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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 찍고 건설 재벌-31화 (31/230)

31. 청일 그룹에서 나왔소(4)

돈 봉투를 되돌려 준 태수가 씩 웃었다.

“대신 당신 명함과 바꿨으면 합니다.”

“제 명함을? 하하하.”

비서는 크게 웃었다.

태수가 왜 이러는지 짐작했기 때문이다.

“하하하, 이것 참. 정말 대단한 분이시군요. 좋습니다.”

비서가 흔쾌히 제 명함을 태수에게 건넸다.

<금산 그룹 총괄 비서실장, 김환.>

“앞으로 애로 사항이 있을 때 언제든 연락 주십시오. 제가 자잘한 일 처리할 능력 정도는 됩니다.”

“좋습니다.”

또 좋다고 냉큼 받는 태수였다.

그런 태수를 보고 있자니 손이 근질거린다.

탐이 난다.

눈앞의 이 사람은 앞으로 크게 될 사람이라는 예감이 든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아는 법이지. 장 회장님께 필히 천거해야겠구나.’

김 비서는 태수를 샅샅이 훑어봤다.

보면 볼수록 감탄이 나온다.

외모부터 분위기, 기세와 예의까지.

‘개천에서 난 용이라던데, 몸에 밴 분위기는 오히려 재벌 집에서 오랫동안 공들여 기른 후계자 말이야.’

그 정도가 아니다.

‘후계자보단 원숙하고 세련된 느낌이, 왠지 꼭 재벌 총수 같단 말이야?’

김 비서는 생각을 끊고 고개를 저었다.

‘이 무슨 해괴한 망상이야. 그럴 리가 없지. 재벌 총수라니, 너무 나갔어.’

김 비서는 태수를 다시 봤다.

다시 봐도 눈에 확 띄는 인재다.

아직 젊은데도 능력이 출중해 보인다.

책상 위에 쌓인 서류들을 보면서 김 비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신기하군. 저 정도 서류를 처리한단 말이지? 오래도록 이 바닥에서 일해 온 사람처럼 별로 어려워하지 않는 것 같고. 타고난 건가?’

볼수록 탐난다.

그래서 물었다.

“혹시 결혼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오호, 그렇군요.”

김 비서의 눈이 빛났다.

순식간에 머릿속에서 여러 생각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여기서 이러고 있을 게 아니로군.’

김 비서는 정중히 인사했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회장님께 감사하다는 말씀, 꼭 전해 주십시오.”

태수는 씩 웃으며 금빛 명함을 슬쩍 흔들었다.

김 비서는 크게 웃었다.

“하하하, 그 금테 두른 명함보다 제 명함을 자주 흔들게 되지 않을까요? 원래 큰일보다 잡일이 번거로운 법입니다.”

“하하하.”

태수는 이번엔 김 비서의 명함을 흔들었다.

김 비서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걸렸다.

태수는 김 비서가 나갈 수 있도록 사무실 문을 열어 주었다.

“서울까지 길이 멉니다. 살펴 가세요.”

“음?”

그런데 사무실 문 앞에는 40대로 보이는 50대 중년 남자가 서 있었다.

차림새며 자세에 상당히 신경 쓴 멋쟁이였다.

“안녕하신가. 먼저 온 손님이 있으셨군?”

태수는 그를 한눈에 알아봤다.

‘청일 그룹 회장··· 한청호.’

태수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청일 그룹의 회장이 강원도까지 찾아올 줄이야.

태수는 무려 25년 만에 그를 다시 만난 것이다.

한청호는 묘한 눈으로 김 비서를 보았다.

“아니, 이게 누구신가? 금산 그룹 김 비서가 아닌가. 요즘 조선소 짓느라 울산과 서울을 왕복하느라 길바닥 위에서 산다던데, 어찌 강원도까지 오셨는가?”

“한 회장님과 비슷한 이유가 아니겠습니까?”

김 비서는 정중히 인사했다.

“실례했습니다.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김 비서는 자동차로 향했다.

한청호는 김 비서를 보며 묘한 웃음을 흘렸다.

“금산에서 김 비서를 보내다니. 장준용이가 그랬단 말이지.”

한청호는 몸을 돌려 태수를 보았다.

“으음!”

갑자기 한청호가 찢어질 듯 눈을 부릅뜬다.

손도 잘게 떨린다.

태수는 의아했다.

‘갑자기 왜? 초면에 이리 놀랄 일이 뭐가 있어? 너무 과민반응하는데.’

태수는 사무실 문을 좀 더 활짝 열어 주며 정중히 안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오시죠.”

한청호는 퍼뜩 제정신을 차린 모양인지 드물게 말을 더듬었다.

“그, 그러지. 헛, 흠.”

태수가 안내한 의자에 앉는다.

한청호는 한참이나 태수를 유심히 살펴본다.

입을 꾹 다물고 표정이 순식간에 휙휙 변한다.

태수는 고개를 갸웃했다.

‘속을 잘 숨기기로 유명한 양반이 이리 흥분하다니. 진짜 이상한 일이군.’

한청호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째깍, 째깍.

벽에 걸린 괘종시계가 초조하게 양쪽으로 추를 흔들었다.

태수는 시계를 힐끗 보고 몸을 일으켰다.

“할 말이 없으시다면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제가 요즘 좀 바빠서 말입니다.”

한청호는 갑자기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앉게. 내 잠깐 생각 좀 하느라 그랬네.”

태수는 한청호를 가만히 보았다.

‘이 양반에 왜 또 기분이 좋아졌지? 무슨 꿍꿍이야?’

한청호는 손으로 태수의 의자를 가리키며 그가 다시 앉기를 종용하고 있었다.

‘한청호의 꿍꿍이가 궁금하군. 여기까지 왔으니 무슨 말을 하는지 한번 들어 보자.’

안 그래도 한청호를 한 번 만나 봤으면 싶었던 태수였다.

털썩.

태수가 의자에 다시 앉았다.

한청호는 사무실을 슬쩍 둘러봤다.

“자네 요즘 몰리브덴으로 떼돈을 번다던데, 생각보다 사무실이 소박해. 내가 난 화분이라도 하나 들고 올 것을 그랬어.”

“용건만 간단히 하시죠. 5분 드리겠습니다.”

명백한 축객령이었다.

한청호는 이깟 일로 얼굴을 붉힐 만큼 서툰 사람이 아니다.

태수 역시 쉽게 자신의 감정을 내비칠 만큼 어수룩하지 않다.

속으로는 복수심에 활활 타오를지언정.

파지직.

둘 사이에 잠시 보이지 않는 불꽃이 튀었다.

한청호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바쁘기로는 나 역시 마찬가지라네. 서울에서 강원도까지 달려왔는데 면담 시간이 고작 5분이라? 이거 너무하는군.”

“바쁜데 어쩝니까. 미리 사전에 연락을 주시던가요.”

“그렇지. 그건 내가 실례를 범한 셈이니 받아들이지. 좋아. 5분 면담, 시작하세나.”

한청호는 여유로웠다.

“여기는 손님이 왔는데 차도 한 잔 안 내오나? 먼 길 달려왔더니 목이 칼칼하군. 뜨끈한 놈으로 내오게.”

“옥수수 차밖에 없습니다.”

“옥수수 차 좋지. 옛날 생각나는군. 내가 미곡 상회에서 일할 때 즐겨 마시곤 했다네.”

태수는 화목 난로 위에서 끓고 있는 주전자를 들어 잔에 따랐다.

한청호에게 차 한 잔 내주었다.

‘5분 후에 내쫓겠다고 으름장을 놨건만 흔들리지 않아. 심지어 편안해 보이기까지 해.’

태수는 옥수수 차로 마른 입술을 축였다.

긴장으로 입안이 바싹 말랐기 때문이다.

다른 누구와 대면했을 때도 긴장하지 않았던 태수다.

하지만 한청호만은 예외였다.

태수가 젊었을 때 한청호는 늘 두렵고, 늘 어렵고, 늘 대단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한청호. 내 기억 속에서 그는 어떤 거물들보다도 뛰어난 자였다.’

태수에게 한청호는 대한민국 최고의 거물이다.

무려 20년 가까이 한청호 밑에서 키워지고, 독하게 교육받은 결과다.

젊은 날의 태수에게 한청호는 정치권을 제 손 위에 올려놓고 쥐락펴락하는 대단한 인물이었다.

자수성가하여 청일 그룹이란 재벌 기업을 만들어 굴린, 입지전적인 위인.

한청호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입을 뗐다.

“내가 누군지 아는 눈치로군.”

“유명한 분이시잖습니까. 대한민국에서 청일 그룹 회장님 얼굴을 모르는 사람도 있답니까.”

“내가 청일 그룹 회장이란 걸 알고 있다니 얘기가 빠르겠구나.”

한청호는 탁 소리가 나게 찻잔을 내려놨다.

“청일 그룹에 몰리브덴을 납품하게.”

“싫습니다.”

태수가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단칼에 자르자 한청호의 눈썹이 꿈틀댔다.

“왜?”

“제 맘입니다.”

“그래, 확실히 파는 사람 마음이지.”

“아신다면 긴말 필요 없겠군요. 전 바빠서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앉아.”

한청호가 단호하게 말했다.

“아직 내 얘기 안 끝났어.”

“안 팝니다.”

“사람 마음이란 말이야, 갈대처럼 흔들리고 손바닥 뒤집듯 바뀌곤 하지.”

“글쎄요, 전 바꿀 생각이 없습니다만.”

고작 당신 제안에 흔들릴 만큼 어중간한 마음으로 청일 그룹에 복수를 결심한 게 아니라서 말입니다.

한청호는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원래 나는 몰리브덴 납품 계약을 체결하기 위해 예까지 왔지. 하지만 마음이 바뀌었어. 바로 자네 때문일세.”

한청호는 자신만만했다.

“이 한청호조차 상황에 따라 마음이 변하는 법인데 자네라고 다를까. 자네, 몰리브덴 광산 하나로 만족할 수 있겠나?”

“회장님 같으면 만족할 겁니까?”

“아니, 그럴 리 없지. 그러니 내가 좋은 제안을 하겠네.”

좋은 제안이라.

한청호 회장도 전생에 태수에게 좋은 제안이랍시고 말을 꺼냈었다.

돌아가신 아버지 사채를 대신 갚아 주고.

어머니께 별채를 내주어 가정부로 고용하고.

동생 한수를 안기부에 보내 주고.

태수를 청일 그룹 비서실에 입사시켰다.

‘참 싸게도 팔렸지. 한씨 일가의 똥개로.’

태수는 피식 웃었다.

‘이번엔 똥개로 팔릴 생각 따윈 없다.’

오히려 그 집 안을 기둥뿌리 하나 남기지 않고 뜯어먹을 생각이다.

‘한청호가 어디까지 내놓는지 한 번 볼까?’

딱 5분 동안만.

“좋은 제안, 어디 한번 들어봅시다.”

“몰리브덴 광산을 사겠네.”

한청호는 선심 쓰듯 말했다.

“10만 원짜리 광산이라지? 이런 폐광산에서 운 좋게 몰리브덴이 나왔다고 치세. 마침 또 미국에서 석출이 중단되면서 가격이 천정부지로 오르며 떼돈을 벌었다고 치지.”

가정이 아니라 엄연히 현재 벌어지고 있는 사실이다.

“일본 놈들이 남겨 놓은 폐광산이라고 해 봐야 그 매장량은 한계가 있겠지. 잘해 봐야······.”

“지루하군요.”

태수는 심드렁했다.

“그래서 얼맙니까?”

“요즘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몰리브덴 시세를 고려해 봐도 이 광산은 9천. 암만 잘 팔아도 9천 8백. 그 이상은 못 받네. 내 장담하지.”

“장담?”

“······.”

느닷없는 공격에 한청호는 잠시 말을 멈췄다.

‘당연하지. 헐값으로 후려친 금액이니까. 내가 지금 몰리브덴으로 한 달에 순수익만 1억을 벌고 있는데. 물론 반짝 최고가인 걸 감안하면 많이 특수한 상황이긴 하지만.’

한청호는 뻔뻔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궁금하면 광산을 판다고 내놔 보게. 진짜로 9천 이상 받기 힘들 테니까. 내가 장담하는데, 그렇게 될 걸세.”

한청호는 자신만만했다.

그 속셈을 모를 태수가 아니었다.

태수는 피식 웃었다.

“당신이 작심하고 막으려 들면 누가 감히 이 광산에 손을 뻗을 수 있겠습니까?”

“그걸 알고 있다면 얘기가 빠르겠군.”

“그래서 9천 8백에 광산을 사고 싶으시다?”

“내 특별히 3억 주겠네.”

한청호가 손가락 세 개를 폈다.

1972년도에 3억이라면 2020년 기준으로 100억에 가까운 돈이었다.

“아주 후하게 쳐준 값이라네. 10만 원짜리가 방금 3억이 되었네. 어떤가?”

이래도 안 넘어오고 배길래? 하는 한청호의 눈빛이 참으로 역겨웠다.

“안 팝니다. 얄팍한 계산은 집어치우시죠.”

태수는 코웃음 쳤다.

‘이곳 상동 광산 몰리브덴 매장량은 추정 가치만 2019년 기준 1조 9천억 원이야. 어디서 똥값에 선심 쓰듯 가져가려고.’

한청호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자네가 사업을 처음 해서 계산이 잘 안 되는 모양인데.”

“회장님께서 계산법을 다시 배워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내가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가? 난 내 말을 진실로 만들 힘이 있다네.”

“거짓이든 진실이든 상관없습니다. 내가 안 팔면 그만 아닙니까?”

“그렇게 막무가내로 우기다가 큰일 나는 법이라네. 몰리브덴은 국가 전략 광물일세. 개인이 함부로 농간을 부릴 대상이 아니다, 이 말일세.”

명백한 협박이었다.

그리고 한청호는 그 협박을 현실로 만들 힘이 있는 자였다.

그 힘을 얻기 위해 정치권에 돈을 그리 뿌려 댔던 것이고.

“잘 생각해 보게. 그 똑똑한 머리로.”

한청호는 자신만만했다.

태수는 크게 웃었다.

“하하하! 안 팝니다.”

의기양양했던 한청호의 얼굴에 금이 갔다.

태수는 웃음을 멈추었다.

“절 중앙 정보국에 집어넣고 몰리브덴 광산을 빼앗겠단 소리로 들립니다.”

“그걸 안다면 얌전히 도장 찍게. 3억이나 받으면 어디 가서 아쉬운 소리는 안 하고 살 것이네.”

“안 팝니다.”

한청호는 모른다.

태수가 왜 이렇게 자신 있게 No를 외칠 수 있는지를.

‘얼마 전에 제가 박정환 대통령에게서 10년간 독점 채굴권을 얻어서 말입니다. 대통령이 직접 승인한 권한을 무슨 수로 빼앗을 수 있는지 한 번 지켜보지요.’

태수는 여유롭게 옥수수 차를 호로록 마셨다.

‘오춘식이 어떻게 몰리브덴 광산을 빼앗겼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오춘식이 몰리브덴 광산으로 떼돈을 벌자 그걸 눈독 들인 박정환 대통령.

그를 들쑤셔서 청일 그룹이 직접 일을 추진했었다.

그 최전선에는 복수에 불타는 태수가 있었다.

오춘식, 태수의 가족들에게 사채를 뒤집어씌워 밑바닥 진창으로 처박은 원수.

그 복수는 태수가 제 손으로 직접 했었다.

‘내가 이럴 줄 알고 진즉에 박태종을 찾아가 담판을 지었지.’

한청호는 으름장을 놓았다.

“중앙 정보국이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 직접 겪어 봐야 안다, 이 말인가?”

“제가 지금 진심인지 아닌지도 구별이 안 가십니까?”

“···진심이구나. 정말로 광산을 안 팔겠다고 작정했어.”

태수는 씩 웃었다.

“파는 사람 마음 아닙니까.”

“틀렸어. 힘 있는 사람, 빼앗을 수 있는 사람 마음이라네.”

“글쎄요, 그 마음도 아마 곧 바뀌실 텐데.”

한청호는 입술을 씰룩였다.

“믿는 구석이 있다는 소리구나.”

파지직.

이번에도 태수와 한청호 사이에 보이지 않는 불꽃이 튀겼다.

태수는 대답 대신 여유롭게 옥수수 차만 호로록 마셨다.

한청호는 잠시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땐 독이 오를 대로 오른 눈빛이 번뜩였다.

“좋다, 광산 인수는 포기하지.”

“살펴 가십시오.”

“시간은 아직 남았고, 내 말도 아직 안 끝났네. 두 번째 제안으로 넘어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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