을.’

그뿐만이 아니다.

‘이번 도로 공사만 제대로 끝내면 막대한 자금을 받을 수 있다. 1,250만 달러 중에서 70%인 875만 달러. 그 돈으로 석유를 사서 4배로 뻥튀기 시킨다. 아파트 건설 자금을 벌어들인다.’

기회는 날마다 오는 게 아니다.

‘기회도 잡고, 돈도 벌어야지. 그 와중에 이왕이면 어려운 이들과 함께 상생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

얻을 건 확실하게 얻고, 함께 나눌 건 제대로 나누고.

그렇게 살아보고 싶었다.

그래서였다.

태수는 베두인족을 돌아보며 솔직하게 말했다.

[가뭄은 천재지변입니다. 여러분은 천재지변에서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쓰시며 여기까지 버텨 오셨을 겁니다. 여러분이라고 싸우고 싶어서 싸웠겠습니까?]

다들 어쩔 수 없이 싸움터로 내몰린 사람들이다.

[사우디 왕실도 그래서 속수무책이었을 테지요. 다른 사막 부족도 같은 사정이었을 것이고요.]

그 누가 와서 뭐라고 해도 말릴 수 있는 싸움이 아니었다.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나라 전체에 가뭄이 들었으니, 물 구하기 힘든 건 다들 마찬가지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저는 멀리서 유조선 가득 물을 싣고 이곳에 왔습니다. 두 부족이 실컷 먹고도 몇 달을 버틸 수 있는 많은 물이 있습니다.]

유조선이 왔다.

그 물이라면 다 함께 이 위기를 버틸 수 있을 것이다.

[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겨눴던 칼입니다. 그러니 이제 모두 그만 내려놓읍시다.]

베두인족이 상대방을 힐끔힐끔 본다.

그간 물 때문에 몇 달이나 전쟁을 하면서 많은 이들이 죽고 다쳤다.

절박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선 피해를 감수해야만 했다.

그렇게 죽은 친구와 형, 동생을 떠올렸다.

[문제가 해결되었음에도 부질없는 미움 때문에 칼을 계속 들 겁니까? 우기가 와도 함께 기뻐할 수 있는 가족과 동료들이 전부 죽고 없다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베두인족은 상상하고 말았다.

빗속에서 목숨으로 쟁취한 우물을 바라보고 있는 자신을.

다 죽고 없는데, 사막에 홀로 버려진 자신을.

[어떻게든 살아 보려고, 그래서 들었던 칼이 아닙니까?]

칼을 든 손에서 자꾸만 힘이 빠져나간다.

[미움은 그만 내려놓읍시다. 아이들을 위해서, 아내를 위해서, 부모를 위해서, 살아남은 사람들과 함께할··· 미래를 위해서.]

모두가 숙연해져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간혹 어디선가 낮게 탄식하는 목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그때였다.

부르릉.

아까 항구로 향했던 차가 돌아오고 있었다.

차가 멈추자마자 베두인족이 뛰어내렸다.

그들이 저마다 흥분으로 잔뜩 상기된 채 크게 외쳤다.

[물입니다.]

[유조선 가득 물이 실려 있었습니다.]

[저자의 말이 맞습니다.]

[엄청난 양이었습니다. 앞으로 물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습니다.]

희망찬 소식이었다.

그 말을 들은 베두인족들.

[우와아아아-.]

[우오오오옷-.]

엄청난 소리로 환호성을 질렀다.

[물이다.]

[이제 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우기가 올 때까지 버틸 수 있어.]

[이 지긋지긋한 싸움을 하지 않아도 된다.]

[부족 전쟁은 끝났다.]

태수는 주먹을 불끈 쥐며 속으로 외쳤다.

‘됐다. 전쟁은 끝났다.’

태수를 보는 베두인족들의 눈에는 호감이 가득했다.

마치 생명의 은인을 보는 것처럼.

전쟁을 종식시키러 온 구원자를 보는 것처럼.

[우와아아-.]

[이건 기적이야.]

베두인족들은 서로를 얼싸안고 기뻐했다.

하루하루, 시시각각 말라가는 우물을 보며 걱정하던 그들이었다.

벌써 몇 달이나 그랬다.

그랬기에 그들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족장님, 물이랍니다. 가뭄 걱정은 끝났습니다.]

[우리는 이제 살았어요. 물 때문에 싸우지 않아도 됩니다.]

족장의 늙은 눈가에도 물이 번지고 있었다.

[난 그를 손님으로 맞이할 것이다. 앞으로 그를 귀인으로, 손님으로 대할 것이다.]

좋다.

아주 좋다.

베두인족에게 손님의 의미는 특별하다.

더구나 앞으로도 계속 손님처럼 대한다니,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좋습니다. 두 족장께서 제 뜻을 함께 헤아려 주시겠습니까? ]

두 족장은 태수의 뜻을 바로 알아들었다.

둘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코리노와 하코넨은 화해할 겁니다. 귀인을 두 부족의 손님으로 청합니다.]

[함께 손님을 맞이할 테니 손님맞이 선물도 함께 나눠 주셨으면 합니다.]

태수가 베두인족들을 돌아보았다.

베두인족들은 황급히 손님에 대한 예를 취한다.

[족장의 뜻이 부족의 뜻입니다.]

[두 부족의 손님으로 맞이하고 싶습니다.]

모두 족장을 따라 정중하게 인사했다.

한마음 한뜻으로.

양쪽으로 나눠 섰던 사막 전사들이 모두 같은 자세로 예를 갖춘다.

도로 가운데 서 있는 태수를 향해서.

태수 역시 한국식으로 90도로 허리를 굽혀 반듯하게 인사했다.

[저를 이토록 극진하게 손님으로 맞아 주셔서 정말 영광입니다. 기쁜 마음으로 두 부족의 손님이 되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막 부족들은 자신들과 다른 태수의 자세를 보고 씩 웃었다.

태수 역시 조국의 예로 자신들에게 화답하고 있다는 걸을 본능적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손님맞이 예를 갖췄던 전사들은 태수를 보며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멀리 떨어져 보고 있던 태수 일행들은 저마다 휘파람을 불었다.

태수 곁에 서 있던 홀쭉이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게 내가 뭐랬어요. 태수만 믿으면 된다고 했잖아요. 봐요, 이렇게 멋지게 해냈잖아요.”

통역하던 송창준 역시 잔뜩 상기된 얼굴로 슬쩍 엄지를 들었다.

“멋졌습니다. 몇 달이나 골머리 썩던 싸움을 이렇게 한 방에 끝내는군요. 이 자리에 함께할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태수는 한참이나 굽혔던 허리를 폈다.

부르릉.

마침 공항에서 헤어졌던 지프차가 먼지를 내며 이쪽으로 달려온다.

지프차 트럭에는 각종 음식이 한가득하다.

전부 태수가 미리 부탁했던 것들이었다.

송진구가 반가움에 버럭 외쳤다.

“타이밍 죽인다. 딱 맞췄다, 새끼야. 잘했다. 어떻게 이렇게 딱 맞춰 왔냐? 무당도 아니고.”

“무당 같은 소리 한다. 저쪽 언덕 위에서 망원경으로 보고 있다가 왔다, 새끼야.”

2등 서기관 송창준은 놀라서 물었다.

“아까 공항에서 다음 차는 약속 장소로 오라고 했던 게 이것 때문이었습니까? 이 많은 음식을 준비하실 생각은 어떻게 하신 겁니까?”

그게 뭐 별거라고.

“사람은 3대 욕구를 채워 주는 자에게 너그러워지곤 합니다. 식욕도 그중 하나죠. 동서고금을 통틀어 밥상머리 대화가 가장 잘 먹힙니다.”

송창준도 안다.

그래서 청탁의 기본은 식사 접대, 술 접대, 성 접대가 아닌가.

“식구라고 했습니다. 밥숟가락 같이 들면 없던 정도 생기는 거 아니겠습니까?”

따뜻한 말이지 않나.

“일단 든든히 먹이고 나면 유대감과 호감도 절로 생길 겁니다. 물 문제는 해결했으니 이젠 제대로 공사에 대해 협의해야 하니까요.”

친해지고 싶은 사람들과 밥 한 끼를 함께 한다.

그간 쌓인 앙금도 함께 밥 먹으면서 조금은 내려놓았으면 한다.

[두 부족이 오랜 전쟁을 끝내고 화해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기쁜 날 함께하는 식사가 빠질 수는 없죠. 이건 한국식 화해이니 기쁜 마음으로 제가 준비한 식사를 함께 즐겨 주시길 바랍니다.]

베두인족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지프차 뒷좌석 가득 실린 많은 양의 음식을 보니 없던 기운도 솟구친다.

[족장님, 엄청난 양의 고기입니다. 애들 먹일 빵과 우유도 있어요.]

[신선한 야채와 과일도 산더미 같습니다. 육포와 생선도 있는 것 같습니다.]

[부족 전체가 먹어도 남을 만큼 푸짐합니다. 여자와 아이들이 무척 좋아할 겁니다.]

결국 그들이 하고자 하는 말은 하나였다.

[오늘 밤은 무조건 연회를 열어야 합니다.]

[족장님, 이런 날엔 연회가 빠지면 섭섭하죠.]

근엄하던 족장부터가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폈다.

험악한 사막 전사들도 지금만큼은 힘센 동네 형 같다.

바로 이런 분위기를 원했기에 태수는 아주 만족스러웠다.

'화해가 뭐 별거라고. 함께 먹고, 함께 기뻐하고, 함께 나누면 그만인 것을.'

이제야 태수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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