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발터
뒤를 따르는 자는 검술이 뛰어나다고는 여기지 않았다. 단순 비교한다면 에트리안보다 떨어지는 실력으로 보였는데 인솔은 제법인지 그가 몇 번 소리치자 에드가 도저히 싸우지 않고는 피해갈 수 없게 됐다.
에드는 잠깐 고민했다. 그러나 곧 고개를 내저었다.
하고자 한다면 충분히 죽일 수 있겠지만, 저자는 자신의 일을 할 뿐이다. 카르엔 대신을 지키는 수호 기사인가 본데 그런 자를 자신의 일을 하고 있다고 죽여버릴 생각은 없다.
카르엔 대신이 나쁜 짓을 많이 한 것 같으니 그를 돕는 이도 그리 좋게 볼 수 없는 것이 현실이지만, 아직 저자의 죄목은 아는 것이 없으니 일단 살려두기로 했다.
에드는 그리 결정하고는 곧장 자신의 앞을 막는 이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경비병들은 에드가 자신들을 향해 달려들자 창을 찔러 왔다.
살짝 뛰어올라 창대를 밟고 재도약한 에드는 그대로 경비병들의 머리 위를 뛰어넘었다. 자신들을 뛰어넘는 에드를 보고, 경비병들의 고개가 따라 올라왔다.
에드는 그들의 뒤에 사뿐히 내려서서는 그대로 담벼락을 향해 달렸다.
경비병들이 많다고 해도 정원이 워낙 넓었다. 그러니 포위망을 하나 뚫으니 길이 열린 것.
그때 뒤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에드는 흘끔 뒤를 보고는 인상을 굳혔다. 열 기의 기마가 달려오고 있었는데 명령을 내리던 수호 기사도 훌쩍 말에 오르고 있었다.
“치사하게 나오네.”
말을 타고 쫓아오면 아무리 에드라고 해도 떨쳐내기 쉽지 않다. 활이라도 있었다면 말을 쐈겠지만, 지금은 그것도 없다. 에드가 담벼락을 향해 달리는데 뒤에서 달려오는 기병들이 활을 뽑아들고 있었다.
에드는 계속 달리면서 날아오는 화살을 피해냈다. 그렇게 한 차례 화살을 피한 에드는 그대로 담벼락을 향해 뛰어올라 벽을 한 번 차고 간단히 담을 넘어 전력으로 내달렸다.
에드가 향한 방향은 펜드래건의 저택과 반대 방향이었다. 저들의 시선은 확실히 끌었지만, 몸이 성치 않은 카일이 아직 도착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큰 데다가 저들의 시선을 조금 더 돌릴 필요가 있었다.
에드가 담벼락을 따라 달리니 정문이 열리고 기병들이 튀어나왔다. 그들을 흘끔 돌아본 에드는 그들이 보는 앞에서 반대편 저택의 담벼락에 올라 담벼락을 따라 달렸다.
곡예와 같은 모습이었지만, 그 속도는 말이 달리는 속도보다 전혀 느리지 않아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다.
“병사들을 풀어 모든 길을 막아라!”
에드는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찮아졌음을 깨달았지만, 달리던 담벼락 아래로 뛰어내린 후에 소란에 깨어나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주택가를 빠져나갔다.
귀족들이 사는 주택가를 벗어난 에드는 불이 꺼진 상점가를 달렸다. 소란을 뒤로하고 에드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밖에서 들리는 소란의 정체를 들은 테인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래서 카르엔 대신의 생사는?”
“목숨은 붙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럴 거면 아예 죽여버리지. 왕도가 들썩이겠군.”
에드가 찾아서 보낸 카일이 데리고 온 이는 테인도 아는 이였다. 가도 공이라고 남부 귀족 연합의 배신의 증거로 꼽혔던 이였다. 마젤타 왕국으로 넘어갔다고 알려진 그가 카르엔 대신의 지하에 갇혀 있었다?
이거 알려지면 카르엔에게 한 방 먹일 수 있는 일이기는 한데 카르엔이 암습을 당한 것 때문에 왕도가 발칵 뒤집힐 거다.
테인이 머리를 싸매고 있을 때 열린 창문을 통해 에드가 불쑥 들어왔다.
“어이 씨! 깜짝이야!”
테인이 기겁하는 것을 보고 에드가 옷을 툭툭 털며 말했다.
“카일의 상태는 어때요?”
“자네 카르엔 대공 암습은 어떻게 된 건가?”
에드는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그냥 시선 좀 돌리려고 돌팔매질 한 번 했어요. 죽지는 않았을 걸요?”
테인은 그 말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차라리 죽이지 그랬나?”
“어? 죽여도 됐어요?”
“그런 말이 아니지 않나!”
테인은 갑갑하다는 듯 가슴을 두드리더니 말했다.
“제 얼굴을 못 봤을 겁니다. 그보다 사람 하나 찾아주세요.”
“얼굴은 못 봤다니 그나마 다행이군. 그럼 복장은 알아봤을 테니 복장은 바꿔야 할 것 같은데.”
“노예 상인 발터. 그 새끼 어디 삽니까?”
에드는 현대를 살다와서 그런지 노예라는 제도 자체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것이 합법이라는 것도 놀라웠지만, 사람을 사고 파는 놈에게 고운 말이 나올 리 없었다. 테인은 말을 돌리는 것에 인상을 살짝 찌푸렸지만, 카일이 메르헨에게 했던 말을 떠올리고 답해줬다.
“발터라면 노예 상인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자일세. 그는 원형 경기장에서 지낸다네.”
왕도에 원형 경기장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노예 검투사들의 검투 대회도 열리고 한다는 것도.
“그곳에 노예들도 모아 놓습니까?”
“그곳은 검투 노예 육성부터 일반 노예들도 모아놓지. 하지만 그는 아무 노예나 구하는 것이 아니라 검투 노예가 아니라면 귀족들만 살 수 있는 특별한 노예를 모아 놓지.”
“알겠습니다.”
“어디 가려고 그러나?”
“가서 리프도 구해와야죠.”
테인이 그 말에 주저하며 말했다.
“거기는 조금 위험한데.”
이게 무슨 말인가 싶어서 바라보니 테인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검투 노예들이 못해도 100명은 있는 곳이네. 그중에는 챔피언도 있고, 그를 호위하는 검투 노예들도 만만치 않은 자들일세.”
에드는 그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발터를 죽이러 가는 게 아니라 리프를 구하러 가는 겁니다. 무슨 걱정을 그렇게 사서 하십니까?”
테인은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에드는 그를 지나쳐 아린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아린은 가도 공을 치료하고 있었다. 뼈가 드러날 정도로 상처 입었던 그의 상태는 많이 호전되어 있었다.
뼈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새살이 돋아난 것을 보면.
아린은 엄청난 신성력을 보유하고 있지만, 회복 주문은 그녀가 주력으로 다루는 주문이 아니다. 그냥 기본 회복 주문으로 거의 죽어가던 자를 살렸으니 성녀라고 불러도 되리라.
가도 공의 옆에는 카일도 의자에 앉아있었고, 그런 카일의 옆에 메르헨도 있었다.
에드가 안으로 들어오자 카일과 메르헨이 벌떡 일어났다. 에드는 손을 들어 그들이 다가오는 것을 말리고는 아린에게 다가가 물었다.
“상태는 어때요?”
“상처는 회복했지만, 일어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릴 거예요.”
몇 년간 저주를 당한 상태로 지내왔고, 제대로 먹지도 못했으니 일어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릴 터였다. 게다가 이미 정신도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을 테고.
아린은 가도 공의 몸에 붕대를 감는 것을 마무리하고는 에드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이 푸르게 불타오르는 것 같았다.
“이거 대체 누가 벌인 짓이죠?”
에드는 가만두면 칼부림이라도 낼 것 같은 아린의 모습에 쓴 웃음을 지은 채 답했다.
“일단 제가 한 방 먹여줬으니 진정해요. 그리고 지금은 그보다 먼저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요.”
“리프를 구하러 간다고 했죠? 이번에는 제가 같이 갈게요.”
에드는 고개를 내저었다.
“당신은 너무 눈에 띄어요.”
에드가 그림자라면 그녀는 빛과 같은 존재다. 힘 좀 쓰려고 하면 푸른 빛이 뿜어져 나올 텐데 그녀를 데리고 갈 수는 없었다.
전면전이라면 그녀만 한 전위가 없지만, 지금은 전면전을 벌일 때가 아니니까.
에드는 코트를 벗으며 테인에게 물었다.
“혹시 비도를 꽂을 수 있는 가죽 띠가 있습니까?”
“잠깐만 기다리게.”
테인은 집사장에게 말을 전했고, 그 뒤에 에드를 보며 말했다.
“오늘 넘어갔다고 하면 험한 꼴 당하기 전에 데려오는 것이 좋을 걸세.”
노예 상인에게 넘기기 전에도 저주술사를 데리고 있던 카르엔 대신이 무슨 짓을 했을지 모르지만, 노예로 끌려가면 어떤 꼴을 당할지는 짐작이 갔다.
귀족에게 파는 상품이다 보니 순종적으로 만들어야 하니 좋은 꼴 보기 힘들 터.
잠시 후 집사장이 비도를 꽂을 수 있는 가죽 띠를 가져왔다. 코트처럼 많은 수의 비도를 꽂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여섯 개의 비도가 꽂혀 있는 가죽 띠였다.
솔직히 현철 비도는 아쉬워서 잘 못 던지고 있었는데 잘 됐다 싶었다. 에드는 가죽 띠를 왼쪽 어깨부터 사선으로 걸치고, 그 위로 그림자 망토를 둘렀다.
비도를 24자루나 꽂아 두었던 코트를 벗었더니 몸이 홀가분한 느낌이다.
에드가 일행을 돌아보며 말했다.
“리프도 구해올 테니 기다려.”
메르헨이 잠시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나도 같이 가면 안 돼?”
“은밀하게 다녀올 거라서 안 돼.”
전면전이라면야 신비술사의 도움이 절실할 터. 하지만 지금 필요한 것은 은밀함이다.
“그럼 부탁할게.”
에드는 씨익 웃고는 메르헨의 머리를 헝클어줬다.
“다녀올게.”
의자에 묶인 난쟁이 여인. 헝클어진 갈색의 짧은 머리 사이로 보이는 갈색 눈동자는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이거 안 풀어!”
중년의 미남이 자신의 턱수염을 긁적이며 말했다.
“외모도 뛰어난 데 저 놈의 입이 문제군.”
“발터. 이 거지 발싸개 같은 새끼야! 이거 불법인 거 몰라?”
발터라 불린 미남자는 눈가에 주름을 만들며 웃었다.
“상등품을 얻으려면 그만한 노력은 들여야지.”
발터가 다가와 난쟁이 여인 리프의 턱을 잡고 들어 올린 후에 내려다보며 말했다.
“귀한 상품에 흠집은 내고 싶지 않지만, 이런 식이면 곤란해.”
“퉷!”
리프는 침을 뱉었고 발터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리프는 그 모습에 웃음을 터트렸다.
“소문대로군. 결벽증이라고 하더니.”
발터는 손수건으로 피부가 벗겨지도록 문대면서 소리쳤다.
“너, 너! 감히!”
리프는 어쩔 거냐는 듯 바라보았다. 발터는 멀찍이 떨어져서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벌주를 원한다면 어쩔 수 없지.”
발터가 손짓하자 그의 뒤편에 서 있던 까무잡잡한 피부의 근육질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내일 아침까지 고분고분하게 만들어 놔.”
“조금 험하게 다뤄도 괜찮겠습니까?”
“병신만 안 만들면 괜찮아. 어지간한 상처는 치료하면 되니까. 하지만 저 버르장머리는 고쳐놔.”
“알겠습니다. 들어가서 쉬시죠.”
발터는 리프를 경멸하는 눈빛으로 내려다보며 말했다.
“내일 아침에도 똑같이 굴 수 있는지 보겠다.”
발터가 물러나자 리프는 앞에 선 근육질 사내를 바라보았다.
“샤프트. 전대 챔피언이 이런 짓이나 하고 쪽팔리지 않아?”
리프의 물음에 샤프트라 불린 사내는 허리에 걸고 있던 채찍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대답조차 하지 않고 채찍을 휘둘렀다.
쫘악!
리프가 입고 있던 옷이 찢어지고 새하얀 살결이 터지며 핏물이 치솟았다. 리프는 어금니를 깨물고 비명조차 지르지 않고 눈에 독기만을 품은 채 샤프트를 노려보았다.
샤프트가 재차 채찍을 들어 올릴 때 그녀가 입을 열었다.
“너 그거 휘두르면 내가 반드시 너 죽인다.”
샤프트는 대답도 하지 않고 다시 채찍을 휘둘렀다.
쫘악!
얼굴에는 상처를 입히지 않지만, 리프의 몸에는 또 한줄기 깊은 상처가 남았다.
“너 이 새끼. 내가 너랑 발터 그 개새끼는 반드시 죽인다.”
샤프트가 재차 채찍을 들어 올렸다. 리프는 지금껏 이 독기로 살아왔다. 미녀 난쟁이가 살아가기에 세상은 녹록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샤프트의 채찍을 이대로 몇 대만 더 맞으면 목숨이 오갈 것 같았다. 건장한 근육질의 인간 노예들조차 채찍질 몇 번이면 사경을 헤매니까.
리프는 샤프트를 독기 어린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또다시 채찍이 날아들려고 할 때 눈조차 깜빡이지 않으려고 했던 리프는 허공에서 날아들려던 채찍이 힘을 잃고 출렁이는가 싶더니 바닥으로 처지는 것을 보았다.
무슨 일인가 싶어 바라보는데 샤프트의 목에 실선이 그어지더니 머리가 데구르르 굴러서 바닥에 떨어졌다.
“어?”
헛것이 보이나 싶었는데 굴러온 샤프트의 머리가 발에 부딪히며 이것이 현실임을 깨달았다.
“리프?”
리프가 시선을 들어 입구를 바라보자 한 사내가 검을 든 채 다가오며 묻고 있었다.
“맞는데. 누구?”
에드는 검을 휘둘러 그녀의 손목과 발목을 의자에 묶어 놓았던 끈을 잘라내고는 검집에 검을 돌려놓으며 답했다.
“메르헨의 부탁으로 왔다.”
리프는 그 말에 눈에서 독기가 풀렸다. 에드는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걸을 수 있겠나?”
리프는 일어나려다가 인상을 와락 쓰며 비틀거렸다. 채찍질의 여파가 너무 컸다.
“무리겠는데?”
에드는 한숨을 내쉬고는 쓰러진 시체의 옷을 찢어서 리프를 업은 채로 꽁꽁 묶었다. 그리고 그림자 망토를 두른 채로 밖으로 나왔는데 복도에는 검투사들이 즐비했다.
들어올 때 은밀히 들어왔는데 검투사들은 무기까지 들고 있는 것을 보면 준비가 되어 있었다.
에드가 인상을 굳힌 채 바라보자 검투사들 뒤에서 발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늘 카르엔 대신이 습격받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혹시나 해서 애들을 준비시켰지. 그래서 그년을 가둔 방은 창문도 없는 지하에 뒀고, 준비해 둔 보람이 있군.”
발터가 떠드는 모습에 등 뒤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이 개만도 못한 새끼가 날 미끼로 쓴 거냐?”
에드는 발터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길을 열어라. 그럼 유혈 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발터가 그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카르엔 대신을 습격한 놈답구나. 그 배짱은 마음에 들었다. 내 노예가 된다며···억.”
발터의 이마에 비도가 꽂힌 채 쓰러지는 순간 에드가 에트리안의 검을 뽑아 들고 복도를 막고 있는 검투사들을 향해 뛰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