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
성녀
성녀 리베라는 왕도 내에서 자신의 ‘눈’이 닿지 않는 곳은 왕궁뿐이라고 알고 있었다. 대신 왕궁에는 교황 밀로토가 깔아놓은 귀가 있으니 자신이 못 보아도 상관없다고 여겼다.
그리고 자신의 눈은 지하수로에도 쫙 깔려있었다. 그런데도 쌍룡사의 호법승과 악마 사냥꾼 에드는 지하수로에서 상급 악마를 잡았다고 했다.
있을 수 없는 일.
만약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자신의 눈에 문제가 생겼다는 얘기다.
교황 밀로토는 쌍룡사의 호법승과 악마사냥꾼 에드가 라르스에게 넘어가 거짓말을 하는 거라고 일축했지만, 그냥 마음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적어도 왕도 내에서 그녀의 눈은 절대적으로 악마를 찾는데 특화되어 있었으니까.
그런 그녀가 놓치는 악마가 있다?
성녀로서의 자격에 문제가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녀는 다른 이들 모르게 총본회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에드 일행이 머무는 호텔을 찾아왔다.
그곳으로 가는 중에도 몇 번이나 고민했다. 자신이 가도 되는 걸까?
하지만 용기를 내보았다.
그렇게 찾아간 호텔의 앞에서 커다란 가방을 메고 지나가는 여인을 볼 수 있었다. 후드로 얼굴을 가린 채 호텔로 들어가던 중에 가방을 메고 있는 여인과 부딪쳤다.
“핫! 죄송합니다!”
여인이 먼저 사과하기에 성녀 리베라도 고개를 숙여 보였다. 목소리를 내지는 않았지만, 뜻은 전해졌다.
그리고 둘이 어깨를 나란히 한 채로 호텔로 들어갔다. 그런데 어째 가는 길이 같았는지 둘은 계속 같이 걸었다. 그리고 그들은 연회장 앞에 멈춰 설 수 있었다.
그 안에서 일행들이 모여 술잔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특히나 론멜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성녀 리베라는 조금 당황했다.
론멜에 대한 평가는 솔직히 박했다. 성기사 중에는 그 이름조차 잘 알려지지 않았을 만큼 별것 없던 이였는데 저 일행에 들고 나서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성장했다.
그가 품고 있는 신성력은 자신과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았다.
마스터 팔라딘이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조차 더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른 것으로 보였다.
총본회에서 론멜이 보여준 눈빛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그 눈빛은 짙은 실망감을 품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에 대한 실망인지 알 수 있었다. 그녀도 교황 밀로토와 마스터 팔라딘과 대화를 하다보면 종종 자신이 성녀가 아니라 그저 악마를 찾기 위한 눈으로 뽑힌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으니까.
그렇게 조금씩 실망해왔던 그녀는 론멜의 눈빛을 본 순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과 같은 눈빛이었으니까.
그래서 저렇게 밝게 웃으며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그는 지금 저 일행에 녹아든 덕에 찬란하게 빛나 보였다.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리베라는 부러움을 느꼈다.
목숨을 걸고 악마와 싸우는 최첨단에 서 있는 성기사가 저리도 행복한 미소를 지은 채 저들과 함께 웃고 떠드는 장면 자체가 부러웠다.
시트라 교단의 총본회에 실망한 눈빛의 그가 지금은 너무나 행복해 보이는 모습을 보이니 부러움을 넘어 질투마저 날 지경이다.
자신은 총본회에 갇혀 그저 그들의 눈이 될 뿐인데 론멜은 마음이 맞는 이들과 함께 왕국을 질타하고 있으니.
그녀가 복잡한 심경으로 그들을 바라볼 때 앞으로 나선 것은 카산드라였다.
“같이 온 건 아니고 호텔 앞에서 만났습니다.”
카산드라의 말에 에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카산드라와의 용건이 급한 것은 아니니 호기심을 먼저 해소하기로 했다.
에드의 시선이 후드를 깊게 눌러쓴 여인을 향했다.
“시트라 교단의 성녀께서 이곳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에드의 물음에 모두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리베라는 모두의 시선을 받고는 천천히 후드를 벗어 넘겼다. 리베라의 얼굴을 확인한 론멜이 인상을 굳힌 채 주위를 돌아보았다.
“혼자 오신 겁니까?”
리베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아무리 이곳이 왕도라고 해도 홀로 다니시면 위험합니다. 성녀로서 자각이 있기는 하신 겁니까?”
론멜이 정색하고 화를 내는 모습을 보고 리베라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가 시트라 교단에 실망했다는 것을 알았는데 이렇게 다시 보니 성녀를 대하는 존경심만큼은 진짜였다.
그걸 알았기에 리베라는 미소를 지은 채 답했다.
“제 한 몸은 충분히 지킬 수 있습니다.”
에드는 그녀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았다. 성녀라고 하면 높은 신성력을 지닌 고귀한 존재지만, 어찌 된 것인지 다시 만난 리베라의 몸을 심안으로 본 결과 굉장히 단련된 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얼마나 전투 경험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지간한 기사 정도는 충분히 찜쪄먹을 만한 몸을 지니고 있었다.
론멜은 그래도 불만을 숨기지 않고 그녀를 걱정했다. 그 모습에 에드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총본회에서 그 꼴을 보고도 성녀를 아끼는 모습을 보니 과연 시트라의 성기사답다고 여겼다.
“무슨 일인지 여쭙고 싶군요.”
재차 묻자 리베라는 에드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의 뒤에 있는 이들의 불편한 시선을 받으면서도 리베라는 자신이 할 말을 숨기지 않았다.
“진짜 지하수로에서 상급 악마를 잡은 것인지 확인하고 싶어 왔습니다.”
“그건 이미 말씀드렸는데요?”
“그렇다면 그 위치라도 알려 주세오. 전투 현장에 가보고 싶어요.”
에드는 리베라가 이렇게까지 나오자 인상을 절로 굳혔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악마와의 결전 장소는 왕궁이니 그걸 꾸밀 수도 없는 상황이다.
“그걸 제가 알려드릴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
에드가 삐딱하게 답하자 그 말을 들은 론멜이 한숨을 내쉬었다. 론멜도 자세한 내용은 모른다. 그도 자고 일어나니 상급 악마의 사체만 있었으니 어디서 난 건지 모르는 상황.
하지만 에드가 저리 말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둘의 대화에 끼어들지 못했다.
리베라는 뭔가 더 말하고 싶어 보였지만, 가만히 듣고 있던 아린이 나섰다.
“미안하지만, 총본회의 뜻은 잘 알았고 저희의 뜻도 전했으니 그만 돌아가 주시죠.”
정중한 축객령에 리베라는 주먹을 꼭 쥐었다. 자신이 가진 눈이 잘못된 것이라면 성녀로서의 자격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어려서부터 오직 성녀가 되는 것만 바라보고 커왔던 그녀에게 자신의 소용이 없다는 것은 무척이나 두려운 일이었다.
뭔가 말하려고 고개를 들었던 리베라는 일행의 단단하게 굳은 얼굴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돌아서려던 리베라는 이상함을 느끼고 그들 일행을 다시 바라보았다.
소녀와 함께 앉아있던 소년과 그 옆에 앉아있는 팔에 사슬을 두른 사내.
그 둘을 본 순간 리베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녀가 입을 열기 전에 론멜이 다가왔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가시죠.”
론멜에게 이끌려 밖으로 나온 리베라가 물었다.
“어떻게 된 거죠?”
“뭘 말씀하시는 겁니까?”
“악마의 힘을 지닌 자가 둘이나 있었어요. 퇴마행을 하는 무리에 악마의 힘을 지닌 자들이 있으면 안 되잖아요.”
론멜은 리베라의 질문에 한숨을 내쉬었다. 브란트와 디에고를 총본회에 데리고 가지 않았던 것은 그들의 능력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과 함께 악마들을 때려잡았던 론멜은 그들을 믿지만, 총본회의 꼰대들은 분명 그들이 가진 악마의 힘을 트집 잡았을 테니까.
그래서 그들을 호텔에 두고 간 것이었는데 리베라가 직접 찾아올 줄은 몰랐다.
“악마의 힘으로 악마를 잡는 것이 잘못일까요?”
론멜의 질문에는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었다. 리베라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시트라 교단에서 파괴는 가장 우선되는 일이다. 그리고 그 파괴를 위해서 가진 모든 것을 동원하는 것은 교리에 어긋나지 않는 일이다.
다만 악마의 힘을 이용해 악마를 잡는다는 발상 자체를 못할 뿐이지.
물론 교리를 해석하고 설파하는 것은 교황의 밑에 있는 추기경이 관리하는 일이라 그들이 알면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기는 할 것 같았다.
리베라는 걸음을 옮기며 넌지시 말했다.
“론멜 경도 모르는 거죠?”
“솔직히 저도 잘 모르는 상황입니다.”
리베라가 뭘 물었는지 알았기에 론멜이 조심스럽게 답하자 그녀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라도 알게 되면 귀띔이라도 해줘요. 비밀은 지킬 테니.”
그저 자신의 눈을 피한 악마가 없다는 확신만 든다면 더 파고들 마음도 없었다. 그렇게 걸음을 옮기던 그들은 총본회 앞에서 사라진 성녀를 찾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던 이들을 만나서는 헤어졌다.
리베라가 론멜을 마지막까지 바라보다가 총본회로 호위를 받으며 들어가는 모습을 보니 마치 끌려가는 것만 같아 론멜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악마를 어디서 잡았는지가 왜 중요한 거야?”
악마를 죽였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론멜은 돌아서기 전에 총본회를 바라보았다.
왕궁보다도 크고 웅장하게 지은 검은색의 총본회 건물을 바라보니 지금까지는 그렇게 믿음직스럽게 했던 그 모습이 어째 단단한 감옥처럼 보였다.
고개를 휘휘 내저은 론멜은 호텔을 향해 돌아서서 달려갔다.
론멜이 리베라를 데리고 갔기에 그녀에 대한 생각은 접었다.
에드는 디에고를 데리고 카산드라와 만났다. 그녀가 만약 사령의 안장을 구해왔다면 디에고가 필요했으니까.
“구했습니까?”
카산드라가 그 물음에 긴 한숨을 내쉬고는 자신의 가방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정말 구한 건가 싶어서 바라보는데 가방에서 안장이 하나 튀어 나왔다. 말의 안장과 별로 다를 게 없어 보이는 안장이었는데 그걸 내려놓은 카산드라가 입을 열었다.
“사령에게 통하는 안장입니다.”
에드가 디에고에게 눈짓하자 디에고가 톰을 소환했다. 디에고에게 뺨을 비비는 톰을 앉으라고 한 후에 그 안장을 얹었다. 에드는 그 안장 위에 앉아 보았다.
크릉.
톰이 이를 드러냈지만, 디에고의 손짓에 곧 고개를 휘휘 내젓고 몸을 일으켰다.
에드는 톰의 움직임에 따라 몸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는 감탄했다.
“진짜로 구했군요.”
에드의 탄성에 카산드라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히 제대로 작동하는군요.”
뭔가 의심쩍은 대꾸에 에드가 바라보자 카산드라가 뺨을 긁적이며 답했다.
“사령의 안장을 구하기는 했지만, 실제로 이게 사령에게 통하는지 확인할 방법은 없었거든요.”
발이 넓은 카산드라도 사령술사를 만나보지 못했다는 얘기다. 그만큼 사령술사가 귀하다는 얘기.
에드는 그 말에 그녀에게 물었다.
“몇 개나 구한 겁니까?”
“지금 제가 당장 드릴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에요. 그것이 실제로 사령에게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하나는 분해하고 연구해서 사령의 안장들을 만들어야겠죠.”
아티펙트를 분해하고 연구해서 새로 만들 수 있다는 건가? 그만한 능력을 지닌 신비술사를 알고 있다는 이야기니 그 부분이 더 구미가 당겼다.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카산드라는 잠시 고민해보더니 답했다.
“길어도 한 달 안에는 될 것 같습니다.”
한 달 안에 사령에게 쓸 수 있는 안장을 얻을 수 있다는 말에 에드는 미소를 지었다. 이번에 마젤타 왕국을 횡단하면서 느낀 건데 새삼 이동 속도를 높일 수단이 필요했다.
앞으로 디에고는 점차 성장할 테고 더 많은 사령을 손에 얻게 될 터. 그 사령을 이용해서 일행의 이동 속도만 높여줘도 충분히 제 몫은 다하는 셈이다.
“얼마입니까?”
“주문 제작이라 단가가 크게 오를 것 같습니다. 사령의 안장은 지금 구할 수 있는 것이 단 두 개였고, 쓸 이들이 많지 않다 보니 가격은 100골드 정도입니다만 주문 제작을 할 시에는 개당 200골드 정도 들 것으로 보입니다.”
“그럼 이걸 포함해서 9개를 부탁하죠.”
카산드라는 에드가 금패 17개를 꺼내서 건네자 그중 하나를 돌려주며 답했다.
“가지고 온 사령의 안장은 그냥 드리고 나머지 8개의 주문 제작에 대해서만 돈을 받겠습니다. 아무래도 제때에 못 구해 드린 것이 죄송하니까요.”
에드는 카산드라가 영업을 참 잘한다고 여기며 금패를 받아 챙겼다. 카산드라도 금패를 챙기고는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더 필요한 것이 있나요?”
에드는 그 물음에 잠시 고민하다가 답했다.
“사령의 안장을 분해하고 재조립할 신비술사. 소개 받을 수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