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4화 - 여러 가지 일이 있었다……. 그렇게 말하고 샤를의 협력을 거절하긴 했지만, 사실 루미너스에게는 다른 생각이 있었다.
어느 날, 거울 속에서 예언자가 나타났다. 그 예언자는 일전에 나타났던 거짓 예언자가 아니라 진짜 예언자였다.
‘나를 구해다오.’
문글로즈의 말을 듣고 루미너스는 샤를이 이 도시를 떠날 때까지 기다렸다.
항구에서 이제는 애물단지가 되어 버린 전노급 함선 한 대가 출항하는 것을 보고 루미너스는 곧바로 샤를의 저택으로 향했다.
저택 내부에는 다량의 함정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루미너스의 머리 위에 떠 있는 헤일로가 강하게 돌기 시작했다. 눈동자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형태의 동공으로 변했다.
저택 내부의 모든 상황을 꿰뚫어 본다.
‘마도사로서는 수준급이군.’
대부분의 함정에는 적의를 가진 사람이 등장한다면……이라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그럼 적의를 없애면 된다.
루미너스는 샤를을 적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받지 못한 물건을 되돌려 받으러 온 것이다.
마음가짐 하나만을 바꿨을 뿐인데 저택 입구를 그대로 들어설 수 있었다.
일반 하인들 몇몇이 돌아다니는 것을 보면서 루미너스는 자신의 망토를 뒤집어쓰고 그대로 안으로 들어섰다.
그들은 루미너스가 옆을 지나가는 것을 보면서도 전혀 알지 못했다.
당연히 루미너스는 그녀가 원하는 것을 하나 가지고 나올 생각이고 이들에게 해를 입힐 생각은 없다.
‘저택 내부에도 이렇게나 많다니.’
일전에 저택에 침입을 허용한 이후로 샤를은 작심하고 저택을 함정 덩어리로 만들어뒀다.
언제든 루미너스가 변심하는 순간 저택 내부의 장치들이 가동할 것이다.
하지만 루미너스의 침투력은 다른 사람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수십 년간 정보기관에서 일하면서 습득한 능력은 아직도 최고조였다.
루미너스는 샤를의 서재를 찾았다. 서재 입구에서, 그녀는 함정을 찾아냈다. 아라크네의 실로 만든 와이어를 사용한 함정이었지만 손쉽게 뚫고 들어섰다.
헤일로의 꿰뚫어 보는 권능을 발휘하자, 비밀 서재로 향하는 입구를 찾을 수 있었고 그곳의 함정을 교묘하게 피해냈다.
루미너스는 샤를의 영성이 내는 분위기와 비슷하도록 파장을 형성하고는 비밀 서재로 들어섰다.
“찾았군.”
책 사이에 숨어 있는 타로 카드 한 장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예언자님.”
-오, 루미너스. 왔군. 이야. 기다리느라 힘이 들었다.
루미너스는 문글로즈가 깃든 타로 카드를 꺼내서 자신의 품에 감추고는 자리를 떴다.
그녀가 늘 머무는 호텔에 도착한 뒤에야 문글로즈의 타로 카드를 꺼낼 수 있었다. 여태까지 오는 동안에 루미너스는 문글로즈에게 이것저것을 가르쳐줬다.
-그러니까 그간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이지? 트리메스가 육신을 갈아탔다…….
“예. 아마도 샤를 헥센은 이번 원정에서 어부형제단을 전부 처리했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럼 광명자 녀석도 나설 때가 되었군.
“예?”
-광명자가 선택을 할 거라는 얘기다. 샤를을 살해하느냐, 아니면 샤를에게 살해당하느냐 양자택일을 벌일 테지.
영체만 남은 문글로즈는 턱을 괴고 생각했다. 광명자는 예전부터 그랬지만 마음이 약하다.
분명히 샤를에게 마지막까지 도망치라고 경고했을 테고, 샤를의 은근한 반골기질이 그 제의를 거부했을 터.
-만약 샤를이 살아 돌아온다면 그때부터가 위험할 거다.
광명자가 살아 돌아온다면, 이 세계는 일시적인 평화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평화가 끝나면 그 즉시 멸망의 길을 걷겠지.
“왜죠?”
-그는 멸망을 유예한다는 선택을 고르지 않을 테니까. 분명 트리메스를 죽이고 그 진신(眞身)인 헤르메스까지 찾아내어 죽일 셈이겠지. 그런 식으로는 결코 끝을 볼 수 없건만…….
죽이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하지만 그 멈추지 않는 폭주 기관차 같은 샤를에게는 통하지 않는 말이겠지.
이제 샤를은 문글로즈를 신뢰하지 않을 테니까.
“그럼 이제 무엇을 해야 합니까? 예언자시여.”
-샤를을 도와야지.
“그는 이제 예언자를 신뢰하지 않을 거라 하셨습니다.”
-날 믿건 아니건, 어차피 지금은 호랑이 등에 올라탄 거다. 갈 데까지 가는 수밖에.
*
샤를과 일행이 돌아오고 나서, 메트로폴은 여전히 조용했다.
브로튼 함장의 경질과 이런저런 사건들은 군부 특유의 폐쇄성으로 인해서 은밀히 다뤄졌고, 메트로폴 타임즈에 실리는 일 같은 건 없었다.
하지만 샤를은 느끼고 있었다. 앞으로 점점 더 신비가 현실을 파고들 것이라는 것을.
비밀 봉인 조약은 허사가 되고 비밀 세계와 물리 세계는 이제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뒤섞이게 될 것이다.
‘이제 세상에 일어난 인과율이 일정치 이상이 되면 선각자가 원하는 일이 벌어진다.’
인과. 원인과 결과다. 지금 우리의 현실은 과거의 원인이 비롯되어서 이뤄지는 것이었다.
광명자가 죽으면서 말하던 것을 떠올렸다.
과거부터가 잘못되어 있었다고.
그때, 상념을 하는 도중 파기나레코르의 영체가 책에서 풀려나왔다.
“짠! 어때?”
“……뭐야?”
“이제 만져지지?”
파기나레코르는 손가락으로 샤를의 팔뚝을 쿡쿡 찔렀다. 진짜 만져지는데?
“뭐했냐?”
“파워 업!”
파기나레코르가 자신의 팔뚝을 들어 올려 보였다.
이 녀석이 관리자 어쩌구 하면서 마지막 흑막처럼 떠들었을 때는 충격이 따로 없었는데 지금 하는 걸 보면 그냥 옛날과 별다름이 없다.
“이제 진짜 신체를 가지게 되었다고 할까. 그리고 마도서로서의 힘도 더 늘어난 것 같고 말이야.”
“……너 플로나 앞에서는 영체로 바꿔라.”
“헹. 시른데?”
그렇게 말하면서 샤를의 팔뚝을 잡고 달라붙었다.
“아니…….”
너 그대로 플로나의 눈에 띄면 반갈죽 될 수도 있다니까?
‘아니, 내가 반갈죽인가.’
샤를은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그래서 파워업 했으니 뭔가 더 성능 좋아지지 않았냐? 뭐가 더 좋아졌는지 말 좀 해봐.”
“음. 일단 검색 능력이 생겼어. 주변에 뭐가 있는지 찾을 수 있지.”
“범위는?”
“메트로폴 전체?”
“생각보다 좁네. 아무튼, 트리메스좀 찾아봐라.”
샤를의 능력이 아무리 향상돼도 도저히 트리메스의 영성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분명 신성의 씨앗을 탈취하려고 달려들 줄 알았는데 어부형제단의 교주의 몸에 깃든 신성의 씨앗은 완전히 무시하지 않았나?
어쩌면 샤를이 그걸 대비해서 함정을 파고 있다는 것을 간파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오. 기다려랏.”
파기나레코르는 양손의 검지와 엄지를 자신의 관자놀이에 대고 마치 정신승리하는 것처럼 정신을 집중하더니 곧 외쳤다.
“있지만 없어!”
“없다고?”
“있는데?”
“없어?”
“있다니까?”
“어딨는데?”
“여긴 없어.”
“…….”
“…….”
지금 말장난하는 거지? 그치?
“이리와봐, 너 반으로 좀 쪼개주게.”
“아, 아니 잠깐만 쭈인 기다려 보라니깐. 있는데 없다고 한 이유가 있어.”
“뭔데.”
“메트로폴에 있긴 해. 하지만 시간대가 지금이 아닐 뿐이지.”
“뭐라고?”
“트리메스는 300년 전의 과거에 있는 것 같아.”
샤를은 슬슬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 녀석 뭔가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맞다. ‘잼민’이 같군.
“트리메스는 어떻게 과거로 갔는데?”
“몰?루?”
“이 씨. 너 실체화하니까 갑자기 열 받네?”
“아아! 쭈인이 때린다! 폭력반대!”
샤를이 쫓아가고 파기나레코르가 둥둥 떠올라서 도망치는 한참 소란을 떨고 있던 중에, 갑자기 서재의 문이 발칵 열렸다.
플로나가 파인애플 한가득 담긴 접시를 들고 있다. 그녀의 눈동자는 파기나레코르를 쫓아가고 있었다.
“……누구?”
“…….”
“아 맞다 보이지? 헤헤.”
“자, 잠깐 기다려. 그거 꺼내지마.”
치마 속에서 길다란 대검을 꺼내는 플로나를 말리느라 한참 고생한 샤를은 잠시 뒤에야 자초지종에 관해서 얘기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 파기?라는 사람이 샤를님이 늘 들고 다니던 마도서에서 나온 거라는 거죠?”
“그래.”
“그리고 그 무슨 이 세상의 관리자인가 그런 거고요?”
“맞아.”
“세상의 관리자라고 하니 뭔가 초월적인 존재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게 아니네요.”
“헤헤.”
파기나레코르가 싱글벙글 웃으면서 접시에 담긴 파인애플을 포크로 찍어먹고 있었다.
“사실 난 이런저런 대비를 많이 해두긴 했지만 내가 직접 한 일은 아무것도 없는걸. 그건 선각자도 마찬가지일걸? 옴뇸뇸.”
선각자도 현실의 일에 직접 개입하지 못한다는 건 이미 들어서 아는 바였다.
“아무튼, 트리메스는 지금 과거에 있다니까?”
“너 이번에 뭐 새로 능력 각성하면서 그런 거 없어? 과거로 가는 능력이라던가.”
“없는 데? 누군가 찾아내는 능력이면 됐지 또 뭘바래.”
“이 색…….”
“아아! 또 쭈인이 때리려고 한다!”
플로나는 팔짱을 끼고 샤를과 파기나레코르를 노려보았다.
이 두 사람, 어째서인지 엄청나게 친해보인다. 그래서 더 질투가 나는 것 같다. 일단 저 관리자라는 것. 마도서의 영체라고 해도 일단 겉보기엔 여자잖아?
“둘이 많이 친한 것 같네요?”
“아, 그렇긴 하지. 거의 처음부터 같이 움직였으니까.”
“처음?”
“아니, 그게 아니라. 음.”
샤를이 말실수를 해서 수습하려고 했는데 파기나레코르는 눈치도 없이 말을 이었다.
“샤를을 이 세계로 데리고 왔을 때부터 말이야. 그때가 처음일걸?”
“……데리고 오다니?”
“김연수를 샤를의 몸에 빙의시켰거든.”
쨍그랑.
플로나는 너무 놀라서 바닥에 접시를 떨어트리고 말았다.
큰일났다. 대사건이 일어나고 말았다.
“저, 잠깐 생각 좀 하고 올게요.”
“자, 잠깐만 플로나!?”
슉하고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 샤를은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곤란해하면서, 동시에 돌아오면 파기나레코르에게 너 진짜 반갈죽이다라고 경고한 다음 플로나를 쫓아갔다.
플로나는 저택 마당에 있었다. 놓여 있는 벤치에 앉아서 가만히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음. 그러니까 플로나?”
“그럼 제가 알던 샤를님이 샤를님이 아니라는 거에요?”
“……맞아.”
플로나는 벤치 옆을 탁탁 두드리면서 샤를보고 앉으라고 했다.
“이렇게 얘기해서 미안해. 아마 다른 시기에, 좀 더 다른 형태로 이야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언제고 플로나에게만큼은 샤를의 이야기를 할 생각이 있었다. 이 세계에 진심이 될수록 그의 생각도 진심이 되어갔으니까.
“예전에, 샤를님이 이전과 달라졌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어요. 근데 그때는 평범하게 넘어갔거든요. 예전보다 더 마음이 따뜻해진 것 같아서요.”
“…….”
“근데 완전히 다른 사람이실 줄은 몰랐어요.”
원래라면 무덤까지 가지고 갔어야 할 비밀이었다. 샤를은 담담히 플로나의 얘기를 들었다.
“조금 충격이지만 그래도 상관없어요. 제가 좋아하는 건 당신이니까.”
“……정말?”
“네. 대신 다른 여자한테 눈 돌리면 안 돼요.”
“……응 그럴게.”
“다른 여자랑 말도 하지 않고 다른 여자 옆에 있지도 말고…….”
‘아니 그건 좀.’이라고 하기에는 지은 죄가 컸으므로 샤를은 더는 말하지 않았다.
아무튼, 곤란한 상황을 겪고 있을 때, 저택 안으로 뜻밖의 불청객이 난입했다.
대체 누군가 싶어서 쳐다봤더니 루미너스가 문글로즈가 깃든 트럼프 카드 한 장을 들고 있는 게 아닌가?
카드에서 문글로즈의 영체가 튀어나왔다.
-내 도움이 필요한 것 같아서 찾아왔는데. 내가 좋은 시간을 방해했나?
“문글로즈?”
댁이 왜 루미너스의 손에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