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가족
징집관이라면 영지 내에서 서열이 상당한 자가 맡았을 터. 하지만 아린 앞에서는 오줌을 지리고도 찍 소리도 못했다.
하긴 아린이 광휘를 내뿜으며 말을 하는데 카리스마가 예전과는 비할 수 없었다. 신성력만이라면 마스터 팔라딘에 버금간다고 한 뒤로도 그녀는 악마들을 잡아 왔다.
지금은 교단 내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꼽힐 만큼 뛰어난 신성력을 가지고 있을 터.
그런 그녀의 카리스마 앞에서는 징집관도 기가 죽을 수밖에 없었다.
하긴 겁에 안 질렸다고 해도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아린은 그 존재 자체로 이미 성기사라는 것을 그곳에 있는 이들에게 알려주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징집관을 처리한 아린이 고개를 돌려 에드를 바라보았다. 징집관이 오줌을 지릴 정도로 냉엄한 표정을 보였던 아린은 에드와 디에고를 보자 환한 미소를 지었다.
저 미소는 자신에게만 허락된 것. 그래서 에드도 마주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녀왔어요.”
담담한 에드의 말에 아린의 미소는 더 진해졌다.
“여관에 자리 잡았어요. 같이 가요.”
디에고를 생각해서 아예 여관에 자리를 잡았나 보다. 아린을 따라 말을 모니 징집관을 따라 나온 병사들도 좌우로 길을 비켜줄 뿐 감히 막아서는 이들이 없었다.
그들이 열어준 길을 따라 말머리를 같이해서 몰아가니 디에고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영지전이라도 벌어지는 거예요?”
“아니. 그보다 조금 더 큰 문제야.”
“어떤 문제인데요?”
아린이 그 물음에 잠시 고민하다가 답했다.
“내가 설명해주는 것보다는 테인에게 물어보는 게 좋겠어. 설명해주기 어렵네.”
에드도 그 말에는 호기심이 동했지만, 그녀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그보다 이번에 만난 녀석은 어때요? 상대할 만했어요?”
“쉽지 않았어요. 태생은 중급 악마인 것 같은데 그 수준은 거의 상급 악마에 가깝더라고요. 혈마석도 예전 것 같지 않았고요.”
“혈마석이 예전 것 같지 않았다고요?”
“마치 더 강화된 것처럼, 더 단단하고 강한 힘을 품고 있었어요. 덕분에 위치를 특정하기가 더 쉬워졌고요.”
“잡기는 힘들어도 다음 목표를 찾기 쉬워졌다는 거죠?”
“예.”
에드는 그 말에 입맛을 다셨다. 상급 악마에 가까운 중급 악마. 경험치는 얼마나 줬을까?
자신도 이번에 꽤 경험치를 쌓았지만, 경험치를 얻을 기회를 놓쳤다는 것은 언제나 아쉬운 일이었다.
라그록스가 혈마석을 강화해서 강해진 녀석들이 얼마나 경험치를 주는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에드는 별일 없었나요? 크로셀의 손가락과 사도를 상대했다는 말은 들었는데. 그들은 어땠어요?”
“혈마석을 복용해서 그런지 잘 죽지도 않더라고요.”
“그래서 어떻게 했나요?”
“아론 덕분에 잡았죠.”
“오빠요?”
오빠를 구해달라고는 했지만, 설마 그가 뭔가 도움이 될 거라고는 생각을 못 한 아린이었다. 에드는 자신의 눈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는 ‘볼’ 수 있었습니다.”
“뭘요?”
“혈마석의 위치요. 그래서 쉽게 상대할 수 있었죠.”
“오빠한테 그런 능력이 있었어요?”
에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깨달음이라도 얻었던 것인지 아론은 예전의 아론이 아니에요. 우리 여정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아린은 그 말에 생각이 많아진 것 같았다. 그녀가 생각에 잠긴 채로 말을 몰아 제법 큰 여관의 앞에서 멈췄다.
“여기에요.”
점원이 다가오기에 에드는 디에고와 함께 다크에서 내리고는 말고삐를 넘기며 품에서 동전을 꺼내서 점원에게 쥐여주며 부탁했다.
“며칠간 고생했으니 깨끗이 씻겨주고 좋은 밥을 주십시오.”
“아이고. 이를 말씀이십니까? 제가 잘 돌보겠습니다.”
점원의 대답을 듣고 에드가 여관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니 아린이 따라오며 물었다.
“말이 굉장히 좋아 보이네요.”
“선물로 받았습니다.”
크로셀의 사도와 손가락들을 상대한 것에 대해서는 들었지만, 그 짧은 시간 자신은 고작 악마 하나를 잡고 이동만 했는데 에드는 뭘 그리 많이 한 것일까?
아린은 그 이야기를 모두 듣고 싶었다.
그때 디에고가 먼저 여관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할아버지!”
디에고는 가장 먼저 테인을 발견하고는 그의 품에 안겼다.
“이크. 조심해라.”
테인은 디에고의 등을 두드려주며 말했다.
“그래도 먼저 챙겨줘서 고맙구나. 엠마라면 2층에서 쉬고 있으니 가보거라.”
“헤헤. 그럼 인사하고 올게요.”
디에고가 2층으로 뛰어 올라가는 사이에 에드는 테인의 앞자리에 앉았다. 먼지투성이인 에드를 보고 덱스가 핀잔을 줬다.
“씻고 와. 뭐 급하다고 그렇게 먼지 풀풀 날리면서 앉아 있어?”
에드는 그 말을 듣고는 옳은 말이라고 여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테인이 그런 에드를 보며 말했다.
“음식을 새로 내오고 술도 준비하라고 하지. 듣고 싶은 이야기가 많군.”
“금방 씻고 오겠습니다.”
“2층에 자네 방을 하나 따로 잡아놓았네. 복도 끝방이니 그곳으로 가면 될 걸세.”
테인이 손을 들자 여점원이 다가왔다. 테인은 그녀에게 동전을 세 개 건네주며 말했다.
“복도 끝방에 따뜻한 물 좀 올려보내 주게.”
“금방 올리겠습니다.”
“그리고 음식도 새로 내주고, 술도 내오게.”
“예!”
활기차게 대답하고 멀어지는 여점원을 바라보던 에드는 아린이 들어와 앉기에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씻고 올게요.”
“기다릴 테니 얼른 다녀와요.”
에드는 2층을 향해 걸음을 옮기다가 아린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제가 온 건 어떻게 알았습니까?”
“테인이 가르쳐 줘서 알았죠.”
에드는 테인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손을 휘휘 내젓고 있었다. 그가 정보를 취급하는 방법은 아직 짐작도 할 수 없었기에 에드는 그저 고개만 끄덕이고 2층으로 올라갔다.
복도 끝을 향해 걸어가는데 문이 열리더니 브란트가 밖으로 나왔다.
“형님.”
브란트는 그 말에 고개를 돌려 에드를 보고는 성큼 다가와 와락 끌어안았다. 에드는 피할까 하다가 브란트의 눈에 깃든 진심을 읽었기에 피하지 않았다.
그렇게 에드를 끌어안은 브란트가 등을 팡팡 두드리며 말했다.
“고생했네.”
“아닙니다. 형님 그보다 저 좀 씻고 오겠습니다.”
브란트는 에드를 풀어주고는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하게. 내려가 있겠네.”
에드는 브란트에게 풀려나서 복도 끝방에 도착했다. 망토를 벗어서 벽에 거는 동안 뜨거운 물통을 가지고 온 여점원이 욕조에 물을 부었다.
앞으로 몇 번은 더 부어야 할 것 같아 그동안 에드는 옷의 먼지를 먼저 털었다. 창문을 열고 먼지를 털면서 살피니 성내의 분위기가 새삼 느껴졌다.
오줌을 지린 징집관은 돌아갔는지 더는 병사들이 돌고 있지 않았지만, 분위기는 여전히 무거웠다. 꼭꼭 닫힌 성내의 건물들을 보니 무슨 일인지 궁금하기는 했다.
에드는 따뜻한 물이 욕조 가득 차자 여점원에게 동전을 두 개 더 건네줬다. 그녀 혼자 물을 길어 오느라 고생했기에 동전을 주니 활짝 웃으며 방을 나갔다.
방문을 잠근 에드는 옷을 벗고 욕탕에 들어갔다. 따뜻한 물에 들어가니 그간의 피로가 녹는 기분이었다. 사실 몸의 피로는 높은 체력 덕분에 없었지만, 정신적 피로가 녹는 기분이었다.
“아, 찜질방 가고 싶다.”
오랜만에 따뜻한 물에 씻고 나온 에드는 상쾌한 기분으로 아래로 내려왔다. 엠마 옆에 딱 붙어서 주절주절 떠들고 있는 디에고의 모습을 보고 에드는 흐릿하게 웃었다.
그들의 시선이 에드에게 향하는 것을 보니 가족에게 돌아온 느낌이 들었다.
에드가 자리를 잡고 앉자 테인이 물었다.
“디에고에게 대충 듣기는 했네만 크로셀의 손가락과 사도를 죽였다고?”
에드는 품에서 혈마석 조각을 꺼내서 내려놓았다.
“그자들이 가지고 있던 혈마석입니다. 이걸 가지고 있으니 혈마석을 깨기 전에는 죽지도 않더군요. 아론이 아니었다면 애 좀 먹었을 겁니다.”
아론이 없었다고 해도 그들은 결국 죽었을 테지만, 아론이 있기 때문에 편하게 잡은 것은 사실이었다.
테인이 혈마석 조각을 살펴보더니 외눈 안경을 반짝였다.
“혈마석이 매번 증발해서 연구를 못 했는데 이건 연구할 수 있을 것 같군. 아린. 이거 내가 연구해 봐도 되겠나?”
“괜찮으시겠어요?”
혈마석이 어떤 물건인지 알기에 아린이 걱정스레 묻자 테인이 미소를 지었다.
“이 늙은이는 걱정하지 말게. 악마에 관한 연구라면 대륙에서 나보다 뛰어난 자는 없을 테니.”
테인이 에드를 돌아보며 말했다.
“연구가 제대로만 된다면 아마 혈마석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걸세.”
“그렇다면 부탁드리죠.”
에드의 시선이 테인을 향했다.
“저희 쪽 일은 디에고가 대충 이야기했다면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지 알려주시죠.”
테인은 그 말에 수염을 쓸어내리고는 답했다.
“남부의 펠만 공이 칭왕을 했네.”
“칭왕이요?”
스스로를 왕으로 칭했다는 말인가?
트라비아 왕국은 왕권을 강화하고 있었고, 아마도 에밀리아가 왕위를 계승 받을 것 같은 지금. 칭왕을 하고 왕국을 세운다는 건가?
“그렇다네.”
“좋은 꼴 보기 힘들 텐데요?”
“물론이네. 왕국에서도 그의 칭왕 소식을 듣고는 곧장 달리아 왕국으로 보내려던 군대의 칼날을 남부로 돌렸다고 했네.”
마침 또 달리아 왕국을 정벌하기 위해서 보내던 군대가 있었다. 그 군대의 칼날이 향할 곳은 달리아 왕국보다는 이곳 남부가 될 수밖에 없다.
칭왕을 했다는 것 자체가 더 크게 다뤄질 문제니까.
“그래서 이렇게 병력을 강제 징집 중이군요.”
“그렇다네. 우리도 아스트론 교단의 이름을 등에 업지 않았다면 좋은 꼴 보기 힘들었을 걸세.”
전쟁.
그건 상상도 못 할 만큼 많은 피가 흐르는 일이다. 자신도 이 몸에 들어올 때 전장의 한복판에서 깨어나 그곳에 널리고 널린 수많은 시체를 보고 얼마나 놀랐던가?
영화에서도 그만한 시체는 본 적이 없었다. 그만큼 많은 시체가 쌓여 그들이 만든 핏물이 강을 이루는 것도 보았다.
그런 전쟁이 일어난다고 하니 자신들의 일과 어떤 식으로 연관이 될지 모르겠다.
“그런데 고작 남부 귀족만 모여서 어떻게 왕국을 세운다는 겁니까?”
테인이 테이블에 접시를 가운데로 옮기며 말했다.
“이게 트라비아 왕국이라면.”
테인이 술병을 반대편에 놓았다.
“이게 마젤타 왕국이지.”
마지막으로 술잔을 들어 그사이에 놓으면서 테인이 에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게 남부 귀족들이 만드는 왕국일세.”
에드는 그 말에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카르엔이 마젤타 왕국과 손을 잡더니 그들의 일파 모두가 마젤타 왕국과 함께하려는 건가 보군요.”
테인은 고개를 끄덕인 채 답했다.
“마침 마젤타 왕국의 국경으로도 병력들이 집결하고 있다고 하는군. 아마도 이건 대리전이 될 가능성이 크네.”
그 모습을 본 에드는 헛웃음을 흘렸다. 강대국 사이에 끼어든 소국. 한국의 모습이 떠올랐다.
“남부가 전란에 휩싸인다면 퇴마행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겠네요.”
에드의 시선이 아린을 향했다. 그녀는 에드의 시선에 고개를 끄덕인 채 답했다.
“맞아요. 그리고 이만한 전쟁이 벌어진다면 악마들이 판을 치겠죠.”
전란의 시대에는 악마가 더욱 기승을 부린다는 건 이미 증명되었다. 어수선한 세상에 악마가 나와서 분란을 일으키게 될 터. 숨어있던 악마들이 기어나오게 되리라.
곧 경험치가 발에 채이도록 굴러다니게 될 세상이 온다.
전쟁은 관심이 없지만, 악마들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그래서 혈마석이 가리킨 놈이 어디 있는지 찾았나요?”
아린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래도 분위기가 이렇다 보니 수사에 협조를 얻기 어려워요. 그래서 디에고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이제는 아린도 인정했다. 악마의 힘을 감지하는 데는 자신보다 디에고가 월등하다는 것을.
엠마에게 무용담을 늘어놓던 디에고는 좌중의 시선이 자신에게 모이자 가슴을 활짝피고는 엠마의 눈치를 보며 허세를 부렸다.
“저만 믿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