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3화 - 샤를은 광명자의 마지막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대체 왜 그가 이렇게 죽음을 택했는지 미심쩍은 부분이 있었으므로.
‘그건 자살이야.’
더 싸울 수 있는데 그 이상하지 않고 죽는 것만큼 이상한 게 없었으니.
광명자의 기억 속에서 그는 자신의 옆구리에 난 상흔을 보고 있었다. 도저히 치유되지 않는 상처는 그를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그때, 그의 앞에 소냐 에센리트가 나타났다.
“주이시어…….”
-왔구나. 앉아라.
광명자는 소냐를 그의 앞에 있는 의자에 앉게 했다. 이 선명한 색의 눈동자를 보고 있으면 늘 마음이 편해지곤 한다.
-와서 보아라. 나의 상처를.
본디, 격 높은 자에게는 보였을 인과율의 창이 소냐에게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남은 것은 그 상처뿐.
“치료되지 않는 겁니까?”
-그렇다. 나는 죽어가고 있으며, 그리고 곧 죽을 것이다. 이생은 억지로 버텨나가고 있는 것뿐이다.
광명자는 과거를 반추했다. 메트로를 건설하고, 영성자가 되고, 마법 같은 것을 쓸 수 있게 된 이후로 그는 많이 들 떠 있었다.
신이 되는 길을 거슬러 올라가 이윽고 인간 중의 신이 되자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처럼 만족감이 들었으며 또한 그 권태감이 수천 년이나 지속되었다.
사람은 몇 년이 지나면 변한다고들 한다. 하지만 신이 된 사람이 몇천 년을 그렇게 세월을 보내자 이미 그는 예전의 자신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방구석에서 게임기를 들고 살았던 그 폐인과는 이제 완전히 다르다.
연인도 있었고 친구도 있었으며 동시에 많은 것을 이루었고 적과 아군을 만들었다.
남부끄럽지 않은 삶을 겪은 그는 이제 스스로에 대한 자존감이 가득찼다.
시간의 흐름에 이별도 겪고 슬픔도 지난 뒤에는 인간의 감각이란 완전히 무감각해졌다.
그리하여 권태로움에 휩싸여 왕좌 위에서 무언가 찾아볼만한 흥미로운 비밀은 없나 기웃거리던 것이었다.
물론, 그것도 더 깊은 곳의 비밀을 파헤치기 전까지의 일이었지만.
-내가 언젠가 죽으면, 광명교단의 모든 것을 무명교단에 물려주어라.
“그런 잔혹한 말씀은 하지 마십시오. 주이시어.”
-신조차 창생사멸에 얽힐 수 있는 섭리의 존재인 것. 나도 언젠가 죽는다. 아해야. 시간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 아느냐?
소냐가 고개를 저으며 모른다 했다.
-관리자와 선각자의 마음이 서로 달라졌기 때문이다. 원래 일치했던 둘의 생각이 달라지자 그것이 곧 시간전쟁으로 이어진 것이다.
“둘은 적대 관계가 아니었습니까? 주이시어?”
-내가 이 세계에 오기 전까지는 그들은 같은 마음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어느새 그 마음이 꿈에서 깨어나려는 자와, 꿈을 더 꾸고 싶다는 마음으로 서로 갈라진바, 관리자는 이대로 가다간 지게 될 것을 직감하고 나를 변수로 삼아 데려온 것이다.
그리하여 광명자가 이 세계로 오게 된 것이라는, 다소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소냐의 안색은 변한 바가 없었다.
그래, 그래서 광명자는 그녀를 자신의 성녀로 선택했다. 평소에는 아닌 것 같아 보여도, 그의 명령을 기계적으로 따를 사람.
-이제 나는 마지막 시험을 치를 것이다. 무명 교단의 교주, 샤를 헥센이 얼마만큼 성장했는가? 또 그의 의지는 얼마나 굳건한가 말이지.
세이브&로드를 사용해서 도망치면 실격이다. 로그아웃은 볼 것도 없다.
광명자의 진의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에게 설득당해도 실격이다. 그의 감언(甘言)에 미혹되어 넘어갈 정도라면, 적의 미언(美言)에 속아 넘어가도 이상하지 않으리.
자신과 그의 소환이라는 사건 이면에 숨겨진 관리자의 의도를 꿰뚫어 보지 못했어도 실격이다. 그럼 샤를은 결국 광명자의 수준에 머무르게 될 것이니.
그가 준비한 함정에서 살아남지 못해도 실격이다. 그 정도의 힘과 전투 능력도 없는데 앞으로의 일이 가당키나 한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광명자의 옆구리에 박혀 있는 인과율의 창을 발견하지 못해도 실격이다. 그 창이 언젠가 헤르메스를 찔러 죽일테니까.
몇 개의 함정을 파둔 것인지 광명자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가 내 시험에 통과하지 못하면 나는 그를 양분 삼아서 내 상처를 채우리라.
비록 완전히 상처를 채울 수 없으며, 그 상처는 곧이어 다시 벌어져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하게 되더라도, 그동안만큼 이 세계는 존속하게 될지어다.
하지만 샤를은 광명자의 시험에 통과할 수도 있다. 그럴 때를 대비해, 광명자는 자신의 모든 기반을 무명 교단에 넘겨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가 살아남는다면 그가 이 세상의 구원자가 될 것이다.
상처 입은 그보다는 샤를이 더 잘해낼 것이므로, 그는 자살을 선택한 것이었다.
이미 생에 미련은 없었다. 샤를의 손이 인과율의 창을 찾아 그를 찔러냈으므로, 마지막 시험까지 통과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바람대로 샤를은 모든 시험에 통과하고 그를 죽인 뒤 그의 모든 능력을 빼앗았다.
“이미 인간이라기에는 너무 멀어진 것 같은데.”
샤를은 망망대해 위에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허공에 떠 있어도, 중력에 이끌리는 느낌이 없었고 숨을 쉬지 않아도 먹지 않아도 된다.
이미 직감적으로 그는 자신의 수명의 제한이 없거나 아니면 한없이 무한할 거라고 느끼고 있었다.
“이게 사람인가?”
기존의 데미갓이 인간에 가까운 반신이었다면 지금은 조금 더 신에게 가까운 반신이 되어버렸다. 이런 불균형적인 상태는 일곱 번째 석판을 소화하기 전까지는 계속 유지될 것이 분명해보인다.
무명 교단과 광명 교단에서 보내오는 그 모든 신앙이 조금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가지고 있는 기존의 능력들이 하찮게 보일 법한 이 각성을 느끼고나서 샤를은 파기나레코르를 불렀다.
-파기.
-오? 쭈인 아직 살아 있었구나?
바다 근처에서 허공에 떠 있던 파기나레코르가 샤를을 향해 다가왔다.
가까이 다가오던 파기나레코르는 곧 멈춰섰다. 샤를의 전신에서 퍼져나오는 기운이 이전과는 다르다.
-쭈인. 광명자를 해치웠구나?
-맞아. 그래서 나도 네가 누군지 알게 되었지.
샤를이 드디어 그녀의 정체를 말했다.
-네가 관리자구나?
파기는 생긋 웃고 대답한다.
-맞아!
처음부터 이상한 부분이 있었다. 파기나레코르는 왜인지 모르게 샤를의 시작부터 함께 있었던 것이다.
지배의 권능이라는 능력을 헤르메스에게 받기 위해서 샤를 헥센은 거래를 했다.
그 능력을 받는 대신 그가 가진 모든 신비학적 자산들을 넘겨주기로. 그래서 그가 초기에 가진 달란트는 지극히 적었는 데다, 신비가 담긴 마도구나 유물은 하나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파기나레코르는 그곳에 있었다.
또한 그 연원을 알 수 없는 능력에 대해서도 그렇다. 레버를 돌렸는데 신들이 갖고 있는 주문이 툭 튀어나온다고? 광명자야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지만 전혀 상관없는 탄원자도 ‘탄원자의 겨울’ 주문을 샤를에게 냉큼 빼앗기게 된 것.
신의 주문을 마음대로 빼앗으면서, 달란트를 먹어 자신의 힘을 보충했다.
석판이 늘어나도, 다른 유물들은 아무런 영향이 없었지만 파기나레코르만큼은 크기가 커지고 성장해왔던 것.
추리할만한 단서는 여럿 있었으나 여기서 알게 된 것은 처음이었다.
-음. 어디서부터 얘기해줄까?
“됐고. 날 여기 불러온 정확한 이유가 뭐야?”
-쭈인도 짐작하고 있잖아? 나는 변수가 되길 원해서 광명자를 데려왔지만 그가 신이 되고나서부터는 변수가 너무 적어졌어. 이 세계와 동화되었다는 거야. 그러니 회사에 안주하게 된 중년 아저씨는 이제 필요가 없어져서 정리해고하는 대신에 쭈인을 데려왔지.
주인이라 부르기는 하군, 샤를은 퍽 웃긴다며 실소를 짓고는 말을 이었다.
-쭈인에게 원하는 건 선각자를 저지하는 거야. 그 멍청이가 자꾸 세상을 멸망시켜서 절대자의 꿈을 깨운다면 이 세상은 사라지게 되니까. 나는 음. 일종의 잠꾸러기 요정이라고 할까?
“요정?”
-데헷? 우리 절대자는 응애야 응애. 얼른 더 코 자야해.
깜찍한 외모로 그렇게 말하니 어이가 없다.
“어찌 되었든, 네 계획은 나랑 같네.”
세상이 멸망하기 바라지 않는다는 것이, 어떻게 잠꾸러기 요정의 원하는 바와 같아지는지 이상할 노릇이었지만 애초에 이 세계 전체가 이상했으므로 이미 따질 필요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헤르메스의 화신인 트리메스를 먼저 죽일 필요가 있지!
“그건 동감이야.”
-트리메스도 죽이고 헤르메스도 죽이면 돼!
“헤르메스가 선각자인 것이 맞나?”
헤르메스가 선각자를 믿고 있는 존재라면 선각자도 없애야하는 게 아닌가 파기나레코르에게 물었더니 파기나레코르가 조용하게 말했다.
-그럴 필요는 없어. 선각자나 관리자나, 결국 이야기의 주체가 될 수 없거든.
“……?”
-선각자나 관리자는 결국 신을 초월해서 세계라는 테두리 밖에 있는 존재지만 이렇게 나처럼 마도서에 들어있거나 하면 그 역할을 벗어날 수 없다는 거야.
“그렇다면 결국 선각자나 관리자나 생각보다 쉽게 죽일 수 있다는 뜻인가?”
-그런 의미도 되긴 하네.
신을 초월한 존재라도 신보다 강하지는 않다는 모순된 말이었으나, 이제 그러려니 했다.
이번 전투의 성과를 분석해보자면, 이렇다.
이제 샤를은 이전보다 더 강한 데미 갓이 되었으며 그전에 사용하던 많은 유물들이 쓸모가 없어졌다. 일종의 하위호환이 되어버린 셈.
‘정말 쓸모 있는 걸 골라내 볼까?’
파기나레코르는 그렇다 치고, 지금 여태 습득했던 유물들 중에는 운명의 셉터나 괴테의 만년필, 티마이오스의 정다면체와 4대 성물 정도일까.
‘안타깝게도 이제 모노클은 쓸모가 없어졌군.’
마찬가지로 에메랄드 브로치도 필요가 없어졌다.
오르골은 배신 때리자마자 버린지 꽤 됐고, 암세천경 완전본이나 사자 소생의 서는 그럭저럭 필요할 때 써먹을 정도는 된다.
신에 가까워지게 되면서 이런저런 부작용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으나, 유물에 의존하는 대신 자신의 능력을 갈고 닦는 것이 더 효율적이다.
샤를은 부라토스의 시체에서 꺼낸 것들을 살폈다.
삼천성의 메달. 죽음에서 돌아오게 만들어주는 4대 성물 중 하나.
또 부라토스가 가진 2개의 무기. 변형되는 검이나 엄청난 속도로 던져지는 도끼도 얻었다.
이 무기들은 샤를이 직접 쓰기에는 조금 모자란 격으로 보인다.
대신 샤를은 모든 주문과 유물을 무효화 시키는 진주 목걸이에 관심을 가졌다.
이것도 4대 성물 급의 유물이다. 지배의 권능을 걸어보니 곧바로 정보가 뜬다.
[찬미자의 보주 – 칭송.]
[분류 : 유물]
[이계의 신, 찬미자가 부른 노랫소리에 세계가 화답하여 저절로 일곱 보주를 만들어낼지니. 그것들은 찬미자의 성에 바쳐졌다.]
[능력 : 자신 보다 약한 신비를 짓누르는 것을 넘어 완전히 분쇄해버리는 역량을 갖고 있다.]
부작용 : 매일 다섯 번씩 찬미자를 칭송해야만 한다.]
“쓸만한 유물이니 킵해둘까.”
샤를은 보주를 집어넣고 나서 이제 돌아가야함을 느꼈다. 제자들에게 연락을 하면서도 샤를은 일말의 불안감이 그를 감싸고 있다는 것은 애써 피하고 있었다.
‘이대로 신이 되어버린 나와 지금의 나는 같은 존재인가?’
그 물음에 대한 깊은 고찰만큼은 피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