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1화 - 트리메스의 기억, 능력, 권능과 영적 지위 등이 그 인피 가면에 깃들어 있다.
저 인피 가면은 트리메스라는 존재의 데이터를 구체화해서 넣어둔 거다.
그러니 그 과정을 겪지 않고 또 새로운 화신체가 된다.
해서 샤를은 마음을 고쳐먹고 소년을 구하기 위해 트리메스를 설득하기로 했다.
“그 가면을 과거의 너에게 덧씌울 셈인가 트리메스? 그런다고 네가 헤르메스의 화신체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냐?”
“…….”
“당장은 도망칠 수 있겠지. 하지만 앞으로는? 헤르메스는 자신의 화신체가 바꿔치기 당한 것을 알고는 어느 세계에 있건 널 잡으러 이 잡듯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닐 텐데?”
트리메스도 헤르메스에게서 영원히 도망칠 수 없다는 건 이미 알고 있다.
“…….”
“이래서야. 그간 대적자 어쩌고 하면서 날 괴롭혔던 것에 비하면 형편없군. 그래, 그냥 또 도망가던가. 댁이 사라지면 난 편하겠네.”
“왜 계속 말하고 있지? 그냥 힘으로 막으면 될 텐데?”
트리메스는 눈을 깜박거렸다. 평소에 샤를이 하던 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왜 설득하려고 하지? 그냥 막아섰으면 되는 것을.
당장 잘 사용하던 주문을 써서 막아설 수도 있었다. 대화를 나누는 동안 부하를 시켜서 기습할 셈인가? 그것에 대해서는 이미 방비를 갖춰둬서 문제없다.
소년 시절 트리메스는 지금 영성자도 뭣도 아니다. 그냥 평범한 한 명의 소년일 뿐이지.
“이 소년과 아무 관계도 없잖은가?”
언제든 죽일 수 있다. 하지만 샤를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그간 트리메스가 샤를을 관찰한바, 그는 성자라고 하기에는 거리가 멀다.
다만 피해를 보지 않으려 최대한 노력하는 정도일 뿐이겠지만, 어린 시절 트리메스를 그가 구해서 뭘 한단 말인가?
어차피 이 시간대에 개입하더라도 현실이 뒤바뀌는 일은 없다. 그냥 또 다른 세계선으로 갈라질 뿐이지.
“난 너처럼 감성이 메마르지 않아서 말이야. 측은지심이라고 들어봤냐?”
“뭐?”
“물에 빠진 사람을 보면 구해줘야지. 그리고 네가 인질로 잡은 사람이 있으면 구해줘야 하고.”
재미있는 말을 들었다는 듯 트리메스의 입꼬리 한쪽이 뒤틀리고 입의 열려던 찰나, 누군가 말했다.
“고맙지만 괜찮아요.”
소년 트리메스였다.
오히려 샤를이 당황해서 눈을 깜빡거렸다.
“뭐?”
“앞으로 기다리고 있을 미래가 잔혹한 것이라면 차라리 미리 받아들이는 것이 나을지도 몰라요. 말씀은 고맙지만 저는 내버려 두셔도 좋아요.”
상식을 벗어난 반응에 샤를이 당황했다. 소년 트리메스는 진심으로 트리메스에게 이용당해도 좋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또 세뇌했냐?”
“나는 설득을 했을 뿐이야. 앞으로 이 애가 겪을 미래를 들려줬을 뿐이지. 이 가면을 쓰고 나면 그 과정을 건너뛸 수 있다.”
샤를은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미안하지만 말이야.”
샤를은 손가락을 잡아당겼다. 또 다른 샤를이 나타나 트리메스의 등 뒤에서 소년을 낚아챘다.
“만 19세 미만 청소년의 발언권에는 큰 의미가 없단다.”
트리메스는 갑작스러운 난입에 당황했다. 눈앞에 있는 건 진짜다. 그런데 어떻게 또 진짜가 나타날 수 있지?
그러다가 그것이 곧 어떤 유물을 사용한 것으로 판단했다.
그 생각대로 샤를은 오래전에 얻었지만 별로 사용하지 않던 유물, 목제 나무 인형을 사용했다.
트리메스마저 감쪽같이 속여 넘길 정도로 똑같은 유물을 사용해서 소년 트리메스를 빼낸 샤를은 그대로 트리메스와 교전에 들어섰다.
“플로나, 이대로 내 분신과 함께 움직여.”
“네.”
샤를은 명령을 내린 직후 곧바로 주문을 난사했다.
초고열의 무존자의 창 주문이 발사되자 트리메스의 주변에 물결무늬 파동이 일어나 막아냈다.
샤를은 눈을 가늘게 뜨고 트리메스를 분석했다.
여태까지 트리메스가 드러낸 능력을 보면 하나같이 처음 보는 능력뿐이었다.
‘주문에 능통하고 유물을 자유자재로 쓰면서 동시에 신체 능력도 비할 자가 없다.’
거기에 모략도 뛰어나니 팔방으로 달인의 경지에 올라 있다. 거기에 아직도 감추고 있는 것이 수없이 많을 것이었다.
샤를은 아직도 트리메스가 숨기고 있는 능력을 끌어내야 한다.
트리메스의 손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
“놔주세요!”
샤를의 분신에 잡힌 소년 트리메스는 하늘을 날 듯이 움직이는 샤를에게 말했다.
“응─안 돼.”
“그게 무슨 말이에요!?”
“긍정과 부정을 동시에 쓰면 부정이 된다는 뜻이지.”
샤를의 막무가내에 소년 트리메스가 외쳤다.
“놔! 내가 원하는 데로 하겠다는데 왜 그걸 막아!”
“어쭈 반말이네. 너 몇 살이냐.”
“14살…….”
“아직 꼬맹이네. 넌 좀 더 삶을 경험해봐야 할 필요가 있어. 넌 잘 모르겠지만 동방에는 이립(而立)이라는 말이 있단다. 적어도 서른은 되어야 마음이 확고하게 선다는 뜻이지. 지금은 아직 여기저기 휘둘릴 뿐인 꼬맹이야.”
“난 내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아요. 난 앞으로 헤르메스라는 자에게 선택받고 난 뒤에 그대로 고통스러운 삶을 살게 돼요.”
“그래서, 미래의 트리메스를 돕겠다고? 너 자신을 희생하면서?”
“미래의 내가 저렇게 망가져 있는데 어떻게 돕지 않아요? 아저씨가 말한 것처럼 측은지심이라는 게 없나요?”
“그러기에는 너무 멀리 왔단다. 넌 저 트리메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저지를 것인지 전혀 모르고 있어. 네가 무엇을 들었건 상상 그 이상일 거다.”
악인에게 끔찍하고 불쌍한 과거가 있다고 해서 그를 심판할 때 정상참작이 되느냐?
‘내 대답은 no다.’
악인이 만들어진 운명을 저주하면서 죄를 돌릴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 넌 늦지 않았지.”
“미래에 내가 어떻게 발버둥 치던 헤르메스라는 자의 손에 들어갈 거라고 했어요.”
“그럼 도망칠 방법을 찾아야지. 네가 지금 왜 그러는지 알겠다. 동정심이지? 미래의 네가 저렇게 되는 것에 대한.”
“…….”
참으로 순진하고 마음 따뜻한 꼬마다. 그러니 이 아이가 그렇게 되지 않도록 샤를은 그렇게 맹세할 생각이었다.
무어라 더 말하려던 찰나에, 끔찍한 비명과 동시에 하늘에 불길이 치솟았다.
“자, 지금 트리메스가 만든 악행 하나가 더 늘었다. 평범한 사람들을 계몽주의자라는 괴물로 만들었지.”
하늘로 치솟은 계몽주의자 하나가 오색으로 빛나는 자신의 나비 날개를 치켜들며 날아올랐다.
그리고 그 옆으로 척추까지 목이 뽑힌 인간들이 함께 날아오르고 있었다.
이 그로테스크한 광경에 소년 트리메스는 경도(驚倒)되어 엉덩방아를 찧었다.
이게 도저히 현실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의 모습이었다.
“저렇게 만든 괴물이 이 도시에 득실득실하는 중이다.”
“아, 어. 어…….”
샤를은 자신의 능력을 점검했다. 그는 지금 정보가 복사된 분신의 상태.
본체가 가진 능력의 3분의 1 정도를 사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본체의 힘이 압도적이라 3분의 1이어도 충분히 할만하다.
하지만 그가 있지 않은 곳에서는 지금 끔찍한 살육이 벌어지고 있을 터.
“플로나, 부탁이 있어.”
“무슨 말씀인지 알겠어요. 나머지 동료들을 도우라는 거죠?”
“그래. 적어도 계몽주의자 하나 정도는 처리할 만해.”
더글라스의 능력이 좀 미지수이긴 하지만, 루미너스나 플로나가 함께 있다면 안전할 거다.
“알겠습니다.”
플로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모로 그녀도 걱정하고 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트리메스와의 싸움에 플로나가 방해될 수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으니까.
플로나가 움직일 때쯤, 저 멀리 하늘 위로 치솟아 오른 계몽주의자가 샤를 일행을 발견하자마자 곧바로 다가왔다.
“여기 또 미몽에 휩싸인 찌꺼기가 하나 있구나.”
“어디서 반말이야?”
샤를의 도발에 계몽주의자는 오히려 웃기 시작했다.
“신선한 녀석이군. 널 죽여서 그 정수를 뽑아야겠다.”
“멈춰라!”
그때, 그들의 앞에 새로운 인물이 나타났다.
상체만 가린 하프 플레이트 아머를 걸치고 장검과 머스킷으로 무장한 기사 하나가 나타났다.
‘탄원자의 표식?’
휘장으로 치장된 상의에 탄원자의 표식이 그려진 휘장이 있었다.
‘300년 전의 메트로폴 영성자들인가.’
등장한 기사가 외쳤다.
“고대의 악마야. 더는 사람들을 죽이게 내버려 두지는 않겠다.”
“이건 또 뭐지?”
손가락을 들어서 기이한 파동을 쏘아낸 계몽주의자를 향해 기사가 검을 들어 파동을 튀겨냈다.
그리고 탄환을 갈겼다. 가슴팍에 파고든 원형 탄환이 엄청난 위력을 뿜어내며 폭발하자 계몽주의자가 폭발 사이에서 튕겨 나가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내가 나설 필요도 없겠는데.’
샤를이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옆에서 이미 만난 적 있던 글리치 노만이 나타났다.
“역시 내 예상이 맞았군.”
“참고로 저걸 만든 건 제가 아닙니다. 노만.”
“후우. 알고 있다네. 근데 자네……. 본체가 아니군?”
그말에 샤를의 희미하게 웃었다. 생각해보니 이 분신을 만드는 유물은 글리치 노만이 말년에 만들어낸 유물이었다.
“아무튼, 메트로폴 전체에서 날뛰는 저 괴물들을 처리하도록 하죠.”
*
불꽃이 튀기면서 마법전으로 들어섰다. 온갖 속성 주문들을 쏟아내는 트리메스를 상대로, 샤를은 광명자의 창 하나만을 사용해서 싸우고 있었다.
관통, 폭발, 열기
세 가지 응용을 조합하면 적의 마법을 되받아치는 것은 물론이고 반격까지 가할 수 있었다.
미친 듯이 쏘아지는 무존자의 창이 다발로 발사된다.
성당 내부는 순식간에 초토화되면서 폭발로 인해 불길이 치솟았다.
그러나 미친 듯이 주문을 쏟아냈어도 아직 트리메스를 죽이지 못했다는 것은 인식하고 있었다.
그 예상대로 트리메스의 주변에는 저 물결무늬 파동이 계속해서 역장의 형태를 띠며 가해지는 피해를 막아내고 있었다.
유물은 아니고 본신이 가진 권능으로 보인다. 상시 유지되는 방어를 뚫기 위해선 더 강력한 무기를 들어야 한다.
그 생각을 하는 동안, 트리메스가 드디어 무기를 꺼내 들었다. 불꽃으로 넘실거리는 검신. 금과 보석으로 장식된 손잡이.
그건 샤를도 이전에 본 것이었다.
“화천지옥검……?”
헬파이어 교주의 손에 있어야 할 것이 트리메스에게 있다.
“댁이 가지고 있었네?”
그럴 거라고 생각했지만 본인이 손에 들고 있다니.
‘분명히 검을 들고 있는 정면에서는 주문에 대한 보호, 자체적인 신체 능력 증가, 영성으로 일으킨 겁화가 붙어 있었지.’
거기다 저 검은 상대가 쏘아낸 주문을 그대로 영성으로 전환해서 흡수하는 미친 물건이었다.
검기(劍技)가 충분하다면 날아오는 주문을 그대로 튕겨 내는 것조차 가능하다.
트리메스는 검을 잡았다. 자세를 보니 검술도 충분히 뛰어난 것처럼 보인다. 그럼 샤를도 그에 대적할만한 무기를 꺼내기로 했다.
트리메스는 비장의 무기를 꺼내자마자 안색이 굳었다.
“그건……인과율의 창?”
역시 트리메스 정도라면 이 창을 볼 수 있을 줄 알았다.
최소 불멸자들에게나 보이는 인과율의 창은 그걸 볼 수 있는 자들에게는 매우 위험한 물건이다.
광명자를 소멸시킬 정도로 위험한 물건이니까.
“이 정도면 충분히 할만하겠지?”
오히려 샤를이 가진 무기가 더 위협적일 것이다. 기습적으로 샤를이 내지른 창이 트리메스를 빗겨 나갔다.
하지만 뺨 일부가 닿았다. 그러자 뺨의 끝부분이 사라졌다.
피도 흐르지 않았다. 마치 그 정보가 소멸한 것처럼 움푹 패 있다.
이 일격은 트리메스의 물결무늬 역장도 두부처럼 뚫고 들어가 버릴 정도로 위력적이었다.
트리메스는 자신의 뺨에 잠시 손을 대더니 무서운 표정으로 검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