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덱스
발터가 노예 검투사들 사이에 있어서 확실히 해치우기 위해서 이기어시까지 사용한 상황. 오늘 마력 소모가 제법 컸다.
에트리안의 검에 담긴 검기로 복도를 가로막고 있는 저들을 모조리 베어낼 만한 마력을 쏟아냈다가는 마력 탈진이 올 정도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이기어시를 적당히 쓰는 건데.
에드가 발터를 죽인 순간 노예 검투사들이 달려들었다.
에드는 허리에 차고 있던 샐러맨더의 검을 뽑아 들고는 찔러오는 창을 회전하며 피하며 그 손목을 베었다.
“끄악!”
치명상은 아니지만, 무기를 들 수는 없을 정도의 깊이로 벤 에드는 이번에는 몸을 바짝 숙였다.
머리 위로 두 자루의 검이 순서대로 지나갔다. 상대의 허벅지를 연달아 베고 뛰어올랐다. 혼자였다면 구르면서 상대를 베었겠지만, 등에 리프를 업고 있어서 그건 불가능했다.
에드가 뛰어올라 벽을 밟으며 그물을 준비한 상대의 어깨를 베었다.
“아아악! 불! 불이다!”
벽을 차고 반대편 벽으로 넘어가면서 비도를 두 개 뽑아서 던졌다. 두 개의 비도가 뒤편의 검투사들의 손목과 어깨에 차례로 박히자 그들이 신음을 흘리며 물러났다.
벽을 박차고 사선으로 떨어져 내려 휘둘러 오는 도끼를 피한 에드는 상대의 겨드랑이를 베고 지나갔다. 좁은 복도에 서 있던 검투사들이 삽시간에 비명을 지르며 하나둘 전의를 상실해 갔다.
에드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재차 내달린다. 그의 놀라운 감각과 민첩은 등에 한 사람을 업고도 충분히 검투사들을 베어 넘길 수 있었다.
어차피 그들을 죽일 생각은 없었기에 지금 당장 손을 쓰지 못할 정도로만 손을 썼다. 그렇게 복도를 막고 있던 열두 명의 검투사들을 뚫고 나온 에드는 곧장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씨발. 아저씨 뭐야?”
에드는 전당포 주인이라고 농담을 던지는 대신 계속 달렸다. 그렇게 계단을 내려가던 에드는 누군가의 간격 안으로 자신이 들어섰음을 깨달았다. 본능적으로 뒤로 한 걸음 물러났을 때 그가 있던 자리에 투창 하나가 박혔다.
에드는 고개를 돌려 저 멀리 선 이를 볼 수 있었다. 투창을 옆에 꽂아 놓고 있던 사내가 또 하나의 투창을 뽑아 들었다.
에드는 그 모습을 보고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사내는 그 모습을 보고 투창을 든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에드는 망토를 벗고 리프를 묶고 있는 줄을 끊었다. 리프가 바닥에 내려서자 에드가 그녀를 등진 채 말했다.
“여기 있어.”
업고 싸울만한 상대가 아니다.
오른손에 든 샐러맨더의 검을 손안에서 빙글빙글 돌리며 에드가 멀찍이 선 사내에게 다가갔다. 그 모습을 보고 사내가 씨익 웃으며 투창 대신에 허리 뒤에 차고 있던 도끼 두 개를 뽑아 들었다.
사내는 손에서 도끼를 휙휙 돌리며 물었다.
“내 이름은 덱스다.”
리프가 신음을 흘리면서 뒤에서 그에 대해 말해줬다.
“씨발. 현 챔피언이네. 무패의 챔피언 덱스.”
덱스는 도끼로 자신의 헝클어진 머리를 대충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래. 단 한 번도 진 적이 없지. 태어나서.”
가끔 그런 자들이 있다. 규격 외의 존재들. 에드도 탈 인간급이 되었다고 여겼는데 저자는 스탯의 도움도 없이 저만한 경지에 올랐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투창을 들고 있던 덱스의 간격을 읽기 무섭게 날아든 투창은 에드가 주의하고 있었음에도 아슬아슬하게 피할 수 있을 만큼 빨랐다. 지금 당장 싸우는 법만 알려주면 중급 악마와도 혼자 싸울 만한 녀석을 이렇게 만날 줄이야.
에드는 검으로 덱스를 겨누며 말했다.
“너 정도 되면 상처 없이 제압하기 힘들어. 그러니 길 비켜주지?”
덱스는 그 말에 씨익 웃었다.
“발터를 죽였지?”
“그래.”
덱스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럼 못 비켜주지. 발터 덕분에 나는 원하는 대로 싸울 수 있었거든.”
에드는 그 말에 이 인간이 어떤 인간인지 알 수 있었다.
전투에 타고난 재능을 지닌 자. 그리고 그 재능을 스스로 깨닫고 즐기는 자. 싸움에 미친 자다.
이런 자들은 말이 통하지 않는다.
에드는 길게 숨을 토해내고는 마주한 덱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단숨에 거리가 좁혀지면서 서로의 간격이 얽힌다. 이렇게 간격이 얽히는 구간에서 싸우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에드였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비도 정도로 잡을 수 있는 자가 아니었으니까.
에드가 달려드는 것을 보고 덱스가 도끼를 휘둘렀다. 보통의 상대였다면 넉넉히 피했을 텐데 지금은 전력을 다해서 피했는데도 머리카락이 몇 가닥 잘려나갔다.
그렇게 피하면서 휘두른 단검으로 옆구리를 베어가는데 덱스는 왼손에 들고 있던 도끼로 막아냈다.
카칵!
서로 스쳐 지나가기 무섭게 에드는 뒤로 돌며 비도를 던졌다. 머리와 다리를 노린 두 개의 비도.
카캉!
덱스는 두 자루 도끼를 휘둘러 그걸 또 쳐내고 있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틈을 이용해서 에드는 단검을 역수로 들며 그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덱스는 에드가 다가오자 박치기를 날렸다.
검투사답게 검투에 능하다는 것을 대번에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한 번 스쳐 지나가면서 알았다. 자신의 민첩이 덱스보다 조금 더 높다는 것을.
덱스의 이마가 날아드는 것을 보고 에드는 고개를 틀어 박치기를 피하면서 사선으로 단검을 그어 올렸다.
카앙!
손에 들고 있던 도끼를 돌려서 역수로 쥐며 그어 올리는 검을 막아낸 덱스의 입이 귀밑에 걸렸다.
이런 싸움은 해본 적이 없다. 다섯 명이 넘는 노예 검투사들과 싸울 때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짜릿함.
아차 하는 순간에 목이 날아갈 것 같은 짜릿함에 솜털이 오소소 일어났다. 그리고 이 짜릿한 상대를 이겼을 때 느낄 쾌감에 오금이 저리는 느낌이었다.
에드는 단검이 덱스의 왼손 도끼에 걸리는 순간 반대편에서 날아오는 도낏자루를 볼 수 있었다. 도끼를 휘두를 각이 나오지 않아 자루로 관자놀이를 노린 공격이었다.
서로 어깨가 맞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
에드는 위빙으로 머리를 왼쪽으로 기울여 자루를 피해냈다. 그리고 허리를 틀면서 비어있는 덱스의 오른쪽 늑골 아래를 주먹으로 짧게 후려쳤다.
뻑!
리버 샷. 일명 간장 치기.
정확하게 들어간 공격에 덱스의 입이 떡 벌어졌다.
타고난 재능을 가진 자. 별로 맞아보지도 않았을 테니 단련하기도 힘든 리버 샷은 처음 맞아보는 공격이었으리라. 리버 샷에 수그려지는 그의 턱을 향해 에드의 왼손 어퍼가 들어갔다.
빠각!
덱스의 턱이 들리며 눈이 풀렸다. 바닥에 쓰러진 덱스를 내려다보며 에드는 길게 숨을 토했다.
악마라면 모를까 인간 중에서 이만한 강자는 처음 봤다. 이 정도 수준의 천재라면 가만둬도 어떻게든 악마의 시대에 휩쓸리게 되어 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주워가기로 했다.
에드는 덱스가 입고 있던 옷을 벗겨 그의 팔을 뒤로 돌려 꽁꽁 묶은 후에 발목도 꽁꽁 묶었다. 리프를 등에 업고 덱스를 옆구리에 낀 채로 에드는 곧장 몸을 피했다.
테인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발터는 죽였다고?”
“잡혀줄 수는 없으니까요. 함정 파고 기다린 인간이라서 그냥 둘 수는 없었어요.”
“그렇다고 치자고. 그럼 이 자는 왜 잡아 온 건가? 왕도의 챔피언을.”
“알아요?”
“알지. 왕도의 챔피언인데. 왕도에서 펜드래건만큼 유명한 이야. 아니지. 요즘 애들은 펜드래건 보다 이 친구를 더 잘 알지.”
“그래요?”
하긴 저만한 실력을 지녔으니 그럴 만도 하겠다 싶었다. 테인은 고개를 휘휘 내젓고는 말을 이었다.
“노예 검투사의 정점에 선 자네. 트라비아 왕국 대표이기도 하고.”
“뭔가 거창하네요.”
“도시 대항 검투사 대회 및 왕국 대항 검투사 대회에도 참가하는 자니까.”
이거 괜히 주워왔나 싶었다. 그렇게 유명한 놈이라면 그냥 두고 올걸.
테인은 아린이 치료하는 리프를 돌아보았다.
“그래도 저 아이는 잘 구해왔군.”
“조금 늦었죠. 조금만 빨랐으면 맞기 전에 데리고 왔을 텐데.”
리프는 카일과 메르헨을 만나고 긴장이 풀린 건지, 치료받는 동안 잠이 들었다.
아린은 리프의 상처를 치료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설명해줬다.
“상처는 거의 회복됐어요. 내일 아침이면 일어날 수 있을 거예요.”
“감사합니다.”
“고마워. 언니.”
카일과 메르헨의 대답을 들은 아린이 에드에게 다가왔다.
“몸은 어때요?”
“마력을 많이 쓰기는 했는데 그 외에는 멀쩡합니다.”
“다행이네요.”
아린은 자신이 함께하지 못한 것에 아쉬워하는 눈빛이었다. 에드가 멋쩍게 웃을 때 메르헨이 카일과 함께 다가왔다. 메르헨은 에드에게 다가와 주저하다가 말했다.
“고마워. 에드가 원하면 언제든 내가 도우러 갈게.”
메르헨을 동료로 영입은 못 했지만, 이 정도 관계를 만든 것만 해도 오늘의 수고가 충분하다 싶었다.
카일도 깊숙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이 은혜는 반드시 갚겠습니다.”
카일의 실력은 메르헨에 비해 기우는 것이 사실이나 인성이 제대로 박혔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몰락했다고 해도 귀족이 진심으로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경우는 본 적이 없으니까.
에드가 고개를 끄덕일 때 덱스가 깨어났다.
“아으으.”
신음을 흘리며 정신을 차린 덱스가 주위를 돌아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긴 또 어디야?”
에드가 돌아볼 때 덱스는 자신의 손이 묶인 것을 확인하고는 몸을 굴리며 묶인 팔 사이로 다리를 빼내고는 일어났다. 그리고 태연히 손을 묶은 끈을 입으로 풀려고 하기에 에드가 검으로 그를 겨누며 말했다.
“너 그거 풀면 죽는다.”
덱스는 입으로 끈을 문 채로 에드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눈빛이 장난이 아님을 깨닫고는 다시 폴짝 뛰어서 뒷짐을 지고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그곳에 모인 이들을 살펴보았다. 아는 얼굴은 한 명밖에 없었지만, 그곳에 모인 이들이 대충 어떤 이들인지 파악이 됐다.
은은하게 피부 위로 푸른빛이 감도는 여인은 단련된 육체와 함께 뿜어지는 기세로 보아 성기사로 짐작됐고, 자그마한 보라색 머리에 안경을 쓴 소녀는 뭔가 위험해 보였다.
초췌한 안색의 청년도 한가락 해 보이지만, 저만한 실력을 지닌 자들이야 널렸다. 도시의 챔피언이라는 자들이 다 저만큼은 했었으니까.
게다가 자신을 쓰러트린 자. 태어나서 이렇게 누군가에게 맞고 쓰러져 본 적이 처음이었다. 거의 맞는 일이 없이 승부를 냈었으니까.
이런 괴물 같은 이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을 수도 있나 싶었다.
“이만한 이들이 모여서 대체 뭘 하는 거지? 악마라도 잡나?”
에드는 핵심을 꿰뚫는 덱스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악마를 잡지.”
농담으로 건넨 말에 진지하게 답하는 모습에 덱스는 멈칫했다. 사실 혹시나 했다. 그가 아는 얼굴이라고는 이들 중에서 악마 연구가인 테인 밖에 없었으니까.
펜드래건이 워낙에 유명해서 그와 한 번 붙어보려고 도발할 때 그의 옆에 앉아있던 인물이라 기억에 남아있었다.
그리고 일행 중에 성기사가 있기에 넘겨 짚어봤는데 진짜로 악마를 사냥한다는 말에 황당함을 숨기지 못했다.
그거 전설의 3영웅이나 하고 다니던 짓 아닌가?
솔직히 큰 도시에만 살아도 악마를 만날 일이 거의 없다. 큰 도시들에는 교회들이 있다 보니 악마들도 어지간해서는 날뛰지 않으니까.
왕도의 챔피언인 그는 노예치고는 호사스러운 삶을 살고 있었기에 악마를 잡는다는 것은 생각도 못 해봤었다.
덱스가 에드를 빤히 바라보았다.
“진짜 악마를 잡는다고?”
에드가 고개를 끄덕이자 덱스가 잠시 고민하다 물었다.
“악마라는 거. 강한가?”
“강하지. 매번 목숨을 걸어야 하니까.”
덱스는 그 말에 에드를 빤히 바라보았다.
“너만 한 자가 목숨을 건다고?”
“그래. 그게 악마다.”
덱스는 에드가 진심으로 하는 말임을 깨달았다.
에드와 싸우면서 처음으로 죽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리고 그 긴박함에서 오는 짜릿함은 이제 권태로워진 콜로세움에서는 느낄 수 없었다.
죽음을 마주하고서야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걸 매번 느낄 수 있다고?
덱스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나도. 나도 악마를 사냥하게 해다오.”
그래. 그냥 미끼를 던졌을 뿐인데 대어가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