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꿀
팔콘을 다시 만나 가까운 마을을 향해 이동하던 말콤에게 팔콘이 입을 열었다.
“누군가 뒤를 따라오고 있습니다.”
알론이 인상을 찌푸렸지만, 말콤은 그를 말렸다.
“우리와 동행하는 것은 안 될 말이나 우리를 돕기 위해 움직이는 것은 호의에 의한 일이다. 그런 것까지 말려서야 쓰겠나?”
“···알겠습니다.”
알론은 뭔가 불만이 있는 것 같지만, 크게 따지지 않았다. 말콤은 태연한 얼굴의 아론을 보면서 확실히 이상함을 느꼈다.
크로셀의 손가락들이 노렸을 만큼 그는 뛰어난 능력을 지닌 존재였다. 그런데 지금 그는 마치 소풍이라도 온 것처럼 여유 있는 모습이 아닌가?
뭔가 초탈해 보이는 그의 모습은 대주교 중에서도 정치에 관심을 끊고 물러나 나무나 꽃을 가꾸는 원로들에게서나 느껴지는 초탈함이다.
말콤은 고개를 내젓고는 걸음을 옮겼다.
어찌 되었든 성기사 존을 죽였을 정도로 강한 크로셀의 여섯째를 죽인 이가 뒤에서 따라와 준다면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지금까지는 성기사로서 두려울 것이 없었지만, 존이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로 약간의 두려움이 생겼으니까.
바위 위에 앉아 있던 라그록스의 갑옷 안쪽에서 핏빛 연기가 솟구쳐 올랐다. 라그록스는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 제법이군.”
현신한 상태에서 아스트론의 신성력을 정면으로 맞은 대가는 컸다. 전신에 화상이라도 입은 것처럼 통증이 느껴지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중요한 것을 알았다.
아스트론의 신성력을 이렇게 쏟아낼 수 있는 자가 있다는 것. 그자의 위험도는 꽤 높다.
마음 같아서는 직접 가서 죽이고 싶었지만, 거리가 너무 멀다. 그리고 자신은 아직 드러나서는 안 된다.
“아니지. 죽여서는 안 되지.”
이건 죽이기보다는 잡아 와서 이것저것 시험해봐야겠다. 이만큼이나 신성력을 발휘하는 녀석이라면 타락 시키는 재미도 있으리라.
라그록스는 자신에게 뺨을 비비는 뿔토끼의 털을 긁어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입을 열었다.
“무슨 수를 써서든 잡아 와라.”
라그록스의 명령은 혈마석을 지닌 크로셀의 단원들에게 전해졌다. 역시 부리는 놈들이 있으니까 편하긴 하다.
“반드시 살려서.”
라그록스는 명령을 남기고는 한 사내의 얼굴을 떠올렸다. 당당하게 자신의 이마에 화살을 꽂아주겠다고 한 사내를.
“내 앞에 서서도 그런 말을 지껄일 수 있나 보도록 하지.”
어쩐지 만남이 더 기대됐다.
바닥에 쓰러진 악마를 바라보며 덱스는 거친 숨을 토해냈다.
“씨발. 이런 것들이랑 싸우는 거였어? 짜릿하게!”
마물들과 싸우던 때와는 달랐다. 허벅지가 쩍 벌어져서 뼈가 보일 정도의 상처가 있었다. 아차하면 다리가 잘려나갈 뻔할 정도로 날카로운 공격이었다.
검의 힘인 신속을 사용하지 않았다면 분명 잘렸다. 솜털이 곤두설 정도로 짜릿한 상대였다.
시시덕거리는 덱스의 허벅지에 손을 올린 아린이 회복 주문을 외우자 상처가 빠르게 아물고 있었다.
덱스는 그걸 보면서 헛웃음을 흘렸다.
“나보다는 저쪽을 봐줘야 하는 거 아냐?”
덱스의 말처럼 브란트의 상처가 더 깊어 보이기는 했다. 옆구리가 길게 찢어져 내장이 흘러나오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브란트는 주섬주섬 옆구리로 내장을 쓸어담고 있었다.
“브란트에게는 회복 주문을 걸 수 없어요.”
“아, 그랬지?”
브란트의 옆구리 상처가 아무는 것을 보면 과연 회복 주문은 필요 없어 보였다. 덱스의 허벅지 상처가 아물자 아린은 죽은 악마의 시체 앞에 섰다.
악마는 강했다. 상급 악마라고 하기에는 뭔가 부족한 녀석이었지만, 중급 악마 이상 가는 악마였다. 아린은 그 악마의 심장을 가르고 그 안에서 혈마석을 뽑아냈다.
그리고는 인상을 굳혔다.
혈마석이 전과 달라져 있었다. 결정체의 강도 자체가 달라진 느낌이다.
악마 자체가 강해진 것이 아니라 혈마석의 성능 때문에 중급 악마가 이렇게 강해졌던 걸까?
셋이서 상대하면서 자신은 그나마 멀쩡했지만, 다른 둘의 상처는 꽤 심각했다.
아린은 혈마석을 쥔 채로 집중했다. 더 강한 혈마석으로 만들어서 그런지 그 위치를 더 잘 파악할 수 있었다. 방향과 거리를 읽은 아린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혈마석을 쫓아가다 보면 라그록스를 만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던 아린의 귓가로 덱스의 투덜거림이 들렸다.
“에드가 있었으면 상대하기 쉬웠으려나?”
덱스의 말에 아린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론을 구하러 간다고 떠난 지 시간이 꽤 지났는데 아직 새로운 소식은 들어온 것이 없었다.
에드에게 별일이 생길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만 아론의 안위가 걱정이었다. 성기사도 죽일 수 있을 정도의 자들이 쫓고 있는 것을 보면.
제발 무사히 만났기를.
그리고 둘 다 아무런 일 없이 웃으며 볼 수 있기를 바라며 아린은 죽은 악마를 성화로 태웠다. 성화로 악마를 완전히 태워버린 아린은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검은 하늘에 총총히 박혀 빛나는 별들을 보며 아린은 에드를 떠올렸다.
충원 요청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가까운 도시에는 신전 대신 교회가 있었다. 교회 정도로는 안심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이 신전 안으로 들어갔을 때 에드는 디에고와 함께 가까운 여관을 잡았다. 그래도 도시로 들어왔으니 마물의 위험은 없으니 잠을 청할 수 있으리라.
에드가 디에고와 같은 방에서 짐을 푸는 동안 디에고가 물었다.
“형. 교회에 들어갔으니 아린 누나도 이 소식을 듣겠죠?”
“아론이 무사하다는 소식은 들을 수 있겠지.”
“우리 소식도 전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요.”
에드는 그 말에 디에고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으며 물었다.
“엠마 때문에 그러냐?”
“무, 무슨 소리예요?”
얼굴이 붉어지는 디에고는 확실히 놀리는 재미가 있었다. 에드는 장비들을 꺼내서 손질하며 말을 꺼냈다.
“도시를 습격할 정도로 멍청한 놈들은 아니겠지만, 라그록스의 분위기로 봐서는 무리할 수도 있으니 제리는 소환해 놓고 쉬어.”
“알겠어요.”
성기사들이 아론을 데리고 가면서 이동 속도가 확연히 줄어들었다. 아무래도 에드처럼 옆구리에 끼고 달리지 않고 걸어서 이동하니 속도가 줄 수밖에 없었던 것.
그래서 디에고도 뛰지 않고 걸을 수 있었다. 덕분에 이동 속도는 줄었지만, 별로 피곤하지 않았다.
톰과 제리를 소환한 디에고는 침대에 편하게 누웠다. 이제는 잠을 자면서도 톰과 제리를 소환해 놓을 수 있을 정도로 디에고는 성장했다.
그만큼 성장한 덕분에 아스트론 교단의 사람들은 피해 다녀야 했다.
그렇게 사령들을 소환한 채 잠을 청하는 디에고의 옆에서 에드는 무기를 손질하고는 창문을 통해 지붕 위로 올라갔다. 여관의 지붕 위에서 편히 누운 에드는 가만히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에 총총히 박힌 별들을 보며 에드는 아린의 눈을 떠올렸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아론의 눈동자도 떠올랐다. 아린과는 다른 마치 인간의 눈이 아닌 것 같은 그 눈동자.
눈만 놓고 본다면 ‘신안’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잠시 아론에 대해서 생각하던 에드는 손에 든 화살을 보았다. 신성력이 담긴 단 하나의 화살. 악마 사냥에는 이것만큼 괜찮은 화살이 하나 더 있지만, 그건 쓰는 방법이 다르다.
상대의 피부가 관통만으로도 뚫기 힘들 때. 그만큼 두꺼운 가죽이거나 할 때나 쓸 수 있는 화살.
지금 당장은 성유물급인 이 화살 하나가 확실히 놈들의 숨통을 끊어줄 수 있다. 다만 그것도 볼 수 있을 때나 가능한 일.
아론의 영입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할 일이다.
“지금쯤이면 도착했을 텐데.”
시간이 꽤 지났으니 혈마석의 추적이 끝났을 터. 자신이 없이 일행이 만난 이들. 아린은 분명히 강해졌다.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그런 그녀라면 충분히 놈을 상대할 수 있었을 것 같지만, 걱정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때 제리가 뽀르르 지붕 위로 올라왔다. 그리고 창문으로 쏙 고개를 내민 디에고가 손짓했다.
“형. 오고 있어요.”
에드는 그 말에 도시의 성벽을 바라보았다. 이 간 큰 놈들이 지금 공격해 들어오고 있다는 건가?
“몇 명?”
“셋인데 하나가 이상해요. 이건 뭐 그냥 악마 같은데요?”
“수준까지는 파악이 안 되지?”
“예. 안 돼요.”
에드는 잠깐 고민하다가 말했다.
“교회로 가자.”
에드가 창문으로 들어와 디에고를 안으려고 할 때 디에고가 황급히 손을 내밀며 말했다.
“잠깐만요!”
“왜?”
“그동안 이거 연습했어요.”
뭘 연습했나 바라보니 디에고가 톰의 등에 타고 있었다. 사령은 그 자체가 영체. 사람은 손으로 만지는 것도 힘들다.
그런데 디에고는 태연하게 그 등에 앉았다.
“그게 앉아져?”
“가능하더라고요.”
이러면 기동성이 놀라울 정도로 올라간다. 에드는 디에고가 제리를 사용해서 감지했을 때만큼이나 놀랐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재능충들 사이에 끼어 있으니, 좋다!
“가자.”
에드가 먼저 창밖으로 몸을 날려서 지붕 위를 달려 교회로 가는 동안 디에고는 사령인 톰의 등에 올라탄 채로 뒤를 따라왔다.
처음 타는 톰이라서 바짝 허리를 숙이고 있었지만, 소리도 없이 잘도 쫓아왔다.
그 모습에 헛웃음을 흘린 에드는 교회의 앞에 사뿐히 내려섰다. 에드가 교회로 다가가자 수사들이 그의 앞을 막았다.
“말콤 경에게 전해주십시오. 이곳으로 크로셀의 잔당이 오고 있다고.”
“정말입니까?”
이 수사들은 성기사인 말콤과 알론과 함께 본단에서 나온 이들. 얘기를 듣고는 황급히 한 명의 수사가 안쪽으로 뛰어들어갔다. 잠시 후 교회가 시끌시끌해지더니 말콤과 알론이 아론과 함께 나왔다.
아론은 여전히 뭔가 초탈한 표정에 푸른 눈으로 에드를 보며 미소 지었다.
“따라오셨군요. 이렇게 다시 보니 반갑네요.”
눈으로 ‘볼’ 수는 있지만, 기척까지 구분하지는 못하나 보다. 에드는 그런 아론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말콤과 알론을 돌아보았다.
“셋이 다가오고 있는데 하나가 조금 특별하다고 합니다. 혼자서 상대하기 힘들 것 같아 이렇게 왔습니다.”
“아론 사제를 노리고 온 것이겠군.”
“아마도요.”
사실 아론의 눈만 있으면 된다. 상대가 고작 셋이라면 2초 안에 다 죽일 자신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성기사들에게 그리 전할 수는 없기에 돌려 말했다. 말콤과 알론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그리고는 말콤이 앞으로 나서서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군. 본단에 충원 요청은 했지만, 멜트 시의 신전에서 합류하기로 했으니까. 잘 부탁하네.”
에드는 그 말에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가 말했다.
“저와 디에고는 교회 지붕 위에서 대기하겠습니다.”
“알겠네.”
에드의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데다가 직접 크로셀의 손가락 셋을 꺾은 이니 오발이 나올 리는 없을 터. 그의 지원 사격을 믿고 싸우면 될 거로 여겼다.
에드는 아론에게 다가와서는 말했다.
“아론 사제는 저와 함께 지붕 위로 피하죠.”
말콤도 그 말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아론은 적들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좋을 테니까.
에드는 성기사들의 허락을 구하고는 아론 사제를 옆구리에 끼고 그대로 교회 지붕 위로 올랐다. 그리고 그런 에드를 따라 톰을 탄 디에고도 지붕 위로 올라왔다.
에드는 지붕 위에 세워진 아스트론의 증표에 등을 기댄 채 아론과 디에고에게 바짝 엎드리게 했다. 그리고 기다리니 지붕 위를 달려오는 존재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에드는 그들을 보고 아론에게 물었다.
“보입니까?”
아론은 다가오는 자들을 보다가 눈을 빛내더니 말했다.
“저기 왼쪽에서 오는 자는 배꼽 부위에 있어요.”
에드는 그 말을 듣고 시위에 신성 화살을 걸었다. 민첩을 하나 더 올렸으니 위력이나 속도 모두 전과 비할 수 없었다. 다만 목표를 찾는 것이 어려웠는데 아론 덕에 그것도 해결됐다.
에드가 화살을 쏘자 그 화살은 육안으로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빨랐다. 그렇게 날아간 화살을 보고 달려오던 자가 단검을 꺼내 휘두르는 것이 보였다. 이기어시로 날린 화살이 단번에 그걸 피하고 배를 뚫었다.
“꺽!”
배가 뚫리면서 신성력의 화살이 상대의 혈마석을 부수자 지붕 위에서 툭 떨어졌다. 경험치가 들어오는 것을 느끼며 에드는 돌아온 화살을 받아서 다시 활의 시위에 걸었다.
“그래. 이거지.”
이게 진짜 꿀 빠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