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
네프사엘
악마는 어차피 죽일 생각이지만, 그녀를 빼내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에드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에스터는 잠시 주저하다가 답했다.
“이들을 만날 때는 대의를 위한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지금 달리아 왕국군은 솔직히 도적 떼나 다름없어요.”
군인이란 대의가 없다면 그저 도적 떼나 다름없는 것은 사실이다.
“의용군으로 모이는 이들은 차라리 나은데 젝스 대장군이 끌고 온 이들은 달라요. 그들은 점령군에게 넘어간 귀족들을 죽이고 그들의 재물을 강탈하고 있어요. 이건 뭔가 잘못되었어요. 누가 더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지 모르겠어요.”
젝스 대장군. 왕국을 되찾겠다는 대의를 등에 업고 자신의 세를 늘리는 중이다.
인제 보니 그저 대의를 핑계로 에스터를 데려다가 꼭두각시로 만든 셈.
에드는 잠시 고민하다가 물었다.
“전쟁에 약탈과 피가 흐르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달리아 왕국을 되찾는 길은 피의 길이 될 겁니다.”
에스터는 그 말에 한숨을 내쉬었다. 에드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왕국을 찾으려고 하면 피를 흘리게 될 테고, 당신이 떠난다고 해도 달리아 왕국군은 당신을 다시 잡아 올 겁니다.”
에드는 그녀가 자신의 왕국을 되찾겠다고 해도 관여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그녀를 탈출시켜준다고 해도 잡혀 올 판이다.
“트라비아 왕국으로 데려다주세요.”
“공주님. 괜찮겠습니까? 망명하시게 된다면 달리아 왕국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을 텐데요?”
“아뇨. 저는 평화적으로 왕국을 되찾을 거예요.”
에드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다.
“트라비아 왕국에서도 정치적인 문제로 클리프 왕자를 보냈던 거고, 정벌군 또한 그가 소환령을 듣지 않아서라는 것을 알아요. 제가 가서 협상한다면 아마도 더 큰 피를 흘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적절히 영토를 내주는 정도로 왕국을 되찾을 수 있을 거예요.”
아무 생각 없이 구해달라고 한 건 줄 알았더니 그건 아닌가 보다. 에드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을 이었다.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은 아시죠?”
“물론이에요. 그리고 제가 뭔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도 알고요. 제가 갚을 기회가 있다면 그때는 꼭 갚을게요.”
에스터가 협상으로 왕국을 되찾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된다면 일국의 여왕에게 빚을 달아놓는 일. 그건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다.
그리고 네프사엘이 이름을 밝힌 것은 에스터와 젝스 대장군 둘뿐이다. 그런데 에스터는 멀쩡한 것을 보니 젝스 대장군이 의심이 갔다.
그의 눈을 보면 현혹이 된 것 같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악마와 거리를 두고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어떤 자들은 오히려 악마를 이용하려고 하는 자들도 있으니까.
만약 그렇다면 달리아 왕국군이 벌이는 일도 납득할 수 있었다. 귀족들의 돈과 병사들을 빼앗는 것으로 젝스 대장군은 자신의 잇속을 챙길 수 있을 테고 그렇게 차곡차곡 챙긴 악업으로 네프사엘의 배를 불려주고 있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트라비아 왕국으로 넘어온 이들이 사제를 살려준 것이 대단한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만약 사제가 죽었다면 아스트론 교단까지 나서서 더욱 난장판이 되었을 텐데 아무래도 그들을 건드리는 것을 껄끄러웠던 걸까?
그 부분은 조사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좋습니다. 트라비아 왕국까지 가게 해드리죠. 그럼 그 사엘이라는 여인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그녀는 동굴 안쪽에 거처가 있어요. 가장 안쪽이라서 보통 그녀가 나와야만 만날 수 있죠.”
에스터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사실 이곳도 그녀가 알려준 곳이라고 해요.”
뒤늦게 합류한 에스터다 보니 자세한 내막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을 들은 에드는 동굴 안쪽에 네프사엘이 머무는 곳이 있기만 하다면 그녀를 잡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우선은 네프사엘의 위치를 확인하는 것이 먼저다. 네프사엘이 무슨 수작을 부린다고 해도 드레드가 있다면 시간은 끌 수 있을 테니까.
“안내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이죠.”
에스터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혼자 가실 건가요?”
에드는 고개를 내젓고는 답했다.
“적어도 함께 온 셋은 함께 가야 해요.”
“좋아요. 제가 안내할게요.”
에스터가 앞장서서 안내해준다는 말에 에드는 그녀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를 따라 걸어가며 에드는 뒤로 따라붙는 수호 기사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저 수호 기사는 누구입니까?”
“아, 캄벨 경 말인가요? 저분은 제 사람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가 하는 행동을 보면 확실히 그녀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인물 같았다. 입도 무거워 보였고.
에드는 살짝 목례하고는 그녀를 따라서 젝스가 있는 방으로 돌아왔다. 에스터와 에드가 돌아오는 것을 보고 젝스는 그들을 돌아보다가 자리에 앉는 에스터에게 물었다.
“청이란 것이 어떤 것입니까?”
“사엘을 만나고 싶다고 하더군요.”
“사엘을 말입니까?”
젝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습을 보고 에스터가 담담히 말을 이었다.
“그래서 허락했어요.”
“그녀는 우리의 든든한 후원가 중 하나입니다. 정체도 모르는 자들을 그녀에게 안내해줄 수는 없습니다.”
에드는 젝스를 바라보다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짐작만 했었지만, 직접 대화를 나눠보니 알겠다. 이 자는 확실히 사엘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 악마와 거래한 자. 영혼을 거래하지는 않았지만, 이 자 때문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피를 흘렸는지를 알 수 있었다.
어차피 에스터를 이곳에서 빼내려고 하면 인질이 필요했다. 그리고 마침 그에 어울리는 자가 호위 하나 없이 이 자리에 있었다.
자신의 실력을 믿고 있는 것 같지만, 그게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이었는지 가르쳐 줄 때가 되었다.
에드는 고민하지 않고 그대로 젝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테이블을 뛰어넘고 달려드는 모습에 젝스가 반사적으로 허리에 차고 있는 검을 잡아갔지만, 에드는 이미 그의 지척에 다가와 그의 머리를 잡고 바닥에 내리찍고 있었다.
“어머!”
에스터가 놀라서 입을 가리고 있을 때 에드는 이미 젝스가 뽑던 검을 빼앗아 그의 목에 겨눈 채 말했다.
“너 사엘이 누군지 알지?”
“무, 무슨 소리냐?”
목에 검이 닿아 있었지만,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려고 했다. 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켜야만 했다.
그런 젝스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에드가 그의 가슴을 누르고 있는 무릎에 힘을 주며 말했다.
“네프사엘.”
젝스는 숨기려고 했지만, 그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이미 심증을 가지고 있었기에 에드는 그 눈빛을 놓치지 않았다. 에드는 고민하지 않고 그의 이마를 폼멜로 내리쳐 기절시켰다.
젝스가 기절한 것을 보고 아린이 물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악마와 거래한 것 같아요. 영혼을 내준 것은 아니고 서로 원하는 것을 얻는 거래였던 것 같네요. 네프사엘에게 악업을 쌓아주고 이 자는 원하는 것을 얻었어요.”
눈이 붉었다면 고민할 것도 없었을 텐데 이 자는 똑똑했다. 네프사엘이 손발로 부리던 자들은 악마에게 현혹되어 있었는데 이 자는 거래하면서 현혹을 피했으니까.
아린은 인상을 굳힌 채 물었다.
“그럼 증거는 없는 건가요?”
“자기 입으로 불게 만들면 되지만 그럴 필요는 없겠죠.”
에드의 시선이 아린과 드레드를 향했다.
“안에서 나눈 대화는 다 들었죠?”
“예.”
“미리 묻지 못해서 미안해요.”
아린은 에드의 말에 미소를 지었다. 처음에는 에스터에게 눈길을 주고 자신도 모르던 과거가 있다고 해서 걱정했는데 이렇게 얘기를 듣고 보니 에스터가 에드에게 어떤 고마움을 느끼는지 알 수 있었다.
아버지의 복수를 대신해준 이에게 느끼는 고마움. 그리고 그에게 빚을 지면서까지 이곳을 벗어나고자 하는 것.
그렇기에 에스터를 이곳에서 탈출시켜준다면 그녀는 에드에게 마음의 부채를 안을 뿐 그의 옆에 설 수 없다.
“괜찮아요. 그럴만 했으니까요.”
아린은 시선을 돌려 에스터를 바라보았다.
“공주님은 저희가 무사히 빠져나가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마침 쓸만한 인질도 생겼네요.”
에스터는 바닥에 쓰러진 젝스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지금 바로 안내해드릴까요?”
“잠시만요.”
에드는 드레드에게 시선을 돌렸다.
“혹시 이 자를 묶을만한 것 없습니까?”
“알면서 묻는 것 같군.”
드레드는 그리 대답하고는 잎 하나를 꺼내서 젝스의 가슴 위에 올려놓았다. 잎에서 넝쿨이 뻗어 나와 젝스를 휘감았다. 보기에는 그저 넝쿨 정도로 보이지만 드레드의 수준을 생각하면 저건 중급 악마도 풀지 못할 넝쿨이다.
젝스가 빠져나올 확률은 없다.
에드는 캄벨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자를 맡아주시겠습니까?”
캄벨은 잠시 에드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에드가 움직이는 것은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만약 그가 다른 마음을 품었다면 에스터를 지키지 못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기에 지금 이곳은 에드와 그 일행의 뜻대로 따르는 것이 에스터를 지키는 일이라는 것임을 알았다.
캄벨이 젝스를 챙기는 사이에 에드는 아린에게 눈짓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아린은 그 뜻을 읽고는 손을 내밀었다.
에드도 칠채비도를 불렀다.
쾅! 콰앙!
무식한 굉음을 내며 벽을 부수고 날아온 방패가 아린의 손에 잡혔다. 그리고 그 구멍을 따라서 날아온 해머를 잡은 아린이 방패를 등에 착용하며 날아온 성검을 받아들 때 날아온 칠채비도가 부드럽게 에드가 걸친 가죽끈으로 돌아와 들어갔다.
에드는 저 멀리서 달려오는 이들의 인기척을 느꼈다. 앞을 막는 이들도 있는 것 같지만, 동굴 내에서 일행을 막는다?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개활지에서 만났을 때나 대군이 의미가 있지 이렇게 좁은 동굴 안에서는 절대 그들을 막을 수 없다.
잠시 후에 일행이 모두 모였다. 에드가 장비를 받아서 착용하는 사이에 병사들의 소란이 전해지는 것을 듣고 에스터가 빠르게 말했다.
“따라오세요.”
에스터가 앞장섰고, 그 뒤를 캄벨이 젝스를 짊어진 채 따라붙었다. 그 뒤를 일행들이 따르기 시작했다.
네프사엘은 분명 대악마고, 그녀가 얼마나 강할지 알고 있었지만 질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변수가 있다면 드레드.
그가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면 상급 악마를 잔뜩 보유했던 라그록스보다 쉽게 잡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에드의 일행은 강해졌다.
특히나 라그록스를 잡으면서 일행의 실력이 크게 올랐으니 어려운 일은 없을 거라 여겼다.
그렇게 에스터의 안내를 받아 달려가던 에드는 앞으로 튀어 나가며 에스터를 안고 바닥을 굴렀다.
에드는 어둠 속에서 날아와 벽에 박힌 것을 흘끔 바라보았다. 그것은 붉은색의 길쭉한 손톱이었다. 길이만 30cm에 달해 보이는 손톱.
에드의 심안 끝자락에 손톱이 잡힌 순간 몸을 움직였음에도 에스터를 구하는 것이 아슬아슬했다. 그만큼 빨랐던 손톱이었다.
어느새 다가온 아린이 방패로 앞을 가렸다. 에드가 아린의 뒤에서 일어나며 캄벨에게 눈짓했다. 캄벨이 에스터의 앞을 막아서는 사이에 동굴에 일행들이 줄지어 섰다.
그때 일행이 가지고 있던 횃불이 일시에 꺼졌다. 아린은 그걸 보고는 곧장 신성력을 일으켰다.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성력이 주위를 밝혔다.
아린의 신성력이 밝히지 않은 어둠 속에서 불쑥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고혹적인 외무에 붉은 손톱이 인상적인 여인은 몸매가 여실히 드러나는 드레스를 입은 여인은 어둠 속에 선 채로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기다리고 있···.”
말을 건네던 여인은 자신의 미간을 향해 날아온 화살을 잡고는 송곳니를 드러냈다.
“···었다. 악마 사냥···.”
콰앙!
그녀가 쥐고 있던 화살이 폭발하며 그녀의 말을 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