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
왕궁으로
라르스의 등장에 송별회를 더는 진행할 수 없었다.
“뭔가 축하할 일이라도 있나?”
“송별회 중이었습니다.”
론멜이 대답하자 그제야 라르스가 그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랬나?”
시트라 교단의 성기사라면 마젤타 왕국 내에서 이런 대접을 받을 것이 아니었지만 라르스는 그러는 것이 너무나 당연해 보였다.
태생이 왕족이라 그런지 몰라도 태도 자체가 달랐다.
사실 악마랑 연관도 없어 보이고 왕국 서열 2위인 라르스와 척을 질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생사를 함께한 론멜이 개무시 당하는 것 같자 에드는 배알이 꼬이는 느낌이다.
에드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보았는지 라르스 뒤에 있던 수호 기사의 눈에서 불길이 일어났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에드의 분위기가 바뀐 것을 알았는지 일행의 분위기 자체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러자 오히려 론멜이 당황하는 것이 눈에 들어왔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라르스도 그걸 읽었는지 일행을 훑어보다가 에드에게서 시선이 멈췄다.
“이름이 뭔가?”
“에드입니다.”
“악마 사냥꾼이라는 에드가 자네로군. 지옥의 문을 닫느라 고생했다고 들었다.”
라르스의 대응이 의외였다. 퉁명스러운 대답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오히려 에드가 한 일을 치하했다.
라르스가 손을 들어 올리자 뒤에 있던 수호 기사가 앞으로 나오더니 테이블 위에 상자를 하나 내려놓았다. 고풍스러운 문양에 은은히 금광을 발하는 어딘가 낯이 익어 보이는 상자였지만, 기억이 정확히 나지는 않았다.
뭔가 싶어서 바라보니 라르스가 입을 열었다.
“지옥의 문에 대해서 들어보니 상당히 위험했던 일이더군. 왕국을 위험에서 구했으니 그에 대한 작은 보상이다.”
수호 기사가 상자의 뚜껑을 열고 뒤로 물러났다. 상자에서 금광이 번쩍이는 것을 보고 에드는 조금 표정이 심드렁해졌다. 저 정도 크기의 상자라면 금패가 가득 들었다고 해도 5천 골드나 될까 싶은 크기였다.
“10만 골드가 부족하다고 느끼겠지만, 내 사비니 이해해주면 좋겠군.”
저 작은 상자에 10만 골드가 들어간다고? 아무리 태자라고 하나 10만 골드 정도를 사비로 쓰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해도 돈 들어갈 곳이 한둘이 아닐 테니까.
에드가 놀라워할 때 옆에서 테인이 중얼거렸다.
“저거 발론의 금화 상자로군.”
“저게요?”
발론의 금화 상자. 악마의 시대에서 본격적으로 돈을 벌 때 볼 수 있는 금화 상자다. 저 상자를 금패로 가득 채우면 금광을 뿜게 되고 딱 10만 골드가 된다.
저 안을 뒤져보지 않아도 저것만 보면 10만 골드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다. 게다가 저 상자 자체 가격만 해도 1천 골드는 하는 유물이다.
에드는 발론의 금화 상자 뚜껑을 닫고는 미소를 지었다. 사비로 이 정도 돈을 주러 왔다면 론멜을 무시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이건 악마를 잡는데 잘 쓰도록 하겠습니다.”
라르스는 그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오랜만에 이렇게 웃음을 터트리는 것 같았다. 10만 골드를 받고도 고개조차 숙이지 않고 악마를 잡는 데 쓰겠다니?
자신을 이리 대하는 이가 거의 없어 신선하기까지 했다.
“하하하하. 그렇게 하게.”
라르스는 옆에 놓인 술잔을 집어 들어 쭉 들이키고는 말했다.
“내일 궁으로 정식으로 초대하도록 하지.”
라르스는 그렇게만 말하고는 수호 기사와 함께 물러났다.
한차례 폭풍처럼 몰아쳤던 라르스가 떠나자 일행은 서로를 돌아보았다. 그는 등장만큼이나 물러남도 빨랐다.
10만 골드만 보상으로 던져 놓고 쿨하게 물러나니 차도남 느낌이 물씬 나며 호감도가 올라갔다.
에드는 발론의 금화 상자를 열고는 안에 든 금패를 꺼내기 시작했다. 에드가 꺼낸 금패가 하나둘 쌓이기 시작했다. 열 개씩 쌓은 금패가 열 개가 되자 에드가 브란트를 돌아보았다.
“형님. 안 그래도 정착금이 부족하다 싶었는데 잘됐네요. 이것도 보태서 쓰세요.”
브란트는 일만 골드나 되는 금패를 보고는 고개를 들어 일행들을 보았다. 2천 골드만 해도 충분히 수도에 정착할 수 있을 거라 여겼는데 1만 골드나 되는 돈을 주겠다고 하니 당혹스러웠다.
그런데 일행 중 누구도 그걸 아까워하는 이들이 없었다.
덱스가 그 모습을 보고는 웃음을 터트렸다.
“구멍가게 열지 말고 번듯한 호텔이라도 지어요. 그래야 오다가다 이용하지.”
브란트는 그 말에 부담감을 덜었다. 일만 골드 정도로 수도에 호텔을 짓는 것은 무리일지 몰라도 여관 정도는 지을 수 있으리라.
“그래. 번듯하게 하나 지을 테니 수도에 올 때는 꼭 들러라. 돈 안 받고 재워 줄 테니.”
“역시! 그럼 다 같이 한잔합시다!”
덱스가 술잔을 들어 올리자 모두 좋다고 술잔을 들어 올렸다. 에드도 브란트와의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술잔을 들고 기분 좋게 술잔을 비웠다.
송별회가 끝나고 다들 잠을 청하러 갔을 때 노리스가 호텔 지붕 위에 나타났다. 그는 나침반을 꺼내 들고 그것을 확인했다.
악마는 수도 시무스 안에 있으니 이제 찾아가 죽일 차례다. 노리스가 나침반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위치를 특정했으니 근처로 다가가면 찾을 수 있으리라.
노리스가 지붕을 박차고 수도 시무스를 가로질러 갈 때 그의 뒤쪽으로 따라붙는 이가 있었다. 노리스가 고개를 돌리니 에드가 망토를 두른 채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달렸다.
노리스가 고개를 돌리자 에드가 미소를 지은 채 말을 건넸다.
“악마를 잡으러 가는 거죠?”
“술을 제법 드시던데 괜찮겠습니까?”
“제가 술이 센 편이라서요.”
노리스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움직임에 전혀 뒤처지지 않는 에드에게 술기운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오늘 송별회에 모인 이들이 모두 쓰러진 것과는 비교되는 모습이다.
브란트와 덱스마저 쓰러졌음에도 술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모습에 노리스는 조금 더 걸음을 빨리했다. 그런데도 에드를 떨쳐내지 못했다.
“그런데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위치는 특정 지었는데 어딘지는 모르겠습니다. 그저 악마가 있으니 갈 뿐입니다.”
그 말에 에드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 악마가 있는데 어디든 무슨 상관인가? 악마를 찾아가 죽이면 될 뿐인 것을.
그렇게 그들이 달려간 곳은 왕궁의 성벽 앞이었다.
노리스와 함께 왕궁의 성벽을 바라볼 수 있는 저택의 지붕 위에서 둘은 잠시 멈춰섰다.
“저 안쪽입니까?”
“그렇습니다. 저 혼자 다녀올 테니 이곳에 계시죠.”
에드는 그 말에 새삼 노리스를 바라보았다. 쌍룡사의 호법승이라는 노리스도 보통 인물은 아니었다.
에드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는 전력을 다해서 심안을 펼쳐 보았다. 이곳에 있는 것이 중급 악마 이상이라면 심안에도 잡힐 터.
그렇게 심안을 펼쳐서 왕궁의 성벽 너머 그 안쪽까지 확인해 보았다. 하지만 에드의 심안이 닿는 범위 안에는 없었다.
옆에서 그런 에드를 바라보던 노리스는 새삼 감탄했다. 심안이라는 것은 쌍룡사의 무승 중에서도 호법승이나 익힐 수 있는 기예다.
완전히 같은 방식은 아니지만, 그걸 펼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었다.
에드는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제법 안쪽에 있나 보네요. 제 심안에는 잡히지 않아요.”
“저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저 안에 있는 것이 확실합니다.”
“그럼 들어가죠.”
태자가 왕궁으로 초대한다고 했지만, 악마를 사냥하는 것은 또 다른 일이다. 괜히 태자에게 설명하기도 까다로운 일.
조용히 처리하고 나오면 될 일이다.
“역시 시주는 말이 잘 통하는군요. 그럼 가죠.”
말을 마친 노리스가 지붕을 박차고 왕궁의 성벽을 향해 몸을 날렸다. 왕궁의 성벽까지는 족히 30미터는 넘는 거리가 있었는데 노리스는 허공을 두 번 박차고 단숨에 성벽에 올랐다.
물 위를 걸어 다니더라니, 역시나 보통 솜씨가 아니었다.
에드는 비도 두 자루를 던졌고, 차례로 그걸 밟고 성벽에 올랐다. 그리고 손을 돌리니 비도가 차례로 날아와 손에 잡혔다.
노리스는 에드가 자신을 따라 성벽에 오른 것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호법승인 그는 지금까지 악마를 상대하는데 단 한 번도 누구의 도움을 받은 적이 없었다.
오히려 처음에 악마를 만났을 때 만났던 파티는 짐 덩어리일 뿐이었다. 하지만 에드는 아니다.
노리스는 나침반을 꺼내서 확인하고는 곧장 걸음을 옮겼다. 그런 노리스의 뒤를 따라 걸으며 에드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노리스가 입고 있는 옷은 붉은색의 무복이다. 눈에 띄는 색임에도 그의 움직임은 은밀하기 짝이 없었고, 왕궁을 지키는 이들 누구에게도 걸리지 않고 있었다.
에드도 은밀하게 움직이는 것은 자신이 있었다. 가지고 있는 장비 중에는 기척을 죽이는 것도 있었고.
하지만 노리스는 그 모든 것을 장비의 도움 없이도 해내고 있었다.
에드도 심안을 쓰고 있기에 경비병들에게 걸릴 일은 없었고, 둘은 왕궁 안을 무인지경으로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렇게 걸어가던 노리스는 회랑의 중앙에 서서는 나침반을 바라보고는 표정을 굳힌 채 말했다.
“지하에 있는 가 봅니다.”
“지하요?”
왕궁 내에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악마가 또 어떤 존재로 둔갑해 있나 싶었다. 아무래도 악마가 많은 악업을 찾으려면 높은 직위에 있는 자로 변하는 것이 좋다.
물론 왕궁 내에서 그러고 있다는 것을 듣고 어지간히 간이 크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지하다?
이곳에도 지하에 비밀 통로가 있는 걸까? 그리고 그 안에 공간이 있다?
비밀 공간에 있다면 아무리 에드라고 해도 들어가서 잡을 수 없다. 아무리 신체 능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비밀 공간을 찾을 방법은 없었으니까.
노리스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가 눈을 감았다. 에드는 그가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직감했다. 심안과 비슷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았는데 지금 그는 그걸 넓게 펼치고 있었다.
심안에서 자신을 숨기는 것을 배웠기에 에드는 지금 그가 펼치는 감각의 확장이 회랑을 넘어서 주변으로 퍼지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주위를 확인하던 노리스가 눈을 다시 뜨더니 왼발을 높이 들었다. 그리고는 강하게 발을 짓밟았다.
꾸웅.
회랑 전체에 울려 퍼지는 굉음에 에드가 화들짝 놀랐다. 자신도 뒤가 없이 살아왔다고 여겼는데 노리스는 정말로 뒤가 없었다.
왕궁에서 이렇게 일을 벌이다니?
심안으로 확인되는 경비병만 해도 넷이 달려오고 있었다.
노리스를 돌아보니 그가 밟은 바닥이 사각 모양으로 푹 꺼져 있었고 그도 보이지 않았다. 왕궁의 비밀 공간을 이렇게 부수고 들어가는 방법이 있을 줄은 몰랐지만, 에드도 그를 따라 몸을 날렸다.
그렇게 뛰어내리면서 바닥의 두께를 확인해 보니 감탄이 절로 나왔다. 1층 회랑의 바닥이라고 해도 에드 키만큼 두꺼운 바닥을 고작 발구름 한 번으로 뚫을 수 있다니 놀라울 지경이었다.
근력 자체가 자신보다 뛰어난 것은 알았지만, 순간적인 파괴력은 브란트에 버금가는 위력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타임 어택이다. 이대로 비밀 공간에서 악마를 죽이고 병사들에게 발각되기 전에 빠져나가야만 한다. 어떤 식으로든 병사들에게 들킨다면 도망가도 마젤타 왕국 내에서는 살기 힘들어질 사고다.
그렇게 아래로 내려간 에드는 노리스의 뒤편에 내려서면서 주위를 돌아보았다.
야명석이 박혀 있어 어둡지 않은 실내에 한 쌍의 남녀가 있었다. 남자가 여자를 가로막고 서서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누구냐?”
에드는 심안으로 남자의 뒤에 선 여인이 악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도 상급 악마.
그리고 그 앞을 막아선 중년의 사내. 중년 미남자를 보고 에드는 어째 불안한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중년 미남자는 라르스가 늙으면 딱 저렇게 될 것 같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