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희생
상급 악마라고 하나 지금 저 몸 상태로 흡수한다고 쳐도 몸이 견딜 수 있을까? 저 몸은 그대로 폭발하는 것이 아닐까?
그 마기와 사령의 기운이 도시를 파괴하지 않을까?
아니면 다른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그런 에드의 고민을 읽었는지 후안이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그리고 내가 모든 힘을 거두거든 날 죽여라.”
아린과 에드가 아무런 말도 못하고 바라보자 후안이 양손으로 자신의 몸을 가리키며 말했다.
“놈에게 당한 상태라 몸에 이 마기와 사령의 기운을 회수해도 버틸 수 없어. 그리고 내가 폭주하게 된다면 도시가 사라지는 데는 하루도 걸리지 않아.”
상급 악마 하나의 힘이라고 하기에는 과하나 사령의 힘을 지닌 자라면 얘기가 다르다. 죽는 이가 늘어날수록 그는 더 강해질 테니까.
후안은 그만큼이나 위험한 자였다.
그가 소피아를 사랑하고 디에고를 낳아 빈민가를 개혁하면서까지 사랑을 지키지 않고 다른 악마처럼 굴었다면 저자는 도시 하나를 하루도 걸리지 않아 끝장낼 수 있는 자다.
그랬다면 평생을 쫓기다가 죽었겠지만, 그 또한 쉽지 않았으리라. 직접 만난 상급 악마는 에드 혼자서는 죽일 자신이 없을 정도로 강해 보였다.
중급 악마와 상급 악마의 차이가 이렇게 클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중급 악마는 이제 혼자서도 간단히 잡기에 상급 악마를 만나도 해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싸우면 목숨을 걸어야 할 상대다.
저쪽에서 이미 시체들을 이용해 군대를 만들었다면 싸워 볼 것도 없이 도망쳐야 할 정도의 수준.
하지만 지금 후안의 상태는 어찌어찌 해볼 수 있을 것 같은 상태였다. 게다가 스스로 죽여달라고 했으니 저항하지만 않는다면 어떻게든 죽일 자신이 있었다.
후안은 양팔을 벌리고는 말했다.
“대신 부탁이 있다.”
“말해.”
도시 하나를 살리는 대가로 하는 부탁. 악마의 부탁이라면 해머부터 휘두를 것 같았던 아린이 먼저 물었다.
후안의 시선이 아린과 에드를 번갈아 보더니 말했다.
“디에고를 부탁한다.”
아린의 눈썹이 꿈틀거렸고, 에드도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어 되물었다.
“무슨 소리야?”
“내가 원한 것은 아니나 그 아이에게는 내 씨앗이 전해졌다. 그리고 그건 성기사나 사제들이 알면 불에 태워 죽이려고 하겠지.”
아린은 그 말에 아무런 답도 하지 못했다. 자신이야 씨앗을 확인하고 고민했지만, 실제로 다른 성기사나 사제들 눈에 띄었다면 디에고는 고민도 없이 그 자리에서 죽었을 일이다.
후안의 시선이 아린에게 고정되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내가 죽으면 그 씨앗은 시간을 두고 개화할 거다. 그때가 되면 아마 아스트론 교단에서 내 아이를 찾아내 죽이려고 하겠지. 그러니 부탁한다. 디에고를.”
아린은 그 말에 인상을 굳혔다. 악마의 힘이 깨어나면 아무리 성기사인 그녀라고 해도 보호해주기 어렵다. 어쩌면 자신의 손으로 죽여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아스트론의 이름으로 약속해다오.”
“난 성기사다. 그건 무리야.”
“꼭 무리는 아니지.”
후안은 미소를 지은 채 말을 이었다.
“그 아이는 온전한 악마가 아니야. 태생 자체가 악마가 아니니까. 허나 그것만으로는 면죄부가 될 수 없을 거다.”
후안이 검지로 아린을 가리켰다.
“날 찾아낸 것을 보면 예언에 따라 움직이고 있지? 그 길에 디에고를 데려가라. 그리하면 그 아이가 공을 세울 것이다. 그 공으로 그 아이의 원죄를 사하게 되리라.”
후안의 붉게 빛나는 눈을 보며 아린은 입을 열지 못했다. 가만히 그를 바라보던 아린이 억눌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미래를 엿본 건가? 그건 대악마, 별의 악마 페스톨레스의 권능이었는데?”
후안은 그 말에 웃음을 터트리고는 자신의 관자놀이를 톡톡 두드렸다.
“페스톨레스가 인간들에게 예언의 악마라고 불리는 것은 별의 운행을 읽고, 다른 이들보다 명확하게 미래를 보기 때문에 그리 불린 것일 뿐이지. 그리고 지금 내가 한 얘기는 그렇게 심오한 얘기가 아니다. 씨앗을 개화할 아들의 살길이 그것뿐이라 그런 거지.”
후안은 미소를 지은 채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또한 예언이다. 후안 레트리아스가 남기는 최후의 예언!”
그가 전신의 격을 개방하면서 하는 말은 정말 예언처럼 들렸다. 그렇게 소리친 후안의 붉은 눈이 아린을 향했다.
“아스트론의 이름으로 약속하겠는가?”
아린은 가만히 눈을 감은 채 고민에 빠졌다. 성기사의 이름은 무겁고 아스트론의 이름으로 약속한다는 것은 목숨보다 우선해야 하는 일이다.
아린이 눈을 떠 에드를 바라보았다. 에드는 그런 아린의 눈빛에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오롯이 그녀가 결정할 일이라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눈빛에 담긴 것은 신뢰였다. 그걸 깨달은 아린은 다시 눈을 감고 작게 아스트론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그리고 아린은 천천히 눈을 떴다. 예언은 할 수 없었지만, 신에게 기도로 물었고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신성력에 이상은 생기지 않았다.
그거면 족했다.
아린의 시선이 후안을 향했다.
“아스트론의 이름으로 약속한다. 단 디에고가 힘에 취해 악마가 된다면 그때는 아스트론의 이름으로 처단하겠다.”
후안은 그 정도면 족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후안은 심장 부위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혈마석을 통해서 놈의 흔적을 쫓고 있다고 했나?”
아린이 후안을 바라보았다. 생각해 보니 지금까지는 악마들을 잡아 죽이는 것이 중요했지만, 이렇게 후안을 만나니 이야기가 통할 것 같았다.
예언이 말한 그자를 찾아 잡기 위한 여정에서 가장 많은 정보를 가진 이를 만났다.
“그놈이 누구지?”
후안은 자조 섞인 미소를 지었다.
“나타난 지 얼마 안 된 악마라 그놈에 대해 아는 이들은 거의 없다. 하지만 놈은 진짜야. 놈의 힘은 대악마, 그 이상이라고 할 정도로 강하다.”
에드는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타난 지 얼마 안 됐다고?”
“맞아. 대충 1년 조금 넘은 것 같던데. 정확하지는 않아. 다른 악마들과 연을 끊고 산 지 10년이 넘었으니.”
자신과 비슷한 시기에 나타난 놈이다. 메인 퀘스트에도 영향을 끼치는 놈. 뭔가 있다.
“이름은?”
“라그록스. 자신을 그렇게 칭하더군. 계보에 없는 악마들을 찾아 새로운 계보를 만들려는 놈이었다.”
후안이 심장을 두드리며 말했다.
“내 심장에 강제로 혈마석을 심었지. 마기를 한층 강화해 주지만, 이것은 구속이다. 악마에게 어울리지 않지. 하지만 덕분에 이런 만신창이 몸으로도 이런 미친 짓을 할 수 있을 것 같군.”
후안이 양팔을 벌리고는 말했다.
“모두 흡수하거든 정확히 내 심장을 노려라. 너희가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다해서.”
거기까지 말한 후안이 술법진에 다시 손을 가져다 댔다. 붉은 스파크가 튀었지만, 후안은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눈과 귀와 코, 입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렸지만, 그는 계속해서 술법진에서 기운을 흡수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에드는 화살을 꺼내 들었다. 아펠라의 이빨로 만든 화살을 뽑아 든 에드는 시위에 화살을 걸고 마력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아린. 축복을 내려줘요.”
아린은 그 말을 듣고는 방패를 등에 걸고 해머도 허리에 건 채로 양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작게 기도문을 외우자 냉기가 어리던 화살촉 위로 신성력이 맺히기 시작했다.
푸른 빛과 하얀빛이 섞여 마치 하늘색을 연상케 하는 아름다운 색이 어리고 있었다.
붉은빛을 흡수하고 있는 후안과 대조되어 하늘빛이 더욱 신비롭게 보였다. 에드는 후안을 바라보며 아린에게 말을 건넸다.
“언제 흡수가 끝나는지 알 수 있나요?”
“술법진의 기운이 줄어드는 양을 보면 알 수 있어요.”
아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가만히 기다렸다.
술법진의 저항을 뚫고 손을 담근 후안을 주위로 무시무시한 기세로 기운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 속도는 점점 빨라졌고, 후안의 몸에서 빛나던 룬문자들에서도 가공할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저거 뭔가 잘못된 건가요?”
술법진의 기운을 흡수하는 중에 후안의 몸에 이상이 생기고 있었다. 어쩌면 라그록스라는 자는 이런 상황까지도 염두에 둔 것일까?
그러나 후안은 칠공에서 피를 뿜으면서도 어금니를 깨물고 견뎌냈다. 피를 폭포수처럼 쏟아내고 있어 아무리 악마라고 해도 저러다가는 출혈과다로 죽는 것이 아닐까 싶은 상황에서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대체 무엇이 후안을 저렇게까지 만든 걸까?
몸에서 빛나던 룬문자들이 하나씩 터져 나갔다. 그때마다 들썩이던 후안으로 가공할 마기가 몰려든다.
지쳐 있는 후안을 보았기에 몰랐다. 상급 악마의 격만 보았는데 그 힘을 되찾아가는 후안을 보니 지금 마력과 신성력이 더해진 이 화살 한 방으로 잡을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다.
에드도 마력을 더욱 집중했다. 그렇게 대치한 중에 후안의 몸으로 술법진의 마기가 거의 흡수되어 갔다. 후안의 눈동자가 이보다 더 붉을 수 없을 만큼 붉어졌다.
빛이 없어도 주위를 밝힐 정도의 붉은빛이었다.
후안의 몸이 조금씩 떠오르고 바닥에서 쏟아져 나오던 붉은빛이 허공에서 회전하며 그의 몸으로 스며든다. 그럴수록 후안은 망가지고 있었지만, 그는 그 고통을 감내하면서 기운을 흡수했다.
후안이 무엇을 위해서 저러는지 알 수 있었다. 지금 후안은 이 도시를 구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소피아와 디에고를 지키기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고 있었다.
후안의 몸에서 빛나던 룬문자는 거의 터져 나갔고, 그의 몸은 넝마가 되었으나 술법진의 기운은 거의 흡수되었다.
힘을 회수할수록 망가져 가는 후안을 바라보던 에드는 시위를 한껏 당겼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후안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 예의라고 느껴졌다.
아린이 말해주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토록 강대하던 술법진의 기운이 모조리 후안에게 흡수되는 순간 사방이 어두워지고 오직 후안의 두 눈만이 붉게 빛나고 있었다.
“지금이에요!”
에드는 시위를 놓았고, 화살은 한줄기 하늘빛 유성처럼 후안을 향해 날았다. 그런데 후안의 손이 화살을 쳐냈다.
화살이 튕겨 나가는 것을 보고 아린이 곧장 방패를 꺼내며 전력으로 던졌다.
신성력을 머금고 날아가는 방패를 후안이 그대로 후려쳤다. 방패가 튕겨 날아갔고, 후안의 팔도 폭발했다.
후안은 그대로 땅을 박차고 돌진해왔다.
그가 말했던 대로 폭주하는 걸까?
달려오던 후안이 왼발을 땅에 박아넣었다. 그의 눈에는 붉은빛이 사라진 상태였다.
이 짧은 순간 후안의 의지는 폭주하던 의지조차 뚫고 나왔다.
“어서!”
그가 말하지 않아도 이미 처음에 쏘았던 화살은 튕겨 날아갔다가 에드의 의지대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렇게 돌아온 화살이 후안의 심장에 박혔다.
지금 그의 몸에 가장 강한 힘이 뭉쳐있는 곳. 혈마석에 화살이 박히는 순간 그의 왼쪽 반신이 얼어붙는가 싶더니 그 안에서 신성력이 폭발했다.
콰앙!
왼쪽 심장부터 어깨까지 반신이 날아간 후안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에드는 그가 죽지 않았음을 알았다. 경험치가 들어오지 않았으니까.
지금까지의 에드였다면 다시 화살을 준비해서 날렸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자기도 모르게 다가가서 허물어지는 후안을 부축했다.
후안은 왼쪽 상반신이 날아갔음에도 잠깐이지만 숨이 붙어 있었다.
후안은 에드가 부축해주자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의 두 눈에서 더는 붉은빛이 보이지 않았다. 후안은 어떻게든 미소를 보이려는지 입가를 말아 올리려 했지만, 그럴 힘은 없었나 보다.
힘겹게 입가를 떨며 후안은 유언을 남겼다.
“디에고를 부···탁, 한다.”
후안은 그 말을 끝으로 고개를 떨구었고, 에드는 경험치가 밀려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단번에 레벨이 오를 정도로 막대한 경험치였다.
에드는 씁쓸함을 느끼며 듣지 못할 후안에게 답했다.
“디에고는 걱정하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