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
방문
블레이크는 발끈했지만 따지지 못했다.
쌍룡사의 이름은 무겁다. 아무리 시트라 교단의 마스터 팔라딘이라고 해도 무시할 수 있는 이름이 아니었다.
쌍룡사가 세워질 때 벌였던 홍련왕의 살업을 생각한다면 더욱이 그래서는 안 된다.
그런 쌍룡사에서 호법승이 가지는 위치는 시트라 교단의 마스터 팔라딘인 자신과 비슷했다. 오히려 그 이름이 가지는 무게는 더 높다고 볼 수도 있었다.
쌍룡사는 주지조차도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밖으로 나오는 것은 오직 호법승.
그러다 보니 그들은 쌍룡사를 대표하는 이들이다. 그런 그가 저리도 당당히 말하니 무시할 수도 없었다. 블레이크가 답답한 마음에 고개를 돌리니 밀로트가 고개를 내저었다.
밀로트는 에드와 노리스를 바라보았다.
악마는 분명 왕궁에서 나타났다. 오늘 이 자리는 그 증언을 듣기 위한 자리일 뿐이었다.
저들이 상급 악마를 제물로 바치며 신의 축복을 받은 것은 짜증 나는 일이나 이미 지나간 일이니 방법이 없다. 그래서 그들을 압박하며 증언을 얻어낼 생각이었다.
교단의 눈이 닿지 않는 곳. 왕궁.
하지만 그곳에서 국왕에게 변고가 생겼음을 알아냈다. 그렇다면 이번 악마와 관련된 사건일 가능성이 컸다.
그 전말을 알아야만 했다. 가만두면 왕국 서열 2위인 라르스가 왕위에 오를 테니까.
라르스는 시트라 교단과의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다. 그가 왕위에 오르게 되면 여러모로 귀찮아질 것이 뻔했다.
그걸 미연에 방지하려고 했는데 호법승이 저렇게까지 말하니 더는 압박을 가할 수도 없었다.
다만 그 이유가 궁금할 따름이다. 호법승까지 나서서 일을 어렵게 만드는 이유가.
“더는 궁금한 것이 없으시다면 이제 치하에 대해서 얘기를 나누도록 하죠.”
에드가 말머리를 돌리자 밀로트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좋네. 악마를 잡는 최전선에서 일하는 그대들이 원하는 것이 있다면 들어주도록 하지.”
“혹시 성유물이라도 괜찮습니까?”
밀로트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지만, 그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이 있는 성유물이라면 힘들겠지만, 다른 성유물이라면 대여는 가능하겠지.”
어차피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았다. 칠채비도도 얻었고 빙결의 활도 이제는 아스트론의 활이라고 부를 정도로 신성력을 품었으니까.
“아큘라의 반지를 얻고 싶습니다.”
밀로토는 그 말에 눈썹을 꿈틀거렸다. 아큘라의 반지는 교단의 3대 보물 중 하나다. 초대 교황의 물건이기도 했고.
그런 물건을 얻고 싶다고 하다니?
“그게 어떤 물건인지 알고 하는 말인가?”
옆에서 소리치는 블레이크였지만, 에드는 어깨를 으쓱였다.
“악마와 싸우는데 필요해서일 뿐 다른 뜻은 없습니다.”
에드의 시선이 밀로토를 향했다.
“아니면 지옥의 문을 닫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모르고 계신 겁니까? 그걸 안다면 그 가치를 논할 문제가 아닐 텐데요.”
지옥의 문에 대해서는 교단의 총본회에서 모를 리가 없었다. 대악마가 튀어나오기라도 한다면 그때는 뒷감당할 수 없을 일. 그렇게 됐다면 군대와 시트라 교단이 총력을 기울여도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런 일을 일행이 별다른 피해 없이 막았다. 성유물을 다 내놓으라고 해도 할 말이 없을 판인데 고작 반지 하나를 가지고 이렇게 나온다면 곤란했다.
에드의 대꾸에 밀로토는 웃는 낯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에드가 혼자 와서 저런 말을 지껄인다면 가만두지 않았을 일이다. 하지만 저 일행에는 아스트론의 성기사는 물론이고 쌍룡사의 호법승도 있었다.
그런 이들을 앞에 두고 무력으로 해결할 수는 없었다.
“아큘라의 반지는 초대 교황이 끼신 반지이자 교단 3대 보물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네.”
에드는 그 말에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기에 필요한 겁니다.”
밀로토는 가만히 에드를 바라보다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그런 만큼 아큘라의 반지는 대여해주도록 하겠네. 그리고 론멜 경에게 회수의 책임을 맡기도록 하지.”
마지막 말은 론멜을 향했던 말. 론멜은 밀로토의 말에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리하겠습니다.”
밀로토는 일행을 돌아보며 말했다.
“론멜 경은 마스터 팔라딘을 따라서 보물고로 가서 아큘라의 반지를 가지고 오도록 하게.”
“예.”
밀로토는 더 말할 것이 없다는 듯 돌아서며 말했다.
“그대들의 앞길에 시트라의 축복이 전해지길 기도하지.”
그 말을 끝으로 밀로토는 뒤돌아 그곳을 떠났다. 그의 뒤에 서 있던 추기경이 떠나고 성녀마저 떠나자 블레이크가 단에서 내려왔다.
“론멜 경은 따라오게.”
론멜만 데리고 나가는 모습을 보고 에드는 어이가 없었다. 이 일행이 어디 가서 이런 찬밥 대접을 받을 이들이 아니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가지고 있는 명성만 생각해도.
일행을 호위하던 성기사들이 다가왔다. 아린은 그들을 가만히 쏘아보았고, 테인은 뒷짐을 진 채로 그들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듣던 것과는 아주 다르군. 초대하고 차 한 잔 대접해주지 않는 것을 보면 말이야.”
테인의 말에도 성기사들은 일언반구 없이 뒤돌아 그들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그런 그들의 뒤를 따르는 테인의 뒤로 따라붙으며 에드가 그의 기분을 풀어주기로 했다.
덱스가 있었다면 그가 풀어주었을 테지만 지금 당장 그는 호텔에 있었으니까.
“차는 즐기지도 않으시잖아요. 술이라면 모를까.”
“크흐흐. 그건 그렇지. 그래도 어제 요정의 눈물은 맛이 좋았더랬지.”
“돌아가면 제가 사드릴게요.”
테인은 그 말에 활짝 웃었다.
“돈이 넉넉하니 자네의 씀씀이도 커지는군. 좋아. 아주 좋아.”
요정의 눈물은 한 병에 10골드짜리. 눈이 튀어나오게 비싼 술이었지만, 돈이 넉넉하니 그거 몇 병 마신다고 문제될 것은 없엇다.
원래 게임도 처음에는 한푼한푼에 손을 벌벌 떨지만, 나중에 가면 비싼 돈 팍팍 쓰면서 즐기는 법이니까.
게다가 요정의 눈물은 비싼 가격도 비싼 가격이지만, 에드도 마실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그거 한 병을 혼자서 다 마시면 마력이 1이 오르니까.
실제로 요정들을 잡아다가 학대하면서 그 눈물을 모아서 만든 술이라고 하는데 그 자세한 내막까지는 몰라도 어제 회식에서 마력이 2가 오른 것을 보면 기회가 될 때 마셔두는 것이 좋았다.
에드는 옆에서 걷는 아린의 굳은 표정을 보고는 말을 건넸다.
“어차피 이제 곧 떠날 건데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아린은 에드가 건넨 말에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스트론의 예언에 따라 퇴마행을 하는 만큼 그녀의 어깨에는 아스트론의 이름이 걸려 있었다.
그러다 보니 무시를 당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또 에드의 말을 듣고 보니 굳이 인간들과 투닥거릴 필요가 있나 싶었다.
“알겠어요.”
짧은 한숨으로 기분을 털어낸 아린은 군말하지 않고 앞장서 걸어가는 성기사들을 바라보았다. 마젤타 왕국의 국교인 시트라 교단이다 보니 그 무력의 정점인 성기사들과 아스트론 교단의 성기사들을 비교해보게 됐다.
그리고 이들보다 아스트론의 성기사들의 수준이 더 높다는 것을 깨달은 아린은 속으로 작은 희열을 느끼며 걸음을 가벼이 했다.
에드는 아린의 기분이 좋아진 것을 보고는 노리스를 돌아보았다. 노리스는 에드와 눈이 마주치자 반장 한 채 살짝 고개만 숙여 보였다.
순간적으로 말을 맞춰준 덕분에 교황 밀로토도 더는 따지지 못하고 풀어준 상황.
에드는 노리스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악마와 싸우는데 진심인 그는 여러모로 자신과 잘 맞는 것 같았다.
호텔로 돌아온 일행에게 덱스는 신나서 이것저것 물었다가 테인의 대답을 듣고는 불같이 화를 냈다. 당장 뛰쳐나가 칼부림을 내겠다던 덱스는 에드가 요정의 눈물을 산다는 말에 얼른 자리에 가서 앉았다.
“아오! 내가 에드 때문에 참는다!”
에드는 미소를 지은 채 그런 덱스의 잔에 요정의 눈물을 따라주었다.
“어제 많이 마시던데 뭐 달라진 점 없습니까?”
“달라진 점? 숙취가 없다는 것 말고는 모르겠는데?”
에드는 장비로 마력을 많이 높여 놓았기에 괜찮았지만, 덱스는 마력과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 그런 그에게는 마력 1이 오르는 것은 분명 유의미한 결과일 텐데.
이런 싸움 천재가 그걸 못 느낀 건지 아니면 자신에게만 통용되는 것인지 몰랐기에 오늘도 많이 먹여보기로 했다.
브란트는 에드가 술판을 다시 벌이자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송별회를 이틀 연속 여는 건가?”
에드는 그 물음에 웃음을 터트리고는 말했다.
“형님. 그보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뭔가?”
“다음 목적지가 트라비아 왕국이라는데 그곳으로 돌아가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트라비아 왕국?”
그곳에서는 여러모로 도움을 받을 곳이 많았다. 아칼란도 지금 한창 개혁 중일 테니 그에게 신경을 쓸 이는 없으리라.
브란트는 잠시 고민하다가 일행을 돌아보았다. 이들과 함께하면서 많은 것을 얻었다. 무엇보다 이들과 함께한 덕분에 자신은 엠마를 되찾았으니까.
“그런데 난 이제 쓸모가 없는데?”
에드가 그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무슨 소리 하시는 겁니까? 덱스 말대로 형님이 트라비아 왕국의 왕도에서 호텔을 하면 오다가다 신세 질 수 있으니 하는 말이죠. 아무래도 저희 활동 무대가 트라비아 왕국이기도 하니까요.”
사실 브란트도 마젤타 왕국 시무스에 남는 것은 고민하는 중이었다. 이곳에는 연고가 없었으니.
그런 와중에 에드의 말을 들으니 혹했다.
“엠마에게 물어보도록 하지.”
“전 좋아요!”
엠마가 듣고 있다가 불쑥 손을 들고 소리쳤다. 디에고도 환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보고 브란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돌아가는 길에 신세 지도록 하지.”
“그럼 오늘은 환영회로 하고 한잔하죠.”
다들 웃으며 잔을 비웠다. 잔을 내려놓을 때 입구로 들어온 론멜이 버럭 소리쳤다.
“날 빼고 이러기 있어?”
에드는 론멜이 온 것을 보고는 물었다.
“론멜 경. 가지고 왔습니까?”
론멜은 그 말에 품에 손을 넣고 조심조심 옥함을 꺼냈다. 옥으로 만든 함을 열자 그 안에 든 반지가 눈에 들어왔다. 어딘가 투박해 보이는 반지에는 시트라의 증표가 양각되어 있었다.
론멜이 반지를 내보이며 말했다.
“이게 바로 아큘라의 반지다.”
에드는 아큘라의 반지를 바라보다가 브란트에게 말했다.
“형님 생각해서 가져왔는데 어떻게 하실래요?”
브란트는 그 말에 인상을 굳혔다. 잠깐 고민하던 브란트는 만약을 대비하기로 했다.
봉인했다고 하지만 그게 풀려날 경우를 대비해서 아큘라의 반지까지 껴보기로.
브란트가 반지를 집어 들어 끼고는 잠깐 미간을 미미하게 찌푸렸다. 아무래도 봉인기들은 몸에 무리가 간다고 하더니 그것 때문이었나 보다.
그렇게 인상을 찌푸리던 브란트가 주먹을 쥐어 보았다. 아큘라의 반지를 낀 브란트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거 마력이 상당히 늘어나는군.”
악마의 힘을 봉인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마력까지 올려준다면 확실히 시트라 교단의 3대 보물이라고 할만했다.
론멜이 옆에 있는 술병의 술을 잔에 따르며 말했다.
“이제 공식적으로 나도 일행이 되어야겠군.”
“무슨 소립니까?”
“교단에서 저 반지의 회수 책임을 물었으니까.”
지금까지는 론멜이 그냥 도왔던 것이라면 저 반지를 대여해 주고 회수를 맡기면서 공식적으로 일행에 들어올 자격이 되었다는 말이다.
에드는 밀로토 교황의 속내를 읽을 수 있었다.
이렇게 론멜을 일행에 끼워 넣고 생색을 내려는 것이겠지. 아마도 대악마를 사냥하게 된다면 그 업적을 시트라 교단에서는 아마 잘 포장해서 이용할 것 같았다.
하지만 에드도 손해만 보는 것은 아니었다.
론멜은 확실히 처음 만났을 때와는 비교도 하지 못할 만큼 강해졌으니까. 브란트도 빠지는 마당에 그를 놓칠 수는 없었다.
모두 요정의 눈물을 잔에 다시 따르고 마시려고 할 때 호텔의 연회장으로 들어오는 이들이 있었다. 에드는 무심코 고개를 돌리다가 어울리지 않는 한쌍의 여인을 보았다.
심안을 켜고 있었기에 그 둘을 모두 알아볼 수 있었다.
“둘이 어떻게 함께 오는 겁니까?”
보부상 카산드라와 시트라 교단의 성녀가 함께 들어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