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아하하하
시끄러운 소리에 정신이 든 론멜은 천천히 눈을 뜨고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몸을 일으켰다.
눈앞에는 악마의 시체가 얼어붙은 채 배가 갈린 채 있었고, 성검이 바닥에 꽂혀 있었다. 그리고 몰려온 병사들이 일행을 포위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난 론멜이 소리쳤다.
“무슨 일이냐!”
론멜이 일어나서 외치는 소리를 듣고 병사들을 이끌고 온 이가 그에게 시선을 주었다. 지금까지 쓰러져 있어서 몰랐던 이들이 그 모습을 보고 다가왔다.
“루카스 총무관님의 저택에서 소란이 일었다고 해서 출동했습니다. 론멜 경. 어찌된 일인지 연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론멜은 그 말에 옆에 꽂혀있던 성검을 뽑아서 악마를 가리키며 말했다.
“너희가 찾는 루카스 총무관이 저 악마다.”
“예?”
기사가 무슨 소리냐는 듯 바라보는데 론멜은 악마에게 다가가서는 말했다.
“이 악마가 루카스 총무관의 모습을 한 채 너희를 속여왔다는 말이다. 이는 시트라의 검인 나 론멜이 증명한 일이니 모두 물러가라.”
“시장님에게 보고하겠습니다.”
“당연히 보고해야지. 시장님에게는 내가 찾아간다고 전해라. 악마를 수하로 뒀던 만큼 시장님 또한 조사가 필요하니.”
기사는 그 말을 듣고 표정이 굳어졌다. 시트라 교단은 마젤타 왕국의 국교인 만큼 그 위세가 대단했다. 그런 시트라 교단의 성기사가 조사하겠다고 한다면 이단심문관이 나서게 될 터.
그들의 손에 걸리면 없던 죄도 실토하게 한다고 하니 시장의 앞날에 거센 폭풍이 몰려오는 중이다.
“그럼 물러가겠습니다.”
병사들이 물러가는 것을 보고 론멜이 그제야 주위를 돌아보았다. 무기를 뽑아 들고 병사들과 대치하고 있던 덱스와 아린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바닥에 쓰러져 있는 브란트와 그의 옆에서 활을 들고 있는 에드였다.
에드의 눈빛을 보니 자신이 깨어나지 못하고 병사들과 만약 일이 터졌다면 병사 중 멀쩡히 돌아가는 이가 없을 것 같았다.
에드가 시위에 걸어놓았던 화살을 화살집에 돌려 넣는 것을 본 론멜이 루카스의 시체에 다가갔다. 아직도 얼음 덩어리 안에 있는 악마를 보니 느낄 수 있었다.
상급 악마란 존재가 어떤 악마인지.
그리고 그런 자를 상대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지금까지 하급 악마나 마물만 잡아 왔던 자신을 돌아보게 했다.
똑같은 고통을 겪으면서 누군가는 검을 뽑았고, 누군가는 쓰러졌다.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지 깨달았다.
저 뛰어난 시트라의 성검을 들고도 자신은 도저히 전투에 뛰어들 수 없었고, 덱스는 뛰어들었다.
스스로 반성하게 됐다.
론멜이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아린이 손짓했다.
“혈마석은 뽑아서 확인했어요. 시트라 신에게 제물로 바쳐요.”
상급 악마. 제물로 바치면 얼마나 많은 신성력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다만 자신이 이번 전투에서 한 일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자신도 염치가 있다.
론멜이 고개를 내저으려고 할 때 에드가 입을 열었다.
“그 성검이 제 몫을 톡톡히 했으니 부담 갖지 말아요.”
론멜은 아린을 돌아보았다. 모든 악마는 제물로 바칠 수 있다. 성화를 통해 신에게 전하게 되면 신성력이 늘어나게 되는데 그걸 양보하겠다고?
상급 악마인데?
그런데 아린은 론멜과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고 론멜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상급 악마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그 머리 위에 손을 올리고는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가 올리는 기도가 이어지자 검은 불꽃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검은 불꽃은 에드도 꺼림칙하게 느껴질 정도의 불꽃이었다.
불꽃이 타올랐고, 루카스의 시체가 그 불꽃에 휘감겨 하늘까지 그 불꽃이 닿는가 싶더니 폭포수처럼 검은빛 줄기가 떨어져 내려 론멜을 휘감았다.
검은 폭포에 론멜이 보이지도 않게 된 모습을 보고 에드는 이것이 론멜에게 기연이 됨을 알았다. 상급 악마를 태워버린 만큼 신이 그에게 막대한 신성력을 내려줄 터.
론멜이 얼마나 강해질지 기대가 되기도 했다.
에드는 브란트의 곁에서 일어나 아린에게 다가갔다. 사실 루카스를 잡는 데는 아린의 공이 가장 컸다고 할 수 있다. 그녀가 제대로 막아주지 않았다면 상급 악마답게 한둘은 죽었을 가능성이 컸다.
그러다 보니 상급 악마의 시체를 아무리 약속했다고 해도 그냥 내주는 것이 대단해 보였다.
에드가 경험치를 얻는 것처럼 저 상급 악마가 줄 신성력을 생각하면 아린도 무시할 수준은 아니었으니까.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던 검은 폭포가 멈췄을 때 론멜이 모습을 드러냈다. 론멜의 피부까지 마치 검은 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검었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을 가진 그가 피부까지 칠흑처럼 검었다가 색을 천천히 되찾았다. 몸을 부르르 떤 론멜의 몸에서 검은 아우라가 뿜어져 나왔다.
그런 아우라를 품은 론멜이 주위를 돌아보다가 온전히 그 아우라를 거둬들였다. 단번에 초보에서 중수까지 올라설 정도의 격변이었다.
론멜은 씨익 웃었다.
“이게 신의 사랑이군. 총애를 받는다는 말이 뭔지 알 것 같아.”
신의 사랑이 신성력으로 표현될까?
단번에 마스터 팔라딘에 필적할 정도는 아니겠지만, 적어도 팔라딘 중에서 최상위 팔라딘에 필적할 만큼의 신성력은 얻었으리라.
론멜은 잠시 그 여운을 즐기는가 싶더니 아린에게 다가와 깊이 고개를 숙였다.
“시트라께서 크게 기뻐하셨소. 고맙소.”
“약속이었으니까요.”
론멜은 그 말에 고개를 내저었다. 하급 악마라면 백 마리를 잡았다고 해도 이만큼의 신성력을 허락받을 수 없었으리라.
“혹시 앞으로 일정이 어떻게 되오?”
“여기서 끝났으면 싶지만, 조금 더 남쪽으로 내려가야 하더군요.”
“그렇다면 교단의 도움을 적극적으로 얻어 주겠소. 그리고 다음 악마는 어떤 놈이든 아스트론에게 제물로 바치도록 합시다.”
에드는 그 말에 미소를 지었다. 론멜은 강해졌다고 해도 사실 론멜보다는 그가 가진 시트라의 성검이 탐날 뿐이었다. 그리고 시트라 교단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다면 충분히 도움이 되리라.
아린이 론멜과 얘기를 나누는 사이에 에드는 덱스를 바라보았다. 덱스는 어느새 레이피어를 들고 휘둘러 보고 있었다.
고통의 저주를 내리는 검인데 어지간한 정신력으로는 저 검에 베이는 순간 고통 때문에 몸이 굳을 터. 성기사인 론멜도 감당하지 못할 정도의 고통을 내리는 저주였다.
그런 레이피어를 휘둘러 보던 덱스가 입맛을 다셨다.
“아씨. 이건 배워보질 않아서 어렵네?”
레이피어는 귀족들의 무기. 다루기 쉽지 않을 테지만, 덱스라면 금세 익힐 수 있다고 믿었다.
덱스의 재능은 놀라울 정도니까.
그때 브란트도 정신을 차렸다. 천천히 눈을 뜬 브란트가 턱을 좌우로 움직이다가 몸을 일으킬 수 없는 것을 확인했다.
“에드.”
에드는 브란트에게 다가가 그의 눈꺼풀을 잡아 위아래로 열고는 눈동자를 살폈다. 눈빛에 문제는 없어 보였다. 그래도 확인해 봐야 했다.
“아까는 왜 그랬어요?”
“사슬의 힘으로 상대를 봉인하니 오히려 내 힘을 봉인한 것이 약해지더라고. 그것 때문에 견디기 힘들었어. 고마웠다.”
“지금은요?”
“지금은 괜찮아. 봉인의 힘도 돌아왔으니까.”
에드는 꽁꽁 묶은 사슬을 풀어주며 말했다.
“이건 다음부터 쓰는데 주의해야겠네요.”
에드가 풀어주자 브란트가 몸을 일으켰다. 그의 모습을 바라보던 에드는 론멜의 성검을 바라보았다. 저 검을 이용하면 브란트가 쓰는 봉인의 사슬이 필요가 없으니.
론멜이 그 이상의 값어치를 해주지 못한다면 덱스가 대신 들고 날뛰면 되리라.
브란트가 몸을 일으켰을 때 에드는 론멜을 바라보았다.
“일단 여관으로 돌아가죠.”
론멜이 그 말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교회에 들러 이번 사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알리고 교단의 힘을 빌려야겠어. 얘기가 끝나고 여관으로 갈게.”
론멜과 헤어진 일행은 여관으로 돌아왔다.
상급 악마와 싸우면서 얻은 것이라고는 에드의 레벨업과 다음 행선지. 마검 레이피어였다. 마지막으로 브란트의 문제점도 알 수 있었다.
여관으로 돌아온 일행을 기다리고 있던 이들이 반겼다. 상급 악마를 상대했음에도 아무도 죽지 않아서인지 분위기는 좋았다.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에드는 테인을 따로 불러 물었다.
“혹시 에슬란의 사슬과 비슷한 효과를 가진 유물급 장비가 있을까요?”
“브란트가 또 발작했나?”
“발작 직전까지 갔습니다. 봉인의 사슬로 상급 악마의 힘을 봉했더니 오히려 형님 내면의 악마의 힘이 폭주하려고 하더군요.”
브란트가 만약 폭주한다면 그 힘이 얼마나 될까? 기사단 하나를 갈아냈지만 그의 몸 안에 흐르는 것은 대악마의 피다. 그 피에 고스란히 육체를 넘긴다면 아마 또 다른 대악마가 탄생하는 것이 아닐까?
위험성은 상급 악마를 아득히 초월하는 폭탄이다. 그에게 족쇄가 더 필요했다. 아직 그 힘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니까.
테인은 잠시 고민하다가 답했다.
“몇몇 악마의 힘을 봉인하는 물건들이 있기는 하네만 에슬란의 사슬에 비견될 것들은 얼마 되지 않네. 아스트론 교단의 성유물 중 아리안의 눈물이라는 목걸이가 있기는 한데 그건 악마의 힘을 봉인하는 정도가 아니라 상대에게 끔찍한 고통을 전해주네.”
“그런 물건은 안 됩니다.”
지금도 악마의 목소리에 저항하기 위해서 브란트가 얼마나 노력하는지 알고 있다. 행여나 엠마에게 해를 끼칠까 봐 가능한 그녀에게서 떨어져 지내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런 그에게 고통까지 전해줄 생각은 없었다.
“악마의 힘을 봉인하는 것은 악마를 심문할 때 쓰는 것이다 보니 고통을 동반하지 않는 물건은 거의 없네.”
“에슬란의 사슬이 있잖아요?”
테인이 그 물음에 픽 웃음을 흘렸다.
“저건 뭐 다를 것 같은가? 저것 또한 끔찍한 고통을 수반한다네.”
에드는 그 말에 브란트를 바라보았다. 그가 워낙 태연하게 있어서 그게 그에게 그렇게 고통을 주는지 몰랐다.
그때 에드와 테인이 따로 나와서 얘기하는 여관방의 문이 열리고 브란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형님.”
에드가 돌아보자 브란트가 다가와서는 자리에 앉았다.
“악마의 힘을 봉인할 수만 있으면 됩니다.”
테인은 그 말에도 고개를 내저었다.
“악마의 힘을 봉인하는 물건들은 대부분 교단이 가지고 있네. 아스트론 교단의 힘을 빌리기는 힘드니 우선은 시트라 교단에 그런 물건이 있는지 알아봐야겠군.”
문이 벌컥 열리며 론멜이 얼굴을 쏙 들이밀었다.
“물건? 어떤 물건? 우리 교단에 있는 물건이면 내가 찾아줄게.”
에드는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끔찍한 고통을 선사한다는데 그런 물건을 차마 자신의 입으로 구한다고 할 수 없었다.
“악마의 힘을 봉인할 수 있는 물건이 있나?”
브란트의 물음에 론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는 악마를 심문하지 않아. 보통은 죽이지. 봉인에 필요한 물건이 있을지 모르겠네.”
시트라 교단의 기풍 자체가 그렇다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때 테인이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시트라 교단에 아큘라의 반지가 있지 않나? 그게 그나마 에슬란의 사슬에 버금가는 봉인의 효과를 가진 것으로 알고 있는데.”
론멜이 그 말에 난처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아하하하. 아큘라의 반지라면 교단 3대 보물 중 하나인 그거 말하는 겁니까?”
“그래 시트라 교단의 초대 교황 아큘라가 가졌던 그 반지 말일세.”
에드는 론멜이 난처해하는 모습을 보고 물었다.
“안 됩니까?”
“···아하하하.”
론멜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주륵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