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
넝쿨
마리포사 덕분에 시간의 한계를 벗어나게 된 덕분에 급속도로 나침반의 대악마와 거리가 좁혀졌다. 지금까지는 대악마가 나침반과 가까워지는 것을 읽는 것이 아닌가 싶게 움직였는데 녀석은 오직 자신의 목적에 맞게 움직일 따름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급격하게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리라.
이대로 간다면 밤이 되기 전에 대악마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에드는 마리포사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요정들에게는 성별이라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대혼란을 예견했고, 인간들을 낙원이라는 곳으로 보내 최대한 살리려고 했다는 것도 알았다. 그것만 들어보면 요정은 인간에게 굉장히 호의적인 존재들로 보였다.
하지만 그건 모두 마리포사의 얘기를 들었을 뿐이니 확신할 수 없었다.
인간들의 의사를 묻지 않고 낙원으로 보내는 행동이 요정으로서는 호의 일지 몰라도 인간에게는 날벼락이나 다름없는 일이니.
성급하게 마리포사가 아군이라는 생각은 버렸다. 다만 지금 도움을 받고 있으니 잠시 동행하는 이라고 여기기로 했다.
“마리포사. 그런데 대체 저 대악마가 움직이는 이유가 뭐야?”
[나도 정확한 이유는 몰라. 하지만 이번 대혼란에서 승리하는 건 대악마들이야. 대륙은 지옥이 될 테니까.]
원래 예정되어 있던 일인가?
이만큼 대단한 주인공 캐릭터들을 데리고도 저 대악마들의 계획을 막지 못한다는 말인가?
마리포사는 예정된 지옥을 막고자 자신이 이곳에 왔을 거라는 말을 했다. 어쩌면 자신을 이곳으로 보낸 여인도 그걸 알고 그렇게 한 걸까?
에드는 바로 앞에 앉아있는 아린을 바라보고는 그녀의 등에 살짝 머리를 기댔다.
아린이 흠칫 몸을 떨더니 에드를 돌아보며 물었다.
“피곤해요?”
“아니요. 잠깐만 이러고 있을게요.”
처음이라면 이 세계 따위 어떻게 되든 관심도 상관도 없었다. 자신이 사는 것만 중요했지만, 지금은 다르다.
아린, 디에고, 덱스, 테인 등 수많은 이들과 함께 보낸 추억이 있다. 생사고락을 함께한 이들과의 추억을 생각한다면 이 세계는 그만큼이나 자신에게 중요해졌다.
그러니 이 세계가 지옥으로 변하게 두지 않겠다.
에드가 마음을 굳히고 그 마음을 담아 아린의 허리에 두르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아린에게도 그 마음이 전해졌는지 그녀는 에드의 손등을 살살 쓰다듬어 주었다.
도시 아르테미아.
그곳의 신전에 모인 이들은 성기사 다섯과 그들의 종자들. 그리고 수사들까지 더하선 수십 명의 인물들이 바라보는 곳에는 한 사내가 서 있었다.
새하얀 풀플레이트 아머를 입고 있는 사내는 마흔이 넘어 보였지만, 이곳에 있는 누구보다 강인해 보였다.
마스터 팔라딘 다리온 갈브리아스.
아스트론 교단의 팔라딘을 이끄는 마스터 팔라딘으로 그는 모인 이들을 돌아보았다. 성녀의 예지로 아르테미아에서 벌어질 끔찍한 일을 생각해서 인근의 성기사들이 모였고, 다리온도 직접 참전했다.
도시는 아직 안전했지만,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지금까지는 교단의 눈을 피해 몸을 숨기기 급급했던 악마들이 갑자기 튀어나와 인간들을 공격하고 있는 지금 아스트론 교단도 인력 부족 현상이 일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숨어 있는 악마를 찾아서 죽이는 일이었기에 성기사가 그리 부족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성기사가 부족할 정도로 악마들이 판을 치는 시기.
다리온은 모인 성기사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곳으로 대악마 중 하나가 오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성기사들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지금까지는 악마들이 숨어 다녔기에 그들에 대해 경시하는 경향이 성기사들에게도 있었다. 그런데 직접 싸워 본 악마들은 상상 이상으로 강했다.
성기사들도 벌써 여럿이 죽었고, 종자는 물론이고 수사들까지 더하면 수십 명이 죽었다.
그런데 대악마가 온다는 말에 모두가 긴장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 이곳에 모인 이들이 전부 나선다고 해도 과연 대악마를 상대할 수 있을지 모르니까.
다리온은 긴장한 성기사들과 종자, 수사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스트론의 영광이 함께한다면 우리는 죽어도 죽는 것이 아니다.”
아스트론의 곁으로 가는 것. 그것이 성기사가 위험한 일에 나서는 이유이기도 했다.
다리온의 말을 들은 성기사들과 종자, 수사들의 눈빛이 변했다.
“경계 태세를 높여라. 늦어도 오늘 밤. 대악마가 이곳에 나타날 테니. 아스트론의 영광이 함께하길.”
“아스트론의 영광이 함께하길!”
힘찬 대답을 들은 다리온은 그들이 흩어지는 것을 보고 뒤돌아 신전 안쪽 회의실에 들어갔다. 그곳에는 굳은 표정으로 지도를 살피고 있는 이가 있었다.
“마스터 팔라딘. 오셨소?”
“타미엔 대주교. 대악마는 찾아냈소?”
“아직 발견하지 못했소.”
고개를 내저으며 답하는 타미엔 대주교는 이번 일에 파견된 대주교로 이단심문관까지 지낸 전력이 있는 교단 내의 입지가 탄탄한 이였다.
특히나 지도를 이용한 탐색에 능해 이번 임무에 파견되어 나왔는데 아론에게서 온 연락대로라면 대악마가 이곳으로 오고 있다고 하는데 그 방향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 했다.
대악마가 이곳으로 향한다는 말만 전해 들었을 뿐 놈이 어디서 올지 모르니 이곳에서 대기 중이다. 하지만 놈의 위치를 파악하기만 한다면 곧장 요격하러 나갈 생각이다.
이곳에서 대악마를 맞이한다면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어 나갈지 알 수 없었으니까.
다리온이 한숨을 내쉬고 옆에 놓인 의자에 앉자 타미엔도 지도에서 시선을 떼고 그를 바라보았다.
“전력이 부족하지 않겠소?”
다리온은 그 말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상급 악마와도 싸워봤던 다리온이지만, 대악마는 그 격을 달리하는 존재라고 알고 있다.
3영웅이나 되어야 싸울 수 있을 정도로 강한 녀석을 긴장으로 굳은 이들을 데리고 상대할 수 있을까?
“지금 어딘들 전력이 부족하지 않겠소? 그저 최선을 다할 따름이오.”
타미엔은 그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저 고지식한 인간은 대악마가 이곳으로 온다는 말을 듣고도 그와 대적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죽으면 모든 것이 의미가 없음을 모르는 걸까?
죽어서 아스트론의 곁으로 간다? 그건 성서에만 실려 있을 뿐 누구도 증명하지 못했다. 그것만 믿고 목숨을 저리도 던질 수 있다니 부럽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단심문관으로 수많은 이단을 고문하고 처형해왔던 타미엔은 그렇기에 더욱 성서에 대해 비판적으로 볼 수 있었다. 죽으면 어떻게 될지 누구도 모른다.
타미엔은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대악마를 찾이 위해 다시 지도에 손을 얹고 살피기 시작했다.
해가 저물고 어둠이 내린 시간. 성벽 위에 오른 마스터 팔라딘 다리온은 저 멀리 어둠에 휩싸이는 숲을 바라보았다.
도시 아르테미아로 오는 대로에도 어둠이 내려앉았다. 보고 대로라면 대악마가 도착할 시간이 되었음에도 아직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다리온은 한숨을 내쉬고는 천천히 돌아섰다.
도시 아르테미아는 지금 불 하나 켜지 않은 채 조용했다. 오늘은 모두 각자의 집에서 숨죽이고 있으라고 전했다. 영주의 명령까지 전달됐으니 특별한 일 없이는 나올 일은 없으리라.
그의 옆을 따라다니던 성기사 말콤이 소리쳤다.
“모두 전투 준비 태세를 갖춰라!”
말콤의 외침에 다리온이 그를 돌아보았을 때 그는 저 멀리 하늘을 보고 있었다. 다리온이 고개를 돌려 바라본 곳에 검은 그림자가 빠르게 커지고 있었다.
“하늘을 날아오는 건가?”
다리온은 그리 말하고는 손을 내밀었다. 말콤이 그에게 투창을 하나 건네주자 그걸 받아든 다리온이 허리를 뒤로 젖힌 채 자세를 잡았다.
“어디 얼굴이나 보자.”
다리온이 든 것은 성유물 신창 그룸벨.
다리온의 신성력을 받은 그룸벨이 강렬한 빛을 뿜어내자 그가 허리를 틀며 그룸벨을 던졌다.
한줄기 푸른 섬광이 되어 검은 그림자를 향해 날아간 그룸벨이 점으로 변했다. 그리고 큰 섬광이 폭발했다.
그 빛이 터지는 순간 날아오던 존재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신창 그룸벨에게 적중당해서 폭발한 곳에 큰 상처가 났지만, 빠르게 회복되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제야 그 형태를 본 성기사들이 자신도 모르게 아스트론의 이름을 불렀다.
“아스트론이시여.”
점점 가까워지는 대악마의 크기는 날개 길이만 30미터가 넘었고, 신장이 10미터에 꼬리까지 더한다면 20미터도 훌쩍 넘을 거대한 존재였다.
그런 대악마가 뿜어내는 격에 정신이 까마득해지는 느낌이었다.
하늘을 날아오던 대악마가 입을 벌리고 포효를 내질렀다.
꾸워어어엉!
포효에 날아든 충격파에 성벽에 쩍쩍 금이 가고 그 위에 서 있던 이들이 비틀거렸다. 고작 고함 한 번에 이 정도라니?
모두가 질린 가운데 성내에서도 강력한 마기가 일어났다. 저만한 마기를 어떻게 숨겼나 싶을 정도로 강대한 마기.
도시의 건물을 부수며 나타난 존재는 뱀의 머리에 상체만 튀어나와 있었는데 그 크기가 문제였다.
뱀의 길이만 40미터가 넘었고, 기둥보다 두꺼운 몸통이라 그 몸이 지나가는 길마다 건물들이 부서지고 있었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는 모습을 보며 다리온의 안색이 잔뜩 굳어졌다.
저것 또한 대악마다.
두 마리의 대악마가 이곳에 모였다.
하나만 해도 까마득한 존재인데 두 마리나 되는 대악마라니?
승산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그래도 다리온은 결정을 내렸다.
“모두 성내에 나타난 대악마를 잡으러 간다!”
아직 날아오고 있는 대악마는 그들이 상대할 방법이 없다. 발리스타를 쏜다고 해도 닿지 않을 거리에 있었으니까.
날아오는 대악마가 합류하기 전에 성내에서 나타난 저 대악마를 잡을 수만 있다면 일말의 가능성이 있다고 여겼다.
다리온이 자신의 대검을 뽑아들고는 아스트론의 이름을 되뇌었다.
“아스트론이시여.”
그 부름에 화답하듯 대검에서 푸른 성화가 피어올랐다. 다리온이 성벽에서 뛰어내리려고 할 때 말콤이 외쳤다.
“마스터 팔라딘! 저기를 보십시오.”
무슨 소린가 싶어 고개를 돌린 다리온의 눈에 날아오던 대악마가 추락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추락하는 대악마를 향해 떨어지는 두 마리 사령도 눈에 들어왔다.
그리폰과 블랙 와이번.
두 마리의 위에 타고 있는 이들이 추락하는 대악마를 향해 공격하는데 날아가는 섬광이 푸르게 빛나는 것을 보고 알 수 있었다.
그가 누구인지.
“악마 사냥꾼 에드.”
대악마를 셋이나 죽인 아린 일행의 사냥꾼. 그가 쏘아내는 화살임을 깨달은 다리온이 대검을 들어올리며 소리쳤다.
“지원이 왔다. 우리는 저 대악마를 막는다!”
다리온이 외치고 앞장서 달려가자 그 뒤를 성기사들이 각자 지닌 성유물을 꺼낸 채 아스트론의 이름을 외쳤다. 성기사들이 들고 있던 성유물이 빛났고, 그런 그들의 뒤로 종자들과 수사들이 따라붙었다.
쐐기 형태를 이룬 그들을 향해서 뱀의 몸에 매달린 대악마가 웃음을 터트리며 마주쳐 왔다.
신성 폭발을 본 순간 안개를 걷고 일행은 전력으로 날았다. 디에고가 온 힘을 다해서 비행 속도를 높였기에 성에 도달하기 전에 대악마를 만날 수 있었다.
에드는 주저하지 않고 화살을 날렸다.
성유물에 버금가는 화살이 날아가 박히자 쇄폭시를 터트렸다.
콰콰쾅!
날개 하나가 그대로 찢겨 날아갔고 대악마가 추락했다. 추락한다고 지켜봐 줄 마음은 없었다. 에드는 그런 대악마를 향해 연달아 화살을 날리며 말했다.
“아린. 일행을 나눠야겠어요. 성 안에서 나타난 대악마를 막을 이들이 필요해요.”
“제가 가겠습니다.”
“나도!”
노리스와 덱스, 론멜의 외침에 에드가 고개를 끄덕이고 소리쳤다.
“가요!”
에드가 칠채 비도를 날려주자 노리스와 덱스, 론멜이 그런 칠채 비도를 밟고 성을 향해 날아갔다. 칠채 비도가 성까지 날아가지는 못해도 최대한 가까이 갈 수는 있을 테니 저들이 늦지 않기만을 바라며 에드는 추락하던 대악마가 날개를 접고 바닥에 내려서는 것을 보았다.
대악마가 둘.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려고 한지는 몰라도 경험치가 넝쿨째 굴러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