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광산 인수(2)
태수는 설명했다.
“금이랑 몰리브덴은 재련 과정이 거의 똑같거든. 금광에 들어가는 시설을 그대로 가져다가 쓰면 돼.”
“아하.”
첫 번째 조건 충족. 몰리브덴 재련 시설이 있을 것.
“게다가 금광 개발에 실패했다고 했잖아? 금광 개발은 모 아니면 도야. 발견하면 대박, 꽝 치면 쪽박!”
“아하!”
사람들은 일확천금을 노리고 금광에 달려든다.
금맥을 발견하기만 하면 대박이 터지니, 다들 부나방처럼 달려드는 거다.
하지만 실상은 돈 잡아먹는 귀신이 따로 없다.
‘원래 인생이 다 그렇지.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High risk-High return)인 법.’
“금광 개발에 실패했다면 단기간에 타격을 회복하긴 어려울걸? 워낙 리스크가 크거든.”
“오-!”
“광산 개발에 투자했던 자금, 그 부채 때문에 잘 돌아가는 시멘트 공장과 석회석 광산을 가지고도 버티기 힘들었을 거야. 순식간에 파산 직전까지 몰리는 거지.”
두 번째 조건 충족. 망하기 일보 직전일 것.
한수도 고개를 끄덕였다.
“열심히 일하던 광부와 직원들도 갑자기 붕 뜨게 됐어. 아직 이탈하진 않은 상태고.”
“딱 좋다. 완벽해.”
세 번째 조건은 이미 충족한 걸 눈으로 확인했다.
태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광산, 우리가 인수하자.”
“그래서 형을 급히 여기로 부른 거야.”
“광산 인수 협상 제안은 해봤겠지?”
한수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잘 안 됐어? 역시 돈이 모자라지?”
2천만 원이라면 꽤 큰돈이긴 하지만, 이렇게 건실한 광산과 시멘트 공장을 한꺼번에 인수하기엔 부족한 돈이기도 하다.
한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돈 문제뿐만이 아니라 또 다른 문제가 하나 더 있어.”
“무슨 문제?”
“광산주가 지금 사채업자들에게 붙들려 있어.”
“이런.”
어째 자꾸 사채업자를 만나나.
광산 권리증을 가져올 때도, 장말동에게 차용증을 받아올 때도.
옆 동네 광산에서까지 사채업자를 만난다.
뭐만 해보려면 그놈의 사채업자가 튀어나온다.
‘지금은 은행보다 사채가 더 활발히 쓰였을 때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사업하면서 돈 한 푼 안 빌리는 곳은 거의 없다.
특히 대규모 광산과 공장을 경영할 때 더 그렇다.
사업 초기에 들어가는 돈이 한두 푼이 아닌지라.
지금은 그야말로 사채업 전성시대라 할 만 했다.
‘그랬기에 박정환도 사채 동결조치를 내건 걸 테지만.’
한수와 홀쭉이는 사채업자가 끼어들었다는 대목에서 절로 한숨부터 쉬었다.
둘 다 난감해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태수는 달랐다.
사채업자가 끼어들었다는 대목에서 눈을 빛냈다.
“이번에도 사채업자 덕을 좀 보겠는데?”
대체 무슨 생각을 하면 결론이 그렇게 나냐?
중간에 사채업자가 끼어들어서 물 흐리는 바람에, 지금 광산 인수 자체가 물 건너가게 생겼는데.
“그렇잖아. 사채업자들이 끼어들어서 분탕치고 있으니까, 이렇게 건실한 광산과 공장에 아무도 달려들지 못하고 있잖아. 그러니 나한테까지 차례가 온 거 아니겠어?”
말이 그렇게 되나?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한수와 홀쭉이가 서로를 쳐다봤다.
낙담했던 아까와 달리 둘 다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채만 해결하면 된다, 이거지?”
그것만 해결하면 알짜배기 석회석 광산과 시멘트 광산을 통째로 먹는 것이렷다?
이러니 절로 의욕이 나지 않겠냐고.
태수는 눈을 빛내며 주변을 돌아봤다.
“광산주는 어디 잡혀있지?”
“시멘트 공장에 붙들렸다고 해. 여기서 남동쪽으로 가면 나온다.”
“가자.”
태수가 성큼성큼 앞서 걷자, 한수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형, 지금 반대로 가고 있는데?”
“응? 남동쪽으로 내려가라며?”
“거기 북쪽이야. 따라와.”
오늘도 한수가 성큼성큼 앞장선다.
홀쭉이가 재빨리 태수 뒤에 따라붙었다.
한수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홀쭉이를 봤다.
“용식이 형님, 시멘트 공장은 위험해요. 형님은 아래에 내려가 계세요.”
“내가 없으면 우리 태수 등 뒤는 누가 지켜주는데?”
“······.”
형님, 그 뼈다귀로는 아무도 못 지켜요.
대체 누가 그 부실한 허파에 바람을 불어댔는지-.
태수를 보는 한수의 눈이 다시 한번 가늘어졌다.
태수는 억울했다.
“왜 나는 형이고, 용식이는 형님이야? 나도 형님이라고 불러줘.”
“······.”
한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용식이 형, 형은 광부들이랑 얘기 좀 나눠 봐. 인부들 동요가 심해. 이탈하기 전에 누군가는 토닥여줘야 해.”
지금 광산주는 사채업자들에게 붙잡혀 있다.
인부들의 동요를 진정시킬 사람이 없다는 뜻.
이대로라면 광산을 인수한다고 해도, 이탈한 광부들 때문에 골치가 아플 게 뻔했다.
“한수야, 네가 광부들이랑 진즉 얘기 끝낸 거 아니었어?”
“이상하게 내가 얘기를 꺼내기만 하면 다들 벌벌 떨면서 자긴 무조건 아니라고, 오해라면서 도망가잖아.”
“······.”
안기부 송곳은 취조가 전문이다.
고문을 하면 했지, 누군가를 토닥여 끌어안을 위인은 못 된다.
사람은 다 적성이 있기 마련이다.
사람 좋고, 친화력 좋은 홀쭉이가 이런 일엔 딱이다.
태수는 홀쭉이를 돌아보았다.
“한수 말이 맞다. 네가 광부들한테 가봐라.”
“나 없이 네 등 뒤는 누가 지키고?”
태수가 홀쭉이의 손에 뭔가를 쥐여 준다.
손을 펴보니 지폐가 몇 장 나왔다.
“여긴 막걸리 안 파나? 점심도 배부르게 먹었겠다, 광부들이랑 막걸리로 입가심하면 딱인 날인데.”
“맡겨줘. 내가 잘 다독여볼게. 오늘 날씨엔 막걸리가 알맞지.”
홀쭉이는 막걸리 생각에 군침부터 삼킨다.
누가 붙잡을 새도 없이 부리나케 광산 마을로 달려 나가는 홀쭉이였다.
한수는 멀어지는 홀쭉이를 보며 중얼댔다.
“형은 참 용식이 형을 잘 다뤄. 보고 있으면 신기하다니까. 둘이 친구라는 것도 신기한데.”
태수는 아직도 억울한 눈빛이었다.
“나도 형님 해달라니까 이젠 홀쭉이까지 형이라고 부르냐? 진짜 치사하지 않냐? 형님 소리가 그리 어렵냐?”
“······.”
“가자. 사채업자한테 광산 뺏기기 전에 서둘러야지.”
태수는 몸을 홱 돌려 시멘트 공장으로 달려갔다.
한수는 버럭 외쳤다.
“거기 북쪽이라니까! 형, 이쪽이라고!”
* * *
시멘트 공장에 도착했을 때, 익숙한 광경이 보인다.
오춘식의 집에서 봤던 것과 똑같은 장면, 일명 다구리.
심지어 등장인물과 대사까지 비슷했다.
퍽퍽퍽.
“야, 닭도 모이를 주면 알을 깐다. 남의 돈을 빌려갔으면 날짜에 맞게 이자를 까셔야지. 안 그러냐?”
“제발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사채를 쓰질 말던가. 제때 갚던가.”
“너무하잖소! 원래 약속했던 기한도 아직 며칠 남았는데!”
“쫄딱 망한 마당에, 우리가 기한 따지게 생겼어? 알 만한 사람이 왜 이렇게 질척대? 이미 다 끝난 일을!”
퍽퍽퍽.
“당장 갚을 수 없으니까 매달리는 거지! 갚을 수 있으면 왜 이러고 있겠어! 이 썅놈의 새끼들아!”
참다못한 광산주가 버럭 외쳤다.
오춘식과 달리 나름 깡다구가 있는 자였다.
“아직 덜 맞았다. 바른 자세 나올 때까지 족쳐라.”
“예!”
퍽퍽퍽.
그래서 오춘식보다 훨씬 더 많이 얻어맞고 있다.
태수는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 박수를 쳤다.
짝. 짝.
“잠깐 멈춥시다.”
“넌 또 뭐야?”
광산주를 때리다 말고 사채업자들이 고개를 돌렸다.
송진구 패거리들이었다.
‘내가 장말동에게 8.3 사채 동결조치에 대해 말해준 탓이구나. 당장 사채를 회수하려고 혈안이 되었잖아.’
그런 이유로 석회석 광산주에게도 불똥이 튄 모양이다.
기한이 남았는데도 이렇게 윽박질러 대는 걸 보면.
“어디서 많이 보던 놈인데?”
송진구는 태수를 알아보고 입술을 씰룩였다.
“어이, 또라이. 여기까지 웬일이냐?”
태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쪽에 잡혀 있는 광산주에게 볼일이 있어서.”
송진구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광산주를 슬쩍 봤다.
“왜? 이번에도 이 새끼가 너한테 돈 빌렸냐? 차용증은?”
차용증이 있긴 했지.
댁이 모시고 있는 장말동 어르신이 직접 쓰신 차용증이.
하지만 그건 이틀 후에나 효력을 발휘할 테고.
태수는 말없이 광산주에게 다가갔다.
“크흐흑. 이 새끼들이. 크흑.”
광산주는 울고 있었다.
태수는 어디 부러진 곳은 없는지 살폈다.
다행히도 괜찮아 보였다.
송진구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삐딱하게 섰다.
“또라이, 이번엔 네가 늦었다. 큭큭큭.”
송진구가 품에서 문서를 꺼내며 씩 웃었다.
“이 광산이랑 시멘트 공장, 전부 우리한테 넘겼거든. 바로 조금 전에. 아까워서 이걸 어쩌나? 큭큭큭.”
송진구는 패거리들을 데리고 유유히 시멘트 공장을 떠났다.
마치 차용증을 얻어내고 장말동의 방안을 나왔던 태수처럼.
"그럼 수고. 큭큭큭."
장말동의 집을 나설 때 송진구에게 했던 태수의 대사까지 돌려줬다.
송진구의 발걸음엔 의기양양한 기세가 가득했다.
“이런.”
한 발 늦고 말았다.
한수는 한손으로 눈을 가리며 안타까운 마음을 토해냈다.
하지만 태수는 그 반대였다.
“이런.”
이것 참 일이 공교롭게도 술술 풀리네?
헐값에 광산을 인수하라고 하늘이 등 떠밀어 주는데?
태수는 시멘트 공장을 다시 보았다.
이건 아깝게 되었다고 안타까워해야 하나, 아니면 잘 됐다고 좋아해야 하나.
‘이틀, 아니, 하루 반나절만 더 기다렸으면 8.3 사채 동결조치로 차용증은 휴지조각이 되고 말았을 텐데. 광산을 빼앗겼으니, 광산주 입장에서 보면 안타까운 일이지만.’
태수의 입장에서는 다르다.
만일 8.3 사채 동결조치로 광산주가 사채에서 풀려났다면?
미쳤다고 헐값에 태수에게 이런 알짜배기 광산과 공장 일체를 넘기겠나.
‘내 입장에서는 잘 된 일이 되어버렸어. 평소라면 엄두도 못 냈을 알짜배기 광산과 공장을 헐값에 사 들일 수 있게 됐으니.’
장말동은 사채업자다.
광산과 공장이 손에 들어왔다 한들 제대로 운영하기보다는 다른 곳에 팔아치울 것이다.
더구나 당장 사채를 털어야 하는 장말동의 입장에서 본다면?
‘나한테 헐값에 팔아버리는 게 제일 이득이겠지.’
이틀만 지나면 사채가 동결된다.
사채를 털어야할 기간이 고작 이틀 뿐.
당장 처분한다고 해도 제 값 받기 힘들다.
헐값에라도 처분해야 한다.
그럼 사채 동결 조치 이후엔?
당장 빌릴 돈이 없어서 광산과 공장을 인수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공장과 광산을 헐값에도 처분하기 쉽지 않다.
결론은?
이러나저러나 헐값 처분이란 거지.
‘장말동을 찾아가야겠군.’
또 눈앞에서 차용증 한 번 흔들어야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