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청일 그룹에서 나왔소(5)
한청호는 일부러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너무 누추하고 좁은 사무실이 아닌가. 몰리브덴 판다고 강원도에서 썩기에는 아까운 젊음이 아닌가.”
한청호는 테이블을 탕탕 쳤다.
“내 밑으로 들어와. 청일 그룹 계열사 사장 자리를 내줄 테니.”
태수는 코웃음 쳤다.
‘한청호가 사람을 흔들려고 용을 쓰는군. 달콤한 제안 다음엔 매서운 협박, 다시 달콤한 제안이라는 건가?’
한청호는 언제 협박했었냐는 듯 부드럽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은근하게 웃었다.
“이런 코딱지만 한 광산 사장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자리네. 생각해 보게. 자네처럼 젊은 나이에 계열사 사장 자리에 앉기가 어디 쉬운가?”
“방직 공장도 계열사 사장 자리, 석탄 광산도 계열사 사장 자리죠.”
“설마 내가 그깟 방직 공장이나 석탄 광산에 사장 자리를 내줄 것 같은가?”
“네, 그러실 것 같군요. 아까부터 손바닥 뒤집듯 마음이 바뀌시는 터라.”
“······.”
정말로 그럴 생각이었기에 한청호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태수는 그 모습을 보고 속으로 혀를 찼다.
‘진심이었군. 뻔뻔한 양반 같으니.’
잠시 굳은 기색이었던 한청호는 순식간에 표정을 바꾸어 얼굴을 꾸몄다.
그가 호기롭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줄 수 있는 사장 자리는 청일 상사, 청일 물산, 청일 실업, 청일 목재, 청일 학원이야. 어디가 좋을까? 마음껏 골라 보게.”
“싫습니다.”
“알짜배기는 쏙 빼고 2류 계열사나 들이민다는 얼굴이로군.”
“그럼 아닙니까?”
“이보게, 자네 나이를 생각해 봐. 고작 24살? 해가 바뀌어 이제 25살인가? 그 나이에 이 정도 자리면 엄청난 제안이라는 걸 왜 몰라.”
딴엔 그렇겠지.
‘난 한청호, 당신 밑으로 들어갈 생각 없어.’
태수는 코웃음 쳤다.
그러자 한청호는 혀를 쯧쯧 찼다.
“그 자리 오르는 게 어디 쉬운 일인 줄 아 나? 남들은 평생을 다 바쳐도 못 이루는 꿈이라네.”
됐습니다.
내 꿈은 고작 그 정도가 아니라서.
“재벌가 그늘에 몸을 의탁하면 그 미래가 얼마나 창창할까. 야망을 마음껏 펼치기에 충분하지.”
됐습니다.
내가 그 재벌가 그늘에 의탁 안 해 본 사람도 아니고.
“상상해 보게. 자네가 청일 그룹 계열사 사장이라고 소개되는 순간을. 사람들이 자네를 어떤 눈으로 우러러볼지, 자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얼마나 아양을 떨어 댈지.”
됐습니다.
그깟 게 뭐 그리 대단하다고.
영양가 없는 똥파리들 꼬이면 귀찮기만 하지.
내가 평생 똥파리 쫓아낸다고 치 떨던 사람이야.
“능력만 증명해 봐. 그럼 내가 곧장 위로 끌어올려 주지. 분명 자네의 시작과 끝은 다를 걸세.”
됐습니다.
그래 봐야 청일의 개로 끝나지.
내가 그 미래의 끝을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또 아는가? 내가 죽고 나면 자네가 청일 그룹 총수가 될지도.”
한청호는 은근하게 웃었다.
“어때? 이만하면 생각이 바뀌었겠지?”
“하하하!”
태수는 크게 웃었다.
“죽었다 깨도 그럴 일 없다는 걸 모를 만큼 멍청하진 않습니다. 또 하나, 청일 그룹 총수 같은 거 욕심나지도 않습니다.”
애초에 청일 그룹 총수 자리에 욕심이 생길 리가 없잖은가.
그깟 자리가 탐났다면 전생에 한일권을 밀어내고 진즉 차지했겠지.
‘청일 그룹, 내 손으로 갈기갈기 찢어 삼키겠다. 기회가 생길 때마다 하나씩 하나씩.’
태수는 피식 웃었다.
태수는 손가락을 들어 천장을 가리켰다.
“위로 올라가는 건 제가 알아서 갑니다.”
태수는 뒷말을 삼켰다.
-한청호, 당신의 머리 위까지.
한청호는 얼굴을 굳혔다.
“자네는 기회를 너무 쉽게 보는군. 내가 지금 자네를 얼마나 챙겨 주고 있는지 전혀 와닿지 않는 모양이지?”
“청일에 몸 바쳐 충성하는 개들한테 개뼈다귀 던져 주기에도 바쁘실 텐데 굳이 저까지 챙겨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전 스스로 알아서 잘 챙겨 먹고살 테니까요.”
“···자네는 영리한 친구인 줄 알았는데.”
한청호 역시 옥수수 차를 호로록 마셨다.
태수에게 눈을 떼지 않으면서.
사냥에 나선 맹수의 눈이었다.
“자네가 잘 몰라서 그러는 모양인데, 청일 그룹은 자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아주 대단하다네.”
태수는 속으로 코웃음 쳤다.
‘모르긴 뭘 몰라. 그 대단하신 청일 그룹, 당신보다 더 크게 키운 게 바로 난데.’
한청호는 말했다.
“청일 그룹은 일반적인 재벌 기업과는 차원이 다르다네. 과연 우리 청일의 뒤를 봐주는 자가 누구일까? 내가 누구와 손잡았을까? 그 뒷배를 가지고 못할 일이 있겠나?”
사업이 아니라 뇌물과 로비로 재벌 기업을 만들었다고 뒤에서 손가락질당하는 청일 그룹이다.
친일로 시작해서 독재 정권까지.
청일 그룹은 정경유착의 표본과도 같은 기업이다.
한청호는 다시 은근하게 협박하기 시작했다.
“자네, 이러다 평생 강원도에서 썩는 수가 있네. 이번에도 내가 장담해 볼까?”
“하하하!”
이번엔 태수가 크게 웃었다.
“강원도에서 평생 썩는 한이 있어도, 남의 집 지키는 개로는 안 삽니다.”
전생에선 청일의 개로 살았다.
견마지로(犬馬之勞)를 다 했지만 결국 토사구팽(兎死狗烹)당했다.
이번에도 그렇게 살 생각 따윈 없다.
파지직.
태수와 한청호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불꽃이 마구 튀겼다.
“개라니, 이거 너무하는군. 난 좋은 마음으로 여기 강원도까지 먼 길 달려왔네. 한데 자넨 청일 그룹 사람들을 개라고 칭하다니, 참으로 무례해.”
태수는 시계를 가리켰다.
“시간 다 됐습니다. 이만 일어나시죠.”
“강태수.”
한청호는 태수를 차가운 눈으로 응시했다.
“마지막 기회야. 청일 그룹에 들어와. 그럼 내 지금까지의 무례는 모두 눈 감아 줄 테니까.”
한청호는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놨다.
“잘 생각하게. 난 자네보다 시간을 후하게 주지.”
한청호가 손가락을 쫙 폈다.
“5일 주겠네.”
한청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회할 일을 자초하지 말게나.”
“살펴 가시죠. 배웅은 하지 않겠습니다.”
한청호는 옷자락을 휘날리며 태수의 사무실을 나섰다.
쿵.
한청호는 태수의 사무실 문을 노려보며 이를 빠드득 갈았다.
“건방진 새끼.”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운전기사에게 말했다.
“청와대로 가자. 각하를 만나야겠어.”
잠시 후 자동차가 부르릉 소리를 내며 출발했다.
* * *
한청호가 떠난 후 태수는 사무실 책상 의자에 털썩 앉았다.
긴장으로 잔뜩 굳었던 몸이 뻐근하다.
“한청호를 다시 만났군. 무려 25년 만에······. 당신을 만나는 순간을 기다려 왔고, 이 순간을 그만큼 두려워했었는데.”
태수는 눈을 감았다.
아직도 심장이 두근두근했다.
긴장과 흥분이 가시지 않았다.
“청일 그룹을 박살 내야 하는데, 그 앞을 막고 있을 당신을 내가 상대할 수 있을까, 난 늘 그게 두려웠다. 마음 한구석에 불안함으로 남았었지.”
태수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격하게 뛰던 심장이 점차 안정을 찾아간다.
“한청호, 확실히 인물은 인물이야. 서로에게 그저 탐색전이었을 뿐인데도, 난 이렇게 긴장했었다.”
태수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했다.
손가락 끝까지 짜릿했다.
“분명 아까 만난 당신은 만만치 않은 인물인데. 희한하게 내 기억 속의 당신과는 조금 다르단 말이야?”
늘 거대하게만 보였던 사람이었다.
늘 어렵고, 두렵고, 버겁기만 했던 사람이었다.
“이상해. 내 기억 속의 당신은 지금보다 훨씬 대단하고 막강한 거물이었어.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끝까지 당신을 넘어서지 못했지.”
한청호가 죽은 후 태수는 한일권의 뒤에서 25년 동안 실질적으로 청일 그룹을 이끌어 왔다.
그 어려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때마다 태수는 생전의 한청호를 떠올리며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었다.
-만일 한청호라면 이 위기를 어떻게 돌파했을까?
-만일 한청호라면 이 사람을 어떻게 회유했을까? 아니면 어떻게 협박했을까?
-만일 한청호라면 이 기회를 어떻게 붙잡았을까?
-만일 한청호라면······.
태수는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기억 속의 한청호를 떠올리며 그의 뒤를 쫓았다.
한청호란 대단한 인물을 닮고 싶었다.
한청호만큼 멋지게 일을 처리하고 싶었다.
“난 언제나 당신에 비해 부족함이 많았어. 그렇기에 늘 당신을 닮고 싶었고, 함께하고 싶었고, 뛰어넘고 싶었어.”
태수는 씁쓸하게 웃었다.
“어째서일까? 그런데 지금은······.”
씁쓸했던 웃음이 점차 자신만만한 웃음으로 바뀌었다.
“한번 붙어 볼 만하단 생각이 들어.”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이상하다.
“그래, 지금 이게 당신이 줄곧 주장했던 바로 그거로군. 사람 마음이 변한다는 거.”
태수는 씨익 웃었다.
“한청호, 당신이 생각보다 별로 무섭지 않아. 예전보다 그리 어렵지 않아.”
태수는 크게 웃었다.
“하하하! 당신을 만나 보길 정말 잘한 것 같네.”
* * *
포항 철강은 요즘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크로몰리강과 스테인리스강 주문이 워낙 많이 밀렸다.
지금도 3교대로 공장을 돌리고 있었다.
공장을 둘러보고 있는 박태종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었다.
“크로몰리강과 스테인리스강을 팔아서 제철소 건설 자금을 마련하게 될 줄이야.”
한여름 땡볕에 포항 철강 사장실에서 당돌하게 몰리브덴 가격이 곧 두 배, 세 배 오를 거라 큰소리치던 청년의 얼굴이 떠올랐다.
“두 배, 세 배가 다 뭐야. 한 15배는 뛴 것 같은데.”
박태종은 크게 웃었다.
“하하하! 워낙 좋은 값에 충분한 양을 공급받다 보니 요즘 몰리브덴 국제 시세가 얼만지 도통 모르겠군.”
몰리브덴을 사려고 안달복달하는 기업들이 들었다면 게거품을 물었을 만큼 속 편한 소리였다.
“따지고 보면 크로몰리강과 스테인리스강을 팔아서 제철소 건설 자금을 마련하라 일러 준 것도 강태수, 그 친구였군.”
현재 돌아가는 상황을 보고 미래를 예측하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참으로 똑똑한 친구였다.
“그 친구는 요즘 벼락부자가 되었다지? 덕분에 우리까지 덩달아 돈방석에 앉았구나, 하하하.”
박태종이 한껏 웃을 수 있는 이유였다.
요즘 박태종은 태수만 떠올리면 자동으로 나오는 흐뭇한 웃음을 참지 못했다.
“아직 제대로 된 용광로조차 지어지지 않았는데, 이번 달도 몰리브덴 덕분에 흑자로구나.”
조선소 자금 압박에서 숨통이 확 트였다.
태수가 몰리브덴을 적당한 가격에 충분히 공급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또 빚을 지고 말았군. 이걸 또 어찌 보답한다?”
박태종이 보답을 고민할 때였다.
직원 한 명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각하께서 사장님을 찾으신다고 하십니다!”
“각하께서?”
“듣자 하니 제철소 건설 속도가 빠르다는 소식을 듣고 무척 기꺼워하셨다고 합니다!”
제정신을 차린 일본산 망종이 불철주야 제철소 건설에 참여한 덕분이다.
3년 동안이나 그토록 힘들고 지지부진했던 제철소 건설이건만 지금은 하룻밤만 자고 일어나도 뚝딱뚝딱 지어지고 있는 것 같다.
제철소가 빠르게 제 모습을 갖추는 것을 볼 때마다 얼마나 기꺼운지.
요즘은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부른 박태종이었다.
“진작 이런 속도로 지었어야 하는 것을. 각하께는 송구할 따름이네.”
그러고 보니 또 있었네, 예쁜 짓.
‘일본산 망종의 목줄을 달아 준 것도 그 청년이야.’
어째 하는 짓마다 예뻐 죽겠다.
무슨 일만 했다 하면 일이 술술, 무슨 제안만 했다 하면 족족 대박!
그러니 예뻐하지 않으려야 안 예뻐할 수가 없다.
직원은 박태종이 태수를 떠올리며 흐뭇해하는 줄도 모르고, 박정환 대통령의 치하에 크게 기꺼워하는 줄 알고 목소리를 더 높였다.
“각하께서 요즘 크로몰리강과 스테인리스강으로 제철소 건설 자금을 벌어들이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는 크게 기꺼워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호탕하게 웃으셨다 합니다.”
“기꺼워하셨다니 다행이야.”
“그런 이유로 각하께서 큰 결정을 내리셨다는군요.”
“결정? 무슨 결정?”
“제철소로 시찰 나오시기로 했답니다.”
“각하께서 시찰을?”
뜻밖이었다.
그 엉덩이 무거우신 양반이 중요한 일을 내팽개치시고 포항까지 내려올 결정을 하셨나.
심지어 제철소가 아직 다 지어지지도 않았는데.
‘아직 여기에 올 때가 아니신데? 무언가 다른 뜻이 있으신가?’
박태종이 의아해할 때 직원이 마저 대답했다.
“각하께서는 언제 시찰하러 오실 예정이라 하셨나?”
“열흘 후라 하셨습니다.”
“알겠네.”
“각하께서 이곳을 시찰하실 때 그분도 같이 보자고 하셨답니다.”
“같이? 누구를?”
“학교를 짓고 있는 태양 건설 사장, 강태수 씨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