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메르헨
에드는 오랜만에 방에서 편히 잠을 청하고 있었다. 이곳은 왕도에서도 펜드래건의 대저택.
날고 기는 악마라고 해도 찾아올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지금까지 네프사엘은 잠을 못 자게 한다고 꾸준히 마물을 보내고 있었지만, 그 수가 현저히 줄어든 것을 보니 어째 별것 없어 보였다.
그렇게 잠을 청하던 에드는 문득 감각에 걸리는 것이 있음을 느끼고, 빙결의 활과 빙결의 화살집을 채여 든 채 방밖으로 뛰쳐 나갔다.
복도를 달리고 있으려니 아린도 편한 옷차림에 방패와 성검을 들고 달려오는 중이었다. 둘이서 눈을 마주치고 달려간 곳은 소피아의 방이었다.
방문을 걷어차고 안으로 들어간 에드는 화살을 시위에 걸고 방안을 살폈다. 그리고는 허공에 떠 있는 디에고를 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디에고를 끌어안고 있는 영체였다. 반투명한 형태의 영체는 익숙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에드는 영체에게 화살을 겨눈 채 물었다.
“후안?”
에드의 부름에 허공에 떠 있던 영체의 시선이 에드를 향했다.
-이렇게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군.
“날 기억하나?”
-그럼 내 아들을 부탁하지 않았던가? 디에고가 품고 있던 씨앗이 잘 깨어났군.
에드의 뒤에 서 있던 아린이 진지하게 방패를 던져야 하나 고민했다. 그렇게 멋있게 죽어놓고 이렇게 다시 튀어나와도 되는 거냐고 묻고 싶었다.
에드는 화살을 거두고 후안에게 물었다.
“디에고 내려놓고 얘기하지.”
-미안하군. 오랜만이라 너무 반가운 마음에 그만.
후안이 디에고를 내려놓고 옆에 누워있는 소피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에 에드가 기가 막혀 하며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후안의 시선이 디에고가 검지에 끼고 있는 반지를 향했다.
-이 반지는 오직 내 힘을 이은 이만이 낄 수 있지. 세상에 디에고만 낄 수 있는 반지다. 그리고 이 반지를 끼었기에 마기의 씨앗은 조금 더 일찍 발아하기 시작했고, 그 씨앗이 발아하니 반지의 힘이 깨어났지. 그리고 그 힘이 나를 불러냈다.
에드는 기가 막혔다. 디에고가 가진 사령의 기운이 비록 영체라고는 하나 상급 악마인 후안을 불러냈다.
에드는 후안의 위아래를 살피고는 물었다.
“디에고가 널 사역할 수 있다는 건가?”
-이제 막 깨어난 힘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나 내가 응했기에 가능한 일이지.
에드는 가만히 후안의 격을 살펴보았다. 상급 악마 시절의 힘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영체니까 물리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만큼 전처럼 강한 힘을 내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기본이 상급 악마였다.
적어도 중급 악마 정도는 간단히 찜 쪄 먹을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디에고가 당신을 소환할 수 있다?”
-맞아. 하지만 지금 디에고의 마기는 이제 막 싹을 피운 정도에 불과해. 너무 보고 싶어서 이렇게 급하게 현현했지만, 지금 마기로는 3분이 한계지.
“3분이면 중급 악마 정도는 잡을 수 있나?”
-쉽지는 않아. 내가 힘을 쓰면 그 시간은 크게 줄어들 테니까. 그래도 중급 악마 정도는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에드는 그 말에 후안이 했던 말이 농담이 아니었음을 알았다. 디에고가 스스로 공을 세울 거라고 하더니 짧은 시간이라도 후안이라는 상급 악마의 영체를 소환할 수 있게 되었다.
후안은 몸이 점점 흐려지며 에드와 아린을 돌아보았다.
-앞으로도 잘 부탁하지.
후안의 몸이 완전히 사라졌다. 에드는 침대에 다시 떨어진 디에고를 잘 눕혀주었다. 에드는 이 소란 속에서 소피아가 깨어나지 않은 것을 보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여행이 힘들었나 보네요. 이 난리 속에서도 깨어나지 않은 것을 보면.”
에드는 디에고에게 이불을 덮어주고는 아린과 함께 방을 나왔다. 그들이 떠나고 나자 소피아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녀는 손을 내밀어 디에고의 손에 낀 반지를 만졌다.
이제 마음을 놓을 수 있게 되었다. 후안은 죽어서도 디에고를 지켜주고자 함을 알았으니 되었다.
또르륵 흐르는 눈물을 삼키며 소피아는 디에고를 품에 안아주었다.
아침에 눈을 뜬 디에고는 소피아가 먼저 일어나 침대에 앉은 채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어딘가 홀가분해 보이는 모습에 디에고가 몸을 일으켰다.
“엄마. 먼저 일어나셨어요?”
소피아는 손을 내밀어 디에고의 뺨을 어루만졌다.
“디에고. 잘 잤니?”
“예. 엄마는요?”
“엄마도 잘 잤지. 오늘은 집 구경도 하고 같이 왕도 구경도 갈까?”
“그래요.”
디에고는 이곳까지 오면서 조금씩 생기를 찾아가던 엄마가 이제 완전히 생기를 되찾은 것을 깨닫고는 환하게 웃었다. 뭐가 엄마를 힘내게 했는지 모르겠지만, 잘된 일이라 여겼다.
“그래요. 맛난 것도 사 먹고 그래요.”
디에고는 소피아를 와락 안고는 환하게 웃었다. 그런 디에고의 머리를 소피아도 천천히 어루만져 주었다.
아침 식사 시간에 디에고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형. 저 오늘 엄마랑 왕도 구경하고 와도 돼요?”
에드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아린은 오늘 할 일이 있나요?”
“왕도에는 아스트론 교단의 대신전이 있어요. 베네딕토 대주교님이 계셔서 뵙고 오려고요. 저희 남매한테 중요한 분이시거든요.”
에드는 아론이 건네준 증표를 준 이가 베네딕토 대주교였다는 말을 떠올렸다. 아마도 아론과 아린 둘을 아스트론 교단으로 이끈 은인 같은 존재일 터.
에드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디에고를 돌아보았다.
“그럼 오늘은 형이랑 구경가자. 형도 왕도는 처음이라서.”
그 말을 듣고 테인이 입맛을 다셨다.
“아쉽군. 자네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이 많았는데.”
“오늘은 디에고와 소피아 데리고 왕도 구경이나 다녀오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오랜만에 돌아왔더니 처리해야 할 일들이 있더군.”
테인은 그리 말하고는 집사장에게 손짓했다. 테인의 뒤편에 서 있던 집사장이 다가오자 그에게 뭐라고 속삭인 테인은 식사를 마치기 전에 돌아온 집사장이 건넨 주머니를 에드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왕도 구경하면서 군것질이라도 하라고 용돈 좀 넣어뒀네. 점심은 밖에서 해결하고 올 건가?”
무게를 보아하니 적어도 30골드는 넣어준 것 같았다. 하급 악마를 잡아도 잘 받아야 10골드 내외를 벌던 때를 생각하면 역시 사람은 큰물에서 놀아야 한다는 것이 떠올랐다.
“그러죠. 추천해주실 식당이라도 있습니까?”
“걸어 다니기에는 넓으니 오늘 하루 더그랑 같이 움직이게. 왕도가 넓어서 마차 없이는 구경도 힘들 테니까.”
“잘됐네요. 혹시 그란트에게서 연락 온 것은 없습니까?”
“사흘쯤 걸린다는 연락은 있었네.”
이틀 후에 펜드래건을 만나고 사흘 후에 그란트를 만난다면 왕도에서의 일은 대충 끝날 수 있으리라.
“그럼 아침 먹고 다녀오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아침을 먹고 나오니 아린은 말을 한 필 얻어 탄 상태였다. 대신전에 가는 길은 알고 있다고 해서 아린은 따로 움직이기로 했다.
“그럼 저녁에 봐요.”
아린이 고개를 끄덕이고 먼저 말을 몰아 떠나갔다. 그리고 더그가 모는 마차에 디에고와 소피아와 함께 올랐다. 마차의 크기는 이두 마차로 크지 않았지만, 그 문양이 왕가의 문양이 박힌 마차라 왕도를 달리는 동안 막힘 없이 달릴 수 있었다.
디에고는 마차의 창문에 얼굴을 내밀고, 왕도를 구경하면서 소피아에게 이것저것 설명해주기 바빴다. 소피아는 그런 디에고의 말을 들으며 맞장구를 쳐주고 있었는데 눈이 마주치니 희미한 미소를 지어주는 게 어젯밤 자는 척한 걸 눈감아 줬다는 걸 아는 모양이다.
그래도 후안이 등장한 덕분인지 그녀는 남은 시간을 디에고와 추억을 쌓으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녀가 기운을 차린 것을 보니 에드도 마음이 놓였다.
마차 밖에서 더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혹시 가보고 싶은 곳이 계십니까?”
에드는 디에고와 소피아를 돌아보았다. 둘이서 추억을 만들고자 한다면 이곳에 그만한 곳이 없을 것 같았다.
“혹시 가족이 구경할 만한 곳이 있습니까?”
“인형극과 오페라가 있는데 오페라는 저녁에만 열립니다.”
“그럼 인형극 하는 곳으로 가주세요.”
“그러죠.”
인형극이라는 말에 디에고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인형극은 생일 때만 가서 볼 수 있었는데 그거 극단이 와야지만 볼 수 있는 건데.”
“인형극을 봤다고?”
“아빠가 보여줬었어요.”
디에고는 말하고 아차 싶었는지 소피아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는 미소를 지은 채 디에고의 손을 잡아주고는 대신 답해줬다.
“애 아빠가 생일날에는 꼭 보여줬었어요. 그때 맞춰 오는 극단이 있어서 매해 볼 수 있었어요.”
그 말을 들었는지 밖에서 더그가 마차를 몰면서 말했다.
“왕도에는 다섯 개의 상설 극장이 있습니다. 혹시 좋아하는 인형극이 계십니까?”
디에고와 소피아가 동시에 답했다.
“자유 기사 펜드래건 연대기요.”
더그가 맑게 웃었다.
“자유 기사 펜드래건 연대기는 왕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인형극 중 하나입니다. 상설 극장이 있으니 그리로 모시죠.”
에드는 황당하다는 듯 서로 눈을 마주친 채 환하게 웃는 디에고와 소피아를 바라보았다. 이 사람들 어젯밤을 보낸 곳이 펜드래건의 집이라는 걸 모르는 건가?
특별히 말해준 적은 없었지만, 가장 좋아하는 것이 펜드래건일 줄은 몰랐다.
“형도 같이 갈 거죠?”
“아니. 극장에 있는 동안 따로 볼일 보고 올게. 끝나기 전에 올 테니까 엄마랑 재미있게 봐.”
소피아는 입 모양만으로 고맙다고 했다. 에드는 흘끔 마부석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더그의 실력은 명확히 보지 못했지만, 이 둘을 지키기에는 충분하리라.
에드는 오늘 테인이 주었던 주머니를 소피아에게 쥐여주며 말했다.
“인형극 보면서 맛있는 것 사드세요. 거기 있는 돈 오늘 다 쓰셔도 되니까 좋은 시간 보내세요. 가고 싶은 곳, 필요한 것 있으면 더그에게 말하면 들어줄 겁니다.”
소피아는 주머니를 받아서 품에 넣었다.
에드는 흘끔 밖을 바라보고는 더그에게 말했다.
“잠깐 마차 좀 세워주세요?”
마차가 멈추자 에드는 문을 열고 내려서는 디에고를 돌아보았다.
“재미있게 놀아. 이따 보자.”
“이따 봐요.”
에드가 마차에서 한 걸음 물러났을 때 더그가 마부석에서 돌아보며 말했다.
“자유 기사 펜드래건의 연대기는 왕도 중심 거리의 달 그림자 극장에서 하고 있습니다. 두 시간짜리 인형극이니 시간 맞춰서 오시면 될 겁니다.”
“두 시간 후에 극장 앞에서 보죠.”
에드는 마차가 멀어지는 동안 창밖으로 손을 흔드는 디에고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마차가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던 에드는 고개를 돌려 왕도를 바라보았다.
왕도 내의 대로 위에는 뭐가 그리 바쁜지 사람들이 주위를 살피는 이도 없이 걷고 있었고, 대로 위로는 마차와 말들이 오가고 있었다.
누구 하나 여유 있게 주위를 살피는 이가 없었다. 에드는 그런 거리를 걸으며 어디서 시간을 보낼까 고민했다. 오늘은 디에고 모자가 함께할 시간이니까.
그렇게 걷던 에드는 향긋한 냄새에 이끌려 걸음을 옮겼다. 조금 걷다 보니 먹자골목이 모습을 드러냈다. 에드는 그곳을 걸으며 구경을 시작했다.
가장 구미를 당기는 것은 역시 불향이 가득한 꼬치구이였다. 에드는 꼬치구이를 집으며 물었다.
“이거 얼마죠?”
“하나에 50쿠퍼입니다.”
눈이 튀어나올 정도의 가격이다. 역시 왕도의 먹자골목. 에드는 1실버를 던져주고 두 개의 꼬치구이를 집어 들었다. 한입 베어 물자 불향이 가득해서인지 입맛에 잘 맞았다.
먹자골목에는 군것질거리부터 요기하기에도 충분한 것들이 많아서 심심풀이로 하나씩 맛볼 생각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랜만에 머리를 식히기 좋겠다고 여기고 걸음을 옮기는데 섬뜩한 시선을 느꼈다.
마치 맹수를 마주한 것 같은 시선에 에드는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돌아보았다. 왕도의 먹자골목에 맹수가 돌아다닐 리는 없으니 누군가 싶어 돌아보던 에드는 쪼그려 앉아있는 소녀를 발견하고 흠칫 놀랐다.
떡 진 보라색 머리에 며칠은 굶었는지 볼은 홀쭉했고, 안경은 한쪽 알이 금이 쩍 가 있었다. 그러나 안경 너머로 보이는 눈빛은 에드의 손에 들린 꼬치에 고정되어 있었다.
에드가 혹시나 해서 꼬치를 흔들어 보니 눈동자가 잘 따라왔다. 에드는 그 모습에 한숨을 내쉬고 소녀에게 꼬치를 내밀었다. 소녀는 꼬치를 보다가 고개를 들어 에드를 바라보았다.
“나 주는 거야?”
에드가 고개를 끄덕이자 소녀는 주저하다가 다가와 번개처럼 낚아챘다. 그리고 꼬치를 흡입했다. 저렇게 먹어서는 맛이고 뭐고 못 느낄 거 같았는데 한입에 꼬치를 집어넣고는 우물우물 볼을 부풀리며 먹었다.
입술을 꼭 다문 채 오물거리는 모습이 귀여웠다. 대체 왕도에서 이런 거지꼴로 돌아다니는 이 소녀는 뭔가 싶었다. 나이는 디에고보다 많아 보였지만 그래 봐야 열네댓 살밖에 되어 보이지 않았다.
요런 소녀가 그런 맹수와 같은 눈빛을 보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이름이 뭐야?”
꼬치를 오물거리던 소녀가 경계의 눈빛으로 에드를 바라보았다. 불쌍해 보여서 꼬치 하나 던져줬더니 영 반응이 마뜩잖았다. 꼬치 하나 적선했다 치고 갈 길 가기로 했다.
에드가 일어나 먹자골목의 다른 군것질거리를 찾아 걸었다. 그런데 그런 에드의 망토를 소녀가 잡았다. 에드가 돌아보자 소녀가 입에서 씹고 있던 것을 꿀꺽 삼키고는 답했다.
“메르헨.”
에드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을 거는 메르헨을 내려다보았다. 메르헨은 에드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도와줘.”
“싫···.”
에드는 이 반말하는 꼬맹이의 손을 탁 뿌리치고 군것질이나 하러 가려고 했다. 그녀가 자신의 망토를 잡느라 손을 들어서 벌어진 그녀의 망토 사이로 척 봐도 예사롭지 않은 오브가 꽂혀 있었다.
최소 명품 이상.
이 소녀 신비술사다. 왕도에서 배곯고 있는 신비술사.
“뭘 도와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