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광산 인수(1)
“흐흐흐, 포항 철강 사장님은 술 고르는 안목이 참 탁월하시단 말이야. 이번 술도 끝내준다. 캬아!”
포항 철강 사장님이 들려주신 위스키 한 병에 홀쭉이는 만세를 불렀다.
아마도 사장실에서 저렇게 만세를 부르며 좋아해 줬다면 위스키를 내준 박태종이 상당히 기뻐했을 것 같은데.
다른 의미로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좋아하긴 했다만.
“좋은 술 마시니까 좋냐?”
“좋지 그럼 안 좋냐? 내가 오면서 알아봤는데, 포항에 상당히 맛있는 막걸리집이 있더라고. 그런데 그냥 지나칠 수가 있나?”
짠!
홀쭉이가 허리춤에서 막걸리 두 병을 꺼냈다.
“막걸리는 또 언제 사 온 거야?”
“아무렴 막걸리 살 시간도 없을까.”
“······.”
순식간에 막걸리를 마시고, 홀쭉이는 부르르 떨었다.
“캬-, 좋다. 물맛이 다른가? 손맛이 다른가? 회도 맛있고, 국밥도 맛있고. 소주는 또 달아요.”
어느새 홀쭉이는 안주를 주섬주섬 꺼내 놓는다.
소주는 덤이었다.
“아까는 잘만 참더니.”
“근무 시간 끝났잖아. 흐흐흐, 너도 앉아. 마셔. 먹어.”
홀쭉이는 안주를 오물거리면서 술맛에 연신 감탄을 한다.
못 말리겠다.
“홀쭉아, 여기 일은 다 봤다.”
“그럼 내일 아침 일찍 서울로 출발할까?”
“그래.”
“그럼 오늘 밤은 실컷 마셔야지. 밤새 달려!”
“······.”
* * *
새벽 버스를 타고 서울로 돌아오는 마음은 가벼웠다.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더욱 가벼웠다.
태수가 홀쭉이에게 종이봉투를 내밀었다.
“받아라.”
“이건 왜?”
“할머니 가져다 드려야지.”
“우리 할매 것도 챙겼냐?”
“당연히 챙겨야지. 너희 할머닌데.”
“고맙다.”
홀쭉이가 봉투를 받아 들고 돌아설 때였다.
‘잠깐, 홀쭉이 할머니가 돌아가신 게 이즈음이었나? 아니면 몇 년 뒤던가?’
태수는 기억을 되짚었다.
태수네 집이 사채 때문에 발칵 뒤집히고, 설상가상 재개발로 집은 헐리고.
동네 사람들은 전부 뿔뿔이 흩어졌었다.
할머니와 살고 있는 홀쭉이도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었다.
‘야반도주하다가 다시 만났을 때 홀쭉이 할머니는 이미 돌아가신 후였어.’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는 모른다.
홀쭉이가 그 화제만 나오면 정색을 하며 자리를 떴기 때문이다.
야반도주 다니느라 중간에 소식이 끊겨서 장례조차 함께하지 못했으니.
‘노환이셨을까?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홀쭉이가 변해 버렸던 거지?’
전쟁 통에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할머니랑 단둘이 살아오던 홀쭉이었다.
할머니를 잃고 외톨이가 되었던 홀쭉이는 태수와 함께 청일 그룹에 들어갔다.
하지만 잘 웃던 녀석이 언제부턴가 웃지 않게 되었다.
장난도 잘 치고, 입담도 걸쭉하던 녀석이 아예 입을 꾹 닫고 말았다.
“홀쭉아.”
“응?”
저만치 가던 홀쭉이가 뒤돌아봤다.
태수는 서둘러 홀쭉이에게 달려갔다.
“홀쭉아, 할머니 모시고 병원에 한번 가 봐라.”
“우리 할매? 병원에는 왜?”
“할머니 연세도 있잖아. 건강 검진 한번 받아 보자.”
태수는 주머니를 뒤졌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나온 돈을 전부 홀쭉이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야, 뭐야?”
“꼭 다녀와. 돈 모자라면 말하고.”
“야, 강태수.”
“오지랖이라고 해도 상관없어. 그래도 부탁하자. 할머니 오래 사셔야지.”
“······.”
홀쭉이가 한참을 물끄러미 본다.
이윽고 홀쭉이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고맙다. 우리 할매 생각해 줘서. 병원, 꼭 가 보마.”
홀쭉이는 다시 집으로 향했다.
‘이번엔 홀쭉이 곁을 내가 지켜 줘야지.’
태수는 멀어지는 친구의 등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홀쭉이는 콧노래를 부르며 집으로 돌아갔다.
“아이고, 우리 태수 왔구나!”
오늘도 어머니가 버선발로 뛰어나오신다.
아버지도 뒤이어 점잖은 얼굴로 나오셨다.
“다녀왔습니다.”
태수는 손에 들린 커다란 종이봉투를 어머니께 드렸다.
“아이고, 이게 다 뭐니?”
“포항 특산품이요.”
“세상에. 돌미역이구나.”
“시장에서 팔더라고요.”
홀쭉이랑 죽도 시장에 다녀왔다.
홀쭉이는 즉석에서 썰어 주는 싱싱한 해산물에 소주 한 잔 걸치는 맛으로 같이 따라나섰고.
태수는 문득 집 안 풍경이 많이 달라졌다는 걸 깨달았다.
거실에 차곡차곡 쌓인 짐들이 눈에 들어왔으니까.
“이게 다 뭐예요?”
“이삿짐 쌌다.”
아, 집 철거하는 날이 며칠 안 남았구나.
바쁘다고 이삿짐 싸는 거 못 도와드렸네.
“이사 갈 집은 정하셨어요?”
“그럼.”
“어딘데요?”
“너도 잘 아는 곳. 강원도 영월군 상동.”
“네?”
태수는 깜짝 놀랐다.
“무슨 이사를 강원도까지 가요?”
아버지와 어머니는 서로를 잠깐 마주 보고 싱긋 웃었다.
이윽고 두 분은 태수를 보며 활짝 웃으셨다.
“어차피 정든 집 떠나는 거 아들 일도 돕고, 곁에서 같이 살련다.”
“그래, 폐광산이 오래돼서 손볼 곳이 많을 거 아니냐? 아버지 집 잘 짓는다. 한 손 보태마.”
“이 엄마 음식 솜씨 알지? 나는 인부들 밥을 챙기마. 어떠니?”
태수는 뭐라 답해야 할지 몰랐다.
“고생하실 텐데요······.”
“고생은 무슨. 식구끼리 돕고 사는 거지.”
“그래, 아들들이 타지에서 고생하는데 밥은 챙겨 먹는지 걱정돼서 잠이 오겠니? 내가 챙겨야 맘이 놓이지.”
두 분은 이미 결심을 굳힌 모양이었다.
태수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부모님과 떨어져 지낼 생각을 하니 아쉽기도 했고.
“다음엔 아파트로 모실게요. 전에 약속했던 것처럼.”
“됐다, 아파트는 무슨. 식구들이 모여 살면 거기가 우리 집이지.”
“그래, 아버지 말씀이 맞다.”
그때였다.
“저기, 태수 형님.”
누군가가 대문 밖에서 조심스럽게 태수를 불렀다.
돌아보니 한수가 데리고 있던 소년이었다.
“무슨 일이야? 한수가 보냈어?”
“네, 한수 형님께서 말을 전하라고 하셨어요.”
“뭔데?”
“강원도 광산으로 와 달라고 하시더라고요. 조건에 맞는 곳을 찾았다고.”
조건에 맞는 곳을 찾았다고?
우리가 인수할 만한 광산을 발견했다는 뜻이다.
일이 어째 술술 풀리는구나!
좋은 소식이었다.
태수가 서둘러 떠날 기색이자 소년이 말렸다.
“강원도행 시외버스 끊겼어요. 안 그래도 내일 새벽 버스표로 사 왔어요.”
뜻밖이었다.
“어? 고맙다.”
“고맙긴요. 한수 형님께서 미리 준비하신 거예요. 받으세요.”
소년은 태수에게 표를 내밀었다.
한수 녀석, 꼼꼼하기도 하지.
새벽 버스표까지 미리 끊어 왔다는 건 당장 서두르라는 뜻이겠지?
‘이렇게 서두르는 이유는 뭐지? 광산에 눈독 들이는 다른 놈이라도 나타난 건가?’
그렇지 않고서야 태수를 급히 찾을 일이 있을까.
2천만 원이란 예산을 무기로 한수가 어련히 알아서 포섭했을 텐데.
예상과 다른 상황이 펼쳐졌으리란 예감이 든다.
“말 전해 줘서 정말 고맙다. 이 표도 그렇고. 고생했다.”
태수는 주머니를 뒤져 버스표값과 수고비라도 따로 몇 푼 쥐여 주려고 했었다.
‘아차, 홀쭉이 할머니 병원비에 쓰라고 전부 줘 버렸지?’
그때 어머니께서 주머니를 뒤져 태수 대신 돈을 쥐여 주신다.
어머니가 웃으면서 말씀하셨다.
“아직 식사 전이지? 같이 먹고 가렴.”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저 배 안 고파요.”
꼬르륵.
어머니는 소년의 팔을 잡아끌었다.
“마침 좋은 미역이 들어왔거든. 잠깐 앉아서 기다려라.”
* * *
1972년 8월 1일.
강원도 영월군 대양 시멘트 소유 석회석 광산 앞.
태수와 홀쭉이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한수는 대체 어디 있는 거야?”
“용식이 형님이셨군요.”
한수가 저쪽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홀쭉이만 보이고 나는 안 보이냐?”
“내가 장님인 줄 알아? 버스표는 하나만 보냈는데 오기는 둘이 왔으니 의아해서 그랬지.”
홀쭉이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가슴을 쭉 내밀었다.
뼈밖에 없어 왜소한 가슴팍이 툭 튀어나왔다.
“에헴, 나도 태수랑 함께 일하기로 했다. 내가 아니면 믿고 등 맡길 사람이 없대나, 뭐라나.”
한수의 눈이 가늘어졌다.
“형, 대체 무슨 수작을 부린 거야?”
“내가 뭘?”
“그렇잖아. 제 앞가림도 잘하고, 일터에서도 제법 인정받고 있는 용식이 형님이 뭐가 아쉬워서 우리랑 같이 일해? 여기 뭐 볼 게 있다고?”
“여긴 내가 있으니까?”
“······.”
한수는 고개를 저었다.
저놈의 자신감은 당할 길이 없다.
홀쭉이는 석회석 광산을 둘러보더니 휘파람을 불었다.
“여기 규모가 꽤 크다. 시설도 그렇고, 아까 인부들도 그렇고 제법이던데?”
오는 길에 삼삼오오 모여 있는 인부들을 봤다.
점심시간이라 그런지 그늘에 옹기종기 앉아 쉬고 있었다.
광부 숫자도 제법 많고, 들고 있던 연장들도 제법 잘 관리되어 있었다.
태수도 석회석 광산을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광산 바로 옆 동네 광산인데, 여긴 비교도 안 되게 시설이 잘되어 있네. 숙소랍시고 마을도 제법 크고. 제대로 잘 굴러가나 보다.”
“잘 봤어. 여긴 아주 건실한 광산이야. 석회석 광산뿐만 아니라 같이 운영하는 시멘트 공장도 잘 돌아가고 있거든.”
태수는 어이가 없었다.
한수의 표정을 보면 장난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사람을 시켜 새벽 버스표까지 구해 온 이유를 모르겠다.
“석회석 광산이라면 내가 제시한 조건과는 첫 번째 조건부터 안 맞잖아.”
첫 번째 조건, 몰리브덴 제련 시설을 갖추고 있을 것.
석회석 광산과 몰리브덴 광산은 제련 시설부터가 다르다.
제련에 부선(浮選) 방법을 적용하는 몰리브덴과 달리 석회석은 암반을 캐서 그냥 잘게 부숴 팔면 그만이니까.
“게다가 여긴 2천만 원 가지곤 택도 없을 것 같은데?”
두 번째 조건. 망하기 일보 직전일 것.
아까 한수가 말했고, 눈으로 확인했다.
여긴 건실하게 운영되는 알짜배기 광산과 공장이 맞을 터다.
“들어 맞는 조건은 세 번째 조건밖에 없잖아.”
세 번째 조건. 당장 광산에 투입할 수 있는 인부들이 많을 것.
오는 길에 보니까 숙련된 광부들은 많은 것 같더라.
한수는 고개를 저었다.
“그랬다면 형을 여기로 부르지도 않았을 거야. 여긴 세 가지 조건에 전부 들어맞는 곳이 맞아.”
“음?”
“여기 광산주가 금광 개발에 나섰다가 실패했다더라.”
“대박! 조건에 완벽하게 들어맞는다.”
어떻게 걸려도 이렇게 얻어걸리지?
태수의 입이 귀에 걸렸다.
한수의 눈이 이채가 어렸다.
‘금광 개발이란 소리에 모든 걸 꿰뚫어 봤어? 진짜 대단하네. 이건 숫제 괴물이잖아?’
지난번부터 매번 놀라움의 연속이다.
진작 형이 대단하다는 걸 인정했는데도, 이럴 때마다 또 놀라게 된다.
‘낭중지추(囊中之錐)는 숨길 수 없다더니. 형이 그간 능력을 숨기느라 무던히도 애썼겠어.’
이제는 제 본모습을 숨기지 않겠다고 선언했던 태수가 떠올랐다.
한수는 저도 모르게 빙그레 웃고 말았다.
자신만만한 지금의 형은 제법 마음에 든다.
“지금 이게 다 무슨 소리야? 누가 설명 좀 해 주라, 응?”
홀쭉이만 영문을 몰라 어버버댈 뿐이었다.
“태수야, 네가 말해 봐. 아깐 세 번째 조건밖에 안 들어맞는다면서?”
그때랑 상황이 바뀌었지.
금광 개발에 나섰다가 망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