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5화 - 트리메스 교수가 사라지고 난지 일주일 째, 정말로 아무 일도 없었다.
재단도 트리메스 교수를 추적하겠지만 그는 마치 증발한 것처럼 사라진 상태였다.
또 사건이 벌어지면 거기 나타나서 흑막 노릇을 할 테지만 그전까지는 찾아내기 어려울 것 같다.
샨티는 샤를이 보호 및 관찰하기로 했다. 빈민가에 그대로 내버려 두기에는 그녀는 너무 취약했다.
영적 순수성을 유지한 존재는 다른 존재들에게 타깃이 될 확률이 너무 높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물질적인 존재건, 비물질적인 존재건 간에.
대신 그녀는 샤를이 만든 복지 재단의 금전적 지원을 받게 되었다. 이곳에서 샨티는 보호를 받으며 교육을 진행할 것이다.
뭐, 그러고 보니 복지 재단이라는 개념도 아예 없었다. 유마도 복지 재단이라는 단어를 듣고 엄청나게 신선하다고 말했고.
이렇게 가끔 샤를은 전근대의 끔찍한 중세식 인식을 느끼고는 현대와 비교를 하곤 했다.
‘이러니 빨갱이들이 생겼지.’
콩산주의의 매운맛이 등장한 것은 당연하게도 복지의 부재였다. 이 사회 문제는 다들 지금 별로 인식하지 못하겠지만 키에프 제국이 망하고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서면서 다들 고치게 되는 문제였다.
뭐, 사회적 문제는 그렇다 치고 샤를은 이번 사건으로 인해 몇 가지 얻은 것이 있었다.
일단 먼저 루덴펠트 백작이 가지고 있었던 신기한 유물.
[복제 나무인형]
[분류 : 유물]
[개요 : 따라 하기 좋아하는 이계의 나무, 프오르귄의 나무토막 소재를 사용해서 유물 제작자 글리치 노만이 제작한 물품.
능력 : 환술을 불어넣으면 사용자의 3분의 1의 능력을 가진 복제품을 생성할 수 있다. 이 방법으로 생성된 존재는 주인의 기억을 일시적으로 공유 받으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원래의 나무 인형으로 돌아간다. 치명적 타격을 입으면 환술이 해제되고 나무토막이 복구되기까지 기다려야한다.
부작용 : 매일 동쪽을 향해 ‘그쪽이 아니라니까’라는 단어를 세 번 외쳐야 한다. 어길 시 복제 나무인형이 사라질 위험이 있다.]
이상한 부작용이었지만, 딱히 위협적인 부작용이거나 하진 않았다. 좀 뜬금없었을 뿐.
이 나무 인형은 샤를의 심상 세계에 고이 보관되어서 나중에 중요한 일이 있을 때 사용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이 나무인형은 지배의 권능으로 묶어뒀다. 헤르메스가 건네준 지배의 권능을 사용하는 것은 여전히 꺼림칙하지만, 지배의 권능을 무기로 써먹을 방법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또한, 무형의 자산 한 가지 더. 운명의 셉터로 사용하는 시간 치환 기술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깨달았다.
일단 신적인 존재들에 대해서는 완전히 먹통이라는 것. 그리고 상대방을 과거로 보낸다고 해서 일어날 일이 일어나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니다.
‘상대방을 미래로 날려 보내서 어느 정도 시간을 버는 것도 괜찮겠군. 아니면 적의 공격을 막거나’
끔찍한 수준의 영성 소모를 감당할 수 있으면 운명의 셉터는 좋은 대안이 되며, 샤를에게는 영성 소모를 감당해줄 성배 조각품이 있었다.
아무튼, 그동안 시간은 무럭무럭 흘러서 대학의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샤를은 그동안 ‘시험’을 끝마쳐둘 생각이었으나 사건의 뒷정리와 교단 내부의 이런저런 일들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시간을 너무 많이 써버렸다.
샤를은 본업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물려 받은 재산 때문에 돈 문제는 별로 없었음에도, 대학교수로 일하는 건 탐정사무소와 마찬가지로 일종의 취미라고 볼 수 있겠다.
이 취미 활동은 샤를이 이런저런 사회적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벌이는 연장선상에 있었다.
그리고 그가 없어도 사업은 잘 진행되고 있다.
처음부터 사업이라는 건 샤를이 아니라 유마가 하고 있으니까.
샤를이 번쩍이는 사업 아이템을 갖고 있어도, 다 미래에 있던 것들이니 그걸 구체적으로 현실화시키는 건 유마가 가진 재능이었다.
오히려 샤를이 손을 대는 것이 문제라고 할까.
아무튼, 그런 이유로 인해 샤를은 오늘 미스트위버 대학으로 차를 타고 출발했다.
봄이 오자 미스트위버 대학의 입구는 벚꽃이 피고 있었다. 동방에서 피는 꽃이 예쁘다며 대학의 이사진이 가져와 심은 나무들이었다.
샤를은 간만에 대학에 나와 강의를 하기 위해 출근하면서 파릇파릇한 신입생들을 보았다.
새학기가 시작되면 당연하게도 새로운 학생들이 들어오는 법.
이중 극소수 만이 이 대학의 이상한 점을 눈치채고 나쁜 일에 휘말리거나 영성을 깨닫게 되겠지.
그 평화로운 모습에 샤를은 팽팽하게 조여졌던 어떤 끈이 느슨해지는 걸 느꼈다.
지금의 작은 평화가 나중에 있을 위험한 일들의 시작이다.
일종의 폭풍전야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다시 마음을 굳혔다.
대학 입구로 들어가자 학생인 줄 알고 접근해오는 신입생도 있었지만, 교복을 입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고개를 갸웃하고는 가버리는 것이었다.
간만에 대학의 교수진들과 얘기를 나눴다. 헥센 가문에 일어났던 사건은 아미티지와, 드레이크, 라이스 교수 정도만 알고 있는 일이었다.
이곳에서 벌어진 일도 아니고 메트로폴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서 일어난 일이었으니까.
그들은 쉽게 입을 여는 사람들은 아니었으므로, 교수진들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샤를을 대했다.
배정된 강의 시간표를 보면서 교실에 들어선다.
고 헤르메스어 강의를 하는 샤를은 자신이 이런 사소한 일상에 치유를 받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러고보니 그랬지. 여태까지 일어난 일들.’
평범한 사람이라면 PTSD가 몇 번은 와도 이상하지 않을 일들의 연속이었다.
생각만해도 끔찍한 괴물들, 인간의 도덕성을 시험하는 온갖 기괴한 사건들.
샤를 헥센이 아니라 김연수였다면 견딜 수 있었을까? 결단코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면서, 샤를은 자신에 대해 생각했다. 그럼 나는 샤를인가? 아니면 김연수인가?
빙의자의 흔한 딜레마를 겪는 도중에 그의 상념을 깨는 종소리가 울 리고 강의가 끝났다.
샤를은 그 여상한 시간을 만끽하고 있었다. 리카 웹스가 처음보는 신입생과 함께 샤를에게 오기 전까지는 말이지.
수업이 끝난 이후 오후에 있을 일들을 생각하면서 자리를 뜨기 전에 샤를은 그에게 닥쳐오는 여학생들이 보이자 반사적으로 뒤로 한 걸음 이동하면서 멈췄다.
“교수니이임!”
“무슨 일이니?”
“보고 싶었다구요!”
“그, 그래?”
리카 웹스의 저돌적인 이 반응이 적응되질 않는다. 리카는 산장에서의 일 이후로 무언가 달라졌다. 음. 좀 더 저돌적으로 바뀌었나.
샤를은 삐질삐질 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면서 뒤로 한 걸음 더 물러났으나, 그녀는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 종종 보지 않니?”
“그런 거 말고요! 이렇게 강의하시는 모습을 말이죠!”
입교하게 된 이후에도 리카 웹스는 무명교단에 와서 샤를의 ‘강연’을 보고 가곤 했다. 평소에도 샤를은 교단을 관리하고 있었기 때문.
“오늘 온 목적이 있습니다. 교수님. 여기 이쪽은 새내기 레나 카르펜 양이에요.”
“아, 안녕하세요. 교, 교수님. 신입생 레나 카르펜입니다.”
심히 심약해 보이는 여성 한 명이 얼굴이 빨개진 채 다가와 얘기했다. 이마를 통째로 넘기는 것이 인상적이긴 하지만, 왜?
“반가워요. 레나 카르펜양. 무슨 일인거죠?”
“레, 레나라고 불러주세요 교수님.”
고백이라도 할 것 같이 새빨개진 얼굴로, 레나가 말했다.
“그, 도움이 필요합니다. 교수님. 교수님은 이런 문제를 잘 해결하신다고 선배님께 들었거든요.”
“무슨?”
“이상한 사건이 일어났어요. 메트로폴 교외에 있는 풍차에서요.”
“일단 대화가 길어질 것 같군요. 자리를 옮깁시다.”
샤를은 둘을 데리고 근처의 라페르테 거리에 있는 카페로 향했다. 대화가 길어질 것 같아서였다.
카페에서 먼저 서두를 꺼낸 것은 리카 웹스였다.
“교수님. 저번에 저희 삼촌이 말씀드리지 않았었나요? 해야 할 의뢰가 있을 거라고요.”
“아, 그랬었지.”
트리메스 교수에 대해 대비를 하기 위해 그와 연락하기 위해서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았을 때 프레데릭은 전언을 전하겠다고 했었다.
“저번 의뢰는 이 일 때문에 연락드린 거에요.”
샤를은 눈을 돌려서 레나 카르펜을 바라보았다. 당연하게도, 리카의 삼촌인 프레드릭 웹스는 재단의 중역 중에 한 명.
그런데 일반인이 있는 곳에서 그런 이야기를 꺼냈어도 되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었다.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레나 카르펜은 영성자는 아니지만 이쪽 세계에 깊게 엮여있는 사람이거든요. 봉인 재단에 대해서는 예전부터 알고 있던 사람이고요.”
“예전부터?”
“예. 카르펜 가문은 재단의 설립 초부터 함께 해왔던 사람들이기도 하고요. 지금도 지분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답니다.”
“흐음.”
리카 웹스는 아무래도 그 이후로 봉인 재단에서 많은 것을 알게 된 것 같다.
그렇다고 봉인 재단의 스파이라고 하기에는 그렇고, 그쪽에서 내민 내민 창구라고 보면 괜찮겠다. 마치 대사관의 외교관들처럼 말이지.
“그래서, 나한테 의뢰하는 이유는?”
“저희 재단에서 하는 일에 대해서는 알고 계시죠?”
“물론이지.”
“이 세상의 이상한 것들, 위험하고 불분명한 것들을 한데 모아 봉인하는 것이 저희 재단의 목적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문제가 생겨서 이사를 진행 중이에요.”
“응?”
“트리메스 교수가 재단의 모든 방어선을 뚫고 아주 손쉽게 들어와 유물을 강탈한 이후에 말이죠.”
“…….”
그러고보니 샤를은 그럴 수밖에 없다고 느꼈다. 봉인물의 관리와 연구를 주력으로 하는 재단에서 관리 부분에서 문제가 생겼으니.
“재단이 봉인하고 있는 물건들은 하나같이 하나만 밖으로 빠져 나온다면 세상에 혼란을 일으킬 수 있는 물건들 뿐이에요. 그래서 지금은 여력이 없죠.”
“그래서 레나 카르펜의 일을 내게 맡긴다?”
“네. 프레데릭 삼촌은 그렇게 하길 원하셨거든요. 한 사람이라도 손이 필요하다고. 의뢰 비용은 재단에서 나온다고 하셨어요. 그 풍차에서 봉인물을 발견한다면 회수하는 조건으로 의뢰를 맡기고 싶다고요.”
의뢰금? 잔뜩 받아내야겠군. 끝 모를 재력을 가진 재단 측의 돈을 뜯어내는 건 언제든 환영이었다.
만년필의 보관까지 마다하고 샤를에게 전달해준 이후로 샤를은 재단 측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었는데 이런 사정 때문에 문제가 많나보군.
“그래서, 정확히 무슨 일인지 들어보도록 하지.”
“네, 네. 그, 그러니까 말이죠.”
“너무 두려워하지 않아도 돼. 심호흡하고.”
샤를에게 말을 건다는 것이 어려운 것인지 아니면 원래부터 남들과 대화하는 게 어려운 건지는 잘 모르겠군.
레나라는 여성은 샤를의 말에 안도한 모양인지 더는 말을 더듬지 않고 말했다.
“메트로폴 교외에 있는 풍차를 아세요?”
“알고 있지. 분명 동쪽에 있던 걸로 기억하는데.”
샤를이 있는 메트로폴 서쪽 교외에는 평범하게 마을이 들어서 있지만 동쪽 끝에는 온통 밭이 있다. 그리고 그곳에 거대한 풍차가 있는 것으로 기억했다.