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
아루스
아린 일행 전부가 볼려온 곳.
그곳에는 술법진이 있었다. 보기에는 얼마 안 되어 보이는 크기였지만, 그 술법진이 도시 전체 지하 하수로를 차지하고 있었다.
두 개의 술법진이 이곳에 마력을 공급한다고 했다. 아마 다른 대악마가 이곳에 도착했다면 둘이서 마력을 공급했을 터.
맥동하는 알을 깨웠을 터였다.
“이게 뭔지는 모르겠소.”
다리온은 마스터 팔라딘으로서 생각보다 박학다식했다. 취미가 독서였던 만큼 교단 내에서도 손에 꼽히는 지식을 갖췄던 다리온이 모르는 존재였다.
그리고 그 답은 마리포사가 알려줬다.
[드래곤의 알이야. 이 미친 새끼들이 마룡을 깨울 생각이었나 본데?]
“마룡? 그보다 이곳에서 일어날 일을 알고 있던 거 아냐?”
[대략적인 것만 알지 미래를 정확히 알지는 못해. 그건 신들도 못하는 일이야.]
신성모독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말에 근처에 있던 이들의 안색이 나빠졌지만, 그런 걸 신경 쓸 존재가 아니었다.
마리포사는 날개를 펄럭이며 에드의 머리 위를 날아다니며 말했다.
[드래곤들도 모두 잠들어 있는데 어디서 알을 구해 온 거야? 그리고 이걸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모든 드래곤의 표적이 될 텐데?]
노리스가 그 말에 인상을 굳혔다.
“이게 정말 드래곤의 알이라면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자 노리스가 설명해주었다.
“드래곤은 태생이 장생족이지만 그 몸을 유지하기 위해 긴 잠을 자야 합니다. 홍련왕께서도 그렇게 잠이 드셨고요. 하지만 드래곤은 그 개체 수가 적은 만큼 후대를 잇는 것에 굉장히 민감합니다. 홍련왕께서 왕국 하나를 태웠던 사건도 실상은 드래곤의 알을 노렸기 때문입니다.”
그 사건에 대해서는 다리온도 알고 있었다.
“홍련왕의 비위를 건드려서 왕국이 사라졌었다는 것이 사실은 알 때문이었다고?”
“예. 그 이후로 감히 드래곤의 알을 노리는 이들은 없었습니다.”
마리포사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드래곤은 격은 갖추지 못했지만, 그 능력만은 대악마나 신에 비견되는 존재들이지. 그런 드래곤인만큼 개체 수를 늘리는 것이 굉장히 힘들어. 아마 저것도 몇백 년 만에 얻은 알일 거야. 그런 알을 훔쳤다니 믿기지 않는군.]
그때 알을 가만히 바라보던 아론이 입을 열었다.
“그보다 이 알은 피에 젖어 있습니다.”
“피에 젖어요?”
에드는 새삼 아론을 돌아보았다. 에드의 심안에도 보이지 않았고, 알은 마력에 휩싸여 있을 뿐 피는 보이지도 않았다.
설마 아론은 시간을 넘어서 볼 수 있는 건가?
아론이 끔찍하다는 듯 답했다.
“이거 아무래도 드래곤의 피 같은데요? 끔찍한 사념이 깃들어 있습니다.”
디에고도 그 말에 수긍했다.
“맞아요. 전에 보지 못한 굉장한 사념이에요. 원혼도 아니고 단순히 피에 어린 사념만으로 이정도라는 것이 믿기지 않아요.”
마리포사가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하긴 알을 품고 있었을 어미가 그냥 내줬을 리는 없겠지.]
에드는 그 말에 인상을 구겼다.
“지금 어미가 품고 있던 알을 빼앗아 오기 위해 대악마가 어미까지 죽였다는 거야?”
[그렇지.]
“그런데 드래곤과 대악마가 싸웠는데 그 흔적이 발견되지 않을 수도 있나?”
[보통 드래곤은 레어에서 지내니까. 그 안에서 전투가 벌어져도 쉽게 외부에 알려지지 않아.]
에드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았다. 홍련왕은 홀로 왕국 하나를 불태워버렸다고 알려졌다. 그것이 드래곤의 힘이라는 뜻.
“그렇게 안 강했는데?”
대악마가 분명 강했지만, 상성상 우위에 있다고 해도 충분히 상대할만했다. 그런 대악마에게 죽을 정도로 드래곤이 약한 걸까?
[알을 낳기 위해 몸이 많이 축났을 거야. 대악마도 알고 노렸겠지.]
에드는 가만히 알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이 알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의논해야 하는 거네.”
에드의 시선이 마리포사를 향했다.
“드래곤도 새끼는 약하나?”
[태생이 강해. 막 깨어났다고 해도 충분히 상급 악마와 싸울 수 있을 정도로 강해. 그리고 금세 대악마에 필적할 정도로 강해지지. 아마 세뇌도 같이 진행되고 있었을 거야.]
“마룡으로 깨우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자신들의 무기로 부릴 생각이었다는 말이네?”
[문제는 그 사태를 알았을 때 드래곤들이 어찌 움직일지 하는 것이지. 그 드래곤들이 과연 마룡과 악마만을 노릴까? 아닐 걸?]
눈이 돌아간 드래곤의 분노까지 감당해야 한다는 걸까?
“그럼 이걸 드래곤에게 돌려줘야겠네. 이 마력을 모두 거둘 수 있을까?”
쉽지 않은 일이다. 괜히 마력을 거두기 전에 드래곤이 태어나기라도 하면 마룡인 상태일 테니 걷잡을 수 없다.
에드가 마른침을 삼키고 아린과 아론을 돌아보았다. 파멸의 힘이 담긴 시트라의 신성력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결국 기댈 것은 오직 하나. 아린과 아론의 신성력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가능하겠어요?”
“해볼게요.”
아린의 시선이 아론을 향했다.
“내가 신성력을 지원할 테니 인도는 오빠가 해줘.”
“이 술법진을 이용하는 것이 좋겠어.”
두 개의 술법진은 대악마가 자신들의 마력으로 알을 오염시키던 것. 그 술법진을 이용할 수만 있다면 두 명의 신성력으로 알을 정화할 수 있으리라.
아론이 술법진의 구조를 파악하고 그 구조를 변경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술법진 자체가 마력을 전송하기 위한 것이었으니까. 오직 대악마가 품고 있는 마력을 전송하기 위한 것이었지 다른 능력은 없었다.
아론과 아린이 각자의 술법진에 올라서 기도하기 시작하자 둘의 몸에 깃들어 있던 신성력이 술법진을 따라서 이동하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술법진이 푸르게 물들고 그 신성력이 점점 중앙으로 모여들었다. 그렇게 모여든 신성력이 드래곤의 알이 있는 술법진도 점점 푸르게 물들였다.
그리고 술법진 전체가 푸르게 물든 순간 알을 향해서 막대한 신성력이 집중되었다.
알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마력을 품었던 알이니 신성력이 주입되면서 난리를 치는 것도 당연했다. 그리고 이게 만약 마력을 품은 마룡으로 깨어날 때를 대비해 일행이 모두 무기를 들고 겨누고 있었다.
만약 마룡으로 태어난다면 태어나자마자 죽을 판이었다. 그래서 에드는 마룡이 조금이라도 늦게 태어나기를 바랐다. 신성력으로 정화되고 나서.
모두가 숨을 죽여 바라보는 가운데 신성력이 뒤섞이며 알의 표면은 하늘색과 검은색이 뒤섞인 형태로 변했다. 그렇게 한참을 기다릴 때 술법진에 모인 신성력이 임계점을 넘기라도 한 것처럼 하늘로 뿜어져 올라갔다.
점점 알의 색이 하늘색으로 변해가는 중에 알의 표면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래서는 뭐가 나올지 모르겠다.
그때였다. 천장을 뚫고 내려온 존재가 그 알 위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 모습을 본 에드는 인상을 굳혔다.
“아스트론?”
아린을 무척이나 닮은 여인. 하지만 그 존재가 아스트론이라는 것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두 명의 신성력이 더해져 하늘을 향해 올라가서 연결된 걸까?
그런데 지금 이 순간 모든 시간이 멈춰 있었다. 에드가 인상을 찌푸리고 주변을 살펴보았지만, 역시나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노리스나 론멜, 덱스 누구도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지금 아스트론은 싱긋 웃어 보였다.
[네가 여길 어떻게 온 거지?]
그런데 이 멈춘 시간 속에서 움직이는 존재가 또 있었다.
마리포사의 물음에 아스트론이 눈을 흘겼다.
[요정왕. 이 아이들은 나를 위해 싸우는 아이들이야. 허튼수작 부리면 찢어버린다?]
마리포사는 그 말에 이를 뿌득 갈았지만, 감히 덤벼들지 못했다. 그건 에드도 이해가 가는 부분이었다.
아스트론은 처음 만났을 때와는 격이 달라졌다. 하긴 그동안 받아먹은 대악마가 몇이었던가?
어쩌면 아스트론은 지금 신 중의 신이 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마리포사의 말을 듣기 전과 다르게 색안경을 끼고 보게 되었다.
아스트론은 더는 대화를 나누지 않고 알을 끌어안았다.
[드래곤들이 싫어하겠지만, 어쩔 수 없지.]
아스트론의 등에서 튀어나온 빛의 날개가 알을 끌어안자 저항하던 마력의 색이 빠져나갔다. 온전히 하늘빛 신성력을 품은 알이 쩍쩍 금이 갔다.
끼이.
그 안에서 튀어나온 것은 머리가 유독 커서 이등신으로 보이는 어른 상체만 한 크기의 드래곤이 모습을 드러냈다. 비늘 하나하나가 신성력을 품었는지 하늘빛이었고, 손바닥만한 날개를 파닥이며 떠올랐다.
그런 드래곤의 목을 끌어안은 아스트론이 드래곤의 시선을 돌렸다. 그 두 눈동자가 에드와 마주치자 말했다.
[너는 저 아이를 따르면 돼. 저 아이가 너의 보호자가 되어 줄 거다.]
끼익.
아스트론이 손을 놓아주자 드래곤이 에드를 향해 날아왔다. 이 작은 날개로 어떻게 나는 것인지 궁금했지만, 날아온 드래곤이 가슴에 들이받자 헉 소리가 절로 나왔다.
이 자식. 일부러 박치기한 거 아냐?
에드가 신음을 흘리면서 드래곤을 품에 안자 아스트론이 손을 흔들며 말했다.
[그 아이의 이름은 아루스. 네게 큰 도움이 될 거야. 그 아이는 내 신수가 되었으니까.]
그리 말하고 아루스가 천정을 뚫고 사라졌다. 영체 형태로 움직이는지 천정이 그녀의 움직임을 방해하지 못했다.
그렇게 아스트론이 사라지자 시간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
“뭐야? 알 어디 갔어?”
다들 당황하는 중에 디에고가 에드의 품에 안긴 아루스를 보고는 물었다.
“형! 그거 뭐예요?”
에드는 쓴웃음을 지은 채 답했다.
“아루스. 아스트론의 신성을 받아들인 신수. 신성 드래곤이라고 해야 하나?”
마리포사가 에드의 머리를 쥐어뜯으며 소리쳤다.
[그걸 그냥 지켜보면 어떻게 해? 막았어야지!]
“왜 막아?”
어차피 신성력으로 마력을 정화해주려 했었다. 그런데 뭘 막는단 말인가?
에드의 물음에 마리포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 몰라. 네가 알아서 해.]
에드는 마리포사가 난리 치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저 품에서 꼼질 거리는 이 묵직한 드래곤을 어찌해야 하나 싶을 뿐이었다.
아린과 아론도 상황을 전해 듣고 중앙 술법진으로 모두 모였다. 그들은 에드의 품에 안긴 드래곤이 마룡이 아닌 것을 보고는 모두 안도했다.
에드는 그들의 안도보다 마리포사가 했던 말이 계속 떠올랐다. 태어나자마자 상급 악마에 비견되는 강함을 가졌다는 드래곤. 이 작은 드래곤이 그게 가능한가 싶기도 했지만, 꼭 문제가 생긴 것처럼 말했기에 살짝 걱정됐다.
“일단 올라가죠.”
에드가 아루스를 품에 안은 채 지상으로 올라오자 다리온이 그 모습을 보고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신수입니까?”
에드는 어디까지 말해줘야 할지 고민했다. 아스트론이 강림해서 직접 신수로 거둬갔는데 그걸 자신만 봤다고 하면 과연 믿어줄까?
괜히 귀찮은 일이 생기지 않을까 싶었다.
그때 에드의 품에 안겨 나온 아루스가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입을 벌렸다.
커어어엉!
이 작은 몸에서 어떻게 이런 큰 울음이 튀어나오는지 모를 정도였다. 그 포효에 일행들마저 휘청였고, 수준이 떨어지는 이들은 바람에 휘날리는 낙엽처럼 튕겨 날아갔다.
에드가 바라보자 아루스는 그의 품에 머리를 비비적거리며 작은 소리로 울었다.
키이잉.
에드가 그런 아루스의 머리를 쓰다듬어 줄 때 마리포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우는 포효는 자신의 탄생을 알리는 거야.]
“누구한테?”
[세계에. 그리고 다른 드래곤들에게.]
에드는 그 말에 인상이 굳어졌다. 그 말은 다른 드래곤들이 지금 포효를 들었다는 건가?
순간 하늘의 별들이 지워졌고, 그 자리에 검은 그림자가 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머리부터 꼬리까지 길이만 족히 50미터가 넘어가는 거대한 동체의 존재.
천천히 하강하는 그 존재가 디딘 건물이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불빛을 받아 붉은 비늘이 눈에 들어왔다. 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커다란 눈동자를 마주친 에드는 마리포사가 했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격은 확실히 신에 비하면 떨어지지만, 저 흉악한 광기를 품은 눈을 보면 전투력은 오히려 신을 상회하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때 노리스가 무릎을 꿇고 합장하며 고개를 숙였다.
“조사님을 뵙습니다.”
그의 태도를 보고 에드는 이 드래곤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홍련왕 카루아리스.
쌍룡사의 개파조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