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알현
커다란 막사 안. 펼쳐진 트라비아 왕국의 남부 지역 지도를 내려다보는 이들의 시선이 슬그머니 들렸다. 그들의 시선이 향한 곳은 전신 갑옷을 입고 있는 거구의 장년인이 눈을 감고 검을 바닥에 짚은 채 앉아 있었다.
“헤르셀 장군. 정말 받아들이실 겁니까?”
헤르셀 장군.
달리아 왕국 정벌군의 지휘관으로 그 지위는 대신에 버금가는 이였다.
트라비아 왕국의 남부에서 펠만 공이 칭왕을 하고 남부 귀족들을 연합해 베리코 왕국을 세웠다.
트라비아 왕국이 보기에는 반란군에 불과한 일. 하지만 반란군을 그냥 둘 수 없으니 달리아 왕국 정벌군의 방향을 틀어서 남부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런 정벌군에 새로운 지휘관이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태자가 죽고, 2왕자가 죽은 지금 왕도에서 왕위 계승 서열이 급격히 상승한 여인이라고 했다.
그저 그런 왕족이 공주의 위를 얻고 이번 반란군 토벌전에 지휘관으로 온다고 하니 달리아 왕국 정벌군에 참여했던 장교들의 반응에 날이 선 것은 당연한 이치다.
그때 막사의 밖에서 병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에밀리아 공주님과 근위대가 도착했습니다.”
“들어오시라 일러라.”
헤르셀 장군은 장교들의 수런거림에도 눈을 뜨지 않고 있다가 천천히 눈을 뜨고는 몸을 일으켰다. 천막의 입구가 걷히고 그곳으로 갑옷을 입을 에밀리아 공주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뒤로 수호 기사와 근위대가 따라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헤르셀 장군이 가장 앞장서 걸어가서 한쪽 무릎을 굽혔다.
헤르셀 장군의 행동에 그곳에 모여 있던 장교들의 얼굴에는 경악이 어렸다.
헤르셀 장군은 군부의 요직에 있는 이로 대신에 버금가는 직위다. 국왕을 제외하고는 굳이 무릎까지 굽힐 이유가 없는 이였다.
하지만 그가 무릎을 꿇은 이상 장교들도 어쩔 수 없이 무릎을 꿇어야 했다. 그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자 에밀리아는 그들을 내려다보며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검집째 끌러 들어 올렸다.
“왕명으로 반란 진압군의 지휘관을 맡은 에밀리아입니다. 왕국 수호검 앞에 예를 갖추세요.”
헤르셀 장군이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헤르셀 듀뷔에. 트라비아 왕국 수호검에 예를 표합니다.”
그제야 장교들은 헤르셀 장군이 어째서 무릎을 꿇었는지 알 수 있었다. 왕국 수호검은 왕을 보는 것과 같다.
왕이 나설 일을 대신하는 이에게 내릴 수 있는 최고의 권위를 지닌 검이었으니.
그리고 그 검을 에밀리아가 가지고 왔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료했다. 그녀가 왕위 계승권이 수직으로 상승했고, 왕위를 이어받기 위한 업적을 쌓는 중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번 반란군 진압이 그녀가 왕위를 승계받는 데 있어 대단히 큰 업적이 되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번 전쟁은 절대로 지면 안 되는 전쟁이 되었다.
단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게 되면 다음 왕위를 이어받을 것이 확실한 에밀리아에게 확실히 눈도장을 찍을 수 있었다.
“왕국 수호검에 예를 표합니다!”
장교들의 확답을 들은 에밀리아는 왕국 수호검을 허리에 차고는 조금 전 헤르셀 장군이 앉아 있던 의자로 다가가 앉았다. 그녀의 뒤로 수호 기사와 근위대가 도열 했다.
“모두 일어나세요.”
헤르셀 장군을 필두로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자 에밀리아가 그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헤르셀 장군. 전황 보고 해주세요.”
펠만 시로 가는 길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성기사인 아린이 함께 하지 않았다면 검문검색에 계속 붙들렸으리라.
수시로 오가는 정찰대와 만나게 됐고, 그들은 만날 때마다 일행을 붙들고, 목적지를 물었다.
아무리 전쟁 준비 중인 왕국의 정찰대들이라고 해도 성기사인 아린을 막을 수는 없었다. 정찰대는 아린의 앞을 막지 않았지만, 그들이 펠만 시에 연락을 취한 것인지 곧 그들을 찾아온 기사단이 있었다.
마차의 앞을 막은 기사단의 기사 하나가 앞으로 튀어나왔다.
투구의 바이저를 올린 기사단의 기사는 긴 수염이 인상적인 인물이었다.
“성기사 아린 경이 맞는가?”
아린이 앞으로 나섰다.
“제가 아린입니다. 누구시죠?”
“흐하하하. 난 베리코 왕국의 붉은매 기사단의 단장 델마라고 하네. 전하께서 그대들을 보고 싶다고 하시니 왕궁까지 우리가 호위하겠네.”
말이 호위지 그들이 원하는 것은 일종의 감시였다. 영지 내를 이동하는 성기사가 무슨 일을 할지 모르니 일단 왕궁까지 데리고 가겠다는 뜻이리라.
어차피 펠만 시에는 가야 했는데 이쪽에도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작정한다면야 붉은매 기사단 전원을 죽이고 몸을 빼낼 수도 있을 테지만 그렇게 힘을 뺄 필요는 없어 보였으니까.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델마가 손짓하며 말했다.
“호위 진형을 짜라. 왕궁으로 이동한다.”
에드는 호위 진형을 짠 이들의 면면을 살폈다. 기사들의 수준이야 빤한 것이었지만, 그들의 갑옷은 상당히 질이 좋아 보였다.
남부 귀족의 수장이었다고 하더니 데리고 있는 기사단은 열심히 꾸렸나 보다.
그런데 조금 실망이다. 칭왕을 했다면 왕도 수준의 기사들이 있을 줄 알았는데 실제로 보니 수준이 한참이나 떨어진다. 하긴 일개 영지의 기사단이었으니 그럴 만도 하겠지만, 이런 이들만 믿고 칭왕을 하다니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호위를 받은 이후로는 검문검색을 받지 않았다.
펠만 국왕의 붉은매 기사단이 호위하고 있으니 거침없이 나아갈 수 있었는데 에드는 저 멀리 보이는 펠만 시를 보았다.
왕도라고 하기에는 작은 도시였다. 하지만 이번 전쟁에서 살아남는다면 이들도 펠만 시를 확장하겠지.
왕도에 어울리는 곳으로 만들기 위해 엄청난 공사가 될 것이 뻔했다.
성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가니 내성까지 이어진 큰 길이 나왔다. 왕도에 비하면 작지만 펠만 시는 남부에서 가장 큰 도시. 그러니 남부 귀족 연합의 수장인 펠만이 얻은 도시가 아니겠는가?
그래서 그런지 길도 정비가 잘 되어 있었다.
하지만 도시 전체가 전시 상황이라는 것을 인지했는지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돌아다니는 이들이 대부분 병사인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계엄령이라도 내려진 것 같은 도시.
에드는 주위를 돌아보다가 마차의 창문을 열고 고개를 내민 채 구경하던 디에고를 돌아보았다. 디에고는 눈빛이 마주치자 씨익 웃더니 마차의 창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갔다.
디에고는 마차 안에서 제리를 소환하고는 감각 공유에 들어갔다. 이곳에 있는 악마에 대해 감지를 시작한 디에고는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많다. 너무 많다.
지금까지 이렇게 많은 악마의 힘을 느껴본 적이 있었을까?
그 크기가 크지는 않지만, 작은 힘들이 흩어져 있었다. 디에고는 그 위치들을 기억하려 애쓰며 천천히 눈을 떴다.
그를 바라보고 있던 엠마가 물었다.
“무슨 걱정거리 있어?”
디에고는 엠마의 물음에 미소로 답했다.
“아니.”
지금은 걱정거리지만 곧 해결될 거라 믿는 디에고였기에 엠마까지 걱정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엠마는 디에고의 미소를 보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걱정이 있으면 사실대로 말해. 괜히 숨기지 말고.”
뜨끔했던 디에고는 양손을 앞으로 내밀고 휘휘 내저었다.
“아냐. 금방 해결될 거라 그래.”
“진짜 내가 걱정 안 해도 돼?”
“응.”
“또 저번처럼 쓰러져서 돌아오는 거 아니지?”
엠마의 눈에 깃든 걱정을 읽은 디에고는 가슴을 두드렸다.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엠마가 디에고의 호언장담에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다음에 또 그렇게 쓰러져서 돌아오면 꼬집어 줄 거야.”
디에고는 엠마가 아니라 그 옆에 팔짱을 끼고 앉아 있는 브란트의 시선 때문에라도 절대로 다쳐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내성 앞에 도달하니 붉은매 기사단보다 수준이 높아 보이는 기사들을 볼 수 있었다.
“전하를 알현하는 데 무기는 소지할 수 없소.”
아린이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하지만 에드는 그녀를 말렸다.
아무리 그녀가 예언을 수행하는 성기사라고 해도 스스로 왕이라 칭한 이상 이곳에서는 펠만이 왕이니 그의 뜻을 따라야 했다.
에드가 먼저 장비를 풀기 시작했다. 빙결의 활부터 화살집, 그리고 장비들을 하나씩 풀어 놓기 시작하자 무기 회수를 위해서 나왔던 시종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나오는 무기가 하나둘이 아니었으니까.
에드는 어차피 무기란 별 의미가 없다고 여겼다. 원한다면 그곳에 있는 기사들의 무기를 빼앗아 사용해도 되니까.
그렇게 에드가 하나둘 무기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랑 아린 둘만 들어가죠.”
브란트는 팔에 두른 쇠사슬을 벗고 갈 수도 없으니 차라리 이곳에서 대기하고 있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 모든 무기를 맡긴 에드는 시종을 바라보며 말했다.
“구하기 힘든 물건들이니 조심하시오. 하나라도 없어지면 책임을 물을 테니까.”
에드의 시선을 마주한 시종은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린도 세 개의 성유물을 풀어서 내려놓았다. 척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물건들이니 감히 탐내거나 하지는 못하리라.
저걸 탐내면 이 정도 소국은 아스트론 교단에게 쓸려나갈 수도 있는 물건들이었으니까.
내성으로 들어간 에드는 아린과 함께 걸으며 앞뒤로 따라가는 기사들의 수준을 보았다. 붉은매 기사단과는 수준이 다른 자들.
아마도 펠만이 친위대로 두려는 기사들인가 보다. 그런 기사 넷이 앞뒤로 둘씩 그들을 호위해서 이동 중이었다.
에드는 잠시 어떻게 하면 그들을 벨 수 있는지 동선을 계산해 보고는 저들이 기를 쓰고 덤벼도 제압할 자신이 있음을 깨달았다.
새삼 자신의 성장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안내받아 간 곳은 내성의 대전.
붉은 융단이 중앙에 길게 깔린 대전의 끝에 휘황찬란한 의자가 있었고 그 위에 한 사내가 왕관을 쓴 채 앉아 있었다.
국왕이라기보다는 전장을 호령하는 것이 더 어울릴 것 같은 패기를 넘치는 이였다.
앞뒤로 따라오던 이들 중 앞에 서 있던 이들이 걸어가 국왕의 뒤편에 섰고, 에드와 아린의 뒤에 선 자들은 그대로 뒤를 지키고 있었다.
아린이 먼저 예를 표했다.
“성기사 아린입니다. 알현을 허락해 주신 점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아린이 가지는 위치는 아스트론 교단에서도 상당한 위치였다. 그런 그녀가 알현이라는 말을 썼다는 것은 자신을 국왕으로 인정한다는 말.
펠만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반갑군. 아스트론 교단에서는 아직 확답을 받지 못했는데 그대의 말을 들으니 흡족하군. 그래. 무슨 일로 왕도를 찾아온 건가?”
“아스트론 교단에 내려온 예언을 수행 중입니다.”
“아스트론 교단에서 내려온 예언을 수행 중이라는 말은 악마와 연관이 있다는 건가?”
“예. 악마의 흔적이 이곳으로 이어져 있어 그걸 쫓고 있습니다.”
“그런가? 도와주고 싶지만, 지금 전시 상황이라 큰 도움은 주기 어렵겠군.”
펠만은 그리 말하고는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편의를 봐주겠네. 왕도에서 그대들의 발걸음을 막는 이들은 없을 걸세.”
“감사합니다.”
아린의 답을 들은 펠만의 시선이 에드에게로 향했다. 에드는 펠만의 두 눈을 바라보면서 한 가지를 깨달았다.
눈 속 깊은 곳에 느껴지는 붉은 빛.
그 크기가 너무 작아서 잘못 본 것인가 싶었다. 하지만 다시 보니 그 안에 은은하게 붉은빛이 점멸하고 있다.
태자 때보다 더 작은 흔적이지만, 흔적은 흔적. 이것 봐라?
“그대에 대한 소문도 들었네. 악마 사냥꾼이라고 불린다지?”
에드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예. 에드라고 합니다. 악마 사냥꾼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