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타로스
펠만은 미소를 지은 채 에드를 바라보았다.
“백해무익한 악마들을 잡아 온 이야기를 듣고 싶으나 보다시피 바빠서 시간을 내기 어려울 것 같군. 왕도에서 악마의 흔적을 찾고 그자를 잡거든 떠나기 전에 왕궁에 한 번 들르게. 그때 쯤에는 여유가 생길지 모르니.”
“그럼 다음에 찾아뵙겠습니다.”
펠만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짓했다.
“물러가도 좋다.”
에드와 아린이 예를 표하고 물러나자 펠만은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악마를 쫓아왔다는군. 아는 것이 있나?”
펠만의 물음에 뒤에 화려한 의자 뒤에서 다비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왕도에 악마가 있다니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자네도 모르는 것이 있나?”
“악마가 있다고 해도 활동하고 있지는 않을 겁니다. 그랬다면 제 눈을 피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요.”
“흐음. 어쨌든 다른 곳도 아니고 왕도에서 내 눈을 피하는 것이 있다는 것은 유쾌하지 않은 기분이군. 악마를 찾고 저들도 살필 수 있도록.”
“그리하겠습니다.”
다비드가 물러나자 펠만은 턱을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었다. 에드라는 자. 악마 사냥꾼이라는 자의 눈빛은 왕인 자신을 마주하면서도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그것은 마치 사냥꾼이 사냥감을 바라보는 눈빛.
태생이 사냥꾼이라 그런 것일까?
펠만은 의자에 등을 기댄 채 창밖을 바라보았다. 해가 지고 천천히 하늘이 남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어디쯤 왔으려나?”
트라비아 왕국군을 상대하려는 준비는 끝났다. 괜히 정찰병들을 헤아리기도 힘들 정도로 내보내고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에드는 모든 무기를 회수하면서 일일이 확인했다. 하나라도 무기가 비었다면 왕궁의 시종이고 뭐고 간에 좋은 꼴 보기 힘들었으리라.
그렇게 장비를 챙기고 밖으로 나오니 마차에서 불쑥 덱스의 얼굴이 튀어나왔다.
“우리 오늘 왕궁에서 지내는 거야?”
“그런 말은 없었어. 여관 찾아봐야지.”
아린은 그 말에 에드를 돌아보며 말했다.
“우선 신전에 다녀올게요.”
왕도로서는 손색이 있지만, 이곳은 남부 귀족 연합의 중심이었던 곳이니 신전 정도는 있을 법한 크기였다.
에드는 말에 오르면서 아직 시립해 있는 시종을 돌아보았다.
“왕도에서 가장 좋은 여관이 어딥니까?”
“내성을 나가서 중앙 광장의 좌측 골목의 첫 번째 호텔이 가장 좋은 곳입니다.”
“감사합니다.”
에드의 시선이 아린을 향했다.
“호텔에 가 있을 테니 그쪽으로 와요.”
“그럴게요. 그럼 이따가 봐요.”
아린이 먼저 말을 타고 신전을 찾아가는 동안 에드는 일행과 함께 호텔을 찾아 이동했다. 그런 그들의 곁에는 붉은매 기사단장 델마가 함께했다.
이게 감시인가 싶었지만, 병사들이 델마를 보고 경례만 하고 굳이 그들을 막지 않으니 나쁘지 않은 선택 같았다. 호텔까지 데려다준 델마가 웃으며 말했다.
“왕도에서 하는 일이 잘 해결되길 빌지.”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델마 경의 앞날에도 아스트론의 영광이 함께 하길 빌겠습니다.”
“흐하하하. 아스트론을 믿는 줄은 몰랐군. 그대에게도 아스트론의 영광이 함께 하길 빌지.”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린 델마가 떠나자 에드는 점원에게 은화를 던져주며 말했다.
“말들이 많이 지쳤으니 목욕시켜 주고 좋은 것으로 먹여줘요.”
남부에서 잘나가는 펠만 시라고 하지만 호텔에서 일하는 점원도 팁으로 은화를 받은 것은 처음이라 머리가 땅에 닿도록 고개를 숙였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고 에드도 돈이 생기니 이렇게 인심도 팍팍 쓰게 됐다. 예전에는 동전 몇 개를 던져줬지만, 이제는 다르다.
점원의 반응이 달라지는 것을 보니 역시 은화의 위력을 알 수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점원들이 주르륵 나왔다. 그리고 도열한 그들의 뒤를 보니 호텔 안쪽이 텅 비어 있어서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긴 계엄령이 내려진 곳에서 호텔에 들를 이가 얼마나 될까?
오랜만의 손님에 점원들이 이렇게 나온 것이리라. 그리고 그들의 중앙에 선 이는 반듯하게 머리를 빗어 넘긴 것이 귀족의 시종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깔끔해 보였다.
“환영합니다.”
에드는 그들을 한 번 둘러본 후에 입을 열었다.
“방 네 개. 그리고 목욕할 수 있는 따뜻한 물. 목욕이 끝난 후에 식사할 수 있게 준비해 주세요. 며칠간 묵을 생각이니 그렇게 준비해 주면 좋겠군요.”
에드는 금화 하나를 꺼내서 건넸다.
“최상의 서비스로 만족하게 해드리겠습니다.”
“기대하죠.”
곧 점원들이 따라붙어서 방을 안내해줬다. 에드와 한방을 쓰는 디에고가 방안으로 들어오니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꺼냈다.
“형. 왕궁, 아니 내성에서 감지해 보니까 펠만 시에 악마의 힘을 지닌 자들이 너무 많아요.”
“얼마나?”
“못해도 서른은 넘는 것 같아요.”
“죽을 놈들 많네.”
에드는 장비들을 풀어 놓으며 말했다.
“뜨거운 물 들어오면 먼저 씻어.”
“알겠어요. 오늘 밤 나가실 거죠?”
에드는 잠시 고민해 보았다. 디에고는 에드와 손발이 잘 맞았다. 가지고 있는 장비 덕분에 함께 움직이기에 가장 적합했으니까.
“오늘 하루 정도는 쉬자. 이제 막 도착했으니.”
디에고가 놀란 눈으로 에드를 바라보았다.
“형. 어디 아픈 건 아니죠?”
높은 체력 덕분에 아프려고 해도 쉽게 아프지 못한다. 에드는 디에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왕도 돌아가는 꼴 좀 보고 움직이자.”
“난 또.”
디에고는 씨익 웃었다. 호텔이라 그런지 점원이 여럿이라 뜨거운 물을 가지고 온 이들이 줄줄이 들어와서 목욕통을 가득 채워줬다.
디에고는 점원들이 나가자 좋다고 옷을 훌러덩 벗어 던지고 목욕통에 다가가 오른쪽 발을 담그고는 얼굴이 붉어졌다. 물이 꽤 뜨거웠나 보다.
“아저씨. 저 엠마에요.”
노크 소리가 들리기에 에드는 별 생각 없이 답했다.
“어. 들어와.”
문이 열리고 엠마가 들어오는 모습에 디에고가 그대로 목욕통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는 그대로 뛰어올랐다.
“아뜨뜨.”
“꺄악!”
엠마는 디에고의 붉게 달아오른 엉덩이를 보고는 눈을 가리고는 후다닥 뒤돌아섰다. 디에고가 그 뜨거운 물에 얼굴까지 집어넣고 숨는 모습에 녀석을 살려주기 위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이야?”
“할아버지가 찾으세요.”
“금방 갈게.”
엠마가 후다닥 사라진 것을 보고 에드는 목욕통을 가볍게 두드렸다.
“엠마 갔다. 나와.”
“푸하!”
디에고가 벌겋게 익은 채 에드를 바라보았다.
“형. 저 어떻게 해요?”
“뭘 어떻게 해? 책임지라고 하면 돼지.”
디에고는 잠시 생각해 보다가 눈을 크게 떴다.
“어? 정말 그래도 돼요?”
에드는 디에고의 머리를 콩 쥐어박고는 테인의 방으로 향했다. 테인은 테이블 앞에 앉아서 에드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리를 권해주기에 에드가 그 앞에 앉으니 테인이 입을 열었다.
“들었나?”
“악마가 많다는 거요?”
“그래.”
“악마가 많은 건 아닐 것 같고, 악마의 힘을 다루는 놈들이 많을 수는 있죠.”
“그렇기는 할 텐데 이곳은 내 정보력이 닿지 않아. 펠만 시의 정보를 틀어쥐고 있는 놈들이 있는 것 같네.”
“정보를 틀어쥐고 있다고요?”
“그렇다네. 이 정도로 정보를 틀어막는 것을 보면 보통내기들이 아니야. 이곳에서는 정보를 얻기 쉽지 않을 것 같네.”
“그건 오늘 밤에 알아보면 되겠죠.”
“뭘 알아본다는 건가?”
“그 정보를 틀어쥔 놈들이요.”
이곳에 오는 동안 따라붙는 눈이 있었다. 그들이 누군지는 잡아서 물어보면 될 일이다.
심안까지 뜬 에드의 감각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특히나 이렇게 거리에 사람이 없을 때는.
펠만 왕국의 왕궁. 서쪽에 있는 높이 솟은 탑의 정상에서 창밖을 바라보며 뒷짐을 지고 서 있던 다비드는 뒤에 느껴지는 기척에 입을 열었다.
“꼬리는 잘 붙였나?”
“예. 멀리서 확인만 하는 식으로 유지하라고 했습니다.”
“그들의 실력이 명성의 반만 되도 특별히 주의해야 할 거다.”
“예. 그런데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다비드는 수하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아린 일행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그들이 왕도에서 벌인 일 때문에 이렇게 촌구석까지 밀려나지 않았던가?
예전에 마음껏 사용하던 예산이나 전력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열악해진 환경이다.
그런데 그들에게 뭔가 변화가 생겼나?
왕도에서 내몰린 이후 펠만 공을 찾으러 이동하는 동안 눈과 귀가 닫혀 있었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뭔가?”
“그들 일행에 브란트와 엠마가 있습니다.”
“뭐?”
다비드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이야기였다. 브란트가 그 자리에서 살아남더라도 몇 개의 함정을 더 팠다. 딸을 구해내더라도, 구해내지 못해도 브란트는 결국 폭주하게 되어 있었다.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는 힘으로 폭주한 그는 결국 아스트론 교단이나 다른 이들의 손에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대체 무슨 수로 살아남아 아린 일행에 합류했다는 말인가?
다비드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아니. 살아남았다면 언젠가 써먹을 날이 오겠지.”
브란트에 대한 대비는 확실히 되어 있었다. 그날 그에게 확실한 죽음을 내리지 않았던 것은 자신의 처지가 부평초처럼 흔들리기 때문이었기에 그를 죽일 방법이 있음에도 사용하지 않았던 것일 뿐.
제 2의 브란트를 만들기 위해서 아껴놓았지만, 놈이 살아서 방해된다면 놈을 죽이는 데 쓰면 될 뿐이다.
“조금 더 주의해서 살피도록 해라. 그리고 가능하다면 엠마를 납치해 오는 것도 좋겠지.”
펠만 공을 왕으로 옹립하고 마젤타 왕국과의 거래를 모두 주도한 지금 변수가 끼어드는 것은 용납하지 못한다.
호텔을 멀리서 망원경을 통해서 살피던 터너는 방의 불이 하나둘씩 꺼지는 것을 보고는 하품을 해댔다.
트라비아 왕국의 아칼란 요원으로 활동하던 그가 이런 촌구석에 내려온 것은 짜증 나는 일이지만, 하는 일은 변하지 않았다.
누군가를 염탐하고 정보를 얻는 일.
그런데 죽었다고 알려진 브란트가 멀쩡히 살아있을 때는 간담이 서늘해졌다.
터너는 가볍게 혀를 차고는 망원경을 접어서 품에 넣고 호텔 맞은편 건물의 지붕에서 망토를 여미었다. 저들이 밤에도 움직일 수 있으니 이 자리를 떠날 수는 없는 노릇.
터너는 지붕에 납작 엎드린 채 하품했다. 이제부터 지루한 잠복의 시작이다.
“졸리냐?”
옆에서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몸을 틀면서 허리에 차고 있던 단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그 손은 다 뻗지도 못하고 상대에게 잡혔다.
그제야 상대를 확인한 터너는 일이 잘못되었음을 알았다. 조금 전 방의 불이 꺼질 때 보았던 자다. 악마사냥꾼 에드.
그자가 어떻게 기척도 없이 자신의 뒤를 잡았단 말인가?
그런데 에드는 손목을 잡은 채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말했다.
“두 명이었는데 한 명은 보고하러 갔나?”
둘이 잠복하고 있었음까지 알고 있는 건가?
“뭐 상관없겠지.”
에드는 터너를 내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럼 뭐하는 놈들인지 알아볼까?”
“베리코 왕국 소속 정보 집단인 타로스의 터너라고 합니다.”
에드는 자기 소속을 술술 부는 터너를 바라보다가 그의 손에 쥐고 있는 단검에 시선을 주었다. 그 단검은 아칼란의 단검이었다.
에드는 그 단검을 빼앗아 그대로 터너의 어깨에 꽂아줬다.
“끄아읍!”
그의 팔뚝으로 입을 막은 에드가 그를 내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아칼란의 단검을 들고 어디서 개소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