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
협상
사자의 갈기 같은 수염을 기른 펜드래건은 성큼성큼 다가와 에드에게 손을 내밀었다.
“오랜만이군.”
펜드래건과 손을 잡자 그가 고개를 기울여 에드의 위아래를 살폈다.
“놀랍군. 이렇게 짧은 시간에 이만한 성취라니. 시간 나면 한 판 붙어보는 게 어떤가?”
“얼마든지요.”
에드도 지금 자신의 실력을 알고 싶었다. 물론 펜드래건을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펜드래건은 대악마를 죽이고 그 뒤로 16년이 지났으니까.
드레드가 16년 동안 새로운 힘을 얻었듯이 펜드래건 또한 그만한 힘을 얻었을 터.
저번에는 그의 밑천은 꺼내보지도 못했으니 한번 붙어보고 싶었다. 그래야 자신이 지금 어느 수준까지 왔는지 알 수 있을 테니까.
에드가 펜드래건과 인사를 나누는 사이에 세실리아는 아린과 인사를 나눴다.
“우리 성기사. 이렇게 입으니까 예쁘고 좋네.”
아린이 살짝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붉힐 때 세실리아가 바짝 다가서며 물었다.
“그래서 에드랑은 진전이 좀 있었어?”
아린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세실리아가 활짝 웃으며 그녀의 등을 토닥여줬다. 그렇게 간단히 인사를 나눈 에드가 에스터 공주를 레이든 국왕에게 소개해줬다.
“이쪽은 달리아 왕국의 제 1왕위 계승권을 가진 에스터 공주입니다.”
에스터 공주는 에드에게 살짝 눈빛으로 감사를 표하고는 가슴에 손을 얹은 채 살짝 고개를 숙였다.
“에스터 디아제 드 달리아입니다.”
“먼 길 고생 많았네. 레이든일세.”
에드는 못 본 사이에 레이든이 더 나이가 든 것 같았다. 태자가 죽고 2왕자가 죽으면서 레이든은 마지막 불꽃을 태웠다. 이제는 재만 남은 것 같은 인상.
죽지 않는다고 해도 상왕에 오르고 새로운 이가 왕위에 올라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그 가장 유력한 후보가 옆에 서 있었다.
“에밀리아에요.”
에스터 공주는 에밀리아가 이 자리에 와 있다는 것만으로 그녀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걸 레이든이 확답을 내려주었다.
“내 뒤를 이을 아이일세. 이 자리에 있어도 될 아이지.”
레이든 국왕이 그리 말하기에 에스터 공주도 에밀리아를 다시 보고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차기 트라비아 왕국의 여왕이 될 에밀리아와 달리아 왕국의 여왕이 될 에스터 공주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둘이 서로를 바라보는 사이에 레이든 국왕이 입을 열었다.
“다들 앉지.”
모두 자리에 앉자 레이든 국왕이 손을 들었다. 그 손짓에 음식이 나오기 시작했다.
“들게. 입에 잘 맞았으면 좋겠군.”
에스터 공주는 스프를 한 수저 떠먹어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달리아 왕국은 산맥이 많은 곳이라 사냥으로 잡은 고기를 이용한 음식들이 많았다. 그랬기에 음식들이 다 무거웠는데 지금 내온 크림 스프는 부드럽기 그지없었다.
그 맛을 음미하던 에스터 공주가 눈웃음을 지었다.
“맛있네요.”
에스터 공주는 왕국을 빼앗기고 나서 하녀로 전락했고, 그 뒤로 달리아 왕국군을 만난 후에도 동굴에서 거의 갇혀 살다시피 했다.
그런 그녀가 제대로 된 음식을 먹지는 못했다. 특히나 왕궁에서 요리사가 작정하고 만든 요리는.
레이든은 손녀를 바라보는 노인처럼 미소를 지었다.
“허허허. 많이 들게. 다 먹고 얘기 나누도록 하지.”
에드도 오랜만에 입이 즐거운 시간이었다. 더그의 실력도 뛰어나지만, 왕궁의 쉐프를 넘어설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실력이 왕궁의 쉐프와 비등하다고 해도 요리 환경이 다르니까.
에드는 어차피 이번 협상에서 자신이 할 일은 없었기에 그저 만찬을 즐겼다.
그렇게 식사를 모두 마치고 나서 차가 나오자 레이든 국왕은 에스터 공주를 바라보았다.
“그래. 이제 그럼 이야기를 들어볼까?”
에스터 공주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2왕자 클리프의 달리아 정복군에 의해 저희 왕국은 짓밟혔습니다. 국왕 전하는 돌아가셨고, 제 가족 모두가 죽었죠. 저도 클리프의 변덕이 아니었다면 살아남지 못했을 겁니다.”
레이든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귀만 기울였다.
“클리프 왕자가 죽었지만, 그의 후임으로 왕국을 통치하는 말롯 경은 왕도의 귀족들과 상인, 시민들에게서 가혹할 정도로 군자금을 끌어모으고 있어요. 덕분에 왕도는 지옥처럼 변했죠.”
에드도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몰랐다. 자신이 클리프를 죽인 것만 생각했지, 그 뒤에 달리아 왕국이 어떻게 될지는 신경 쓰지 않았다.
“달리아 왕국 정벌군이 남부에서부터 왕도를 향해 오면서 이제 왕국 남부의 백성들도 약탈에 비명을 내지르고 있죠. 트라비아 왕국 내의 알력으로 이뤄진 전쟁으로 달리아 왕국의 국민들이 큰 피해를 받고 있습니다.”
레이든은 수염을 쓸어내리고는 물었다.
“그래서 원하는 것이 뭔가?”
“달리아 왕국군은 병력을 모았고, 언제든 그들을 공격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레이든이 흘흘 웃더니 말했다.
“달리아 왕국군은 부족한 군자금을 얻기 위해서 자국의 귀족을 약탈한다고 들었는데?”
“앞으로 그럴 일은 없습니다. 새로운 후원자를 만났고, 넉넉한 군자금으로 병력을 보강하고 있습니다.”
에스터의 말에 레이든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긴 아칼란이 아무리 뛰어난 정보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드레드가 그녀에게 군자금을 내준 것까지는 알지 못할 테니까.
레이든은 눈을 가늘게 뜨고 에스터를 바라보았다. 에스터는 그 눈빛을 담담히 받아내고 있었다.
레이든은 한참을 그렇게 에스터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운 후원자를 만난 것은 축하할 일이군. 그래서 달리아 왕국군의 병력으로 정벌군을 공격하겠다는 건가?”
“정벌군은 점령군을 몰아내기 위한 트라비아 왕국의 호의임을 압니다.”
에스터가 말을 돌리자 레이든은 미소를 지었다.
사실 정벌군을 보내 점령군을 몰아낸다고 해도 그곳을 점령하고 있을 수는 없다. 무엇보다 그만한 병력을 빼 놓는다면 트라비아 왕국이 대륙 종주국의 자리에서 내려와야 할지도 모른다.
사면에 모두 다른 왕국과 맞대고 있는데 지금 각 왕국들은 트라비아 왕국을 주시하고 있었다. 종주국이라는 것을 알고 지켜만 보았지만, 그들이 달리아 왕국을 점령해버리면서 문제가 생겼다.
가만두면 트라비아 왕국이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성장할 것을 알고 벌써 외교적으로 슬슬 압박이 전해지고 있다.
마젤타 왕국은 5만의 병력을 잃은 것도 있지만, 지금 왕국이 어수선해서 움직이지 못할 뿐 다른 왕국들은 국경으로 병력을 내보내는 중이었다.
“그래서?”
“점령군을 몰아내고 정벌군은 다시 트라비아 왕국으로 돌아가기를 원합니다.”
레이든은 그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말이야 어떻든 이미 한 번 손에 넣었던 왕국이다. 그냥 내달라는 것이야말로 도둑 심보가 아닌가?
아무리 대의에 어긋난다고 해도 오직 그것으로만 왕국이 움직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에스터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마튼 평야와 국경 인근의 성 네 개를 내드리겠습니다.”
마튼 평야는 달리아 왕국의 가장 중요한 평야 중 하나다. 그곳에서 나는 밀의 양이 왕국의 밀 소비량의 2할을 차지할 정도다.
레이든도 에스터가 그렇게까지 말할 줄은 몰랐기에 잠시 말을 멈췄다.
에스터는 그 뒤로 말을 이었다.
“대신 마튼 평야에서 나오는 밀 최우선 수입권을 요구하는 바입니다.”
달리아 왕국은 자급자족할 수 있는 상황에서 마튼 평야를 내주면 자급자족할 수가 없다. 왕국민들을 굶길 수는 없으니 밀 최우선 수입권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트라비아 왕국으로서도 손해를 볼 것은 없었다.
마튼 평야에서 나는 밀을 달리아 왕국이 지속적으로 사간다면 그만큼 국고가 늘어나는 것이니까.
게다가 그렇게 받은 마튼 평야와 성은 국왕 직할령이 된다. 마다할 이유가 있을까?
레이든의 시선이 에밀리아를 향했다. 자신의 시대는 끝났고, 그 뒤를 이을 에밀리아의 생각이 궁금했다.
에밀리아는 가만히 에스터를 바라보다가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굉장히 좋은 조건이군요.”
에스터도 이 자리에 나올 때 그냥 빈손으로 나온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에밀리아도 이제 여왕이 될 수업을 받는 이답게 그냥은 내주지 않았다.
“그 조건은 좋아요. 하지만 두 번에 달하는 군이 움직인 데는 막대한 자금이 들었습니다. 그 정도에 왕국을 내주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이네요.”
에스터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가만히 잘 있는 달리아 왕국을 트라비아 왕국이 공격해 들어왔고, 왕족들이 대부분 죽었다.
그리고 지금도 달리아 왕국은 수탈당하고 있는데 오히려 전쟁 배상금을 더 뜯어내려고 하니 화가 안 날 수가 없었다.
그래도 표정에 변화는 없었다.
“무엇을 더 원하시나요?”
에밀리아는 에스터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려 그녀의 옆에 앉아있는 에드와 아린을 보았다.
사실 에스터가 혼자 왔다면 영혼까지 탈탈 벗겨 먹었을지도 모른다. 달리아 왕국군이 있고, 후원자를 얻었다고 해도 그들이 정벌군을 공격할 수는 없을 테니까.
주변 왕국의 외교적 압박도 달리아 왕국에서 얻는 수익을 나눠 먹으면 된다.
그런데도 에스터를 몰아치지 못하는 것은 에드와 아린 때문이다. 저 둘이 함께 왔다는 것은 그들과의 인맥도 있다는 뜻.
그걸 알았기에 에밀리아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고는 말했다.
“달리아 왕국의 레이저 부대 전술 교관들을 보내주세요.”
“예?”
에스터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부분이라 되물을 때 에밀리아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
“크로우에 버금가는 레인저 부대를 양성할 계획이에요. 그러니 그만한 부대를 만들 수 있을 정도의 뛰어난 교관이 필요해요.”
달리아 왕국은 태생이 산맥에서 사는 이들이라 레인저가 되기 쉬웠다. 대부분이 산사람이었으니.
하지만 그걸 훈련한다고 만들 수 있을까?
게다가 그걸 어떻게 믿고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걸까? 전술 교관이라고 보내는 이들이 허술한 이들일 수도 있지 않을까?
무엇보다 그들을 내줘도 되는 걸까? 달리아 왕국의 특수 병과라고 해야 할 이들의 전술을 내주게 되면 다시 트라비아 왕국이 침공할 때 그들을 막을 수 없을 테니까.
에스터가 그런 고민을 할 때 에밀리아가 에드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교관들은 에드님이 검수해주셨으면 해요.”
에드는 갑자기 자신에게 화살이 튀자 시선을 돌려 에밀리아를 바라보았다.
“해주시겠어요?”
시선을 돌리니 에스터도 에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에드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레인저 부대 전술 교관의 실력을 검증하는 것만으로 유혈 사태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여건이 된다면요.”
에드의 대답을 들은 에밀리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에스터를 돌아보았다.
“세세한 내용은 외교관들을 통해서 조율하도록 하죠.”
“그래요.”
에스터는 대답하면서 알 수 있었다. 왕국은 돌려받지만 서열 정리가 된 것이라는 것을.
그녀가 내건 조건을 무시할 수 없었던 것에서부터 달리아 왕국이 지고 들어간 것이었다. 하지만 더는 피를 흘리지 않고 왕국을 되찾을 수 있다는 것만 해도 큰 성과였다.
달리아 왕국 사절단이 머무는 곳으로 펜드래건과 세실리아가 따라왔다.
“영감. 안 죽고 잘 살아있네.”
펜드래건을 보고 테인이 흘흘 웃음을 흘렸다.
“죽지만 않은 것이 아니라 대악마들이 죽는 꼴도 봤지.”
“대악마가 죽어?”
펜드래건이 놀라서 묻자 테인이 손가락 세 개를 펴 보였다.
“라그록스. 네프사엘. 네비로스가 죽었네.”
“네비로스는 16년 전에 죽었잖아?”
“그런 줄 알았지. 드레드 그 친구 몸에 기생하며 살아있었네.”
펜드래건은 그 말에 가볍게 혀를 찼다.
“그 친구 고생 많았겠군. 말이라도 하지.”
“어쩔 수 없었을 걸세. 네비로스의 정수가 드레드보다 더 탐낼 몸을 찾아야만 빠져나갈 수 있었으니까.”
펜드래건은 상황을 대충 이해했다.
“그래서 네프사엘을 죽였군.”
“맞네. 놈의 몸에 네비로스의 정수를 집어넣고, 죽였지.”
펜드래건이 에드를 돌아보았다. 대악마는커녕 상급 악마만 만나도 위험할 것 같았던 그가 전과 다른 기세로 나타났다. 게다가 그 일행들도 만만치 않았다.
예전처럼 동시에 달려들라고 하면 과연 이길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성장한 모습.
펜드래건의 투쟁심을 자극하는 이들이었다.
펜드래건은 씨익 웃으며 일행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 시선이 멈춘 곳은 에드였다.
“한 번 몸이나 풀어볼까?”
에드도 주저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이 별궁의 연무장으로 걸어가자 일행들도 모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 중에서는 펜드래건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그랬기에 기대가 됐다. 자신들을 이끄는 에드가 이미 3영웅에 버금가는 위업을 쌓았다는 것을 알았고, 진짜 3영웅과 대결을 한다고 하니 모두가 그 승부의 향방에 관심을 기울였다.
솔직히 누가 이기든 상관없었다. 저들 중 누가 이길지 몰라도 둘의 대결은 보는 것만으로 큰 도움이 될 것을 알아 모인 이들 모두가 눈을 반짝이며 지켜보았다.
에드는 천천히 화살을 하나 뽑아 시위에 걸고는 펜드래건을 바라보았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도저히 가늠조차 하기 힘들던 펜드래건이 이제는 보인다. 그 끝을 정확히 인지할 수 없을 정도였지만, 그래도 그 끝이 보인다는 것만으로도 자신이 얼마나 성장했는지 알 수 있었다.
펜드래건이 검을 뽑아 들고 손을 까딱이는 순간 에드의 화살이 시위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