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
합류
라야는 환한 미소를 짓더니 아린을 꼭 끌어안았다.
“수고했다. 우리 막내 대단해! 정말 대단해!”
아린이 난처한 얼굴로 라야의 품에 안겨 있을 때 뒤에 있던 웨인이 한마디 했다.
“대단하죠. 라야 선배보다 훨씬 강해 보이는데요?”
라야가 그 말에 웨인을 흘겨보며 말했다.
“그걸 꼭 말로 해야 하냐? 이런 말 하기는 그렇지만 마스터 팔라딘도 안 될 것 같은데?”
그 말에 웨인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인정. 퇴마행을 나선 지 얼마나 됐다고 저리 강해졌는지. 이럴 줄 알았으면 퇴마행을 따라갈 걸 그랬나 보네.”
“따라가긴 뭘 따라가? 그때도 바빴던 것 잊었어?”
“말이 그렇다는 거죠.”
라야가 인상을 찌푸린 채 돌아볼 때 뒤에 서 있던 에드가 물었다.
“라야 경. 앞으로 어떻게 하실 겁니까?”
라야는 그 말에 아린의 포옹을 풀고 그 어깨에 팔을 두른 채 말했다.
“막내가 도와줘서 내가 담당하던 사건이 해결된 데다가 좋은 정보를 얻었으니 우선은 총본회에 연락해서 다음 명령을 기다려야죠.”
라야와 웨인의 실력은 모르겠지만, 시트라 교단의 성기사들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하긴 트라비아 왕국은 대륙의 중심이면서 또한 악마가 넘쳐나는 곳.
다른 왕국에서 마물을 보듯이 트라비아 왕국은 악마를 만나다 보니 그들의 능력이 뛰어남은 당연하였다.
그런 이들의 도움을 받을까 했는데 총본회의 생각은 어떨지 모르겠다.
에드는 아쉬움을 뒤로 해야만 했다.
라야는 아린의 뺨에 얼굴을 비비며 말했다.
“막내야. 총본회에 연락하고 네 얘기도 해줄게. 이번에 네가 세운 공이 크다.”
아린은 라야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며 답했다.
“일단 총본회의 대답이 돌아올 때까지는 저희도 이곳에 머물게요.”
“그래. 그래야지.”
환한 미소를 지은 라야가 아린의 목에 팔을 두른 채 말했다.
“총본회에 보고할 때 같이 가자. 교황 성하도 궁금해 하실 테니까.”
아린은 라야를 충분히 뿌리칠 수 있음에도 그녀를 뿌리치지 못하고 끌려갔다. 그 모습을 보고 에드는 라야가 아린에게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있었다.
웨인은 끌려가는 아린과 끌고 가는 라야를 바라보다가 에드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그 뒤를 따라갔다.
에드는 그들이 멀어지는 것을 보고는 일행에게 돌아갔다. 아마도 아린은 오늘 밤 못 돌아올 수도 있으니까.
디에고는 돌아오는 길에 닉과 퓨리를 부리느라 지쳐서 엠마의 옆에 앉아 있었고, 다른 이들은 모두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들도 이번 일에 대해서 듣고는 다들 생각에 잠겨 있었다.
에드는 그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라그록스가 이렇게까지 움직이는 것을 보면 이미 준비가 된 것 같아요. 저들의 역습도 역습이지만, 우리가 추적하는 것을 저들이 몰랐을 리는 없겠죠.”
테인이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대악마씩이나 되는 자가 혈마석을 추적하며 펼치는 퇴마행을 몰랐을 리가 없지. 지금까지 대응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네.”
이야기를 듣던 노리스도 반장한 채 말을 받았다.
“대악마는 자신만 아는 자들이라고 들었습니다. 수하들의 죽음으로 그자는 시간을 번 걸 겁니다. 그리고 그 시간을 벌어서 괴물들을 만든 것으로 보입니다.”
덱스는 그 말에 검과 도를 뽑아 들고는 부딪쳤다.
“몸이 근질근질한데 싸울만한 놈들이 있다고 하니 다행이네.”
덱스는 불만 가득한 시선으로 에드를 바라보았다. 싸움은 계속되는데 자신만 계속 빠지니 단단히 삐졌다. 자신이 왜 빠지는지 알고 있기에 더 열심히 수련하는 중이었지만, 아직 이 정도로는 부족했는지 싸움이 없었다.
싸움을 즐기고 그걸 통해 성장하는 그로서는 미칠 노릇이었다.
에드는 그 말을 듣고는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지금까지 시간을 벌었고, 라그록스는 괴물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혈마석을 쫓고 있죠. 그리고 놈도 그걸 알고 있을 겁니다.”
에드의 말을 들은 이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론멜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그럼 이번에는 함정이 기다릴 수도 있다는 건가?”
“십중팔구는 그리 생각하고 있습니다.”
테인도 그 말에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렇겠군. 이번 퇴마행에서 대악마를 만날 수도 있겠어.”
테인은 그리 말하면서 어떤 열망을 보였다. 정말이지 악마를 죽이는데 있어서는 에드만큼 진심인 이였다. 에드는 그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려 다른 일행을 바라보았다.
그때 이야기를 듣던 브란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이번에 대악마를 만난다면 나도 가겠다.”
모두의 시선이 브란트에게 향했다. 브란트가 각오 어린 눈빛을 보이는 것을 보고 에드는 고개를 내저었다.
“형님. 물러나기를 결심하는 것도 가벼운 일은 아니에요. 괜히 마음을 돌리지 마세요.”
“다들 목숨을 거는데 어찌 안 간단 말이냐?”
에드는 그에게 다가갔다. 그의 눈빛이 진심인 것을 알았지만, 에드는 그가 물러날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를 바랐다.
“형님. 형님은 우리가 돌아갈 곳이 되어주세요. 엠마를 위해서라도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브란트가 그 말에 인상을 굳혔다. 사실 지금의 브란트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브란트는 봉인을 풀고 싸우려고 했다. 하지만 에드의 말을 들으니 마음이 흔들렸다.
봉인하고 처음으로 정신을 차렸을 때가 떠올랐다. 몸은 무기력했지만, 귀를 괴롭히는 목소리도 사라졌고 처음으로 평안을 되찾았다.
봉인을 다시 푼다면 그 대악마의 목소리를 듣게 되리라. 그것이 두려움에도 용기를 냈다.
하지만 진정한 용기는 그것이 아니었다. 악마와의 싸움에 자신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물러나야 할 때 가족을 위해서 물러나야 한다는 것.
그것을 에드가 일깨워주고 있었다.
브란트는 에드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답했다.
“···그래. 네 말을 들을게.”
“힘든 결정 고마워요.”
에드는 브란트의 어깨를 두드려주고는 일행을 돌아보았다.
“제라드와 메르헨. 둘에게 연락이 닿나요?”
에드의 물음에 테인이 외눈 안경을 만지며 답했다.
“가까이 있는 것은 제라드 쪽이다. 메르헨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아.”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신비술사 헬레나의 딸인 그녀라면 큰 도움이 될 거라 여겼는데.
제라드에게는 대지 파괴자를 줬었는데 얼마나 성장했을지 궁금했다. 고작 장비 하나를 바꾼다고 강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태생이 야만 전사였다.
거친 북해를 헤집고 다니는 그들은 고난과 역경이 성장시켜준다. 꾸준히 악마를 잡아 왔다면 아린 만큼은 아니어도 이제 제법 쓸만해 졌으리라.
게다가 그의 일행들을 생각하면 기대할 만하였다.
“제라드는 용병이니 그에게 의뢰를 넣어서 만나도록 하죠.”
“좋아. 연락을 취해보지.”
라그록스가 어떤 함정을 파놓았다고 하더라도 그걸 뚫고 들어갈 생각이었다.
아조렐 시를 떠나 올라가는 중에 갈림길이 나왔을 때 일행은 잠시 멈춰섰다.
라야가 아린에게 다가와서는 울먹이며 말했다.
“막내야. 우리 이렇게 헤어져야 하는 거야?”
웨인이 뒤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선배. 부마가 움직이고 있다고 하지만 우리가 먼저 지원가야 해요.”
“알아.”
라야는 웨인을 한 번 쏘아본 후에 아린을 바라보았다.
“퇴마행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했어. 우리가 라그록스의 팔다리는 자를 수 있지만, 놈의 심장을 찌를 수 있는 것은 오직 아스트론님의 선택을 받은 너만 할 수 있는 일이야.”
아린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처럼 자신의 어깨가 무거워진 적이 있었나 싶었다. 하지만 자신 혼자가 아니었다.
에드를 비롯해 자신과 함께하는 이들이 있으니 라그록스의 심장을 찌를 준비가 됐다.
“다치지 마세요.”
라야는 그 말에 아린을 와락 끌어안고는 뺨에 얼굴을 비비며 답했다.
“당연하지. 우리 막내야말로 다치지 마.”
한참이나 아린에게 엉겨 붙던 라야가 웨인에게 끌려서 사라지자 아린이 일행을 돌아보았다.
“가죠.”
그녀의 말을 듣고 일행은 곧장 움직였다. 제라드에게 연락이 닿았기에 그들을 만나러 가는 길. 그들은 아인강을 따라 배를 타고 내려온다고 했다.
그리고 목적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닉과 퓨리를 이용한다면 하루도 걸리지 않을 거리지만, 그렇게까지 무리할 생각은 아니었다.
우선 고속 비행은 디에고의 마력을 갉아먹으니까.
그래서 그들은 마차를 타고 이동하기로 했다. 그렇게 이동한 일행이 도착한 곳은 아인 강을 끼고 있는 벨베로 시.
모든 이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마차가 벨베로 시의 성문으로 다가갈 때 성문 옆의 아인 강 위에서 큰 목소리가 들렸다.
“형!”
에드가 고개를 돌리니 그곳에 쾌속선이 한 척 있었다. 쾌속선치고는 상당한 크기를 자랑했는데 그 날렵해 보이는 모습과 주변의 배들을 지나가는 그 속도감을 보면 확실히 쾌속선인 것 같았다.
그 쾌속선의 선두에 발을 올린 채 양손을 입에 모으고 소리치고 있는 야만 전사가 있었다.
“에드 형!”
크게 외치는 소리에 에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쾌속선은 빠르게 강변으로 붙었고, 10미터가 넘게 남았을 때 쾌속선의 선두를 박차고 제라드가 몸을 날렸다.
에드는 강변에 뛰어내린 제라드가 달려오는 모습을 보고 그의 실력이 놀라울 정도로 늘었음을 알았다. 덱스에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는다.
성유물로 도배를 해서 끌어올린 덱스에 비하면 장비가 부실함에도 그에 버금가는 실력을 지녔다는 것은 그만큼 육체가 성장했다는 뜻이었다.
저 상태에서 장비만 조금 추가해주면 능력의 상승폭이 더 커질 수 있다.
아스트론 교단의 보물 창고도 한 번 털러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지금 당장 쓸만한 것들은 유물만으로도 신체 능력을 끌어올릴 수 있다.
돈으로 끌어올리면 덱스의 육체 능력은 가뿐히 뛰어넘을 수 있으리라.
이것이야말로 주인공급의 피지컬이다.
힘차게 달려오는 제라드를 보고 에드가 다크에서 내렸다. 가만뒀다가는 다크가 발로 걷어 차버릴 수도 있었으니까.
“으하하하! 오랜만이야!”
제라드가 와락 끌어안으려고 하기에 발을 들어 그의 가슴에 가져다 댔다. 제라드의 손이 허공에서 허우적거렸지만, 녀석은 그런 것에 개의치 않았다.
제라드는 허리에 손을 올리고는 에드를 내려다보았다.
“그래서 상급 악마를 잡으러 간다고?”
에드는 그런 제라드의 가슴을 툭툭 두드려주며 답했다.
“상급 악마로 추정되는 괴물을 상대해줘야겠어.”
“응? 형은?”
“우리는 대악마를 잡을 거야.”
그 말에 제라드가 에드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씨익 웃더니 등에 차고 있던 대지 파괴자를 휘둘렀다. 그 움직임이 덩치에 맞지 않게 경쾌했는데 에드는 이미 그 공격을 피한 후였다.
후웅!
대지 파괴자의 특수 능력이 아님에도 그가 휘두른 일격의 궤도를 따라 날아든 풍압에 대로 뒤편의 나무가 베어져 쓰러졌다. 그 모습을 보고 일행 모두 눈빛이 변했지만, 제라드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어느새 그의 미간, 인중, 가슴, 양쪽 관자놀이와 명치, 배꼽 아래에 일곱 자루 비도가 떠 있었다. 언제 어떻게 뽑아내는지 보지도 못했는데 비도의 날카로운 예기가 겨누고 있었다.
제라드는 그걸 바라보다가 대지 파괴자를 회수하고는 양손을 들었다.
“흐흐. 역시 아직은 형 자리를 못 노리겠네.”
에드는 칠채비도를 거두고는 제라드의 가슴을 주먹으로 툭 쳤다.
“아직 멀었어.”
에드는 제라드의 옆에 서서 다가오는 쾌속선을 바라보았다. 대형 쾌속선의 갑판에서 손을 흔드는 시르케와 그녀 곁에 선 하멜, 그리고 말없이 서 있는 포드가 눈에 들어왔다.
“저 배는 뭐야?”
제라드가 턱을 살짝 들고는 말했다.
“내 배야. 매드 몽키 호. 우리가 활동하는 구역이 아인 강이라서 무리해서 장만한 배지.”
에드는 제라드를 바라보았다. 하긴 바다 사나이인 야만 전사들에게는 자신의 배를 갖고 싶다는 꿈이 있다고 들었다. 그 꿈을 이런 곳에서 이룰 줄은 몰랐지만.
에드는 그런 제라드의 등을 팡 소리가 나게 치고는 말했다.
“좋아. 그럼 이번 악마 사냥 함께 하자.”
제라드가 환하게 웃었다.
“기대해. 시원찮으면 대악마도 내가 잡아버릴 테니까.”
제라드의 패기가 마음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