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
진심
에드는 일단 상대를 살폈다. 라르스를 닮은 사내.
마젤타 왕국의 국왕이라면 칭왕했던 펠만 국왕과는 급이 다른 진짜 왕이다.
마젤타 왕국 서열 1위. 국왕 라쉬드 폰 시무스 마젤타.
그가 틀림없었다.
에드는 그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뒤에 선 악마가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지만, 일국의 왕이나 되는 자가 비밀 공간에 악마를 숨겨두고 밀회라도 나누고 있었다는 얘기가 아닌가?
악마에게 홀린 눈.
상급 악마나 되는 자였기에 적당한 수준으로 국왕을 홀린 것이 분명했다. 조금만 더 홀렸다면 분명 어떤 식으로든 표가 났을 터.
아주 조금씩 세뇌를 진행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지금도 노리스가 무식하게 회랑의 바닥을 부수고 내려오지 않았다면 저만큼이나 홀린 눈빛을 보일 리가 없었다.
상급 악마는 자신을 찾아왔을 때 확실하게 상대를 홀리고 암시를 거는 정도로 풀어줬으리라.
현장을 발견하지 않았다면 몰랐을 일.
그래도 암시 정도라면 신성 주문으로 어떻게든 회복시킬 수 있다. 에드의 시선이 노리스를 향했다.
“악마는 제가 맡죠.”
노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드의 말만으로 서로 뜻이 통했다는 뜻.
에드가 먼저 달려들자 라쉬드가 검을 뽑아 들었다.
마젤타 왕국 자체가 군부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그런 마젤타 왕국의 국왕이라 그런지 검을 뽑는 기세가 남달랐다. 하지만 에드는 신경 쓰지 않고 그를 향해 화살을 날렸다.
라쉬드가 본능적으로 검을 휘둘렀지만, 그의 검을 모조리 피한 화살이 뒤편의 악마를 향해 날아갔다. 라쉬드 국왕의 뒤에 있던 악마는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화살을 보고는 손을 휘둘렀다. 그 손길조차 교태를 부리는 것 같으니 요물이라고 할만했다.
안이 비치는 특이한 재질의 옷을 입고 있던 여인의 손짓과 함께 바닥에서 그녀의 그림자가 솟구쳤다. 그림자가 일어나 화살들을 막았다.
쩌저정!
그림자가 얼어붙으며 깨져나간다. 그사이 에드는 라쉬드 국왕의 머리를 뛰어넘었다.
라쉬드 국왕의 고개가 에드의 움직임을 따라 올라갔을 때 그의 명치로 봉이 꽂혔다.
“꺼헉!”
노리스가 내지른 찌르기에 명치를 맞은 라쉬드 국왕이 뱃속의 것을 게워내며 쓰러졌다. 노리스는 쓰러지는 국왕을 받아들고는 에드를 바라보았다.
노리스는 에드의 실력을 직접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승산을 점칠 수 없는 상대는 자신의 선배이자 함께 호법승이 된 이를 제외하고는 처음 보았다. 스승조차 넘어선 자신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강자.
그는 어떤 싸움을 할까?
그것이 궁금했기에 라쉬드 국왕을 제압하고 살펴보았다.
상대는 쌍룡사를 나오고 처음 보는 강자인 악마였다. 갈수록 강한 악마들을 만난다고 들었지만, 지금까지 싸운 자와는 격이 다른 존재.
그림자를 이용해 싸우는 특이한 악마였다.
자신이라면 저 악마를 어떻게 상대할까 고민하면서 에드가 싸우는 방법을 지켜보기로 했다.
에드는 라쉬드 국왕을 지나쳐 기이하게 휘어 들어가는 화살을 쏘아내더니 높이 도약했다. 국왕을 가뿐히 뛰어넘은 에드는 허공에서 연달아 화살을 쏘아냈다.
그 화살을 쏘아내는 움직임이 놀라울 정도로 빨랐다. 허공에서 일곱 발의 화살을 쏘아내는 궁수에 대해서는 들은 적도 없었으니까.
그러나 악마도 만만치 않았다.
그림자는 마력으로 만든 것인지 그녀의 가벼운 손길을 따라 일어나서 일곱 발의 화살을 막는 벽이 되어 그녀를 지켰다. 그때 에드의 품에서 비도들이 튀어나왔다.
여섯 자루의 비도가 튀어나온 순간 여인이 손짓했고, 그림자가 창날처럼 에드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에드는 날아드는 그림자를 보고는 비도를 박차고 재차 도약해 천장을 밟고 머리가 아래로 향한 채 활의 시위를 당겼다.
에드가 든 활에서 새하얀 빛을 내뿜었다.
그 빛에 여인은 인상을 찌푸린 채 뒤로 훌쩍 물러나며 그림자를 일으켰다. 그때 에드의 품에서 튀어나왔던 여섯 개의 비도가 그림자의 벽을 돌아서 여인을 향해 날아갔다.
그 비도들은 은밀하면서도 빨랐다.
게다가 여섯 개의 비도가 동시에 다른 방향으로 날아가는 기예는 바라보던 노리스도 어떻게 저걸 피해야 하는지 고민이 들 정도였다.
여인이 만들어놓은 그림자의 벽을 우회해서 날아든 여섯 개의 비도에 여인은 다급하게 몸을 틀어서 피해 보았지만, 전부 피할 수는 없었다.
두 개의 비도에 맞았다고 여겼는데 피가 뿜어져 나오는 곳은 세 곳이었다. 어떻게 된 것인지 확인하기도 전에 에드가 그림자의 벽을 뛰어넘으며 화살을 날려 보냈다.
원래라면 충분히 여인이 막거나 피할 수 있을 법했는데 비도에 맞은 부위에 문제가 생겼다.
여인의 움직임이 전처럼 민활하지 못하고 느려진 것이 느껴졌다. 크게 차이 나지는 않지만, 그것만으로도 화살을 피할 방법은 없었다.
한줄기 새하얀 빛줄기를 그리며 날아간 화살에 여인은 손을 들어 막았다. 그녀의 손 위로 그림자가 구체로 뭉쳐서 화살을 막았다.
화살이 구체에 박힌 순간 주변으로 무시무시한 냉기가 퍼져 나왔다. 구체를 넘어서 여인의 팔마저 얼려버린 냉기.
통째로 얼어버린 팔을 여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을 때 그녀를 노렸던 여섯 개의 비도가 모조리 에드에게 돌아갔다. 에드의 몸으로 돌아온 비도가 다시 몸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보니 노리스도 감탄했다.
그리고 에드의 공격은 끝나지 않았다. 에드는 그 화살을 날리고 곧바로 두 발의 화살을 더 시위에 걸고 있었다.
하늘빛 기운을 품은 화살과 검은 기운의 화살.
지금까지 날린 화살과는 다른 화살이라는 것을 멀리서도 느낄 수 있는 화살이었다.
두 발의 화살을 본 순간 여인도 최후의 발악을 시작했다. 여인의 눈에서 붉은 광채가 쏟아져 나오며 야명석이 깜빡인다 싶더니 주변이 모두 검게 변했다. 사방이 어둠에 싸인 순간 그림자를 다루는 여인의 힘은 극대화된다.
온 사방을 그림자로 뒤덮은 여인의 그림자에서 수를 헤아리기 힘든 수많은 가시가 에드를 향해 날아들었다.
노리스가 돕기 위해 몸을 날리려고 할 때 두 발의 화살이 시위를 떠났다.
두 발의 화살은 가시들을 곡예 비행을 하듯 피하며 두 줄기 선을 그렸고, 에드는 몸을 뒤집으며 품에서 비도를 꺼내 휘둘렀다.
쩌저저저적.
에드를 향해 날아들던 가시들이 모조리 돌이 되어 후두둑 떨어졌을 때 여인의 몸에는 두 발의 화살이 꽂혔다.
“꺄아아악!”
여인이 비명을 지르는 것을 보니 승부는 끝났다.
노리스는 자신과 여인의 상성을 떠올려 보았다. 근접 전투를 선호하는 그에게 있어 여인은 상대하기 까다로웠다.
그렇게 끝났다고 여겼을 때 여인이 몸에 화살이 박힌 채로 노리스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노리스가 봉을 들어 앞을 가렸을 때 여인의 관자놀이에 비도가 날아가 박혔다.
머리가 돌로 변하고 있었지만, 여인은 웃고 있었다.
노리스는 불길한 기분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가 부리던 그림자가 꾸역꾸역 기절시켰던 라쉬드 국왕의 몸으로 기어들어가고 있었다. 노리스가 그걸 보고 다급하게 주먹을 내질렀다.
콰앙!
상대가 누구든 악마의 기운이 몸에 들어갔다. 더늦기 전에 제압해야 했다.
내지른 주먹에 맞고 날아간 라쉬드 국왕이 저 멀리 날아가 처박혔다. 하지만 상대는 비척거리며 일어났다.
노리스는 자신의 주먹을 내려다보았다. 상대를 죽이지 않고 제압하고자 했지만, 이 정도 일격이라면 바위도 부술 수 있을 정도였다.
악마의 힘을 품었다고 해도 맞고 바로 일어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노리스가 한숨을 내쉬고 봉을 쥔 채 주문을 외웠다. 노리스가 쥐고 있는 봉 위로 붉은빛을 뿜어내는 문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노리스는 붉게 빛나는 봉을 쥔 채 라쉬드 국왕을 바라보았다. 그가 악마의 힘에 당한 것은 자신의 잘못이었다.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서 노리스가 나서려고 할 때 위에서 뛰어내리는 이들이 있었다.
악마를 잡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지하에 내려오고 나서 순식간에 승부가 났으니까.
그런데 그 짧은 시간에 달려온 이들이다.
그들의 복장을 본 노리스는 이해할 수 있었다. 에드에게 집중하느라 주변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기에 저들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지 못했나 보다.
국왕의 수호 기사들이었다.
핏빛 갑옷을 입은 수호 기사들은 바닥에 내려서기 무섭게 상황을 살피는가 싶더니 한 명이 검을 들고 노리스의 앞을 막아섰다.
“전하!”
한 명이 앞을 막고 한 명이 물러나 라쉬드 국왕을 살폈다. 야명석이 밝혀주는 지하 비밀 공간에서 라쉬드 국왕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피하시오!”
노리스가 다급하게 외쳤지만, 오히려 그것이 화근이 되었다. 고개를 돌린 수호 기사의 뒤에서 고개를 든 라쉬드 국왕이 붉게 변한 눈으로 수호 기사의 가슴을 검으로 뚫었다.
“끄헉!”
심장을 뚫고 나온 검에 수호 기사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자신의 가슴을 뚫고 나온 검을 보고 고개를 돌리던 수호 기사의 가슴을 베고 올라온 검이 그대로 수호 기사의 머리를 잘라냈다.
그렇게 쏟아지는 핏물을 맞는 라쉬드 국왕을 보고 노리스를 막아섰던 수호 기사가 뒤돌아 라쉬드 국왕을 향해 검을 들어 올렸다.
“감히 짐에게 검을 겨누는가?”
그 말에 수호 기사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검을 반쯤 내렸다. 그리고 그걸 기다렸다는 듯 라쉬드 국왕이 땅을 박차고 튀어나왔다.
처음 그가 보여주었던 움직임과는 확연히 달라진 움직임이었다. 그렇게 달려든 라쉬드 국왕의 검을 수호 기사는 순간 망설였다.
상대는 자신이 충성을 맹세했던 국왕이었다. 그런 국왕에게 검을 겨눠도 되는 건가?
그런 생각이 머리에 스쳐 지나가는 순간 뒤에서 불쑥 끼어든 붉은빛의 봉이 라쉬드 국왕의 검을 막았다.
쩌엉!
그 충격에 놀란 것인지 라쉬드 국왕이 눈을 붉게 물들인 채 살기 가득한 검을 휘두른 것에 놀란 것인지 수호 기사는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정신 차리시오. 국왕 전하는 악마에 홀렸으니.”
노리스가 봉을 힘껏 떨쳐내자 라쉬드 국왕이 훌쩍 뒤로 물러났다. 뒤로 물러났던 라쉬드 국왕이 바닥에 내려서더니 노리스를 바라보았다.
“쌍룡사의 호법승인가? 짐에게 봉을 겨눈 것이 쌍룡사의 뜻인가?”
노리스도 그 모습에는 잠시 주저했다. 상대가 기억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면 쌍룡사에 피해가 갈 수도 있다. 물론 아무리 마젤타 왕국의 국왕이라고 해도 쌍룡사에 직접적인 피해를 줄 수는 없다.
쌍룡사가 마젤타 왕국 내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곳은 아무나 건드릴 수 없는 성역이니까.
하지만 쌍룡사를 괴롭히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것을 알았기에 노리스가 주저할 때 뒤에서 화살이 날아들었다.
노리스는 자신을 노린 것이 아니었기에 가만히 서 있었고 그렇게 날아든 화살이 라쉬드 국왕을 노렸다. 라쉬드 국왕은 검을 휘둘러 화살을 쳐냈다.
악마의 힘을 받아들이기 전에는 반응도 못 했던 화살이었는데 지금은 막아냈다. 라쉬드 국왕은 서늘한 미소를 지은 채 에드를 향해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감히 짐에게 화살을 겨···.”
라쉬드 국왕은 말을 잇지 못하고 다급하게 검을 휘둘렀다.
카카카캉!
네 발의 화살까지는 어떻게 막아냈지만, 뒤를 이어 날아온 화살은 막아내지 못했다. 라쉬드 국왕의 미간과 가슴, 명치에 화살이 박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